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86화 (86/170)

86. 문을 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육감의 문.

몸에 해를 끼치는 걸 감지하는 것으로 열었지만.

이건 일정 반경으로 자신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더듬이였다.

본능을 토대로 문을 열어 놓고 보니 알 수 있었다.

‘쓰는 방식을 달리하면.’

제 뒤에 있는 사람의 동작을 읽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대로 뒤에 있는 렘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그려 낸다. 코를 파고 튕겨 내고, 온열 가죽 안에서 몸을 비비적대다가 고개를 든다. 시선이 자신의 등에서 멈춘다.

세세한 과정을 설명하자면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나는 이유를 추측, 이후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거지만, 그 일련의 과정이 단숨에 이뤄졌다.

이게 ‘육감의 문’.

열린 문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거라면.’

뒤에서 누가 몽둥이를 휘둘러도 피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육감과 직감, 본능의 영역이다.

그제야 작센이 말한 짐승의 본능적인 사냥 방식이 이해됐다.

육감의 문은 주변 모든 정보를 단숨에 집약해서 머릿속에 꽂아 주는 용도였다.

그러니 응용한다면 집중함으로 뒤에서 렘이 코를 파는 것도 알 수 있는 거고.

“생각 없는 놈들은 이런 걸 심안이라고 하지만, 다 개소리입니다. 그저 감이 좋아진 거, 그게 전부일 뿐.”

작센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고 했다. 그러니 응용할수록 쓸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는 건 당연했다.

물론 조심할 것도 있었다.

“감을 너무 맹신하면 역으로 속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말하며 작센은 왼손으로 엔크리드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어깨에 작센의 손이 닿기 직전까지 그가 그 손으로 제 목을 노리는 착각이 들었다.

묘한 속임수였다.

어찌 보면 발렌 식 용병검과 비슷한.

육감의 문을 열었다고 해서 오늘을 반복하는 일에 달라진 게 있는가. 없다. 엔크리드는 다시금 똑같은 오늘을 살기 시작했다.

다만, 이제까지의 오늘과 결과가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들 뿐.

사실, 예감이랄 것도 없다.

이제 그 흉악한 함정을 넘어설 자신이 생겼으니.

가죽 흉갑을 두르고 왼쪽 허리에 롱소드, 허리 뒤편에 두꺼운 칼날을 가진 가드 소드.

휘파람 비도를 몸에 두른 칼집에 촘촘히 꽂아 챙기고 작은 나이프를 양쪽 발목에 숨겼다.

그 위로 갬비슨까지 걸치면 경장보병의 완전 무장이었다.

익숙했기에 무장한다고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다.

이러려고 일부러 아침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 움직였고.

‘가면서 횃대 몇 개만 더 챙기면.’

수십 번 오간 길이다. 가는 길에서 잡화점을 들르는 것까지도 익숙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반복했으니.

“구둣방 가서 주인을 달래기 위해 목에 검을 들이댈 셈인 거요? 아니면 부츠와 목숨을 걸고 싸울 셈인 거요?”

의뢰 내용을 대강 들은 렘이 하는 말이다. 렘이 침대에 누운 채로 얼굴만 내밀고 떠들었다.

“부츠 열을 썰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매일 하는 농지거리였다.

‘어째 오늘을 계속 반복해도 비슷한 농담을 하는 것 같은데.’

렘의 속내가 얼핏 보였다. 마수가 아니라 구둣방에 가는 것 자체가 거슬리기 때문일 것이다.

“후딱 처리하고 마수 대가리 따러 가쇼.”

렘이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누구도 직공의 가게 지하에 그런 굴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보기 전엔 안 믿었지.’

그러니 새삼 궁금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가앙.

에스터의 배웅, 엔크리드는 오늘을 기억하기 위해 손끝으로 에스터의 코를 툭 때렸다.

캬릉!

방심하고 있던 에스터가 뒤로 물러나더니 고개를 좌우로 털곤, 곧 사나운 울음을 터트렸다.

