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본헤드
거리를 좁혔기에 일격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그리 검을 올려치는데 뭔가 엔크리드의 얼굴을 때렸다.
묵직한 한 방이, 마치 렘의 주먹에 맞은 것 같았다.
궁둥이부터 넘어진 엔크리드의 머리 위로 다시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턱을 당기고 옆으로 굴렀다.
퍽.
그러자 또 보이지 않는 뭔가, 그러니까 무형의 충격파가 그가 있던 자리를 후려쳤다.
더러운 하수가 없는 자리였다. 대신 축축한 흙더미가 튕겨 얼굴에 튀었다.
한쪽 눈을 찡그린 엔크리드의 눈이 바빠졌다.
‘안 보여.’
주문일 것이다.
당연한 예상이다. 얼굴만 있는 채로 입을 뻐끔거리는 머리통을 봤다.
그런 짓을 가능케 하는 게 누구겠나.
“피했구나. 괜히 고생만 더 한다. 얌전히 있으면 안 아프다.”
남자 마법사가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보이지 않으니, 막을 도리가 없었다. 엔크리드는 또 옆으로 굴렀다.
그가 있던 자리로 씽 하고 바람의 칼날 따위가 지나갔다.
물론 엔크리드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그저 무슨 주문의 일종이라는 것만 알았지.
‘이럴 땐 어떻게 하지.’
그동안 참 많은 검술 교관을 만났는데, 그들이 마법사 얘기만 나오면 하는 말이 있다.
“마법사? 대응하는 법은 하나지.”
“튀어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어.”
“상대하지 마라.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죽도록 고생만 하고 싶지 않다면.”
“운 좋으면 죽는 거고, 운 나쁘면 상상도 하지 마라.”
이들 중 이름깨나 날린 이들도 있다는 걸 보면, 그만큼 마법사란 존재와 주문이란 것의 위험함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반면 사고뭉치 분대원은 마법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다르긴 했다.
“활로 쏴 죽여.”
이건 렘.
“안 볼 때 죽입니다.”
이건 작센.
“꼭 싸워야 한다면 바짝 붙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형제님.”
아우딘다운 답이다.
라그나야 뭐.
“그냥 베면 죽는 건 똑같습니다.”
하고 답했고.
어쨌든, 여기서 내린 결론은.
마법사는 피하는 게 좋다는 것.
하지만 꼭 죽여야 한다면 라그나의 말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베면 죽는 건 똑같다.’
그러니 그렇게 하면 될 것이다.
뒤로 도망가는 선택지 따윈 없었다.
놔두면 계속 같은 짓을 할 놈이었다.
사람이 낡은 옷가지처럼 찢기고, 걸레처럼 널브러질 것이다.
신발 직공과 직공의 딸이 떠올랐다.
가만히 놔두면 그 둘이 제일 먼저 죽을 테니.
직공과 그의 딸.
일방적이긴 해도 수십 일을 지켜봤다.
교류가 없다고 해도 그들은 갈림길 앞을 서성이는 엔크리드를 위해 식사를 준비했고, 걱정을 남겼다.
그렇다고 그들이 엔크리드의 고생을 알진 않겠지만.
그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지켜야 할 게 있다면 지킬 뿐.
그게 엔크리드가 꾼 꿈이고, 걷고자 정한 길이며, 가리키는 이정표의 종착지였다.
“자자, 도망은 가지 말고, 착하지, 괜찮다.”
마법사가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하수도 위쪽에서 빛이 떠올랐다.
횃불보다 훨씬 밝은 광원이다. 머리 위로 떠 오른 빛 덕에 발밑으로 그림자가 퍼지듯 생겼다.
마법사는 웃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에게 이건 일일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그런 마법사를 보며 집중의 집중을 더 해 육감의 문을 활짝 열었다.
마법사는 엔크리드의 움직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는 그저 실험체, 버러지, 고깃덩이.
그의 눈에 엔크리드는 그렇게 보였다.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자, 무형의 충격파가 날아갔다.
펑!
‘운이 따르는구나.’
마법사의 눈에는 그리 보일 뿐이다.
엔크리드가 옆으로 툭 뛰어 주문을 피했으니까.
그리고 엔크리드는 묘한 감각에 기대어 움직이는 중이었고.
‘안 보여.’
안 보인다고 없는 건 아니다.
작은 깨달음과 함께다.
그럼 느낄 순 없나.
집중력과 육감이 합쳐져 늑대 마수의 움직임을 예측하듯.
이번에는 시신 애호가 마법사의 손짓을 보고 다음을 예측하고 무엇이든 느껴 본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마법사가 바람을 조형해 칼날로 만들어 던졌다.
세 방향에서 동시에 휘어지며 날아가는 바람의 칼날이다.
사신의 낫보다 매서운, 걸리면 저따위 천 갑옷은 썩둑 잘릴, 그런 주문이었으나.
엔크리드는 그걸 옆으로 굴러 피했다.
“또 피해?”
