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소문은 빛의 날개를 달고
“그 몸, 이제야 좀 봐줄 만하군요. 형제님.”
“이 정도면 이제 기본기는 나쁘진 않습니다.”
“어지간한 눈먼 칼에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대응이 나쁘지 않다. 딱 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흐흐, 이제 좀 대련할 맛이 나는 걸 보니 검이 좀 손에 붙은 거요? 야수의 심장도 무르익었고?”
각각의 분대원이 하는 말이다.
곱씹어 생각할 것도 없이 전부 실력이 늘었다는 말이었고.
엔크리드에게 실력이 늘었다는 건, 그의 삶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였다.
그건 꿈을 이어 줄 실이었고 어두운 밤을 비추는 달빛이었으며, 아침을 데려오는 여명이었다.
빛바래고 찢어진 꿈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기에.
이 한 줄기 빛이 꿈이란 놈을 다시 일으켜 세울 기반이 되었으니까.
기사란, 명예를 쌓아 올려 실력으로 완성하는 이름이다.
엔크리드는 기사급 용병이나 전사가 되길 원하는 게 아니라 기사가 되기를 원했다.
왜냐고 물어보면 답할 말이 궁하긴 했다.
가슴 속을 간질거리는 건 있다. 그게 입 밖으로 선뜻 나오지 않을 뿐.
거짓된 말로 하라고 하면 그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또 싫다.
이런 부분에서는 고지식한 게 엔크리드란 인간이었다.
용병 시절 봤던 불합리한 것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했으나.
오직 그것만이 이유 전부라 할 순 없다.
꿈은 왜 꿈인가.
‘그저 바라기에.’
누군가의 환호도 받고 싶고.
검술을 단련하는 시간도 좋고.
주변에 있는 이들과 떠드는 시간도 좋다.
과거, 자신을 무시하고 내쳤던 이들을 만나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고도 싶다.
복잡하게 얽히고 섞인 욕망이다.
사람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으니.
그 욕망의 집합체가 엔크리드에게는 두 글자로 귀결됐다.
‘기사.’
꿈이다.
실력이 부족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해도.
꿈으로 향하는 길이 생겼다면 그곳으로 걷고 싶었다.
그러므로 명예를 쌓는 것 또한 해야 할 일이었다.
또한, 시험해 보고도 싶었다.
‘내 검, 어디까지 통할까?’
대련이라고 해 봤자 종일 분대원하고만 한다.
전장에서는 미치 휴리어란 놈과 싸워 이겼고, 승급전도 치렀고, 혼혈 요정의 암살도 이겨 냈지만, 그때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이 다르기에.
엔크리드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싸우고 싶다.’
오롯이 검을 휘둘러 자신을 증명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병사 등급제에서 상급 병사가 됐다.
다만, 상급 내에서도 편차는 존재한다.
실력이 늘었기에 생기는 호승심과 호기다.
실전을 통해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런 차에 들어온 의뢰였다.
하물며 중대장이 함께다. 만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중대장이 직접?’
엔크리드의 의문이다.
그가 가진 의문을 다른 사람이라고 안 가질까.
중대장은 오가는 길에 들른 게 의도의 전부였지만, 여타의 소대장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일이긴 했다.
특히나 본래 이 일을 전했어야 할 엔크리드의 직속 상관인 4소대장이 보기에는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저 우연이었으나, 우연을 우연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 * *
보더 가드 상비군은 도시 내 시민과 상단 등에 무력을 빌려주곤 했다.
나우릴리아가 만든 양대 정책 중 하나로 비롯된 일이다.
하나는 병사 등급제.
둘이 병사 용병제다.
용병 대신 병사가 나서서 의뢰를 수행하게 한 건데, 등급제와 더불어 왕국의 성공한 정책 중 하나였다.
“보더 가드의 상비군이라면 믿을 만하지.”
이런 말이 곧잘 나올 정도였으니.
용병 대신 병사가 나서서 의뢰를 수행하는 병사 용병제는.
시민과 상단의 호응을 얻게 된 건 어쩌면 당연했다.
용병은 거칠고 험하지만, 병사는 그보다 덜하다. 기강이 잡힌 부대가 다 그렇듯 명령에 충실했다.
거기에 대형 용병 길드에 비하면 비용도 더 저렴했다.
“도시 내 치안을 위해 호위는 당연한 거 아닌가? 이런 거 하나하나에 크로나를 요구하는 건 너무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진 않소?”
가끔.
이리 툴툴거리는 상단 책임자가 나오기도 하지만.
호위 병력을 한 번이라도 써 보면 그 말이 쏙 들어갔다.
보더 가드 상비군은 연에 2번씩 국지전을 벌이는 이들이다.
전장이 근접한 군사 도시의 부대다.
죽고 죽다 보면 당연히 어중이떠중이는 걸러지는 법이니, 상비군 소속 병사의 수준이 상향 평준화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용, 실력, 안전.
세 가지 연유로 다들 만족감이 높으니, 성공한 정책이라 하는 거고.
중대장이 의뢰를 수급한 것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굳이?’
다만, 다들 이런 생각을 하긴 했다.
