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두 번째 직업을 제안받다.
“다 죽입시다.”
무기를 놓아 버린 걸 넘어서 오줌을 지린 사람도 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렘이 피가 묻은 도끼를 들고서 말하니.
“사, 사, 살려 주십쇼.”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하지.
안 그래도 전의를 상실한 이들이었다.
렘은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부 개척민 출신, 낮춰 부르길 야만인이라 한다.
렘은 서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개척의 땅은 후환을 남겨 둬서는 안 되는 세상이었다.
“암살자 보낸 거 맞는 것 같고, 여기서 누가 범인이네 마네 따져 봤자 남는 게 뭐라고, 멱 따고 끝냅시다. 그게 깔끔하지 않수?”
겁에 질린 자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엔크리드와 무릎 꿇은 범죄자 무리 사이에 선 렘이 언제라도 도끼를 휘두를 것 같았으니까.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너 모포는 어디다 던져 뒀냐?”
렘은 엔크리드가 하기 싫다면 자신이 나서서 손을 쓰겠다고 할 참이었다.
그런데 뜬금없는 물음이 돌아왔다.
“뭐요?”
“모포.”
분명 숙소에서 나설 때는 모포로 몸을 칭칭 감은 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포를 죄다 버렸다.
“골목길 어귀쯤?”
거지를 보기 전이다. 특유의 본능, 야수의 후각이 렘에게 전투 준비를 시켰다.
“그럼, 오늘 잘 때는 어쩌려고?”
왜 계속 저런 걸 묻는 건지 모르겠으나, 처음 모포를 버렸을 때부터 렘은 다 계획이 있었기에 답했다.
“매일 외박하는 놈 모포를 덮으면 되니까 걱정 마쇼. 분대장 모포 안 뺏을라니까.”
“내 물건 건드리면 죽는다. 아니, 내가 죽인다. 반드시.”
작센이 알아듣고 반응했다. 툭 하면 외박하는 놈, 작센이다.
작센은 만나는 여자가 많았다. 도시에 들어오면 밤마다 숙소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치사한 새끼가 쓰지도 않을 거.”
“건드리지 마라. 야만인.”
“하여간 음흉한 들고양이 새끼, 속도 좁아요.”
둘이 투덕거리기 시작하는 걸 보고 엔크리드가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럴 필요 없다. 렘.”
처음 도둑 길드를 노렸을 때부터 엔크리드는 계획이 있었다.
렘의 어설픈 모포 탈취 계획보다는 조금 더 그럴듯한 계획이.
암살자를 들여보낸 게 얘들 같아서 시작한 게 반, 다른 계획이 반이다.
‘이건 의외지.’
이들이 암살의 배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반 이상이었다.
애초에 아즈펜이 보냈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그러니 누가 크로나를 걸라고 했다면 길드가 배후가 아닌 쪽에 걸었을 거다. 잃어도 상관없는 동화 몇 닢만 걸었겠지만.
만약 이들이 배후라면, 또는 배후가 아니라면.
그런 것보다 중요한 계획이 있었다.
“날이 꽤 춥잖아. 따뜻하게 지내고 싶지 않냐?”
렘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무슨 얘기를 하나 싶은 얼굴이다.
“어?”
비상한 눈치와 머리가 잘 돌아가는 크라이스만 알아들었다.
그가 큰 눈을 껌뻑이며 ‘설마’ 하고 제 분대장을 쳐다봤다.
엔크리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단련하겠답시고 용병계에서 구른 게 몇 년인가.
거기서 발렌 식 용병검의 존재를 알기도 했으나, 검 외에 배운 게 몇 배는 많았다.
가령.
‘날 털어먹으려는 도둑의 주머니를 터는 건 온당하다.’
이런 거다.
엔크리드는 마음먹었다.
이게 자신의 꿈에 영향을 준다고도 생각 안 했다.
어차피 범죄 패거리 아닌가.
이들이 축적한 재산도 바람직한 방법으로 모은 것도 아닐 진데.
후환이나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이 걸릴 법도 했지만.
‘상관없지.’
