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75화 (75/170)

75. 마성의 분대장

여관 홀 벽 곳곳에 붙어 있는 촛대엔 불꽃이 반만 붙어 있었다.

손님도 없겠다. 촛값이라도 아껴 볼 심산일까.

덕분에 생긴 짙은 음영으로 엔크리드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새벽 내내, 감각의 칼날을 연습하던 중이었다.

조용한 실내, 밖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의 소리, 호위 대상이 술잔을 기울이는 소리.

집중력과 동시에 감각의 날을 세워 듣는다.

기척을 읽고 주변에 있는 사람 숫자를 센다. 저 멀리서 우는 밤새 소리를 듣고 거리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그러며 엔크리드는 자신이 인지하는 범위를 되새겼다.

‘다섯 발짝 안쪽이라면.’

기척까지도 읽을 수 있다. 옷깃 스치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며 드는 생각이다.

‘오롯이 듣는 거로만 그런 게 가능한가?’

습격 직전, 요정 중대장과 작센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둘은 이미 기습을 예측했다.

그건 어떻게 했을까?

오롯이 귀에 의지해서는 아닐 것이다. 나중에 작센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울 수 있는 거라면 배우고 싶었다.

‘이번에는 벽이 아니었어.’

이제 어지간한 수준에서는 오늘을 반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일부러 죽으면서 오늘에 갇히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여전했다.

‘내일을 위해.’

항상 앞만 보고 달렸다.

그게 그를 오늘에 갇히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부스스, 타다다닥.

벽난로 안에 넣어 둔 장작이 부러지며 불똥이 튀었다.

전투의 복기 외에도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엔크리드는 자리에 앉은 채 턱을 괴고서 자신이 죽인 사람을 떠올렸다.

‘조국의 영광이라.’

아즈펜의 첩자 부대인 걸까.

그만한 인원을 움직인 놈은 무슨 생각을 일을 벌인 걸까.

보더 가드 내에서 이만한 사고를 치고 어쩌려는 걸까.

다시금 습격이 있을까?

두 개 분대의 병력을 뚫고? 암살자라도 보낼 것인가?

그리 생각하다 보니, 도망간 놈을 잡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 타이밍에 레오나가 내려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근무 중이라 교대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레오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이전 밤의 흔적이 남은 바닥이다. 그녀는 무던하여지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더 신경이 쓰일 텐데.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게 오히려 더 편할 것이다. 엔크리드는 경험으로 그걸 알았다.

“보더 가드에 온 건 처음입니까?”

“네? 네.”

근데 왕눈이가 이 여자 성격이 유별나다고 하지 않았던가.

강단은 있어 보이지만, 아직은 렘과 같은 미친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렘이랑 비교해선 안 되지.’

그건 예의가 아니다.

“펜-하닐 강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고 하죠. 그중 강의 물로 만든 검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음유시인의 이야기는 언제나 심장을 자극했다. 엔크리드는 그런 얘기 몇 개를 외워 뒀다.

이야깃거리로 쓰기도 좋을뿐더러, 근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도 좋았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하는 얘기는 근무 중에 떠드는 잡담 같은 거였다.

다만,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꽤 신선한 얘기일 것이다.

“들려주세요.”

레오나가 흥미가 생겼는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답잖은 얘기인데도, 레오나는 눈을 빛내며 들었다.

중간중간 미소와 함께 호응도 했다.

“그래서 한때 강물로 검을 만드는 유행이 돌았지만, 이야기처럼 강에 사는 정령을 불러일으키는 검이 만들어지진 않았습니다.”

“말을 잘하시네요.”

“그런 편이죠.”

렘이 인정하는바, 말로 상대를 도발하는 재주는 제 분대장을 이길 수 없다고 했고.

여기서 분대장이 자신임에야.

고개를 끄덕이는데, 대뜸 레오나가 말했다.

“저랑 같이 가실래요?”

