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69화 (69/170)

69. 여자를 안는 꿈을 꿨다 (2)

엔크리드는 꿈을 꿨다.

꽃밭과 여자가 나왔다.

“당분간 신세 좀 질 테니, 그렇게 알아.”

신비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여자라면 잘 돌아보지도 않는 엔크리드인데도 쉬이 잊히지 않을 듯했다.

꿈은 난잡했다.

꽃밭이었다가, 검은 강이 나왔다가, 사공이 보였다가 여자가 보였다가 갑자기 표범이 보였다.

‘네가 여기서 왜 나오냐?’

속으로 물었는데, 표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토라졌는지 한쪽으로 고개를 팩 돌린다.

그게 몹시 귀여워, 엔크리드는 참지 못하고 놈의 정수리를 손가락을 세워 긁었다.

그르르.

레이크 팬서는 맹수라고 들었는데, 이럴 때 보면 고양이와 매한가지였다.

놈이 기분 좋은 울음을 흘렸다. 그르륵거리는 소리가 엔크리드가 듣기에도 정겨웠다.

그러다 잠깐 눈을 떴는데,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참 모호했다.

눈앞에 꽃밭과 검은 강에서 봤던 여자가 품에 안겨 있었다.

그것도 나체로.

눈을 깜빡이니, 여자는 사라지고 표범의 정수리가 보였다. 아무래도 꿈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품에 안은 묵직한 느낌이 남았다. 작은 표범에게선 느낄 수 없는 향기와 온기가 남아서 더 묘한 기분이었다.

‘꿈이 너무 현실감 있는데.’

그러다 다시 잠이 쏟아졌고, 엔크리드는 굳이 쏟아지는 잠을 이겨 내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난 눈을 뜨니, 자신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 품 밖으로 나가지 않던 표범이 온데간데없었다.

“표, 에스터.”

아무렇게나 부르려던 엔크리드는 잠결에 지은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자, 한쪽에서 꼿꼿하게 선 레이크 팬서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숙소 그늘에 기가 막히게 숨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도 어려웠다.

호수 같은 푸른 눈과 흑단 같은 까만 털의 주인이다.

놈이 톡톡 바닥을 즈려밟고 걷더니 새초롬하게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숙소 한쪽에 쉬라고 만들어둔 가죽 위다. 당연히 온열 가죽이고.

‘하루아침에 풍족함을 넘어 사치스럽게 됐어.’

일개 표범까지도 온열 가죽 위에서 제 손톱을 손질하는 광경이라니.

그 위 왕눈이가 가져다 놨는지, 렘이 가져다 놨는지 육포 따위가 놓여 있었다.

표범은 육포를 손톱으로 대충 자르더니 입 안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근데 뭐가 이렇게 허전하지?

아침에 품 안을 데워주던 작은 짐승이 없어서?

아니면 꿈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꿈에 나온 여성의 나체를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림에는 조예가 조금도 없기에 엉망진창으로 그리겠지만.

그만큼 기억에 뚜렷하게 남았다.

‘예쁘긴 했지.’

미모가 탁월했다. 인외의 미모를 뽐내는 요정 중대장과 버금갈 정도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슈?”

“꿈을 꿨는데 너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서.”

에스터가 그런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표범의 눈빛이 묘했다.

꿈에서 자신이 이름을 말할 때, 생각보다 의념이 강하게 남았을지도 모른다.

의지력이 약한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정신적인 타격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표범의 몸으로라도 손을 쓸 방도를 궁리해 봐야 할까.

표범은 심각해졌다.

“무슨 꿈인데 그러슈?”

가죽을 돌돌 말고 누운 채로 렘이 물었다.

“넌 애벌레냐?”

“맞수. 난 애벌레요. 입만 산 애벌레요. 그러니 아침 식사를 먹여 주시오. 아니면 이 허약한 애벌레는 굶어 죽는다오.”

이 새끼는 확실히 반쯤 미친 새끼가 맞다.

엔크리드는 렘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래도 될 만한 놈이다.

“그래서 무슨 꿈이오?”

렘이 다시 물었다. 엔크리드는 턱을 긁으며 답했다.

“묘한 꿈이었어.”

“묘하다?”

렘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가리만 나와 있으니, 모든 표현을 표정과 머리로만 한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발가벗은 여자를 봤다.”

“크륵! 칵, 칵!”

‘음?’

엔크리드의 눈이 표범에게 향했다.

육포 조각 따위가 목에 걸렸는지, 연신 기침을 토하는 표범이 보였다.

“에스터?”

표범은 그대로 바닥에 고개를 박은 채, 부름을 외면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신에 신비로움을 뿌리던 표범이다.

맹수 중의 맹수, 그린 펄의 주인.

호수를 닮은 눈을 가진 표범, 레이크 팬서.

