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84화 (84/170)

84. 사람을 살리고자 마음먹으니, 틈이 보였다.

‘열기.’

폭발이다. 몇 번이고 마지막 순간을 되새겼다.

정말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전 혼혈 요정의 암살은 죽기 직전 말이라도 나눴지.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저 뜨거운 열기로 인한 열통, 뜨거운 죽음의 고통만이 남았다.

검이나 창에 찔리면 달군 쇠꼬챙이에 꿰인 느낌이 들곤 했는데.

이번에는 진짜 불에 타죽은 셈이다.

‘트랩? 폭발하는 걸 보니, 마법 트랩인 거겠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하슈?”

“의뢰받을 생각.”

아침을 해결하고 렘의 말에 대거리해 준 뒤, 다시금 의뢰를 수급하러 간 곳이다.

“제발 부탁이다. 이것 좀 해 줘.”

당연하게도 바느질 분대장이 부탁이란 말을 던졌다.

이 새끼, 그쪽 상태를 알고 보내는 걸까?

그런 것치곤 눈 밑은 퀭한 게, 상대를 골려 먹을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피로에 찌든 병사로 보일 뿐.

“요새 일이 많나 보네?”

“밤에 사고 치는 애들은 줄었는데, 최근에 외부 마물이나 마수가 좀 늘어서 그쪽으로 빠지는 병력이 많아.”

숫제 울상이었다. 그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사실 속인다고 해도 의뢰를 거절하면 그만이고.

의뢰를 받는다 해도 구둣방 안에 들어서지만 않는다면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무시해도 되는 일인 거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벽 같은데.’

엔크리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물었다.

“내가 안 가면?”

“묵혀야지.”

부대 내 병사가 해야 할 필수 의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의뢰도 있는 법이다.

이건 무시해도 될 만한 일이긴 했다.

“그래, 꼭 갈 필요는 없긴 하지. 그런데 구둣방 그 아저씨가 헛소리할 사람은 아니라서 그래. 나도 내가 갔으면 좋겠는데 소대장이 자꾸 눈치를 줘서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어.”

이 또한 진심인 듯했다.

생각에 빠져 답이 늦자, 바느질 분대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저기, 나 기억하지? 그때 그 가죽 뭉치로, 응?”

“기억하지.”

도시에 돌아와서 술병을 입에 달고 살진 않나 했더니, 여기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다.

“걱정이 돼서 그래, 좀 봐주라. 어릴 때부터 알던 아저씨라.”

“알았다.”

일단 가 보자.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이라도 해 볼 참이었다.

일반적인 트랩이라면 화염 폭발이 아니라 독침 따위가 날아왔을 텐데.

트랩이 작동하는 소리나 낌새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이란 소리인데.

‘마법이라면.’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며 걷다 보니, 본래보다 조금 늦게 구둣방에 도착했고.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었다.

“보더 가드 상비군입니다. 열어 주십시오.”

전보다 문을 세게 두드리고 외치니 그제야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 직공 대신, 젊은 여자가 보였다.

길게 땋은 갈색 머리칼과 볼에 주근깨가 가득한.

“상비군이요?”

사슴처럼 커진 눈을 하고 여자가 말했다.

“의뢰 때문에.”

슬쩍 말하고 안을 보는데, 안쪽에도 직공이 안 보였다. 그 대신 덩그러니 난 구멍만 보였다.

“그, 저, 아버지는 가게 밑에 뭐가 있다고 거기에 들어가셔서.”

이런 젠장.

엔크리드는 속으로 읊조리고.

“잠시.”

놀란 신발 직공의 딸을 반쯤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스.

뚫어 놓은 구멍 안으로 흙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성격 더럽게 급하네.’

직공이 상비군을 기다리다 못해 먼저 들어간 거다. 아예 누구도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보통이라면 이런 일로 병사가 쉬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할 테니.

“위험한 거죠?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주근깨 여자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제가 들어가서 데려와야겠어요.”

“제가 갈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아니요. 저도 가야겠어요.”

말린다고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빨리 가서 그 폭발을 막아야 했다.

엔크리드는 설득하는 대신 단숨에 구멍 안으로 몸을 날렸다.

가장자리에 손을 얹고 왼발부터 밀어 넣어 동굴 경사로를 타고 내려간다.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다.

고립의 기법으로 몸 전체를 통제하는 게 수월해졌기에 간단한 동작에도 운동 능력의 향상을 체감했다.

물론, 지금은 이딴 생각을 할 때가 아니긴 했다.

경사로를 다 내려서자마자, 단련된 엔크리드의 귀가 발걸음 소리를 잡아챘다.

시선을 앞으로 던지니, 더듬더듬 첫 번째 통로로 발을 디디는 직공이 보였다.

엔크리드의 뒤에서 직공의 딸이 쫓아오더니 그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

“아빠!”

엔크리드는 딸의 허리를 붙들고 뒤로 던지듯 내려놓으며 외쳤다.