고개를 갸웃한 엔크리드가 되물었다.

“네? 어딜?”

상대는 아직 호위 대상이다. 보더 가드 내에서 일어난 습격으로 두 개 분대 병력이 여관을 통제한 상태라 안에 아무도 없긴 해도.

아직 엔크리드의 임무가, 그녀가 요청한 의뢰가 끝난 건 아니다.

이틀이 남았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따라가는 게 당연한데.

“이후 보더 가드를 떠날 때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하는 거예요.”

대뜸 하는 말인데, 준비된 말 같다. 사람을 여럿 부려 본 이들에게서 보이는 특유의 뉘앙스가 담겼다.

조용히 앉아, 붉은 입술을 열어.

“오세요.”

자신이 제안한 자리가 더 좋으리라 확신하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레오나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로크프리드 상단이 어떤 곳인가.

렝가디스 상단이나 다른 대형 상단보다는 조금 처져도 지역 일대에 영향력이 있는 상단이었다.

이들 상단은 펜-하닐 최북단에 있는 ‘황야의 양치기’ 무리와 준비만 할 수 있다면 용도 잡을 수 있다는 사냥꾼 집단인 ‘검은 가죽 길드’, 깊은 산속에서 자연을 벗 삼고 사는 빙하수호단체인 ‘글레이셔 레인져’와도 거래를 텄다.

그들의 핵심 거래 상대가 위 셋인 셈이다.

거기에 펜-하닐 대륙 곳곳을 유랑한 선대의 경험이 녹아든 지도도 있다.

로크프리드 상로도란 물건이다.

상행을 기록한 지도인데.

각 상단의 특산물을 정리하고 가장 빠른 길을 정리해 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누군가 그걸 훔쳐서 팔아먹으면 죽을 때까지 먹고 살 걱정은 없을 만큼의 보물.

로크프리드가 이런 상단이었다. 누구나 욕심을 낼 만했다.

특히나 선대의 핏줄을 이었다면 자신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이 어제의 과감한 습격을 만들었으리라.

‘여기에서 먼저 칼을 뽑다니.’

그래서 화가 난다. 그 과감함이 왜 하필 지금인지.

자신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선대의 유언을 지키려고 이리 노력하는데.

어째서 상대는 그걸 모두 무시하는지.

그래, 선대의 유언만 아니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겠지만.

그 선대의 유언이 무엇이었나.

“죽고 죽이기 전에 합의부터 시도해 주렴. 그렇게 해 주겠니? 레오나.”

선대, 자신을 딸처럼 키워 준 사람이다.

하지만 쉬이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상단도, 혈연도.’

둘 다 포기할 수 없기에 하는 유언이다. 레오나는 선대의 마음을 이해했다.

로크프리드 상단을 키우기 위해서 레오나를 키웠으나.

제 핏줄을 타고난 놈을 마냥 내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였다.

나우릴리아의 보더 가드, 칼 없이 말을 나눌 최후의 보루로 삼은 곳이다.

선대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끝났을 후계 경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의 암습이다. 하물며 보더 가드에서 칼을 뽑아?

‘머저리.’

잡다한 생각의 끝이었다.

위기에 빠진 순간 자신을 구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처음 눈에 띈 건 호수를 닮은 눈이었다. 그 푸른 눈.

마력이 깃든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매력적인 눈이었다.

흑발과 푸른 눈에 단련된 몸.

거기에 얼굴까지 잘생겼다.

관심이 생길 법도 했다.

‘정말 괜찮은 외모야.’

거기에 실력도 뛰어났다. 단숨에 방으로 뛰어 들어와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이라니.

무얼 바라지 않는 성품은 또 어떤가.

구한 뒤, 일이라는 한마디에 레오나는 심장이 뛰었다. 그때부터였다.

탐이 났다. 데려가고 싶었다.

“지금보다 나은 위치, 나은 대우를 약속드리죠.”

