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육감의 문
“작센.”
일어나자마자 엔크리드가 작센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육감의 문이라는 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기도 하겠지?”
“그게 시작이죠.”
이제껏 작센이 살기를 마구잡이로 쏘아 낸 이유이기도 했다.
생존 본능.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가진 것.
그게 시작이라면.
‘이거였구나.’
간질간질하게 심장을 건드리던 감각.
아련하다고 해야 하나, 분명 그와 비슷한 걸 느꼈다.
물론 한 번만으로 완벽하게 몸에 새길 순 없었다.
부족한 재능 덕이다.
그렇다고 한탄 따윈 하진 않았다.
재능이 없다는 걸 되새긴다고 달라지는 건 없기에, 다시 움직일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금 시작된 오늘,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간다.”
똑같이 의뢰를 받고, 횃불을 하나 가져와 구둣방으로 향했다.
이제 네 번째다.
이번에는 아예 첫 번째 망치질도 시작하기 전에 도착했다.
“같이 뚫어 보죠.”
“에? 뭐?”
엔크리드는 황당해하는 직공과 힘을 합쳐 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 다시 맞이한 여섯 개의 갈림길.
첫 번째와 두 번째 통로를 마주한 순간이다.
간질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불길함이라 말해야 옳을 만한 감.
엔크리드는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이게.’
이곳, 그저 직공이 죽는 걸 두고 보지 못해 들어선 곳.
몇 번 시도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대로 봉인했어야 할 스펠 트랩이 있는 곳.
엔크리드는 이 ‘오늘’에 묶일 생각이 없었다.
이건 사고였고, 이 사고는 의지가 있다면 피할 수 있는 문제니까.
당장만 해도 직공과 딸을 무력으로라도 내보내고 구멍을 조사할 병대를 요청하면 될 일이니까.
물론 그건 최후의 수단이었다.
스펠 트랩이 있기에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죽는 게 자신이 아니더라고 해도 가만히 두고 볼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여기에 마법이 걸려 있으니, 몸값이 금보다 비싸다는 마법사를 데려오라고 할 순 없지 않나.
일개 분대장이 요청한다고 마법사가 쭐레쭐레 이곳으로 올 일은 없을뿐더러.
스펠 트랩이 있다고 말한들 그걸 누가 믿을 것인가.
대부분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반응이겠지.
‘우리 분대원이나 중대장은 믿어 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결론은 이거였다.
이곳이 바로 육감의 문을 단련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것.
그걸 깨닫자, 짜릿한 희열이 치솟는다. 겨우 네 번 만에 육감의 문에 틈이 생기지 않았나.
이제 열어젖힐 일만 남은 셈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통로에 발을 디뎠고.
엔크리드는 그 순간 색다른 고통을 겪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머리 위에서 세로로 몸을 갈랐다.
끔찍한 고통, 통증, 쌔애애애애액 하는 바람 소리, 몸에 남는 서늘함, 피가 바닥에 울컥 쏟아지며 몸 안의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탈력감.
그 어느 하나,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통증과 감각이다. 괴롭다. 당연했다.
다만, 새로이 깨달은 경험의 족적이 괴로움을 잊게 해 줬다.
그러니 반복되는 오늘이 괴롭지만은 않았다.
그저 내일을 위해 내달리고 발악할 뿐.
* * *
다섯 번째 아침을 맞이한 순간, 엔크리드는 오늘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목표를 세웠다.
‘육감의 문을 열고, 이 굴을 통과한다.’
누군가 안다면 가히 미친 짓이라 하겠지만.
엔크리드에게는 이 또한 단련의 순간일 뿐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성장한다는 것.
내일을 위해 발악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 우리 가게 밑에 구멍이 있다는데, 왜 웃는 거요?”
신발 직공이 웃는 엔크리드를 보고 물었다.
“미지를 탐구하는 취미가 있습니다.”
아무 말이나 뱉고 내려가려는데, 직공이 팔을 붙들었다.
“아래에 뭐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조심해야…….”
“네, 그러죠.”
시험해 보고 싶은 게 많았다.
내려서고 통로를 마주한다. 곧바로 불길함이 전신을 찌르는 듯한 육감이 경고성을 울리진 않았다.
‘문이 열리다 만 거라고 보고.’
이제부터 마저 열어 볼 심산이었다.
무식하게 함정에 몸을 던질 생각은 버렸다.
해 보니까 알겠다.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 다섯 번째 오늘이다.
여기서 끝낼 수 없다고 해도, 여전히 발악은 할 생각이니.
쉽게 반복할 수 있다고 지금을,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진 않는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 해야 할 일은?
엔크리드는 종일, 정말 온종일 통로 앞을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오갔다.
첫 번째에서 두 번째 앞, 두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
다시금 여섯 번째에서 처음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횃대 다섯 개가 다 탈 때까지.
이렇게 하루를 보내면 이대로 오늘이 끝나지 않을까 할 시간까지.
“대체 뭐 하는 거요?”
처음에는 황당해하던 직공이.
“점심은 먹고 하지?”
끼니를 챙겨 줬다.