그런 맹수가 바닥에 침을 흘리며 기침을 토했다.

“켁!”

저러다 죽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 살다 살다 표범이 육포 처먹다 목에 걸려 죽은 건 본 적이 없수, 그래서 예뻤수?”

엄청 예뻤다.

하지만 답을 하진 않았다. 말해 뭐하나.

어차피 꿈인걸.

“겨울이라고 너무 굼뜬 건 아니냐? 렘?”

엔크리드가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고 보니 전신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괴롭다.

그래도 이럴 때 가만히 있으면 몸이 더 축난다.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훈련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예전이라면 급한 마음에 더 호되게 몸을 굴리겠지만.

그러면 몸이 더 망가진다는 걸 안다. 안 이후부터는 선을 지켰다.

전처럼 마음이 급하지도 않았고.

‘휴식도 훈련의 일부.’

수없이 많은 검술 선생이 했던 말이다.

오늘은 적당히 몸을 풀어주면 내일은 조금 더 편할 것이다. 아우딘에게 배운 몽크 체조면 충분하리라.

“그래서 예뻤냐니까.”

“알아서 뭐 하냐. 꿈인데.”

대강 답하고 나갔다. 오늘도 추웠다. 전신에 안 아픈 곳이 없지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생각이 많진 않았다. 오히려 대련으로 한바탕 구르고 나니, 명확해졌다.

항상 의문이었다.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재능이 있는 자들, 흔히 말하는 천재라는 이들에게는 원하지 않아도 길이 보인다고 한다.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것, 부족한 걸 찾아내는 것도 재능이란 거다.

그럼, 재능이 없는 이들은?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본다.

거기서부터 시간이 소모된다. 출발선이 달라진다.

그래서 훌륭한 선생이 필요한 거였다.

부족한 걸 집어서 얘기해 줄 선생의 존재는 언제나 보물과 같으니.

이번에는 요정 중대장이 그 역할 일부를 해 줬다.

이제 부족한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채워 줘야 했다.

“아우딘.”

아침이면 아우딘은 밖으로 나온다. 추위? 그런 거에 신경 쓰는 인간이 아니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그를 기도하는 곰이라 부를까.

몸집만으로 그리 불리는 건 아니리라.

“네, 형제님, 좋은 날이지요?”

쌩 하고 칼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보더 가드는 펜-하닐 대륙 내에서도 북단이다.

펜-하닐 대륙 내에서도 특별히 추운 지역이란 거다.

구름 낀 하늘 덕분에 아침인데도 주변이 얼룩덜룩해 보였다.

하지만 아우딘은 본래 이런 인간이다. 해가 뜨면 뜨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차마 눈이 오는 날에는 좋은 아침이란 말을 하지 않지만.

“그러네.”

엔크리드가 대꾸했다. 날이 무슨 상관일까.

아니, 좋은 날이긴 했다. 어떤 날이든 새로이 뭔가를 배우는 시간은 좋은 날이 맞으므로.

“레슬링 가르쳐 줘.”

엔크리드는 언제나 그대로였다. 그는 하던 대로 했다.

목적과 의지가 명확했다.

분대원을 항상 이렇게 대했기에 지금과 같은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우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 이 작자는 참으로 독특한 사람이기에.

며칠 만에 실력이 늘어난 걸 보며 어떤 행운이 있기에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엔크리드는, 분대장은 아우딘이 보기에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제 몸이 타는지도 모르고 주변을 태우는 불꽃.

그러하기에 그 불꽃은 주변을 밝히고 데운다.

세상 모든 걸 외면하고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 기실 반쯤 포기한 상태였을 때.

그때 처음 부대에 들어와 마주한 인간이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첫 만남이다. 엔크리드는 막사 앞에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냥 몽둥이도 아니고 물 먹은 나무 세 개를 겹쳐 끈으로 묶은 물건이었다.

“근력 단련.”

단순히 무거운 것만 휘두른다고 힘이 쉬이 늘까.

늘긴 하겠지만,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저러다 몸이 망가지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며칠이면 관두리라 생각했다.

엔크리드는 그러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한결같았다. 전장에 나서도, 근무가 있어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자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그는 검을 휘둘렀다.

아우딘은 그때 당시의 자신을 떠올렸다.

피폐, 두 단어로 당시의 자신을 그려 낼 수 있으리라.

음울함을 한껏 풍기며 물었었다.

“실력이 형편없는데, 왜 매일 그러는 겁니까?”

“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기분 상한 표정도 없었다. 평온한 물음에 담담한 답처럼, 그리 대답하고 하던 일을 마저 한다.

그걸 보며 아우딘은 머리에 벼락이 꽂힌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가.

어떤 믿음이 그에게 있는가.

신앙의 냄새는 없다.

노력하는 것도 재능이라 하지만, 애초에 타고난 게 없다면 노력이란 것도 계속할 수 없는 법이다.