엔크리드는 고민할 게 없었다.

상단의 호위라고 해 보지 않았을까.

만약 자신의 목적이 오롯이 크로나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앞으로 커나갈 상단의 검으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거다.

하지만 꿈이 있고 나아갈 길을 봤으며, 더디다고 해도 현재 그 길을 걷는 중이기에.

한눈을 팔 틈은 없었다.

“괜찮습니다.”

두 손을 허벅지에 올려 두고 허리를 바로 세운 자세다.

곧은 자세에서 나온 확실한 답변.

거절할 때는 확실하게 하는 게 좋다. 엔크리드는 경험으로 그걸 알았다.

레오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싫다는 사람 붙잡는 건 추합니다.”

언제 내려왔는지, 뒤쪽에서 작센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렇군, 추한 거군.”

요정 중대장의 한마디도 들렸다.

“그런가요.”

레오나는 버럭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도 신경질을 내지도 않았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뿐.

“지금 자리에 만족하시는군요.”

그건 아니지만.

여기에 있어야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보이긴 하니까.

“에효, 장사가.”

어느새 나온 여관 주인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새벽의 푸른빛이 서서히 여명의 노란빛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아침이었다.

“손해는 상단에서 메워 드릴 겁니다.”

레오나가 다시금 말했다. 애초에 확답을 듣고자 꺼낸 말처럼 보였다.

“아이고, 그래 주시면.”

여관 주인이 손을 싹싹 비비며 말한다. 레오나는 그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죠. 정오쯤에 손님이 올 테니, 준비해 주시고요.”

“네.”

앉은 채로 명령을 전하는 게 익숙해 보였다.

곧 위에서 유모가 내려왔고.

레오나는 쉬겠다 말하며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작센이 다가와서 말했다.

“도시 내에도 예쁜 여자 많으니, 굳이 상단의 후계자를 건드리진 마십시오.”

안 건드렸다. 거절했지.

엔크리드도 여자가 꼬인 경험이 많다. 얼굴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하물며 단련된 몸은 여러모로 매력을 발산하기 좋은 도구고.

“엔크리드 상급병.”

중대장이다. 다가오지도 않고 제자리에서 평소와 똑같은 자세, 똑같은 말투로 그녀가 부른 뒤 물었다.

“여성 편력이 있는 편인가?”

“……아니요.”

“지나가는 여자 모두에게 추파를 던지는 편인가?”

“아닙니다.”

“그런가?”

“네.”

분명 농담일 것이다. 농담이 맞는데.

표정은 더없이 진지하고 눈빛은 더없이 담담했다. 그래서 대하기 어려웠다.

‘이제 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군.”

중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나 돌릴 요량으로 밖으로 나가니.

2중대 3소대 소속 분대원 중 하나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지나가는 여자마다 전부 꼬시고 다니면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이것도 아는 척이라면 아는 척이겠지.

“누가?”

“중대장에 이어서 로크프리드의 아가씨까지. 크으, 마성의 분대장이네, 마성의 분대장.”

감탄사를 보내는 건 소대장이다. 이쪽도 안면이 있긴 했다.

이런저런 임무로 여기저기 임시로 불려 나간 적이 많으니.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구나.”

“아니랍니다.”

“아니라고 하십니다.”

병사 몇이 그 말을 받았다. 복명복창이다.

갑자기 파견 나와 도시 내 여관을 둘러싸고 있으려니 할 일이 없나 보다.

지루할 법도 했다.

이후 따로 습격도 없었으니까. 그럴 낌새도 없었고.

그래, 심심한 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날 놀리며 시간을 보내는 게 반갑진 않은데.’

소문은 언제나 무서운 법이라.

역시나, 얼마 안 돼서 또다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여관에 찾아온 크라이스가 이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

“아니, 분대장 하루 만에 상단주와 잤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한 겁니까? 나도 쉽지 않은데, 로크프리드 아가씨는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데요. 성격도 까칠하고.”