“멈춰!”

직공이 뒤를 돌아본다. 그의 얼굴에 긴장과 의문이 섞여 있다.

이미 떨어진 발이다. 그는 그대로 걸음을 내디뎠고.

엔크리드는 빠아아앙 하는 소음과 함께 공기가 압축되어 몸을 짓누르는 걸 느꼈다.

모든 건 한순간이었다.

불길, 화염, 폭발.

화르르륵.

“끄!”

제대로 뱉지도 못한 직공의 단말마와 함께 터진 불길이 엔크리드의 몸을 불살랐다.

직공도, 그 뒤의 딸도.

펑!

엔크리드는 죽어 가며 폭발의 여파가 위로 솟겠다고 생각했다.

허탈한 죽음이다. 통증을 버티고 이겨 내자, 어둠이 지나친다. 꿈과 같은 검은 강을 헤치고 다시금 눈을 떠, 아침을 맞이하자.

* * *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수?”

렘이 옆에서 물었다. 차마 좋은 꿈이라고 할 순 없었다.

꿈에서 검은 강의 뱃사공이 생긋 처웃더라고.

과거, 오늘을 반복할 때는 그래도 매번 제 손으로 시작하고 제 손으로 끝낸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억울한 감이 있었다.

불가항력이란 생각이 들어 버렸으니.

‘놔두면 죽으러 간다는 건가.’

아버지가 먼저, 딸이 그다음.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까.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이미 그들이 죽은 시점에서 실패한 일이 될 테니까.

‘외면하면 그만인데.’

엔크리드가 외면하면 그 둘은 죽는다. 반드시 죽으리라.

그래서 그게 문제가 되나?

죽고 죽이는 세상이다.

그런 시대고.

전장에 나서서 싸우는 걸 업으로 삼았기에 엔크리도 수없이 누군가를 죽였다.

다만.

‘그 사람들은 죽고 죽이는 전장에 나선 게 아니잖아.’

그저 제 가게를 꾸려 나갈 사람일 뿐이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꿈꾸는 기사가 음유시인이 노래하던 그런 기사도를 갖춘 위인이 아님을 안다.

현실에 따라야 하는 거다. 세상이 변한만큼.

그렇다고 해도.

‘지고 싶진 않아.’

이걸 외면하고 돌아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직공과 그의 딸 하나가 더 죽는 것뿐인데.

다만, 그게 엔크리드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일 뿐.

그리고 그들이 죽는 걸 아는 건 오롯이 엔크리드 혼자뿐이니.

이게 전쟁이라면, 제 손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그래, 그럼 놔둬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막을 수 있잖아.’

그렇다면 그냥 둘 순 없다. 막을 수 있으니까.

이걸 기사도라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저 고집이라 부르고 말지.

그렇다고 해서 엔크리드가 아는 기사도가 흐려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거기에 자신이 지켜야 할 게 있다면 지키는 것.

그게 엔크리드가 아는 기사다.

꿈을 꾸는 자는 그걸 배반할 수 없기에.

엔크리드는 그곳에, 직공과 딸을 보러 가야 했다.

“개 같네.”

엔크리드는 드물게 짜증을 드러내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 직공과 딸을 죽게 만든 자신의 느린 걸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심히 재수 없는 꿈을 꿨나 보네.”

뒤에서 렘이 중얼거렸다.

다시금 하루를 시작한 엔크리드는 배를 채우고 의뢰받으러 가는 내내 고민했다.

‘통로를 하나씩 들어가 봐야 하나?’

그만큼 거지 같은 짓도 없을 것이다.

통로에 얼마나 많은 트랩이 있는지도 모르는 판에.

하지만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분대원 중 누구를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구둣방 직공이 제 가게 밑에 언데드형 마물이 있는 것 같다고 같이 가자고 하면 뭐라고 생각할까.’

놀리는 건 둘째치고 아무도 안 올 것 같은데.

억지로 데려갈 순 있겠지만.

엔크리드는 그럴 마음이 안 생겼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분대원에게 매달릴 것인가.

아니면 혼자 넘어갈 것인가.

과연 자신이 바라고 바란 꿈이 누군가의 뒤에 서서 입을 터는 것인가.

선두에 서서 검을 휘두르는 것인가.

이번 일이 검을 쓰는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한다. 내가 지킨다.’

분대원에게 기댈 일은 아닐 것이다.

“그 구둣방 아저씨가 걱정돼서, 나 알지?”

“알지, 뱀 술은 맛있었나?”

“꿀맛이었지.”

입맛을 다시는 바느질 분대장에게 다시 의뢰를 건네받고 곧바로 뛰듯이 걸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갑니까?”

막 나서는 데 뒤에서 작센이 물었다.

“재수 없는 양민 구하러 구둣방에.”

“……구두나 부츠가 양민을 괴롭힌답니까?”

