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머저리를 다루는 법
얇은 나뭇가지 하나와 사람 하나.
늘어뜨린 팔,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 나뭇가지.
그게 검처럼 보였다. 그 어떤 칼보다 날카롭고 뾰족한 검.
이후에는 생각하고 마시고 할 것도 없었다.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났고 순식간에 끝났다.
엔크리드는 전장의 환영을 봤고.
상대가 발을 움직였다 싶은 순간, 본능의 영역에서 검을 내리그었다.
훙.
엔크리드가 든 가지가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정확히 허공만 갈랐다.
그리고 상대의 나뭇가지 끝이 목에 닿았다.
툭.
‘어떻게?’
조금 전 자신이 본 장면을 되새긴다. 보이긴 했다. 그러니 보고도 당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다들 끝나고 한마디씩 하는 것 같으니, 나도 하지. 타이밍이었네.”
남자가 말했다.
상대는 쾌검을 썼다. 그리고 그걸 정검식의 교본처럼 활용했다.
먼저 움직인 게 아니라 엔크리드가 내리긋는 검격을 역이용했다.
‘받아치는 게 아니라.’
엔크리드의 눈이 상대의 발밑으로 향했다.
상대의 부츠를 따라 부드럽게 반원을 그린 흙바닥이 보였다.
‘몸을 틀어내 중심선을 숨기고.’
기본기다. 어찌 보면 단순한 기술이라 하겠다.
몸을 틀어 피하고 검을 찔러 끝냈다.
‘전장이었다면.’
첫 번째 찌르기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때와 자신은 완전히 다른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멀고 높다. 상대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절망과 좌절에 휩싸일 정도로.
그만한 차이를 보였다. 고작 작대기 한 번 내지르는 것으로.
“어린 축은 아닌 것 같은데.”
남자가 말을 흘렸다. 질문이 내포된 말이었기에 엔크리드는 답했다.
“서른. 한 번 더?”
“한 번 더 하자고?”
끄덕.
“허.”
엔크리드의 끄덕임에 남자는 허탈한 웃음을 토했다.
그가 보기에 이 작자는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차이를 보여 줬다.
열정에 물들어 나섰으나, 한계가 명확하니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마음을 꺾어 주고자 했다.
패배는 누구에게나 뼈아픈 법이니까.
그것도 압도적 차이의 상대를 마주할수록 더 아플 테고.
진다는 건 어떤 것인가.
패배를 마주한 자는 어찌 되는가.
좌절하고 절망하며 괴로워한다.
그중 인정하지 않고 발악하는 자가 있기도 하지만.
‘발악인가?’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검을 내리치는 타이밍을 뺏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건지.”
되레 자신에게 더 가르쳐 달라 묻고 있다.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처음 자신을 유혹했을 때처럼, 무엇이든 불사를 소리 없는 불꽃을 품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미친놈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음에도 남자는 다시금 자세를 취했다.
상대의 실력과 한계가 보임에도.
그래도 다시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또다시 대련, 당연하게도 엔크리드는 패했다.
그는 네 번을 더 패했다.
지치지도 않고 도전했고 폴리드 쪽 검사는 전부 받아 줬다.
“아직 상대할 수준이 아닙니다.”
작센은 조언 대신 위로를 건넸으나, 엔크리드에게 딱히 위로가 필요치는 않았다.
지는 것, 패배는 정말 수도 없이 겪었다.
자신보다 어린 재능에 꺾이고.
자신보다 늦게 검을 잡은 용병에게도 밀렸다.
마을에서 자경단 노릇을 하는 놈에게도 진 적이 있었다.
산적에게도 졌었다.
용병 생활을 할 때는 성격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한 개자식한테도 패했다.
마수나 마물에게 도망친 적도 수없이 많았다.
하피의 발톱이 동료의 심장을 후볐을 때도 도망가기 바빴다.
그때마다 고개를 떨궜으면 엔크리드는 지금 여기서 분대장 노릇을 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일로 상처를 받는 일 따윈 없었다.
다만.
“재밌었다.”
즐거울 따름이지. 엔크리드는 솔직했다.
“……가끔 보면 분대장은 너무 이상합니다.”
엔크리드는 정말 제 분대원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그나마 제일 멀쩡해서 데려온 작센이지만, 이쪽도 사실상 평범한 병사는 아니지 않나.
폴리드란 놈이 말할 때 완벽하게 무시한 것부터 정상이 아니다.
지금도 작센은 폴리드를 본체만체했다.
틈만 나면 폴리드가 슬그머니 다가와.
“너 병사 새끼, 얼굴 기억했다. 내가 바로 로크프리드의 차기 상단주다.”
라고 말해도 깨끗하게 무시했고.
“야, 야, 너 대답 안 해? 왜, 오금이 저려서 말이 안 나오냐?”