“안 까칠해.”

“에이, 아닌데.”

“왔으면 일이나 하나 해라.”

“네?”

엔크리드는 크라이스에게 시답잖은 말 대신 일을 줬다.

오해를 푸는 건 신경도 안 썼다. 얘도 알고 놀리는 거니까.

“습격한 놈 중에 도망간 놈이 있다. 찾아봐.”

도망간 놈, 엔크리드는 그놈의 행적이 궁금했다.

아즈펜의 첩자로 자신의 칼에 죽은 사람은 조국의 영광을 부르짖고 죽었는데.

정작 이 일을 작당 모의한 놈이 살아남으면 재미가 없지 않나.

‘제가 한 일의 대가는 치러야겠지.’

그게 순리고 옳은 일이다.

정의는 살아 있다고 말해도 좋은 일이고.

그리고 부대에서도 곧 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이다. 그냥 놔두고 싶지도 않았다.

일을 벌였다면 책임을 져야지, 부하를 전부 놓고 도망가다니.

아즈펜의 첩자라고 자신을 밝힌 이상, 살려서 내보낼 순 없는 노릇이다.

“네.”

밤의 길드가 있으니, 도시 내에 있는 일은 대부분 알 수 있다. 장점이었다. 그러니 사람 하나 찾는 게 어려운 일이 되진 않겠지.

‘때마다 크로나도 들어오고.’

이번에 돈을 모으면 부무장으로 괜찮은 숏소드나 가드 소드를 구해 볼까 했다.

가드 소드는 일전에 써 보니 퍽 마음에 들었다.

라그나는 방패를 드는 것도 권했지만, 방패는 쉬이 손에 익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배우겠지만, 가진 바 능력 중 근력을 쓰는 게 특기라면.

“애초에 검을 양손으로 잡고 휘두르는 게 낫겠군요. 그래도 전장에서는 방패가 있는 게 좋습니다.”

라고 말한 것도 라그나다.

경장 보병으로서 어느 정도 수준으로 방패를 다룰 줄 알긴 했다.

군대의 목적이 무엇인가.

특출난 하나보다 평준화된 다수의 힘을 우위로 보는 곳이다.

뛰어난 검사 둘이 섞인 십인대보다, 똑같이 훈련받아 규격화된 십인대가 더 강하다는 건 상식이었다.

규격화된 훈련에 속한 방편으로 방패를 다루는 집단 대형 훈련도 있었다.

휘하 분대원은 대충하고 넘어갔지만, 엔크리드는 그것도 부지런히 배워 뒀다.

쉽게 안 늘어서 그렇지.

‘손에 안 익긴 해.’

방패를 들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라그나 말대로 양손으로 검을 잡고 휘두르는 게 훨씬 잘 맞는 옷처럼 느껴졌다.

방패를 쓰거나 쓰지 않는 것.

규격화된 다수의 법칙을 깨는 존재가 된다면 크게 신경 쓸 부분이 아닐 것이다.

크라이스가 가고 얼마 안 있어 볼살에 심술이 가득한 남자와 십여 명의 병력이 찾아왔다.

호위라고 온 놈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눈매가 쭉 찢어졌고 팔이 밑으로 축 늘어진 사내였다.

허리춤에 가늘고 긴 칼날의 세검, 레이피어를 찼다.

‘빠를 것 같은데.’

보자마자 드는 느낌이다. 상대는 굳이 자신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감의 발로로 보였다.

‘난 빠른 검을 쓴다. 하지만 안다고 막을 순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자세와 태도였다.

심술보로 양 볼을 채운 남자의 이름은 폴리드.

레오나와 후계 경쟁을 한 상대였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을 하나 차지해 앉더니, 말했다.

“야, 레오나 불러와.”

‘야’라고 불린 상대는 작센이었고.

작센은 당연하게도 그 말을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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