그게 퍽 귀여워 엔크리드가 웃으며 말했다.

“간다.”

그리 숙소를 나서서 중간에 잡화점을 들러 횃대 세 개를 사서 두 개를 허리춤에 꽂고, 하나는 몽둥이처럼 들고 걸었다.

재게 발을 놀려 직공의 가게에 도착해 들어서니.

“보시오! 여기 구멍이!”

놀란 직공이 하는 말이 들리고.

“그러네요. 구멍이 있네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놀란 눈으로 말하던 직공은 엔크리드의 대답에 호들갑을 떠는 대신 엔크리드의 전신을 훑었다.

“……어디 전쟁 나가쇼?”

순찰병도 이렇게 무장을 완벽하게 하고 돌진 않는다. 두툼한 천 갑옷에 무장 상태를 보니 직공의 입에서 저런 말이 절로 나왔다.

“매사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라. 검을 가르쳐 준 선생이 해 준 말입니다.”

실제 지나가며 만났던 검술 교관이 저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만반의 준비를 한 것뿐이지만.

“누가 지독한 함정을 깔아 뒀으니, 실수로라도 안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구멍 안을 슬쩍 보고 직공에게 겁을 주자, 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곤 묻는다.

“그걸 안을 슬쩍 보기만 하면 안다고?”

아, 마음이 조금 급했군.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쪽은 제가 전문가라.”

무심하게 답하니, 직공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마저 입을 열며 본래 엔크리드가 기대했던 반응을 보였다.

“함정? 무슨 함정? 내 가게 밑에 왜 이런 게 있는 거요?”

그야 엔크리드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계속 모르진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알아볼 참이니까.

함정을 깔아 뒀고, 함정이 본연의 역할을 했다.

여기서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은.

함정을 넘어서면 무언가가 나온다는 거다.

숨길 게 있어야, 감추려고 노력하는 법이니.

“왜 여기에 이딴 짓을 했는지는.”

엔크리드는 잠시 말을 끊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알아볼 겁니다.”

엔크리드도 호기심이 솟구쳐 오른 참이니.

답하고 능숙하게 경사로를 밟고 내려갔다.

어디에 어떤 형태로 굴이 생겼는지, 이제는 눈을 감아도 훤했다.

그동안 수십 차례 오간 길이다. 육감의 문을 열겠다고 이 좁은 굴 안을 계속 돌아다녔다.

덕분에 땅의 굴곡까지 외울 판이었다.

그리 다시 여섯 개의 갈림길을 앞에 섰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통로는 폭발이.

세 번째 통로는 바람의 칼날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육감을 단련하기 위해 더 시간을 소비할 필요는 없었다.

할 만큼 했으니.

‘그럼.’

여섯 개의 통로 중 안전한 길은 어디인가.

속으로 되뇐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엔크리드는 이걸 만든 새끼의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었다.

‘음흉해.’

여섯 개 전부 함정이니까.

제 육감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렇다.

수십 번의 오늘 중, 당연히도 제 육감을 확인하는 작업도 있었다.

과연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올바른가.

올바른 감각이다.

기실 엔크리드는 여섯 번째 길도 잘못됐음을 알게 됐으니.

여섯 번째 통로에 들어가면 머리 위에서 뿌연 연기 같은 게 퍼졌다.

피부를 감싼 순간 수포가 일어나고, 들이켜면 검에 베이고 창에 찔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통증을 선물하는 독 안개였다.

여섯 개의 통로 모두에서 불길함이 느껴진다. 길이 없다. 막혔다.

여기서 멈춰야 할까? 발이 묶인 건가? 더는 손을 쓸 수 없나?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굴 너머로 향해야만 오늘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건.

길이 막혀 멈춘다는 건 오늘에 갇힌다는 소리였다.

상대는 찌르기에 능숙한 병사도 아니었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암살자도 아니었으며.

불리한 전장에서 마주한 적군 무리도 아니었다.

