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63화 (63/170)

63. 노크

금세였다.

과연 작센이랄까.

해가 머리 위를 지날 때쯤 부대를 나섰는데, 아직 노을이 땅에 옷을 입히기도 전에 작센이 돌아왔다.

“빠른데?”

호박 수프와 잘 익은 돼지고기 뒷다릿살 찜으로 식사를 해치운 뒤였다. 렘이 배를 두드리며 물었다.

잘 먹었다고 놀리는 것 같았다.

작센은 렘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엔크리드를 보고 말했다.

“안내하겠습니다.”

곧바로 출발할 기세였다.

“앉아.”

엔크리드가 앉은 채로 말했다. 작센이 주춤했다.

위치를 알아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꼬리를 잡은 게 들킬지도 모른다.

상대가 숨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대비할 수도 있다.

숨는 것보다 깨끗하게 뒤를 쫓는 끈을 잘라 버릴 의도를 품진 않을까?

그럴지도 몰랐다.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혼자였다면, 결정하고 실행하는 게 자신이었다면 고민할 거리도 못 되는 것들이다.

작센의 머릿속에 별생각이 다 머릿속을 헤집는데 분대장의 음성이 들렸다.

“여기 호박 수프가 맛있어.”

그걸 누가 모르나.

여관 이름부터 ‘바네사의 호박 수프’였다.

시장 교차로에 있는 네 개의 여관 중 가장 음식 맛이 좋은 곳이다.

“크라이스가 사비를 풀었다고. 먹고 가자.”

엔크리드가 재차 말하고 나서야 작센이 앉았다.

어쩐 일인지, 렘과 라그나, 아우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작센은 어깨 위와 머리 위에 덮인 눈을 대강 털었다.

벽난로의 온기가 안을 훈훈하게 데운 덕에 금세 눈이 녹았다.

덕분에 겉옷이 조금 젖었다.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 호박 수프랑 아까 먹은 바비큐 줘, 일 인분.”

“기다리시던 일행이 왔네요! 네!”

여급이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발랄한 친구였다.

대체로 부대 사람들은 호박 여관을 좋아했다.

음식 맛이 좋다는 건 그런 거니까.

부대 내 취사를 담당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라그나의 말을 빌리자면 부대 내 식사는 입을 학대하는 것과 같았다.

어떨 때는 먹을 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거다.

그에 반해 바네사의 호박 수프 여관에서 먹는 식사는 훌륭한 수준을 넘어섰다. 보더 가드 최고의 요리사가 이곳에 있다는 말도 흔히 돌았다.

“시간 끌면 안 좋습니다.”

작센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아직 눈 안 그쳤어.”

엔크리드라고 고된 노동을 하고 싶을까.

검술 단련이나, 체술 단련도 아닌 바에야.

그에게도 눈은 악마의 똥가루다.

아니, 부대 내 복무하는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지금 도둑 길드를 치고 돌아가면 쌓인 눈이 그들을 반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렘 등이 아무 말도 안 한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크라이스가 주머니를 연 것일 테고.

작센은 모든 걸 깨달았다.

“그렇군요.”

그 뒤에는 먹는 일에 열중했다.

어느새 땅거미 스멀스멀 질 때가 돼서야 엔크리드를 포함한 모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자.”

“또 오세요!”

발랄한 여급이 말했다. 크라이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줬다.

둘은 이미 아는 사이 같았다.

여관 안에 머무는 내내 둘이 속닥거리는 장면이 많이 보였다.

“알아?”

엔크리드가 묻자.

“이름 레이사, 나이 열일곱, 아버지는 신발공이고 어머니는 직공이지요. 둘 다 길드에 가입한 적은 없고요.”

신발공은 가죽이나 기타 부자재로 신발을 만들어 파는 사람을 말했고.

직공은 옷감을 짜는 사람을 말했다.

둘 다 흔한 직업이었다.

제조 길드나 목공 길드도 엄연히 도시 내에 존재하는데 길드에 가입한 적이 없다면 실력이 출중한 편은 아닐 터고.