실력이 붙으니, 자연히 다른 일에도 자신감이 붙는다.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입김을 뿜어낸 엔크리드가 이어 말했다.
“털자. 숙소에 마법 난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온열 마수 가죽 몇 개는 깔아 보자.”
또다시 침묵이다. 생각지도 못한 경우였던 거다.
곧 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내가 확보한 땅에서 나온 물건은 내 것이지.”
렘다운 표현이었다.
“따뜻하게?”
라그나도 반응했다. 추운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허허, 신께서 말씀하시길, 도적의 것을 훔쳐 널리 좋은 곳에 쓰라 하셨으니.”
실제로 성서에 저런 말이 쓰여 있을까? 아니면 신전에서 저런 말을 가르칠까?
둘 다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아우딘은 자신이 한 말을 굳게 믿음으로써 이 일의 온당함을 전했다.
“나쁘지 않군요.”
작센 또한 고개를 끄덕였고.
“그냥 털기만 할 겁니까?”
크라이스는 발전된 의견을 뱉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춥다.”
죽은 이들의 내장과 피가 뿜어내는 열기도 금세 식게 만드는 기온이다.
그들은 곧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던 이들을 향해 크라이스가 들어가길 종용함으로 남은 이들도 들어 왔다.
두 다리가 부러진 이들이 남았기에.
“전부 부축해서 데리고 들어오세요.”
크라이스의 말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치를 보던 이들이다.
이대로 도망가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이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쫓을 겁니다. 아까 그 도끼 든 사람이. 또는 다리 부러뜨리는 게 취미인 사람이.”
라그나도 작센도 잘 싸웠지만, 패거리의 눈에 가장 무서운 건 도끼질 하는 렘과 몽둥이로 다리 후려치는 아우딘이었다.
그야말로 공포였다.
“보더 가드 내에서 상비군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이 밤에 마수가 돌아다니는 끝 계절을 탐험이라도 하시게요? 동사 또는 마수의 먹이가 됩니다. 안 죽일 테니, 들어 오세요.”
크라이스는 설득의 귀재였다.
엔크리드는 안으로 들어가며 크라이스의 말을 듣고는 칭찬을 건넸다.
“넌 사기를 쳐도 잘 쳤을 거다.”
“그거 칭찬입니까?”
“응.”
“아닌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자 벽난로에 불이 붙어 있었다. 곳곳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죽은 놈이 여기서 살았던 것 같았다.
벽난로 위에는 날이 서지 않은 가검 두 자루와 방패가 교차 되어 걸려 있었고 양쪽 벽에는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었다.
“비싼 거냐?”
엔크리드가 그림을 힐끗 보며 물었다. 크라이스는 자세히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요. 싸구렵니다. 누가 저딴 걸 샀을까 싶네요.”
예술적 소양이 없는 엔크리드가 봐도 그랬다.
“내가 발로 그려도 이것보다는 잘 그리겠다.”
렘도 같은 의견인 것 같았다.
다들 벽난로에 붙어 서니, 그들 뒤로 긴 그림자가 생겼다.
“횃대에 불 좀 붙여. 어둡다.”
엔크리드도 그 사이에서 불을 쬐며 말했다. 누굴 지칭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엔크리드가 말을 덧붙였다.
“길핀이 죽었으니, 그다음 놈이 나와서 해.”
“길핀은 안 죽었습니다.”
그러자 사지 멀쩡한 놈 중 하나가 나섰다. 머리 위에 머리털 대신 백사장이 있는 친구였다.
낮에 봤다면 눈이 부셨을 것이다.
눈썹 위로 긴 흉터가 있었는데, 흉터와 대머리의 조합으로도 인상을 변하게 할 순 없었다.
눈꼬리가 처지고 입술이 두꺼워, 도저히 살벌한 인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근데 뭐라고?
“길핀이 안 죽어?”
설마 무슨 마물처럼 재생력이라도 지녔다고?
그래서 목이 베이고도 살아난단 건가?
지금 저택 앞 공터에서 시체가 된 놈이?
그럴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백사장 대머리가 입을 열었다.
“제가 길핀이니까요.”
뭐냐, 이 상황은.