아니, 지하 통로가 괴롭히지.

엔크리드는 속으로만 답하고 곧바로 구둣방으로 직행했다.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 직공이 막 바닥을 향해 망치를 휘두르는지, 꽝꽝 하는 소리가 먼저 반겼다.

쿵쿵!

엔크리드가 드세게 문을 두드려 자신이 왔음을 알리자, 직공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나왔다.

“자, 보쇼. 저기 구멍이!”

“있군요. 구멍이. 한번 봅시다.”

가서 아예 구멍을 여는 작업을 도와줬다.

망치로 때리고 두꺼운 쇠막대 따위를 지렛대로 써서 판자를 들춰냈다.

그리 만든 구멍이다.

“내가 가 볼 테니까, 기다리시고요.”

“에, 음, 혹 마물이라도 나오면.”

“제가 알아서 합니다.”

내려가기 전 부싯돌로 횃대에 불을 붙였다.

화륵.

어째 불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았다. 불에 타죽는 경험은 두 번이면 족할 테지.

내려서는 순간, 엔크리드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건 죽음의 공포가 불러온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엔크리드는 저 통로 안에 들어서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걸음을 돌리진 않았다. 가뿐히 이겨 내고 나아갔다.

싫다고 외면한다면.

평생 도망만 가는 삶을 살 것이다.

이제껏 살기 위해 도망친 적이 여러 번이었고.

그때마다 후회했다. 그런 후회를 다시금 경험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므로 엔크리드는 돌아서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 향했다.

한 걸음 성큼, 첫 번째 통로는 볼수록 기분이 더러웠다.

여섯 개의 통로 중 나머지 다섯 개다.

‘어디냐.’

멀쩡한 통로를 만들고 전부 트랩을 깔아 두진 않았을 테니.

두 번째는 괜찮을까?

엔크리드는 신중하게 횃불을 들어 바닥과 벽, 천장까지 꼼꼼히 살폈다.

딱히 눈에 두드러지는 게 걸리는 건 없었다.

별 차이 없는 갈림길만 있을 뿐.

통로 크기도 비슷비슷했다.

안쪽은 어두워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시 밑에 이런 미친 공간을 만든 놈이 누군지.

잘하면 하수도까지도 이어져 있을 듯싶었다.

후두둑.

머리 위로 흙먼지가 떨어졌다.

급조한 통로는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무너져서 깔려 죽진 않으려나.

어쨌거나 지금은 안쪽을 살펴볼 시간이었다. 절로 이걸 만든 놈의 낯짝이 궁금해졌다.

‘간다.’

갈림길 두 번째 통로다.

‘첫 번째에 들어가면 불길이 덮치고.’

여긴 어떨까.

두 번째 통로 앞에 선 순간, 엔크리드는 또다시 솟아오른 불쾌한 기분에 돌아서고 싶었으나, 무시하고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긴장한 채 내딛는 첫 번째 걸음, 어떤 이상도 없었다. 폭발도 화염도, 그 외 다른 것도.

엔크리드는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횃불을 들어 다시금 사방을 꼼꼼하게 관찰했다.

이후 내린 결론이다.

‘본다고 알 수도 없지 않나.’

검 하나에만 매달리기도 바쁜 시간이었다. 던전 탐험이야 용병질하면서 어깨너머로 보긴 했으나, 트랩을 살필 만한 지식은 없었다.

그런 건 제대로 훈련받은 이들이나 가능한 짓이니.

그러므로.

‘이건 답이 없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불길함이 전신을 짓누른다. 눈앞에서 마수가 입을 쩍 벌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맨몸뚱이로 마수의 입안에 머리를 들이미는 기분이다.

그걸 이겨 내고 나아가려는데.

“지금 뭐 하는 거요?”

어느새 뒤따라 내려온 직공이 뒤에서 물었다. 그 한마디에 예민하게 벼려져 있던 불길함을 느끼는 육감이 무뎌지고, 한걸음 나서는 게 그리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느껴지던 것들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직공과 함께 불에 타 죽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그렇게 다시 한걸음 디디는데, 다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비슷한 감이다.

불길함에서 비롯된, 마치 실수한 것만 같은.

‘내딛지 말았어야 할 걸음.’

불현듯 든 생각이 곧 답이었다.

훙.

첫 번째 통로와 같았다.

폭발, 압력, 화염.

이 통로 끝에 뭘 숨겨 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독한 트랩을 준비했다는 건 분명했다.

뻐-엉.

소음과 함께 화염에 불타 죽는다. 당연하게도 그냥 죽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

엔크리드는 죽어 가며 속으로 짧은 탄성을 뱉었다. 통증과 무관하게, 야수의 대담함이 현재 느끼는 감각을 여실히 판단하게 해 주는 기반이 되어 주니.

세 번째 오늘을 마무리하며 엔크리드는 뜻밖으로 무언가를 느꼈고.

그렇게 네 번째 오늘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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