“꿈은 언젠가 수도로 가서 여관을 차리는 것. 지금은 바네사의 호박 수프의 음식 솜씨를 배우는 게 목표죠.”

“꿈이 야무지네.”

렘이 끼어들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럴 만했다.

여관이라는 게 말이 쉽지, 아무나 운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들어가는 크로나도 크로나지만, 무장 경비를 두는 것도 필수니까.

술과 음식을 팔면 소란이 일어나는 건 일상이 된다.

오늘이야, 내리는 눈 탓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조용한 편이지만, 평소였다면 이미 투덕거리는 사람 몇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조금 전에도 문을 나서며 무장 경비가 힐끗거리지 않았나.

엔크리드가 보기에 은퇴한 병사 같았다.

보더 가드 출신의 무장 경비를 두면 여러모로 편할 것이다. 어지간한 소란은 알음알음 정리할 수 있으니.

그보다 더 큰 사고가 일어나면 어차피 경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부대 내 경비병을 불러야 한다.

부대 내 끈이 있다면 보다 빨리 경비병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은퇴한 병사를 경비로 쓰는 건 보더 가드에서는 필수 조건이었다.

여기에 여관은 세금도 꽤 많이 부과되는 편이고, 보더 가드를 기준으로 보자면 여관에 회의를 위한 홀은 물론이고 특실, 개인 연무장에 식당과 술집까지 갖춰야 했다.

보더 가드에는 영주가 없고 영주관이 없어 대소사가 전부 여관에서 이뤄지기도 했다.

실제 부대 내에 회의실이 있다지만, 거기는 군사 시설이다.

아무나 들이는 곳이 아니었다.

자연히 여관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런 여관을 수도에 차린다라, 무리가 맞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이유도 없겠지만.

“자세히도 아는구나.”

엔크리드가 선두에 선 작센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예쁜 여자는 다 미래의 고객이 될 수 있으니까요.”

크라이스의 목표가 귀부인 살롱을 여는 거라고 했던가.

오롯이 여자만 받는 살롱이다.

당연히 급사는 전부 남자, 그것도 잘생긴 남자로 꾸린다고 했다.

창의력이 돋는 새끼다.

남자의 미모로 귀부인의 주머니를 털 작정을 한다니.

크라이스가 불안한지 계속 입을 열었다.

“근데 레이크 팬서는 괜찮을까요? 걔는 춥지도 않나. 왜 따라나서라니까 움직이질 않는 건지.”

“아직도 걔 발톱 노리냐?”

“아니요. 노리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 것 같던데요. 괜히 비싼 게 아니었어요.”

엔크리드는 크라이스의 말에 피식 웃었다. 말만 그렇지, 아직 노리고 있을 게 뻔해 보였다.

“이름이나 지어 주시죠. 계속 데리고 다닐 것 같은데.”

크라이스의 말에 엔크리드가 내심 고개를 끄떡였다. 언제까지 이름도 없이 이놈 저놈 부를 순 없으니까.

그리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으슥한 골목에 들어서고도 한참 걸은 뒤였다. 몇 번이고 꺾어서 들어가다 보니, 방향 감각이 나쁘지 않은 엔크리드도 길이 헷갈릴 지경이었다.

“너, 도둑 길드에서 크로나 처먹고 일부러 함정으로 가는 거 아니냐?”

렘이 괜히 이죽거렸다.

작센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 새끼는 툭하면 말을 씹어.”

렘이 불퉁거렸지만, 작센은 그 또한 무시함으로 렘을 대하는 태도에서 일관성을 지켰다.

“그만.”

엔크리드가 한마디 더 하려는 렘을 말렸다.

“차별 대우 하는 거요? 나 서운해지면 재미없을 거요.”

참으려고 엔크리드를 걸고넘어지면 좋은 신호였다.

여기서 말다툼을 끝내겠다는 거니까.

그 뒤는 조용했다.