“근데 왜, 오리가 강물 오가듯 좌우로 오가기만 하시나요?”
나중에는 딸이 와서 의문을 표하고.
“거, 의뢰로 왔다면서 저 병사는 왜 저러는 건가?”
“나도 몰라. 종일 저러네.”
옆 가게 약초상 주인까지 와서 구경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짓.
엔크리드는 종일 한 점의 집중을 발동한 채로 이상한 부분을 찾기 위해 애썼다.
불길함을 감지하는 육감은 어떤 원리로 발동하는가.
작센의 설명대로라면 보고 듣고 맡고 느끼는 과정이 본능의 영역에서 발동하는 거라 했다.
인식하지 못한 위험을 육감이 먼저 잡아채는 거다.
그 시작, 이질감을 찾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종일 보고 있었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든 생각이다.
‘이대로 안 죽고, 하루가 지나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새삼 드는 의문이었다. 이후, 종일 통로 앞을 수없이 오갔으면서도 얻은 건 없었다.
‘높이는 내 신장보다 반 배 정도 더 높고.’
밑으로 꽤 깊은 굴이라는 거다.
안으로 들어가 보진 못해서 굴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는 모르겠다.
부스스하고 흙먼지가 떨어지긴 하지만, 꽤 견고한 벽과 천장.
기둥은 없지만, 금세 무너질 것 같진 않고.
또 다른 점은 뭐가 있나.
음습한 공기지만, 바람이 통한다는 것.
저 안쪽의 어둠은 횃불에 기대어 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또 다른 건?’
냄새는 어떤가. 비릿한 향이 나긴 하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언데드형 마물이라도 있을까?
성직자라면 주변에 감도는 공기만으로 알아챌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오롯이 검에만 미쳐 살던 엔크리드에게 그런 재주는 없었다.
찾고 또 찾는다.
이질감이 느껴질 때까지 끝없이 관찰하다 보니, 어느새 깊은 밤이었다.
“안 돌아갈 거요?”
통로 뒤쪽, 직공의 부름이다.
뒤로 돌아가자, 비스듬히 이어진 경사로 위쪽에 직공의 얼굴이 보였다.
엔크리드는 위로 올라서며 답했다.
“안쪽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위험한 건 없어 보입니다. 입구를 막고 내일까지 기다리시죠. 지원군을 데려올 테니.”
“서성거릴 시간에 지원군을 불렀으면 됐을 것 같은데?”
본래라면 그게 맞는 말이지.
근데 지원군을 불러 누구 하나가 통로 안에 들어서서 폭발을 일으키면 그거로 끝 아니겠나.
다 같이 죽는 길이다.
“살펴볼 게 있어서.”
전문가인 척, 마치 이런 종류의 일에 능숙한 척하자, 직공이 미심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구멍을 막고 부대로 돌아가는 길이다.
머리 위에 뜬 달이 보였다.
보름달이었다.
낮에는 조금 풀린 날씨가 밤이 되자 다시 쌀쌀해졌다.
마수 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여민 엔크리드가 뒤를 흘깃 봤다.
신발 직공이 막아 둔 바닥을 뚫고 아래로 내려가진 않은 듯했다.
호기심 많은 양반 같았는데.
‘그랬으면 폭발이 일어났겠지.’
여기서 다시 드는 의문이다. 이대로 밤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가.
부가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반복되는 오늘, 언젠가는 끝내야 할 순간이 필요할 테니.
‘진즉에 시험해 봐야 했다.’
하긴, 지금까지는 시험하기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없었으니.
수틀리면 죽는 전장에서 반복되던 오늘이었고.
암살자의 단검을 피하던 오늘이었다.
그런 오늘을 겪고 이런 날을 맞이하니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엔크리드는 덤덤했다.
언제든 똑같이 단련했고 반복했다.
그게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마수 잡으러 간다며? 근데 대신 부츠를 죽이러 간 거요? 죽이긴 했고?”
숙소에 들어서자, 렘이 물었다.
이미 어떤 의뢰로 어디에 갔는지 다 아는 눈치였다.
흙먼지가 묻은 바지의 궁둥이를 털며 엔크리드가 답했다.
“세 개쯤 죽였지, 보람찬 하루였다.”
“……말을 맙시다.”
렘은 자신이 질 게 뻔한 말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다.
작정하고 덤비면 혀를 놀리는 것만큼은 엔크리드가 월등한 재주를 보였으니.
자기 전까지 작센의 살기에 시달린 뒤, 엔크리드는 침대에 누웠다.
혹 오늘을 반복하기 위해 누군가 자신을 죽이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으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아무 일도 없이 잤다.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흘러가는 상황을 본 엔크리드는 속으로 읊조렸다.
‘반복이군.’
오늘의 반복이다. 자고 일어나는 거나, 뒈지는 거나, 매한가지였나 보다.
그리 다시 시작된 오늘이다.
엔크리드는 또 갈림길 앞을 서성였다.
죽음의 고통이 없는 오늘의 반복이지만, 그는 한결같았다.
여전히 최선을 다했고, 여전히 발악했다.
