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78화 (78/170)

78. 열정으로 물들이는

토레스는 여전히 실력이 출중했다.

엔크리드는 그와 대련하면 열 번에 일곱 번은 졌다.

“실력이 늘었네.”

토레스가 숨을 고르며 우두커니 선 채로 말했다.

새삼 드는 의문이다.

진검을 들고 제대로 붙으면 어떻게 될까.

모르겠다. 엔크리드는 싸움에 확신을 가지는 부류가 아니었다.

아무리 검을 잘 다뤄도 일곱 살 아이가 쥔 단검에 심장이 찔리면 죽는 게 사람이다.

실력을 떠나 목숨을 건 싸움의 승패는 어찌 되는지 알 수 없단 거다.

“그렇습니까?”

엔크리드는 드러누운 채로 답하고 벌떡 일어났다.

“다음은 나.”

“들어와.”

입김이 나오는 계절임에도 여관 뒤 공터에는 땀이 튀고 열기가 피어올랐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전부 엔크리드와만 싸웠다.

대련의 연속이다.

엔크리드에게는 값진 시간이었다.

토레스를 비롯한 변방 수비대는 변칙 공격에 능했다.

그렇다고 기본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뚝 하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양손에 쥔 수비대원이 말했다.

“난 단검이 특기라.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

팔뚝 반만 한 길이의 나뭇가지 두 개다.

“서로 조심해야겠지.”

“그러니까 같이 조심하자고.”

수비대원이 실실 웃었다. 웃음 안에 열기가 보였다. 적의 따윈 없는 순수한 호승심.

딱!

나뭇가지가 만나 부딪히며 엔크리드는 또 싸웠다.

몇 번의 수를 교환한 뒤다. 당연히 상대가 거리를 좁히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단검 대신 든 짧은 나뭇가지 두 자루를 교차해 엔크리드의 검을 잡아서 옆으로 꺾어 내쳤다.

그거로 균형을 무너뜨린 뒤, 손에 든 나뭇가지를 던져 엔크리드의 몸통 어림을 맞췄다.

“실전이었으면 눈알이었다.”

그러곤 말한다. 이 작자도 뛰어났다. 토레스에 버금갈 정도로.

변방 수비대가 왜 특별 취급을 받는지 알 수 있었다.

엔크리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번의 패배다.

잠깐 쉴 시간이었다.

자연히 전원 휴식이다.

공터와 여관을 잇는 문에 작센이 비스듬히 서 있었다. 엔크리드가 안으로 들어서자 작센이 입을 열었다.

“상대가 단검을 들었다고 거리를 좁히는 데만 정신이 팔리면 안 됩니다. 기본기가 잘 닦였다고 기본기로만 싸울 겁니까? 상대가 바닥을 기어서 다가오는데 굳이 검으로 등을 내리찍는 것만이 답입니까? 발로 걷어차는 건 왜 안 됩니까?”

지든 이기든 작센은 입을 열었다.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잔소리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엔크리드에게는 아니었기에.

그는 귀를 열고 들었다.

“단검으로 저런 수법을 쓸 줄은 몰랐는데.”

“본래 쓰는 무기는 소드 브레이커 종류일 겁니다.”

소드 브레이커, 칼날 뒤쪽을 톱날처럼 만든 검을 말한다. 즉, 저 작자는 상대의 무기를 부수는 게 특기 중 하나인 거다.

“거리를 내주진 않은 건 잘했지만, 그다음도 염두에 뒀어야 합니다.”

작센은 대련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곱씹어 줬다.

엔크리드는 매번 최선을 다했다.

거리를 내줬으면 그냥 당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거리를 내주지 않은 거다.

덕분에 소드 브레이커를 쓰는 수법을 본 거고.

잘한 건 잘한 거다. 작센도 그걸 집어 말했다.

“상대하는 법을 궁리해 보십시오.”

검술의 기본기와 몸을 단련하는 것. 기술을 배우는 것. 그걸 몸에 새기는 단련법까지.

전부 좋다.

하지만 대련 중에 생긴 일에 관한 대처는 스스로 고민해야 했다.

작센의 말이었다.

엔크리드도 동의하는 바다.

같은 동작을 수백 번 해야 그나마 몸에 익곤 했다.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궁리해야 했다.

복기와 궁리.

그게 엔크리드가 가진 무기였으니.

그는 그렇게 했다.

“쉬고 나면 내 차례다.”

다른 수비대원이다. 검과 발을 잘 쓰는 대원이었다. 단순히 스텝을 밟는 게 아니라 번번이 발차기를 섞어 썼다.

상대하기 까다롭지만, 또 그만큼 배우는 게 있다.

토레스를 포함한 변방 수비대원 여섯이 전부 돌아가며 대련했는데.