라그나가 심심한지,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며 걸었고.

“겨울은 춥군요.”

이 추위에도 바닥에 몸을 뉜 거지 무리를 본 아우딘이 한마디 한 게 전부였다.

눈은 그쳤지만, 단단하게 언 흙 위로 얇게 눈이 쌓였다.

내일 낮이 되면 태양 빛에 녹아 질퍽한 땅을 만들 터였다.

“여깁니다.”

그렇게 반 시간쯤 골목길을 헤맨 뒤였다. 낡은 나무 문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더 가드 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문이었다.

해는 떨어졌지만, 달빛이 은은히 비춰 주어 시야에 불편함은 없었다.

엔크리드가 문을 밀어 열려는 찰나다.

“네가 왼쪽 할래?”

우두커니 멈춘 가운데 달빛을 등진 렘이 말했다.

“제가 오른쪽을 맡지요. 얻어먹은 값은 해야겠지요.”

아우딘이 그 말을 받고.

“알아서 해. 난 나한테 덤비지만 않으면 그만이니까.”

라그나가 하품을 했다.

“게으름뱅이 새끼 같으니라고. 분대장, 손님 왔수다.”

엔크리드가 렘의 말에 몸을 돌렸다. 전부 거적 따위를 걸친 놈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오면서 봤던, 널브러진 거지새끼들이었다.

머릿속에 혼혈 요정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크니.’

엔크리드는 괜히 혁대 뒤편을 손으로 훑었다.

손끝에 나이프 한 자루가 걸렸다.

흔한 물건은 아니었다. 혼혈 요정을 죽이고 그 시신에서 쓱싹 해 온 거니까.

가슴팍에도 든든하게 비도집을 찬 상태였다.

휘파람 비도란 물건을 보니 흔히 만들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나, 냉큼 챙겨야지.

바닥에 꽂힌 것과 요정의 몸에 있던 것까지 몽땅 챙겼다.

“어릴 때 못 배웠나 본데, 해 떨어지면 이런 데 들어오면 안 된다고.”

거지 하나가 말했다. 말하며 앞니가 보였는데 누렇다 못해 검은 것 같았다.

밤이라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겨울이고 몇 발짝 떨어져 있는데도 고약한 냄새가 날 것 같긴 했다.

“지랄하네.”

렘이 답하고 움직였다. 빠른 걸음은 아니었다.

성큼성큼 걸어서 거리를 좁혔을 뿐이다. 앞으로 나선 거지가 소매에서 주머니칼을 꺼냈다.

칼날이 한 뼘도 되지 않은 나이프다. 그걸 들고는 찌르는 시늉을 했다.

“뒈진다. 너.”

그게 그의 유언이었다.

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놈은 나이프를 쑤셨다.

거지가 배를 노리고 쑤셨는데 렘은 왼손으로 상대 손목을 잡아챘다.

렘은 그대로 거지를 안쪽으로 당기며 오른쪽 팔꿈치로 놈의 머리통을 갈겼다.

빡! 우득!

과감하며 확실한 일격이었다.

팔꿈치에 머리통을 맞은 거지의 목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였다.

우득.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서 아우딘이 엄지와 검지, 중지만으로 거지의 턱을 잡아 뒤트는 게 보였다.

세 손가락으로 턱을 잡아 틀었는데 목이 꺾인다.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부린 묘기였다.

“미친 새끼가!”

“시발!”

남은 셋 중 둘은 핏대를 세웠고 하나는 눈치를 보더니 잽싸게 뒤로 내빼려고 했다.

렘과 아우딘의 싸움은 짧았다.

거리를 좁히고 나이프 따윈 무시한 채 일격, 그게 전부였다.

렘은 손날로 거지의 목울대를 후려친 뒤,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끊어쳤다.

그거로 거지 하나의 의식이 날아갔다.

아우딘은 더 단순했다.

왼발을 앞으로 툭 내딛더니, 왼 주먹을 쭉 뻗었다.