오늘에 묶이는 게 엔크리드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걸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뱃사공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길 넘어서는 거겠지.’
* * *
횃대가 꺼지자, 빛에 익숙해져 주변이 컴컴하게만 보였다.
화륵.
다시 부싯돌을 튕겨 횃불에 불을 붙이고 든다. 엔크리드는 여섯 개의 갈림길을 바라봤다.
‘이런 경우 여섯 개 중 하나는 진짜겠지?’
쉬운 방법은 몸을 던져 확인하는 거다. 여섯 개 전부를 하나씩 일일이.
엔크리드는 그 방법을 쓰는 대신, 육감의 문을 갈고 닦고자 했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불길함.’
생존 본능이 자극하는 무언가.
여섯 번째 오늘에서 희미하게 그게 느껴졌기에.
엔크리드는 다시금 전과 비슷한 오늘을 보내고.
“대체 종일 뭐 하는 거요?”
황당해하는 신발 직공을 달래기 위해 이전의 오늘에 생각해 둔 핑계를 댔다.
“안쪽에 뭐가 있나 확인하는 겁니다. 보니까 트랩이 깔렸네요. 도둑 길드 쪽에서 몰래 비밀 통로라도 만든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가진 마십시오.”
도시에 도둑 길드가 길핀 길드만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엔크리드를 그들을 연상하며 말했으니.
그들의 이름을 판 셈이다.
그럴듯한 핑계였다. 통로 앞을 오가며 고심까진 아니어도 고민한 결과다.
직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시 돌아간 숙소에서 엔크리드는 작센의 눈초리를 받았고.
그가 쏘아 내는 살기를 느껴야 했다.
매일 저녁 반복되는 일이다.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버틴 뒤에도, 엔크리드는 잠들 생각이 없었다.
자서 반복되었다면 밤을 새우면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했다.
그리 버티고 버텨 다음 날의 동이 터오는 걸 보려 했다.
“냐아.”
옆으로 에스터가 다가와 발로 등을 툭툭 쳤다.
안 자고 뭐 하냐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먼저 자라.”
엔크리드는 에스터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 동이 터오길 기다리는 사이다.
엔크리드는 잠깐 눈을 깜빡였고.
곧 검은 강을 보았다.
“무의미한.”
뱃사공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한 말은 남았다.
다시금 눈을 뜨니.
“뭐 하슈?”
밤을 지새운 것처럼 머리는 무겁고 몸에 피로는 남았는데, 다시금 반복된 오늘이었다.
‘아예 눈도 깜빡이지 않으면?’
그럼, 그대로 하루가 이어지는 걸까?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눈을 깜짝이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그건 기사가 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
그러므로 오늘의 반복은 피할 수 없는 일인 거다.
‘오늘만 살아가라 이거냐.’
그것도 좋다.
어쨌든 이미 내일로 나아가는 방법은 알고 있으니.
엔크리드는 다시금 구둣방으로 향했고.
전보다 피로한 채로 오늘을 견뎠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며칠 밤을 새우며 싸우고 도망가던 전적이 있음에야.
그렇게 오늘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죽음의 고통이 없으니, 평온하다고 해야 할까?
평온함에 취해 이대로 오늘에 안주하게 되는 건가.
아니, 엔크리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반복한 오늘의 오늘의 오늘의 오늘의 오늘의 오늘.
일흔여덟 번의 반복이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오늘을 살아간 이후다.
숙소에 돌아온 엔크리드는 작센이 쏘아 낸 살기를 피했다.
옆으로 두 걸음.
세밀하게 상대의 살기를 느끼면 할 수 있는 묘기다.
우연일지도 몰랐기에 작센은 다시금 살기를 쏘아 냈다. 국소 지역, 이곳을 넘으면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실어 바라보는 것, 살기를 뿌리는 원리다.
그리 뿌려 낸 살기를.
엔크리드가 몸을 틀어 흘려 냈다. 육감의 문을 열지 않으면 흉내도 못 낼 짓이었다.
그것도 어설프게 여는 게 아니라 활짝 열어젖혀야만 할 수 있는 짓임에야.
“……뭡니까?”
‘생존 본능의 효율이 끝내주더라고.’
속으로 한 대답과.
“갑자기 되네.”
겉으로 뱉은 말이 달랐다.
물론 속으로 한 말이 진실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트랩.
그보다 좋은 훈련 도구는 없었다.
그 도구를 엔크리드는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고.
그게 육감의 문을 열어젖혀 줬다.
그리하여 지금 작센의 눈을 저리 크게 뜨게 만들 수 있었고.
“갑자기?”
이럴 수가 있나? 없다.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작센은 심히 당황했으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어쩌겠나, 됐다는데.
진전이 전혀 없어 보여서 어떻게 자극을 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별의별 방법을 다 떠올렸는데.
전부 무용해졌다.
“덕분이다.”
엔크리드가 말했고, 작센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물론 그러곤 곧 평소와 같이 속으로 읊조렸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도 작센은 다시금 흐뭇했다.
과정이 어떻든, 엔크리드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문을 열어젖혔으니.
작센의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그만큼 기쁘다는 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