“쟤가 대장이 아니라고? 아, 그거군요. 도마뱀 꼬리 자르기 같은 거?”
크라이스가 바깥을 가리키며 묻고는 스스로 답했다.
그 말에 엔크리드는 용병 업계에서 구르며 술자리에서 오갔던 잡담이 떠올랐다.
“가끔 범죄자 길드 새끼들이 하는 짓거리인데, 패거리 이름을 괜히 제 부하 이름으로 해 놓는 거야.”
“왜?”
“수틀리면 부하를 팔아먹고 튀는 거지. 갑자기 범죄자 소탕하겠다고 군대가 들이닥친 다거나 할 때 쓰는 시답잖은 수법인 거다.”
“넌 그걸 왜 그렇게 잘 아냐?”
“그쪽에 잠깐 몸담았거든, 하여간 그렇게까지 하는 놈들이 흔하진 않은데, 아주 개자식인 거지.”
엔크리드는 실제로 이런 짓을 하는 놈은 처음 봤다.
보통 공명심에라도 제 이름을 패거리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훨씬 많았으니까.
부하의 이름을 앞세웠다, 이건 저 밖에서 뒈진 놈이 굉장히 음흉한 새끼란 거였다.
“개자식이었군.”
알아들은 엔크리드가 말하자.
뒤에서 라그나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고.
눈치 빠른 크라이스가 상황을 대강 설명했다.
엔크리드의 계획은 그럴듯했지만, 단순했다.
도둑 길드를 쳐서 얘들이 협조하면 적당히 성의를 받아서 돌아오고.
반항하면 두들겨 패서 성의를 받아 돌아올 작정이었다.
물론 괜히 도둑 길드를 건드리면 후환이 따르겠지만.
그조차 무력으로 찍어 누를 자신이 있었다.
자신과 분대원이면 충분하리라.
그런데 진짜 자신을 노린 암살자와 연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정말 따뜻하게 해 줄 거요?”
뒤에서 렘이 속삭였다. 얼굴을 너무 들이밀어서 불쾌했다.
“꺼져라.”
속삭여 준 엔크리드가 길핀을 바라봤다. 제 백사장 머리를 한 번 손으로 쓱쓱 쓰다듬은 길핀이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죽일 거면 나 하나만 죽이고 나머지는 살려 주십쇼. 이 중에는 병든 노모를 모시느라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힘들다고 다른 사람 주머니 터는 게 멀쩡한 짓은 아니지.”
병든 노모를 모셨다고 해서 다른 이의 가슴팍에 칼을 들이대고 이득을 취하리란 법은 없다.
“에, 그냥 살려 주면 고맙겠습니다.”
엔크리드는 팔짱을 끼고 똑바로 선 채로 길핀을 바라봤다.
이 친구 어째 강단이 있다.
자기만 죽이라는 말도 퍽 인상 깊고.
그럼, 아까는 왜 안 덤볐을까?
물어보니.
“제 이름 팔아서 수틀리면 도망갈 새끼를 위해서 왜.”
이름 모를 길드장의 호위였던 둘이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도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쪽이었다.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뒈진 놈이 한 짓이 보였다.
제 부하들이 이리도 하나같이 자기를 싫어하니.
“모아 둔 거 토해 낼래? 그럼 곱게 가고.”
엔크리드는 계획대로 움직였다.
“암, 토해 내면 죽일 필요는 없지.”
개척민의 사상 따위를 추위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렘이 동조했다.
다른 이들이라고 다를까.
“네. 근데 금고 열쇠는 뒈진 그 새끼가 숨겨 놔서.”
“아, 괜찮아.”
여기 노크만으로 잠긴 문을 여는 마법사가 계시거든.
금고 상자 따위야, 뚝딱이지.
길핀은 지혜로웠다.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고 하자 그동안 축적한 재물을 다 토했다.
“엇, 온열 가죽이다!”
“다 가져가시면 길 지키는 애들 다 죽습니다.”
골목길 안쪽, 길을 지키는 거지를 말한 거였다. 이미 오면서 죽인 그 거지들.