그래도 무시했으며.
“이 새끼가, 나중에 눈물 줄줄 흘리며 후회하게 해 주마.”
저래도 무시했다.
한결같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는 결국 폴리드란 놈이 엔크리드에게 하소연했을 정도니.
“야, 저 새끼 왜 자꾸 나 무시하는 거냐?”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하니 환장하겠는지, 엔크리드가 보기에 폴리드란 놈은 툭 치면 울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상대가 가여워 조언했다.
“말을 거니까.”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이었다.
말을 거니까 무시하는 것 아닌가.
애초에 말을 걸지 말았어야지.
엔크리드는 자신의 아량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친절한 조언이었다.
정작 그 말을 들은 폴리드가 부들부들 떨었다.
“너, 너, 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고 엔크리드는 상큼하게 그를 지나쳤다.
“병사, 지독하군.”
중대장이 옆에서 그리 말했지만.
이보다 친절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레오나가 그걸 듣고 있다가 마시던 차를 뿜는 일도 있긴 했지만.
“음, 새삼 정말 마음에 든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하고 싶네요.”
그러곤 저런 말을 남겼다.
아니, 왜 친절함을 보였는데 이러는 건지.
* * *
거듭된 대련은 만 하루가 지난 뒤 끝났다.
이제는 일을 마무리할 시간이었으니.
변방 수비대원, 중대장, 이름 모를 검사까지.
엔크리드는 얻은 게 많았다.
정작 작센을 포함한 모두는 그저 그의 열정에 감탄했을 뿐이지만.
엔크리드에게는 더없이 값진 시간이었다.
‘특히나.’
상대 검사는 쾌검이 무엇인지, 대처하는 방식은 어떤 건지, 상대가 빠름을 이용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 줬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번개가 치듯 새겨진 건 없지만.
‘괜찮아.’
벽을 만났을 때, 더없이 유용할 테니.
땀을 씻고 벽난로에 몸을 덥히고 무장까지 점검한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분대장.”
크라이스가 여관 문을 열었다.
그의 뒤로 대머리 길핀이 보였고, 길핀의 손에 얼굴이 반쯤 박살 난 친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저렇게 두들겨 패 놓으니 얼굴을 알아보긴 글렀다 싶은데.
“그놈이군.”
중대장은 한눈에 알아봤다. 요정의 감각은 뭐가 달라도 다른 듯했다.
“히끅.”
멍청한 폴리드가 딸꾹질했다.
엔크리드는 어떻게 저런 놈을 상단의 머리로 삼을 생각을 했는지, 그 휘하에 있는 이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꼭두각시로 세울 셈인 건가?’
그렇다면 뭐.
그게 아니라면 저만한 검사가 왜 저기에 있겠나.
딱히 약점을 잡힌 것도 아닌 듯한데.
“그으으으, 사, 살려 주십시오.”
잡혀 온 놈이 피가 섞인 침을 흘렸다. 뚝 떨어진 피와 침이 바닥에 고였다.
어지간히도 두들겨 맞았나 본데.
“이 친구가 처음에는 거칠었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성격이 좀 부드러워졌습니다.”
크라이스가 말했다.
당연하게도 크라이스가 말한 대화가 혀를 쓰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주먹 또는 발.
거기에 칼도 섞인 듯했다.
팔뚝 어림을 보니 베인 상처도 있다.
낡은 리넨 붕대로 대충 감아 두긴 했지만, 흔적은 여실했다.
“내가 리더입니다. 맞습니다. 제가 크로나에 눈이 멀어서 일을 벌였습니다.”
남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뱉었다.
“잠시만.”
다들 얻어터진 남자의 입을 주목하는데, 레오나의 목소리가 주변을 환기했다.
“사람을 좀 물렸으면 하는데요? 책임자가 특등 병사 소대장 토레스 맞죠?”
“……그러지.”
보는 눈이 많긴 했다. 토레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변방 수비대원 둘이 남자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그대로 위층으로 향했고.
곧 레오나와 폴리드, 토레스와 말 잘하는 갈색 머리 남자, 엔크리드와 대련한 검사까지 위로 향했다.
그 일행에 엔크리드와 중대장도 합류해 같이 올라가기로 했고.
“두 분은 제 호위를 마저 해 주시길 부탁드리고요.”
그 말에 작센이 밑에 남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앞에 놓인 카르멘 컬렉션의 스틸레토가 있는 자리에서 멀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들 움직이는 가운데, 크라이스가 막 올라가려는 엔크리드에게 다가와 슬그머니 물었다.
“뭔데요?”
“몰라서 묻는 거냐, 확인차 묻는 거냐?”
“받을 걸 받고 싶어서 묻는 거로 해 두죠.”
이 크로나에 미친 왕눈이.
일했으니 대가를 지급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스틸레토를 줄 순 없고.