훙, 꽝!

주먹이 무슨 포탄 같았다.

발끝부터 시작된 허리의 뒤틀림에 이은 일격이다.

어깨부터 시작된 쭉 뻗은 주먹에 맞은 놈의 코가 사라졌다. 안면이 안으로 움푹 들어간 채, 무릎을 푹 꿇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일격에 안면 함몰이었다. 기절하고 쓰러지는 건 당연했다.

그사이 뒤로 도망간 놈은 엔크리드가 해결했다.

퉁, 퍽!

“꺽!”

도망가던 놈이 목 뒤에 꽂힌 단검을 장식 삼아 앞으로 고꾸라졌다.

막 쫓으려고 발끝에 힘을 주던 렘의 고개가 뒤로 돌았다.

아우딘도 눈을 몇 번 깜빡거렸고 반쯤 졸린 눈을 하던 라그나도 눈을 크게 떴다.

작센의 미간이 좁혀졌다가 펴졌다.

묵직하고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싸는 가운데.

“와.”

크라이스가 짧은 감탄사를 토했다.

엔크리드는 오른손 끝을 앞으로 쭉 뻗은 자세에서 손을 내리며 말했다.

“왜? 시간 낭비잖아. 쫓는 거.”

“우리 분대장 언제부터 단검을 그리 잘 던졌수?”

렘이 물었다.

“하다 보니 늘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내가 던진 나이프에 집중할 시간은 아니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지 다섯이 덤볐는데도 놀라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하물며 크라이스조차 덤덤했다.

“안 놀랐냐?”

엔크리드가 물었다.

그는 이미 걸어오면서 누운 거지의 몸과 손을 보고 알았다.

괜히 용병질을 하며 먹고 산 게 아니었다. 어설픈 실력으로 오래 살아남으려면 뭐가 필요한가.

눈치다.

엔크리드의 눈치도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는 거지의 존재를 통해 작센이 제대로 된 길을 간다는 걸 알았다.

지키는 놈들이 있다면 앞에 뭔가 지킬 게 있다는 거 아닌가.

“네? 아, 안 놀랐어요. 어떤 거지가 무장한 병사에게 덤벼요. 핑계가 조악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앞이 범죄 길드의 본거지거나 놈들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건 확실해진 거죠.”

누구나 눈치챌 만한 일일까?

아니면 크라이스가 영리한 걸까.

아무래도 전자 같았다.

그래도 대담하긴 했다. 전장에 나서면 요리조리 잘 도망 다니긴 해도 크라이스도 전장을 눈앞에서 지켜본 병사였다.

이런 건 일도 아니었다.

“범죄 패거리치고는 놀랍긴 하네요.”

“뭐가?”

“덤빈 놈들이 하는 짓을 보니까 교대로 근무를 돌린 것 같은데, 일개 패거리치고는 너무 치밀해요. 길핀이란 놈 수완이 엄청 좋은가 봐요.”

크라이스는 영리하기도 했다. 일면을 보고 그 후면의 일을 생각할 줄 알았다.

“그것도 그렇네.”

둘이 몇 마디 나누는 동안 작센은 문을 열다가 물러났다. 곧 검 손잡이를 잡는 걸 보니 베어 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아우딘이 나섰다.

“제가 노크해 보겠습니다.”

범죄 조직의 본거지다. 두드린다고 열어 줄 리가 없었다.

펑!

하지만 아우딘의 노크는 조금 달랐다.

“푸하, 잘하네. 우리 종교쟁이 친구.”

렘이 감탄했다. 엔크리드도 내심 감탄했다.

아우딘은 오른 어깨를 당기고 왼발을 축으로 몸을 틀며 손바닥으로 문짝을 후려쳤다. 아니, 후려치자마자 손을 뒤로 뺐다. 끊어치기였다.

그러자 문짝의 경첩이 들리며 안으로 문이 말려 들어갔다.

그러니까 열린 거다. 다른 말로 하면 부순 거고.

호쾌한 노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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