그들의 허름한 옷 안쪽에 마수 가죽을 덧대어 놨다는 말에 크라이스가 말했다.
“이거 피 묻으면 못 쓰잖아.”
죽은 거지의 것을 뺏을 순 없게 되었다.
그나저나 엔크리드는 새삼 또 길핀을 다시 봤다.
‘일개 수하까지 다 챙겼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름만 빌려줬다는 것치고는 본래 길드장보다 인심이 더 좋은 듯했다.
다들 알음알음 길핀의 뜻에 따르는 걸 보니, 딱 봐도 칼 좀 다룰 것 같은 호위 둘도 마찬가지고.
“좀 남겨 둬.”
엔크리드가 적절히 제지했다.
다행히도 다들 물욕이 없었다.
아니, 한 명은 아니어야 하는데.
크라이스는 물욕이 넘쳐흐르는 분대원이다.
근데 어쩐 일로 물건을 확인만 하고 가져갈 시늉도 하지 않았다.
“안 챙기냐?”
“네, 아, 분대장. 안 그래도 할 얘기가 있는데.”
엔크리드도 할 얘기가 있었다. 이들은 이미 정보를 듣고 대비했다.
정보가 샌 곳, 하나뿐이었다.
부대 내는 아니다. 여기에 온다는 걸 아는 건 둘뿐이다.
‘중대장과 소대장.’
그 둘이 범죄자 길드에서 크로나를 상납받았을까?
‘그건 아닐 것 같고.’
그렇다면 남는 건 한 군데다.
‘바네사의 호박 수프.’
크라이스가 여급과 속닥거렸을 때, 실수인 척 도둑 길드를 소탕하러 간다는 말을 흘렸다.
“여급, 일부러 그랬냐?”
“아, 눈치챘어요? 분대장 머리 좋군요.”
나쁜 편은 아니지.
험한 세상 살아남기 위해 얻은 눈칫밥이 몇 년인가.
“맞아요. 알게 모르게 이쪽 길드에 정보를 퍼다 주는 놈이 많으니까. 여급은 아예 전용 정보원이었을 겁니다. 발랄한 여관의 여급, 이런저런 정보를 수급하기는 딱 좋았겠죠. 아우, 무서워라. 그 순진해 보이는 애가 도둑의 정보원이라니.”
무섭긴, 네가 더 무서울 것 같은데.
그걸 알면서 십분 이용한 거 아닌가.
“저도 확신은 없었어요. 이번 일로 안 거죠.”
미리 말했어야 했다. 괜한 수작이었다고.
제 실수를 자각한 크라이스가 핑계를 늘어놨다.
“됐어. 넘어가. 하지만 다음부터는 미리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분대원의 실력을 염두에 둔 짓거리였을 거다. 엔크리드 자신도 이쪽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본래라면 이번에 본거지를 치고도 남은 이들을 쫓고 찾아내야 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확실히 크라이스도 노리는 바가 있는 거다.
도둑 길드의 전력을 모은 뒤 다 부숴서 얻을 것, 무엇이 있을까.
“저기 분대장, 크로나 필요 없어요?”
아량을 보인 엔크리드에게 크라이스가 대뜸 물었다. 그 큰 눈을 깜빡거리며.
순진무구한 척, 눈을 이리 뜬다는 건 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표시였다.
크라이스는 제 외모를 이용할 줄 아는 놈이니까.
거기에 영리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게 엔크리드에게 통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무슨 수작질인지 들어나 보자.”
눈깔 예쁘게 뜨기는 안 통했지만, 크라이스가 한 말은 와닿았다.
제국 화폐, 크로나란 단어가 돈과 차용되는 단어로 쓰이니, 지금 크라이스가 한 말은 돈 필요 없냐는 물음과 같았다.
돈은 항상 필요했다.
포상금을 탈탈 털어 검 한 자루를 사는 바람에 그 외, 이런저런 장비를 갖추기도 버거울 지경이었으니까.
지금 털어먹은 거로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돈이야 앞으로도 꾸준히 필요한 거 아닌가.
“여기, 우리가 먹죠.”
크라이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그는 엔크리드에게 두 번째 직업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