여섯 명 다 비슷한 기술을 쓰긴 했으나, 독특한 기술도 보여 주곤 했다.

개성도 있으나, 기본기가 출중하다. 배울 게 많았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대련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산을 오르지 않은 사람은 정상의 풍경을 체감할 수 없으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 점의 집중에 더.’

라그나에게서 배운 기술이 빛을 본다. 야수의 심장이 주는 대담함이 기초가 되는 건 당연했다.

“어떤 순간에도 감각의 날을 세우십시오.”

작센이 말한다. 날카로운 감각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땀을 흘리는 그의 곁으로 레오나가 다가왔다.

“정말 좋아하나 봐요.”

“뭐가 말입니까?”

“검 쓰는 거요.”

“그렇게 보입니까?”

“네.”

레오나는 종종 말을 걸었다. 시답잖은 얘기였으나.

엔크리드가 보기에는 먹이를 눈앞에 둔 거미가 상대를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절대로 먹이를 그냥 두고 볼 일 없는 욕심 많은 거미.

‘저 외모에 거미는 좀 무리이긴 하지만.’

누가 봐도 돌아볼 만한 미녀 아닌가.

“요정 중대장님 때문인가요? 여자의 외모에 둔감한 편 같으신데.”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제가 그쪽 타입이 아니라는 거?”

이건 어떤 의미의 질문일까, 얼굴에 장난기가 엿보였다.

“레이디 레오나 수준의 외모를 외면할 수 있는 남자는 흔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돌려 말하지만, 엔크리드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시답잖은 대화 후 레오나는 수수하게 웃으며 중대장 곁에 앉곤 했다.

“조심해라. 여성 편력이 있다.”

그럼, 중대장이 헛소리를 뱉고.

그 말에 레오나가 웃었다.

요정의 농담을 이해하는 건가.

엔크리드를 곤란하게 하는 농담이 레오나를 연신 웃게 했다.

“제가 본 요정 중에 가장 재치 있는 분이군요.”

“그런 소리 많이 듣지.”

대체 어디서?

대련을 준비하는 중에 발목을 삐끗할 뻔했다. 감각의 날을 세우고 있으니, 절로 둘의 대화가 들렸다. 유심히 듣지 않아도 들릴 크기의 목소리다.

“나와는 아이도 있지.”

“네?”

“부대 내에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저렇게 말하면 오해가 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레오나는 웃으며 넘어갔다. 믿는 건지, 마는 건지.

“안 할 거야? 이제 지쳤나?”

엔크리드는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을 보며 걱정을 버렸다. 소문이야 어차피 지독하게 날 것이다.

일전, 레오나의 기습 고백 때문에 아마 더 지독한 소문이 퍼질 거고.

“마성의 분대장.”

밖을 지키는 이들이 툭하면 자신을 그리 부르고 있으니.

“주술을 파괴한 마성의 분대장.”

“여자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마성의 분대장.”

이제 슬슬 그만 듣고 싶어질 정도다.

“마성의 분대장입니까?”

하물며 작센도 그 단어를 입에 꺼냈다.

“응?”

“수비대원 전부가 다 분대장만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만 하루를 미친 듯이 대련만 했다.

처음, 주변에 내려앉았던 어색한 공기 따윈 이제 없었다. 그들 전부는 검과 땀으로 어울렸다.

그 대가로 엔크리드는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기도 했고.

“아픈가?”

때린 쪽이 물으면 엔크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 전 일격은 기가 막혔다. 몇 번이고 되새기는 중이었다.

상단 내려치기에 맞서, 밑에서 위로 막는 척하며 팔뚝을 벤다.

순간적인 판단, 타이밍을 재는 눈, 과감함까지.

필요한 것들이 절로 떠올랐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경험의 체화다.

‘아.’

엔크리드는 다시금 희열에 휩싸였다.

그는 현재 일어나는 일에 취했다.

가끔 중대장이 나서서 레슬링 비슷한 걸 할 때도 있었고.

중간중간 레오나가 말을 걸기도 했다.

“부럽네요. 저도 배워 둘 걸 그랬나 봐요.”

중대장이 자기 팔을 공중에서 잡아채 매달리며 팔 관절에 부하를 주는 걸 보고 하는 말이다.

정작 엔크리드는 넘어져 버티느라 바빴던 기술이다.

“레슬링을 활용해라. 병사.”

중대장도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작센의 말을 듣는 걸 봐서 그랬는지, 아니면 순수한 호의인지.

지금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걸 따질 필요는 없기에 엔크리드는 경청의 자세를 고수했다.

“좌우 균형이 많이 무너졌네. 몸 단련하는 걸 누가 봐주긴 해?”

