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레오나 로크프리드
“아즈펜의 이름으로 범죄를 덮으려 한 거죠?”
레오나가 재차 묻자.
“거기까지, 그 뒤부터는 우리 소관인 것 같은데.”
토레스가 레오나의 말을 막았다.
“그런가요? 어쨌든 오해는 풀렸군요.”
레오나가 생긋 웃었다. ‘난 순수해요, 순진해요, 아무것도 몰라요’ 이런 미소였다. 물론 그녀는 전부 알았고 순진하지도 않았다.
토레스는 답하는 대신 남자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간다.”
엔크리드에게 돌아가서 보자는 인사도 없었다. 그대로 얼굴이 엉망이 된 남자의 어깨를 툭 밀어 버리곤 눈을 부라릴 뿐이었다.
“어, 어, 살, 살, 살려 주십시오.”
“닥쳐라. 적군의 첩자 주제에.”
“제가 아는 건 전부, 전부 말하겠습니다. 첩자 아닙니다. 오해가, 오해가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혀는 제일 나중에 자를 테니까.”
토레스의 말에 남자의 다리가 풀렸으나, 그에게는 넘어질 자유도 없었다.
좌우에 붙은 대원 둘이 그를 그대로 둘러메듯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버렸으니.
토레스의 태도를 보자니,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머리싸움이 있었구나.’
검에 미쳐서 상황을 돌아보지 않아, 이제야 보인 것들이다.
레오나는 왜 폴리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는가.
만약 폴리드가 사주한 게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폴리드만의 책임인가, 아니면 로크프리드 상단에도 책임이 있는가.’
상단에까지 책임을 묻는다면 레오나는 그걸 인정하는 게 이득인가, 부인하는 게 이득인가.
만약, 상단이 자신의 것이 확실하다면 인정하지 않는 게 이득이다.
굳이 이 문제로 폴리드란 멍청이를 쳐 내지 않아도 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엔크리드는 레오나가 상단 승계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고 폴리드를 쳐 내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보더 가드는 로크프리드 상단의 일원이 암살을 사주한 걸 빌미로 대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상단이 사주한 일로 도시의 명예가 더럽혀졌으므로.
도시의 명예는 곧 부대의 명예이니, 이걸 토대로 한 몫 톡톡히 뜯어 낼 수 있었을 테니까.
‘상단을 위해서 이런 판단을 내렸다는 건가?’
그녀가 그만큼 자신의 상단을 아껴서 그럴까.
“왜요? 새삼 제 미모에 빠져 드셨나요?”
엔크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이 여자는 대체 뭘까.
그녀의 얼굴은 폴리드의 뺨을 후려칠 때보다 배는 밝았다.
절로 여유가 느껴졌다. 그리 여유를 보이면서도 앉은 자세에 빈틈은 없다.
계산이 끝난 상인의 얼굴이었다.
상단의 어떤 것도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인데. 필시 믿는 구석이 있는 거였다.
그게 보더 가드 상비군은 아닌 거고.
정말 묘한 여자였다.
“아닙니다.”
엔크리드는 답할 건 답했다.
그녀의 생각과 태도, 의도와 별개로 엔크리드는 임무를 수행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아쉽네요.”
레오나가 웃었다.
저 미모가 거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가.
그 생각을 고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보니 더없이 잘 어울리지 않나.
순수함이란 가면을 벗고 지은 지금의 미소는 먹이를 머금은 거미 그 자체였다.
* * *
“그동안 감사했어요.”
의뢰가 끝나가는 시점이다.
여관에서 짐을 챙겨 나온 레오나가 말하고.
그 옆에서는 폴리드가 실실 웃었다. 실상, 승계 관련으로 레오나와의 말싸움을 이기길 했나, 준비한 암살이 성공하기를 했나.
그런데도 웃음기를 보였다.
그 웃음이 이제 상단의 주인은 자신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야, 병사 너, 나중에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거다.”
‘처음에는 작센한테 시비를 걸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엔크리드를 향해 화살촉을 돌렸다. 번번이 엔크리드를 걸고넘어졌다.
‘무시해야 했나?’
친절했기에 생긴 문제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폴리드의 얼굴이 의기양양한 표정의 표본처럼 보였다.
웃음기 어린 입가, 확신에 찬 눈빛, 내적 흥분으로 인한 콧김 발산까지.
“바짓가랑이를 잡는 게 아니라 발모가지를 잘라 줄 순 있는데.”
엔크리드는 괜히 상대가 대답할 거리를 주기 싫어 혼자 중얼거렸다.
그걸 들은 건 작센과 중대장, 가까이 있던 레오나뿐이었다.
“그럴 바에는 목을 자르십시오. 그게 빠릅니다.”
작센은 조언을.
“남자한테도 인기가 있군, 병사.”
중대장은 놀림을.
“제가 괜히 미안하네요.”
레오나는 사과했다.
“응? 너 뭐라고 했냐?”