“이번 달 경비는 너 다 가져라.”
크라이스는 남자를 잡아 온 순간, 작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다가 멈춘 걸 봤다.
지금 작센의 손에서 카르멘 컬렉션을 뺏는 건 어지간한 재주로는 어림도 없을 터였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일을 시키고 입을 닦을 생각도 없었다. 엔크리드는 길드, 그러니까 크라이스에게 받을 주머니를 양보했다.
“약속한 겁니다.”
만약 대가가 카르멘 컬렉션인 걸 알면 크라이스는 어떻게 할까.
그래도 그냥 넘어가려나?
사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럴 것이다. 그냥 넘어갈 것이다.
그건 작센이 탐낸 물건이니까.
크라이스는 분대 내에서 제 위치를 잘 알았다.
분대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힌 건 엔크리드만이 아니었으니까.
작센이든, 렘이든, 라그나든, 아우딘이든.
그들이 바라는 거라면 크라이스는 깨끗하게 뒤로 물러났다.
목줄에 묶인 사냥개를 보고 무는지 안 무는지 확인한다고 제 손을 개의 주둥이에 넣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자.”
크라이스의 이마를 툭 밀어낸 엔크리드가 위층으로 향했다.
방 하나를 차지한 이들이다.
가운데 무릎 꿇은 첩자 부대의 리더가 있고.
토레스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남자 옆에 서 있었다.
폴리드 쪽에서 셋, 레오나는 혼자였다.
엔크리드가 중대장과 레오나 곁에 서자, 그제야 구도가 잡혔다. 엔크리드까지 오자, 레오나가 입을 열었다.
“따로 심문해야 하는 걸 알지만, 제가 먼저 몇 가지 물어도 될까요?”
토레스를 향한 물음이었다.
“그러시오.”
토레스의 태도는 첫날부터 지금까지 똑같았다.
보더 가드 외부 인사를 향해서는 언제나 딱딱했다. 레오나는 거기에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암살 대상이었던 레오나다. 심문까지는 아니어도 몇 마디 먼저 물을 자격은 충분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기도 했고.
상단 승계 문제가 모든 일의 시작점이니까.
얻어터져서 푸딩이 된 남자다.
레오나는 무릎을 구부려 바닥에 꿇어앉은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누가 시킨 거죠?”
“모,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가용 자원을 이용해 여관에 있는 레이디를 노리라는 것밖에는…….”
남자는 떨면서도 똑바로 말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끝장나리라는 걸 예감한 듯 보였다.
“이 방 안에 혹시 아는 얼굴이 있나요?”
남자는 주변을 둘러봤다. 엔크리드를 비롯한 모두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멍청하게 직접 나서서 시키진 않았겠지.
보통 이런 일을 벌일 때는 중간에 사람 몇을 더 넣는 법이니.
이후부터는 심문의 시간이리라.
레오나를 노린 건 폴리드.
그게 밝혀지면 상단 후계를 논하는 문제는 끝일 테니.
엔크리드는 그렇게 예상했고.
“이런, 아무래도 제 주머니가 탐이 났던 멍청이 몇이 모여서 일을 벌인 모양인데요.”
레오나는 예상 밖의 말을 읊기 시작했다.
“……네?”
잡혀 온 첩자 부대의 리더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그리고 멍청한 폴리드는 자신의 지혜를 뽐냈다.
레오나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한 거다.
“누가 뭐래요?”
레오나가 오히려 말을 받아쳤다.
“에, 아, 그게 아니고.”
폴리드가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첫 만남에 대뜸 뺨을 후려갈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런단 말인가.
엔크리드는 자신이 폴리드의 처지였다고 해도 심히 당황했으리라 생각했다.
끝내 폴리드는 어버버 하며, 혀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소리를 뱉어 내며 말을 잇지 못했고.
토레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폴리드를 제외한 상단 측 사람들이 오히려 덤덤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폴리드란 놈의 죄로 몰아가리라 다들 생각했으니까.
“대담하군.”
뒤에서 중대장이 속삭였다. 간신히 엔크리드만 들릴 정도였다.
대담해? 뭐가?
엔크리드는 상황이 쉬이 이해되진 않았다.
궁금해지니, 절로 머리가 구르며 생각을 이어 갔다.
사람이 독특한 행동을 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물론 렘을 포함한 분대원 들은 이유 없이 미친 짓을 하곤 하지만.
레오나가 렘은 아니니까.
엔크리드는 상황을 되새겼다.
로크프리드 상단, 폴리드, 레오나, 승계 문제, 보더 가드 내에서의 습격, 변방 수비대원, 잡아 온 놈, 아즈펜의 첩자.
알고 있는 걸 정리하고 돌아본다. 그제야 깨달은 점이 있기에, 엔크리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과 단련하는 시간에 푹 빠져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걸 이해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