이 정도면 중대장이 나설 일은 아니었으니까.
소대장들도 다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입이야 처신을 위해 다물었지만, 그들도 제 중대장의 실력이 어중간한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안다.
‘변방 수비대장이랑도 해볼 만하지 않으려나.’
변방 수비대장은 보더 가드 최강이다. 대대장은 지나가는 사람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중갑 중대장은 잡을 것 같고.’
요정 중대장은 이미 제 전투력을 전장에서 증명하기도 했으니.
“이 의뢰는 내가 하지.”
그런 요정 중대장이 의뢰서를 하나 가져간다고 한다.
상관이 나서서 한다고 하는데 뭐라고 하겠나.
알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지.
“왜 굳이 직접 나서십니까?”
4소대장이 물었으나.
“사고뭉치 분대장을 데려가지.”
저게 대답이었다.
의뢰 하나야, 이게 뭐 별일이겠나.
문제라면 데려가는 사람 때문이지.
주술파괴자, 상급 병사가 된 엔크리드다.
4소대장은 오롯이 눈치로 이 자리에 올랐다.
요정 중대장이 훌쩍 떠나자, 4소대장은 머리를 굴리며 과거를 더듬었다.
눈치의 기반은 정보다. 주변 상황 파악이 늦으면 진급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충실히 기억을 떠올렸다.
‘의무 막사 때도 보러 갔다고 하지 않았나?’
요정 중대장이 엔크리드를 보러 직접 갔었다.
그것도 부임하자마자.
의무 막사에도 굳이 보러 가고.
이후 엔크리드와 독대한 것도 몇 번 되고.
하물며, 다른 소대장과는 독대하는 상황도 거의 없는 판이었다.
대답이나 제대로 해 주면 다행이었다.
중대장은 엔크리드의 승급전에 끼어들기도 했다.
4소대장도 그 장면을 봤다.
‘변방 수비대원과 싸울 때였지.’
그때 4소대장의 눈에는 위험에 빠진 엔크리드를 위해 나서서 막은 것처럼 보였었다.
또한,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중대장은 사고뭉치 분대만 명령을 내려 밖으로 내보내기까지 했다.
그들은 눈을 다 치운 아침이 돼서야 돌아왔다.
‘온열 가죽까지 챙겨서.’
어디서 뭘 하고 왔을까.
기밀 작전이라고만 말했다. 중대장에게 직접 보고한 내용이라 자신도 몰랐다.
중대장과 둘이 개인 연무장에서 대련도 했다고 들었다.
왜 그랬을까.
의무 막사, 독대, 승급전, 눈 오는 날의 작전 명령과 대련에, 의뢰까지.
모든 정보가 하나가 되어 섞이며 머릿속에서 결론을 만들어 낸다.
4소대장의 자신의 추리에 소름이 돋았다. 물론 헛다리였고 오해였으며 멍청한 생각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제 추측에 짙은 확신의 향기를 맡았다.
고로 절로 드는 생각이다.
‘설마 둘이?’
소대장은 요정과 사고뭉치 분대장을 나란히 세워 봤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그림 같았다.
“에이, 아니겠지?”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확신이 들지만, 괜히 혼잣말을 던져 봤다.
“뭐가 말입니까?”
옆에 있던 부하가 묻는다. 무료한 위병 근무 중이었다.
4소대장은 조심스레 제 추측을 말해 봤다.
헛소리라고 했다면 거기서 끝날 일이었는데.
“……와, 씨.”
부하의 반응이 묘했다.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또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보더 가드가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소문은 금세 퍼졌다.
특히나 어떤 소문은 날개 달린 말보다 빠른 법이니.
부대 내에 하릴없는 이들, 특히 욕탕 관리와 식사를 준비하는 여인들은 이런 종류의 소문에 환장하는 편이었다.
그들을 통해 소문에 빛의 날개가 달렸고, 금세 부대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서 부대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 * *
“분대장! 곧 애 아빠가 된다면서요? 맞아요?”
사흘 만에 부대로 들어온 크라이스가 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엔크리드는 생각해 봤지만, 그가 알 수 있는 건 없다.
소문은 이미 퍼졌다.
크라이스의 말에 옆에서 렘이 배를 잡고 낄낄 웃었다.
어찌나 신나게 웃던지, 온열 가죽이 흐트러지며 맨발이 쏙 나왔다.
“키흐크흐, 맞지. 맞아. 애 아빠지. 왕눈아, 엄마 얘기도 들었냐?”
“그, 네, 무슨 소문이 이런가 싶어서. 난 혹시나 했죠. 애는 과장된 건 줄 알긴 했지만, 중대장은 언제 꼬드긴 겁니까? 역시 우리 분대장.”
크라이스가 엄지를 치켜세우자, 엔크리드는 그 엄지를 잡아서 다시 눌러 넣어 줬다.
“오해다.”
“오해?”
“누가 이상한 소문을 냈어.”
4소대장이 냈지만, 엔크리드는 그 사실을 몰랐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정보를 다루는 데 이골이 난 크라이스도 몰랐다.
작정하고 파헤치면 소문의 근원지를 알아내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그럴 일은 아니지 않나.