그저 함정일 뿐이지.

멈춰 있는, 움직이지 않는 이지(理智)가 존재하지 않는 스펠 트랩일 뿐.

엔크리드는 첫 번째 통로 앞에 섰다.

‘잘못 디디면 통구이.’

스펠 트랩은 어떻게 발동하는가.

육감의 문을 열었기에 본능의 영역에서 바라볼 수 있다.

횃불도 필요 없었다.

엔크리드는 통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을 뗄 때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만 대도 베일 듯한 칼날 사이를 맨몸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기분이었다.

트랩의 발동 원리는 감지다.

불길함이 느껴지는 곳을 피해 걷는다.

한 점의 집중을 발동하고 심장에 야수의 대담함이 깃드니.

발걸음이 흔들릴 경우는 없었다.

집중한 채로 육감의 문을 열어 봄으로.

스펠 트랩의 빈틈을 밟았다.

누군가 본다면 지그재그로 걷는 걸음일 뿐이지만.

엔크리드는 외줄을 걷는 기분으로 통과했다. 그런데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육감, 직감의 영역.

본능만으로 함정을 돌파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성취감에 가슴이 뿌듯해지긴 했다.

물론 이런 감정 따윈 잠시 뒤로 미뤄 둬야 할 시간이었다.

“일단.”

첫 번째는 넘어섰다.

이후 어둠 너머를 보며 횃불에 불을 붙였다.

길을 유심히 보는데, 아까와 같은 불길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저 앞에 뭐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직감이었다.

엔크리드는 조심히 걸어 나갔고, 곧 그 앞에 자신을 맞이한 놈을 볼 수 있었다.

“끄르르윽.”

굽은 등, 척추가 있는 자리로 뾰족한 가시 같은 뼈가 튀어나왔고.

횃불의 불빛에도 새파란 피부임이 보일 정도로 피부색이 옅다.

입은 인간보다 몇 배는 컸고, 걸쭉한 침을 흘리는 모습이 군침을 삼키는 듯하다.

손톱은 길고 팔뚝은 두꺼웠으며 눈깔은 까맸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근육의 결이 얼핏 보였다.

구부정한 허리 덕에 양 주먹이 바닥에 닿는 놈이었다.

구울(Ghoul)이다.

이 세상에는 마물과 마수가 존재했다.

신학자들의 말을 따르면, 먼 옛날 신이 서로 죽고 죽이며 생긴 존재라는데.

그거야 엔크리드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이런 놈들이 존재한다는 게 중요할 뿐.

짐승의 그것을 닮으면 마수.

그 외는 전부 마물이라 불렀다.

구울은 그중에서도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 괴물이었다.

“네가 왜 여기서 튀어나오냐?”

이걸 언데드라 할 수 있을까?

직공의 말이 반은 맞은 셈이다.

아래에 괴물이 있었으니까.

다만, 해골 병사 따위가 아니라 구울이 나왔을 뿐.

마물에게 대화를 나눌 지성은 없다. 먹이를 보고 달려들 뿐.

“끄워어어어!”

구울은 인간을 먹는다. 콧대 따위가 없어 얼굴에 달라붙은 구멍으로 보이는 그들의 납작한 들창코는 인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기관이었다.

먹이 냄새를 맡은 놈들은 냅다 덤볐다.

굴이 그리 비좁진 않았다.

그렇다고 좌우로 뛰어다니며 검을 휘두를 형편은 아니었지만.

환경에 따라 움직일 정도의 재량은 있으니.

스릉, 챙.

달려드는 구울을 보는 순간, 엔크리드는 롱소드를 뽑아 앞으로 비스듬히 세웠다.

‘셋.’

한 놈 뒤로 두 놈이 더 있다.

일반적으로 구울 하나를 잡으려면 장창병 둘이나 셋은 필요하다.

능숙한 병사라면 검을 들고 혼자서도 잡겠지만.