엔크리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매일의 노력에 매일 배반당하는 사람.

그리 매일 배반당하면서도 또 매번 나아가는 사람.

‘당신은 뭡니까?’

아우딘은 그 뒤 분대장을 꾸준히 관찰했다.

분대장을 계속 보다 보니 자신이 낙담한 이유가 참으로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믿음은 대가를 바라며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날, 아우딘은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형제님, 그러다 관절 전부 망가집니다.”

이후, 분대장의 훈련을 조금씩 봐 주기 시작했다.

아우딘은 사람의 몸을 본다. 프록 수준만큼이나 재능을 보는 눈이 있다고 봐도 좋았다.

프록이 재능 판독자라고 불린다면.

아우딘은 후천적인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몸을 본 뒤, 몸의 단련 정도를 파악하는 신체 판독자라고 해도 좋았다.

그가 보기에 엔크리드는 몸을 만드는 일에도 다른 이들보다 배는 노력해야 했다.

타고난 골격이 그렇다.

근육의 질도 그리 좋지 않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아는 분대장은 그런 인간이 아니다.

“시작은 몸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아우딘이 물었다. 여전히 칼바람이 부는 날이지만.

그는 분대장을 지켜보다 다시 기도를 올린 그 날 이후로 항상 좋은 아침이라 생각했다.

물론 눈 오는 날은 빼고.

“얼마든지.”

“고통스러울 겁니다.”

“괜찮아.”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했다.

“아플 겁니다.”

“문제없어.”

칼에 수없이 찔리며 죽는 것보다는 덜 아플 것이다.

“지금부터 알려 드리는 건 몽크의 체조가 아닙니다. 제가 개발한 기술이지요. ‘고립의 기법’이란 겁니다.”

이름이 불길하게 들렸지만, 그만큼 희망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일단 배운다면 제대로 배우는 게 맞으니.

현시점에서 분대원, 아니 엔크리드 자신이 본 사람 중 최고의 무투 기술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고립의 기법.”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 한 점의 집중, 이후 네 번째 기술의 이름이다.

“머리로 이해하고 몸으로 수행하는 훈련이 될 겁니다. 형제님.”

“응.”

“그럼, 하시지요.”

덤덤한 말투였다. 엔크리드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끄으으으으음.”

연병장 한쪽에서 비명 대신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지요. 형제님.”

엔크리드는 아우딘이 매일 기도하는 대상이 악마가 아닌가 생각했다.

일전에 했던 체조는 말 그대로 몸을 푸는 수준이었다.

툭하면 기본이라 하더니.

“유연성을 기반으로 무게를 들어 근육에 힘을 붙일 겁니다. 하시지요.”

아우딘은 몸 곳곳을 주물럭거리더니, 기묘한 자세를 시켰다.

말 그대로 근육을 찢어발길 것 같은 자세였다.

왜 엎드려서 발뒤꿈치가 엉덩이를 짓누르는데, 허벅지 앞쪽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건지.

아우딘은 손수 엔크리드의 다리를 붙잡고 눌렀다.

엔크리드는 아우딘의 손이 강철로 만든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굳건한 힘이다.

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엔크리드는 몸으로 근육의 움직임을 익혀야 했다.

“두어 번 죽는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안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정말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었으니까.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끄르으그그륵.”

엔크리드의 입에서 묘한 신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분대장 형제의 한계는 제가 압니다.”

‘내 한계를 왜 네가 알아?’

사실 아우딘은 미친 새끼였을까?

엔크리드는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내심 즐겁긴 했다. 이 괴로움을 통해 얻은 것이 기대됐기에, 엔크리드는 신음을 흘리고 괴로워하면서도 웃었다.

“표정을 보니 여유가 있으시군요.”

아니, 여유는 없는데.

악마의 사제 아우딘은 그날 엔크리드의 몸을 수차례 분해하고 쪼개고 찢었다.

사계의 끝, 겨울의 어느 날이다.

사흘 내내 유연성을 기른 뒤다.

“드십시오.”

무거운 돌덩이 따위를 들고 제한된 동작을 수행하는 게 뒤따라왔다.

“스읍, 후. 호흡 잡고. 배에 공기 넣습니다. 복압으로 하는 겁니다. 형제님.”

고립의 기법은 전투에 쓰는 재주가 아니었다.

제 몸을 개조하는 기술이었다.

보름, 보름 내내 엔크리드는 피똥을 싸는 기분으로 버텨 냈다.

그러자 조금 버틸 만했다.

다시 보름이 더 지나자.

“할 만하시지요?”

전처럼 힘들진 않았다. 그만한 고통은 없다. 시작은 힘들었지만, 그럴 만한 가치도 있었다.

그렇게 다시, 보름 총 한 달이 지나자, 몸의 변화가 시작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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