목숨이 위협받는 것도 아니고.
“흠, 나쁘지 않지요. 반려로 두고 검술 선생으로 삼으면.”
라그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 새끼는 머리통에 뭐가 든 걸까.
가끔 보면 렘보다 더한 게 들어 있는 것 같다.
혼인을 검술 향상의 기회로 도모하라는 건가?
“후으, 끼이이이.”
옆에서 쉬지 않고 웃어 젖힌 렘은 이제 마수의 울음과 비슷한 소리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너무 마음 주지 마십시오. 나중에 차이면 고생하니까.”
한쪽에서 제 옷을 접던 작센이다.
‘내가 차이는 게 기정사실인 거냐?’
전제가 심하게 잘못되지 않았나?
“형제님, 축복을.”
다들 알면서 건네는 장난질이었다.
다들 엔크리드의 일과를 알지 않나.
누군가와 정을 통하고 뭔가를 하기에는 빡빡한 일과의 연속이었다.
“말을 말자.”
쓸데없는 소문일 뿐이었다. 그리 생각하고 에스터에게 손을 뻗는데.
하악!
오늘따라 에스터는 자신의 손길을 거부했다.
“나 크라이스 아닌데.”
억울한 엔크리드가 말했으나, 에스터는 매섭게 흘겨보곤 온열 가죽 위에 길게 누울 뿐이었다.
온종일 품에 파묻혀 있더니, 갑자기 저러는 이유는 뭘까?
“질투하나 본데. 다독여 주쇼, 좀.”
옆에서 렘이 한마디 하더니, 또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어 댔다.
렘은 역시나 미친 새끼였다.
“하아, 덕분에 즐거웠수, 그래서 언제 출발하는 거요?”
“어딜?”
“호위 임무, 한 명만 데려가야 한다면서.”
“그런데?”
“당연히 나랑 가야지.”
가죽을 펄럭이고 반쯤 몸을 일으키며 하는 말이다.
그러며 당당히 엄지로 자신을 가리킨다.
일어난 렘의 어깨 위에서 펄럭하고 온열 가죽이 한번 넓게 펴지더니 툭 하고 렘의 어깨에 걸쳐지며 망토처럼 늘어졌다.
“놀렸다고 이러는 거요? 냉정하게 생각합시다. 분대장, 저기 얼음장 같은 작센 새끼? 호위 대상이 신소리 한 번만 해도 난리가 날 거요. 음흉한 들고양이가 호위 대상을 할퀴는 걸 보고 싶은 거요?”
그게 네 입에서 나올 말이냐.
엔크리드는 황당했으나, 표정은 그대로였다.
어디 마음껏 말해 보라는 태도다.
“게으름뱅이야, 관심도 없을 것이고.”
라그나는 본래 의뢰 따위 잘 나서지 않는다. 마지못해 나서는 일이 아니라면 그렇다.
“그렇다고 왕눈이를 데려가실 거요? 호위할 대상을 늘리실 것도 아니고.”
이건 맞다.
크라이스는 애초에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덩어리는 그래, 뭐, 쓸 만하다 칩시다. 그런데 기도한다고 호위 대상 옆에서 중얼대면? 종일 그러면? 호위 대상이 그걸 썩 반기진 않을 것 같은데?”
덩어리는 아우딘을 말하는 거였다. 렘 자식, 서부 개척민 출신의 이민족 주제에 말재간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매끄럽다.
남은 선택지가 렘뿐이라고 그리 들리게 하는 말솜씨다.
다만.
‘네가 제일 문제지.’
상관 폭행은 왜 했는가.
제 성질 때문이다.
호위 대상을 두들겨 패서라도 지켜야 한다면, 그래, 렘도 괜찮다.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들겨 팰 수 없다면?
호위 대상의 성격이 조금이라도 지랄맞다면?
호위 대상과 렘을 붙여 놓을 순 없는 거다.
만 하루, 아니 반나절도 되지 않아 파국이 예상된다.
의뢰를 맡아서 공을 세우는 게 아니라 위약금이나 잔뜩 물 생각이 아니라면, 렘은 기피 대상 일 순위란 얘기다.
“넌 안 돼. 절대.”
숨을 고를 필요도 없기에,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
“……와, 나 지금 상처 받았수. 특히 절대라고 할 때. 이거 어쩔 거요? 다 큰 성인 남자의 가슴에 이런 상처를 남기고?”
“그래도 안 돼.”
“나 삐뚤어질 거요.”
무시했다. 머리통 안에 자갈이 꼈는지, 렘은 본래 이상한 소리를 잘 지껄이니.
부대 내를 둘러봤다.
“그렇게 부탁한다면야.”
슬쩍 눈이 마주친 라그나가 말했다. 웃기고 있다. 저걸 데려가면 호위가 아니라 퍼질러 자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아침잠 많은 저 자식 깨우느라 고달프기도 할 것이고.
‘어딜 혼자 보낼 수도 없지.’
길을 잃을 테니까.
라그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길치다.
남은 선택지는 둘, 아우딘과 작센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기에 내가 말했다.
“그래, 너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