되도록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게 전술적으로는 옳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구울의 낯짝에 주먹질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엔크리드처럼 말이다.

뿍!

앞으로 비스듬히 세운 칼날을 들이밀어 첫 번째 구울의 가슴팍에 꽂고, 왼손으로만 검을 잡은 뒤 바깥쪽 사선으로 내리눌렀다.

“끄르꺼거르르!”

인간의 성대에서는 절대 나오지 못할 괴성이 터졌다. 검이 꽂힌 구울 한 마리가 엔크리드의 힘에 끌려 무릎을 꿇었다.

그 덕에 칼날이 놈의 몸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 밑으로 내려갔으나, 양단할 순 없었다.

이것만으로 왼팔 근육에 부하가 밀려왔다.

그렇게 한 놈을 제압하자, 그 뒤에 달려드는 놈이 손톱을 휘둘렀다.

예상한 바였기에 왼발을 중심으로 빙글 몸을 틀어 피하고, 자유가 된 오른손 주먹을 뻗어 끊어쳤다.

뻑!

주먹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놈의 고개가 뒤로 들렸다. 충격이 온전히 전달된 덕에 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돌격이 저지되자, 세 번째 구울 놈이 달려들려고 애썼다.

뒤에서 손을 쭉 뻗는데 다른 두 놈보다 팔이 더 길었다.

구울은 본래 제멋대로 생긴 족속이니.

어느 놈은 팔이 길고, 어느 놈을 다리가 두껍기도 했다.

엔크리드는 마지막 구울의 움직임을 진즉에 눈치챘기에 고개만 꺾어, 쭉 찌르는 손톱을 피했다.

틈을 만들었으니 그 뒤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하나씩.’

죽이면 될 일이다.

예전이었다면, 진실로 예전, 오늘을 반복하기 전의 그였다면 진즉에 죽었겠지만.

몸에 붙은 경험과 검술, 체술이 이제 남다른 수준까지 올라왔다.

왼손으로만 쥐고 있던 검을, 두 손으로 잡고 내리그었다.

양팔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부우욱.

“끄럭!”

구울 한 마리가 가슴부터 가랑이까지가 갈라져 밑으로 보랏빛 내장을 쏟아 냈다.

한쪽으로 굴러떨어진 횃불이 남은 두 마리의 얼굴을 비추고, 그 뒤로 그림자를 길게 이었다.

공포 따윈 잊은 괴물 두 마리가 재차 달려들고.

세 마리였을 때도 무난하게 한 마리를 죽여 없앤 엔크리드의 검이 다시금 춤을 췄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구울을 향해 스텝을 밟고, 중검식 상단 수평 베기로 한 놈의 목을 자르고.

마지막 남은 놈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머리통을 발로 힘껏 밟았다.

빡!

머리가 호박처럼 터지진 않았으나.

“끄르거, 끼륵.”

깨진 머리통에서 검은 체액이 줄줄 새긴 했다.

“이제 정말 궁금해졌는데.”

엔크리드가 말하며 남은 구울의 머리통에 검을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빠직.

검 끝이 구울의 머리통을 관통해 땅에 박혔다. 엔크리드는 깨진 머리통을 헤집은 검을 뽑았다.

구울 세 마리.

최소 하급 병사 여섯은 필요한 싸움이었으나, 엔크리드는 가뿐히 이겨 냈다.

구울의 손톱에는 독이 있기에 스치기만 해도 돌아가야 할 판이었지만, 스치지도 않았다.

그동안의 단련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무도 보지 않았으니, 그게 좀 서운하긴 해도.

곧 이 안에 숨은 놈에게는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제 검이 얼마나 매몰찬 편인지 말이다.

“후.”

몇 번 호흡을 고르고 검에 묻은 구울의 체액을 털고 품에서 싸구려 린넨을 꺼내 칼날을 닦아 낸 뒤, 엔크리드는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굴 안으로 향하는 것이 곧 내일로 향하는 길이 될 테니.

주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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