엔크리드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폴리드가 물었다. 엔크리드는 깨끗하게 그걸 무시했다.
처음부터 친절 따윈 담지 말았어야 했다.
무시당한 폴리드가 잠깐 성질을 부리긴 했지만, 곧 진정했다. 뒤에 있던 수수한 외모의 남자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금세 흥분을 가라앉힌다. 이후에도 폴리드 놈은 재차 눈을 부라림으로 자신감을 표출했다.
‘누가 봐도, 뭘 준비한 거로 보이는데.’
그 준비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보더 가드 내에서의 소란은 더는 용납되지 않을 테니.
‘나가자마자 죽이겠다고 덤비겠지.’
여관 앞에 모인 레오나 일행의 면면을 보면 과연 상대를 감당할 수 있을까 싶긴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레오나가 옆에 다가와 말했다.
“에스코트 받는 기분이네요.”
에스코트 받는 기분이 아니라, 호위 임무의 일부로써 실제 해야 할 일이었다.
폴리드는 멍청하게 속내를 보였지만, 레오나는 그 반대였다.
그녀는 뭘 믿고 있을까.
새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레오나의 태도에 걱정 따윈 엿보이지 않았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후일, 기회가 되면 반드시 갚겠습니다.”
2층에서 퇴역 병사라는 암살자에게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여자 호위도 다가와 말했다.
“네.”
엔크리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넓은 대륙에서 다시 만날 일이 얼마나 있다고.
다만, 주변에서 보는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여관 전체를 호위하던 두 개 분대가 아직 곁에 있었다. 하는 김에 호위 임무도 함께했다. 보더 가드 내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한 책임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여자와 염문을 뿌리는.”
“스치는 모든 여자에게 매력이란 독을 던지기에.”
“그대의 이름은 마성의 분대장이라.”
근데 일은 안 하고, 시나 짓고 앉아 있는지.
“……왜들 저러는 겁니까?”
여자 호위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퇴역하고 다들 음유시인이 되길 원해서 연습하는 겁니다. 놔두십시오.”
엔크리드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중대장이 그사이 레오나의 곁에 붙어 소곤거렸다. 예민한 청각이 그녀의 말을 잡아챘다.
“조심하는 게 좋겠다. 저 병사는 눈에 보이는 모든 여자를 자빠뜨리는 경향이 있으니.”
뭘 자빠뜨린다는 건가.
엔크리드는 근래에 여자의 분 냄새도 맡아 본 적 없었다.
그러기에는 정신없는 일이 연속해서 그를 덮쳤으니까.
“안 갑니까? 꺼지실 때가 된 것 같은데.”
엔크리드는 정중하게 두 개 분대의 병사를 배웅했고.
그들은 정말 퇴역하고 음유시인이라도 할 생각인지, 순식간에 마성의 분대장이란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미친 사람들이었다.
이번 일로 토레스 쪽, 그러니까 변방 수비대는 골이 아픈 채로 떠났는데, 이쪽 병사 무리는 태평했다.
그럴 만하긴 하지.
저들이야 시키는 일을 할 뿐이니까.
변방 수비대를 떠올리니 새삼 레오나의 수완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로 보더 가드에 빚을 지운 셈인가.’
그녀는 말 몇 마디로 상황을 엎었다. 보더 가드 내에서 이걸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습격 자체를 도시 내 치안 문제처럼 몰아갔으니까.
상단의 승계 문제로 생긴 습격이라면 로크프리드 상단 책임이 될 테고.
크로나를 보고 습격한 거라면 도시의 치안 관리 문제가 된다.
‘기가 막히는 일이군.’
폴리드가 시킨 짓이라는 건 다 알지만, 정작 암살 대상이 부인하니.
이런 걸 타고난 상인이라 해야 하는 걸까.
결론이 났기에 눈에 보이는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을 이야기다.
뭐, 토레스가 떠난 후 여관에 남아 있던 크라이스가 얘기를 보충해 주기도 했고.
“결국 보더 가드 쪽도 부인하긴 하겠죠. 그런데 상황이 저쪽이 유리하긴 하네요. 걔들 아즈펜의 첩자 부대라면서요?”
그게 왜 불리한지 물었더니, 크라이스가 술술 말했었다.
“아즈펜의 첩자가 일으킨 문제의 책임을 따지게 되면 그게 누구에게 유리할까요? 아즈펜의 첩자가 상단의 크로나를 노렸다는 것과 도시 내에 분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 어떤 이야기에 더 무게를 두고 싶으세요?”
크라이스 말이 이해됐다.
아즈펜이란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이건 상단에 유리한 상황이 된 거다.
결국, 조국의 영광을 부르짖고 뒈져 버린 첩자 덕이라 하겠다.
엔크리드는 그 얘기를 들으며, 크라이스의 머리도 레오나 못지않게 잘 돌아가는 걸 알았다.
본래 머리 좋은 건 알았지만.
‘대형 상단의 후계와 엇비슷해 보이는데.’