중대장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건 변방 수비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우딘도 했던 말을 변방 수비대원의 입에서도 들었다.

좌우 균형의 차이.

오른손잡이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는 법 첫 번째가 전신 근육을 단련하는 거다. 힘은 쓸 만하네.”

토레스도 조언을 건네고.

“단검이라고 해서 거리감을 죽일 생각만 했지? 차라리 더 근접전으로 끌어들일 것처럼 해 봐. 그럼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 상대의 머리통에 악령을 심어 주라고.”

상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법.

“안 좋은 버릇이 있군, 상대를 속이려는 수법도 좋지만, 기본을 잃으면 안 되지. 중심축은 어디에 둘 건가?”

대련하며 저지르는 실수를 지적해 주기도 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말 그대로 엔크리드는 푹 빠져서 모든 걸 새겨들었다. 경청의 자세로 듣고 또 듣는다.

분대원 사이에서 대련으로 보내는 것과는 또 달랐다.

이게 즐거워 보였을까?

“나랑도 하겠나?”

폴리드 쪽 검사가 나섰다. 레이피어를 검집째 풀며 옆으로 내려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기에.

“재밌는 친구군. 임무 중에 이런 대련이라니.”

“시간을 값지게 쓰는 편이라서.”

호위 임무 중, 대형 상단의 후계 문제로 피를 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엔크리드는 검을 잡고 휘둘렀다.

그래야 했다.

다른 이의 시간과 엔크리드의 시간은 다르니.

재능을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는 평등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족한 걸 메워야 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언제나 부족한 법이었다.

* * *

레이피어의 검사는 흥미가 돋았다.

‘실시간으로 실력이 늘진 않는데.’

주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병사다.

특히나 변방 수비대란 이들과 엔크리드란 남자와의 관계 변화가 흥미롭다.

처음 보는 사람 사이에 있던 경계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녹아든다. 그러면서 호감을 얻는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드문 인재야.’

다만 검술 쪽 재능은 아니다. 지금 실력이 한계다. 그게 레이피어의 주인인 검사의 눈에는 보였다.

엔크리드란 병사의 재능은 다른 곳에 있다.

많은 인재를 접하고 살아온 그였기에 떠올릴 생각이다.

만일 엔크리드의 꿈이 기사란 얘기를 듣는다면 곧바로 고개를 저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이 어쨌든 간에.

‘가르쳐 보고 싶긴 하다.’

끝없는 열정이다. 그 어떤 말도 허투루 흘리지 않는다.

재능은 형편없지만, 그것과는 다른 묵직한 열기를 가졌다.

열정만으로 주변을 감화시키는 재주다.

이제껏 엔크리드를 가르친 교관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다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결국 자신이 가진 걸 엔크리드에게 집어넣으려 했다.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포기 따윈 아예 없는 단어처럼 구는 열정과 패기다.

“나랑도 하겠나?”

그게 발을 떼게 하고, 입을 열게 했다.

“에?”

옆에 있던 함께 온 동료가 놀라 자신을 본다. 자신도 놀랄 판이다.

적이라면 적인데.

여기서 나서는 게 우스워 보일 것 같아서.

하물며 상대가 거절하면 꼴이 더 우스워지려나.

문제라면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 따윈 전혀 하지 않았다는 거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팔에는 멍이 들었고, 온몸은 땀으로 흥건하다. 공터에 부는 찬 바람을 날려 버릴 열기를 몸에서 풍긴다. 뜨거운 김이 어깨 위로 솟는다. 지치기도 했을 텐데.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닌 거다.

지금 저 작자는 순수하게 대련을 즐기고 있으니.

“좋군.”

검사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 * *

작센은 상대의 의도를 의심했고.

중대장은 흥미롭다는 고개를 끄덕였고.

변방 수비대원 전부는 수틀리면 베어 버릴 생각을 했다.

엔크리드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으니.

그리고 엔크리드는.

‘쾌검.’

상대의 검을 머릿속에 그리기 바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 게 승산이 높을까.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지 마쇼!”

렘은 승패를 머릿속에 넣고 싸우는 새끼 중 살아남은 새끼를 못 봤다고 했다.

승패를 의심하느니.

“확신을 가지는 거요. 그게 먼저요.”

확신이란 칼을 갈아라.

야수의 심장이 대담함을 품는다.

엔크리드는 나뭇가지 끝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양손으로 검 그립을 쥐듯 집중했다.

한순간, 주변이 변한다. 집중력이 타오르며 주변을 전장의 한복판으로 바꿨다.

상대의 몸에 두른 갑옷이 보이고.

그의 손에 들린 얇은 검이 보인다.

피하지 못하면 죽으리라.

문득 든 생각에 엔크리드는 푹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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