잠깐 머릿속을 스친 생각일 뿐이다. 머리가 좋으면 뭐 하나.
크라이스의 꿈은 귀부인을 등처먹는 살롱을 차리는 것인데.
이런저런 생각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성문 입구다.
위병을 서는 병사가 엔크리드와 일행이 다가오는 걸 보고 몸을 돌렸다.
“엔크리드라고 했지?”
그들을 보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폴리드 쪽 검사가 말을 걸었다.
“난 그쪽 이름을 못 들었는데.”
“그건 미안하군, 여기서 이름을 밝힐 처지가 못 돼서.”
“…….”
갑자기 다가와 왜 말을 거나 빤히 보니, 검사가 엔크리드의 뒤쪽을 향해 말했다.
“몇 마디 말만 하려고 한다. 살기는 거두지.”
엔크리드의 우측, 어느새 작센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예민하시군. 살기라니.”
작센이 답했다. 폴리드를 그렇게 무시한 놈이, 여기서는 대답을 곧잘 했다.
“걱정하지 마라. 살기 없이도 사람 목 베는 건 쉬운 일이다.”
중대장은 또 언제 온 건지, 그녀가 폴리드 쪽 검사의 뒤편에 섰다.
검사는 둘을 한 번씩 보고는 깔끔하게 외면하고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검을 놔라.”
대뜸 하는 말이다.
“열정만으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엔크리드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듣는 얘기다.
포기해라. 재능이 없다. 시간 낭비다. 길이 없는 곳을 걷는 것과 같다.
꼭 맞아 봐야 아픈 걸 아는 거냐?
칼에 베이면 아프다는 걸 이제는 너도 알지 않느냐?
수련에 시간을 쏟는 만큼, 재능이 보잘것없음을 알 수 있는 법임을 왜 느끼지 못하는가.
느끼지 못하긴, 그래, 안다.
무수히 많이 듣던 얘기.
말 몇 마디에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더라도 엔크리드도 알긴 했다.
자신이 기사가 될 순 없다는걸.
그래, 한때는 그랬다.
그래도 검을 휘둘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찢기고 바란 꿈의 조각을 그저 품고만 살아왔다.
앞을 가로막은 벽이 어찌 생겼는지 볼 수도 없었다. 주변이 모두 암흑이었다.
그런 때도 손아귀가 터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며 살아왔는데.
지금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 한 점의 집중, 고립의 기법.
중검식을 비롯한 검술의 기본.
발렌 식 용병검의 응용.
반복되는 오늘, 계속되는 단련과 수련, 늘어나는 실력.
누군가의 눈에는 거북이보다 느린 반걸음이, 엔크리드에게는 과거 그 어떤 때보다 의미 있는 반걸음이었기에.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보였다.
“웃는 건가.”
검사가 그걸 보고 읊조렸다.
“괜한 걱정을.”
작센이 한마디 하고.
중대장은 묵묵히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검사는 대답을 원했고 엔크리드는 그가 바라 마지않던 답을 던졌다.
“다음에 보면 내가 이길 수도 있다.”
사람의 앞날을 예단하는 건 오만한 짓이다. 엔크리드가 말했고.
“그렇군.”
검사는 귀를 닫은 상대에게 굳이 제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성문을 앞에 두고 일어난 작은 소요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성벽 앞에 다다랐을 때다.
레오나는 뒤로 돌아서며 엔크리드를 포함한 이들에게 말했고.
이대로 나가나 싶은 순간이다.
엔크리드의 눈에 위병이 고개를 앞뒤로 돌리면서 일행과 바깥을 번갈아 보는 게 보였다.
곤란한 기색이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성벽 바깥, 일대의 무장 집단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알았다.
상대가 무력을 앞세웠다면 이쪽은 무엇을 내세워야 하는가.
레오나가 믿는 카드였다. 그들이 성벽 밖에 있었다.
“로크프리드 상단 호위대 매티스, 여기 왔습니다.”
유일하게 성벽 안에 들어와 있던 자다.
가지런한 콧수염을 기른 자였다.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고 걸친 코트의 어깨 위로 먼지가 쌓였다.
무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대륙에서 상단의 이름을 세울 수 없다.
주변 도적과 산적, 마수와 마물에 다 뜯어 먹혀 뼈다귀로만 장사할 게 아니라면, 무력은 필수다.
나선 남자는 로크프리드 상단의 무력을 책임지는 이였다.
그는 다가와 자신을 보이는 것만으로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엔크리드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시야에 매티스란 남자만 가득했기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세가 남달랐다. 그는 기세만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재밌는 친구들이 같이 있군요.”
그는 그리 말하고 레오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호위대가 왔습니다. 단주.”
남자가 레오나에게 말했다.
엔크리드는 그제야 그의 뒤로 시선을 던질 수 있었다.
로크프리드 상단 호위대.
서른 명 이상의 무장 병력이 성문 밖으로 진을 친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