마법사는 말하면서도 양손을 연신 놀렸다. 그에 따라 보이지 않는 충격파와 칼날이 연이어 엔크리드를 노렸으나.
엔크리드는 그걸 다 피했다. 운은 아니었다.
감각, 오감을 넘어선 육감의 영역이다.
반쯤 게슴츠레 뜬 눈, 쫑긋하며 움직이는 귀, 오도독하고 소름이 돋은 피부.
모든 게 마법사가 부리는 수작을 연상케 했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죽일 길을 찾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휘파람 비도 하나만 던지면 끝날 일이었다.
베면 죽으니, 목이나 머리통에 구멍이 나도 죽겠지.
‘아니, 안 돼.’
순전한 감이다. 육감이 말했다. 비도 따위로는 죽일 수 없다고.
그럼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이게 자연스러운지는 모르겠으나.
오롯이 감으로 마법을 피하는 중이었다.
상대는 주문을 이용해 신기한 짓을 했으나.
‘어차피 화살이나 칼날이라고 생각하면.’
적병이 둔기나 검을 휘두르는 거로 생각한다면.
‘위협적인가?’
아니다. 피할 수 있었다. 오히려 미치 휴리어의 검이 더 날카롭다.
그러니 피한다. 피할 수 있었다.
휘파람 비도가 안 된다면 아우딘의 조언을 되새겨 볼 때였다.
‘붙으면 되는 것.’
피하고 단숨에 땅을 찬다. 마법사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이놈이!”
마법사는 놀랐다. 단숨에 몇 발짝, 보이지 않는 마법을 피해 달려들며 검을 치켜든 놈이다.
병사의 칼붙이가 위협적인 거리에 도달했다.
엔크리드의 거리, 검사의 거리다.
붕.
롱소드의 칼날이 머리 위로 떨어지자, 마법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삼켜라!”
강력한 마나와 주문이 합치되어 세상에 구현된다. 마법사의 말이 곧 세상에 현현하여 그 힘을 행사했다.
깊고 어두운 세계를 경험한 마법사만이 보일 수 있는 주문이었다.
그리 현현된 주문.
본래라면 마법사의 주문은 엔크리드의 내장 일부를 잘라내 없애야 했다.
이건 감으로 피할 수 있는 주문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
아니, 있긴 했다.
“웩.”
마법사는 당황했다. 분명 구현되어야 할 주문이 반사되어 제 몸에 충격으로 돌아왔으니.
그의 눈에 바람의 칼날이 잘린 천 갑옷 안쪽이 보였다.
까만 가죽 갑옷, 마법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물건이었다.
“너, 너, 뭘 입고 있는 거냐?”
“좋은 거.”
엔크리드가 마법사의 눈이 제 갑옷을 닿은 걸 보며 답했다.
그게 상대가 부린 무슨 술수를 막은 것처럼 보였으니.
엔크리드는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손도 눈치만큼 빨랐고.
훙!
칼날이 공기를 삼킨다. 내려치는 쇠붙이는 대장장이란 이들이 망치와 불길이란 주문으로 만든 검이라는 물건이었다.
으적, 쩍!
머리통이 잘리고 터진다. 중간에 검을 막는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힘으로 찍어 눌렀다.
마법사는 죽어 가며 속으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직 준비한 게 많은데! 바밀로! 바밀로!’
바밀로라 이름 붙인 제 아이를 깨우려고도 했다.
물론 다 실패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건 마법사라고 해서 다를 바 없으니.
죽은 뒤의 망상으로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순 없었다.
“아쉬워 보이네.”
엔크리드는 죽은 마법사를 발로 걷어찼다.
이후 엔크리드는 여기저기 찢긴 갬비슨을 벗었다. 도저히 더 입고 있을 수 없었다. 이건 걸레로도 못 쓸 판이었다.
보람이 솟구치진 않았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거의 들지 않았다.
목숨의 위협? 있었으나 넘어섰다.
그저 할 일을 했다는 마음만 들었다.
죽일 놈을 죽였다. 딱 그거다.
‘뒤처리하기 전에.’
이런저런 스펠 트랩을 깔아 둔 놈 아닌가.
여기저기 꿍쳐 놓은 게 좀 있지 않을까 싶어 안쪽을 뒤졌다.
혹시나 다른 함정이 발동할까 꽤 주의하며.
그렇게 찾은 게 갈색의 두꺼운 책 한 권, 금화 다섯 개가 든 크로나 주머니, 까만 나무 지팡이, 파란 돌과 흰 돌 몇 개, 밤색 장갑을 한 쌍 찾았다.
엔크리드는 몽땅 챙겼다.
나머지는 이름 모를 풀과 또 뭔지 모를 물건들이었다.
하나같이 보기만 해도 찝찝한 게 챙길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이제 돌아갈 요량으로 검을 닦아 넣는데, 쨍 하고 칼날 중간이 부러졌다.
“이런.”
절로 탄식이 나왔다.
검을 너무 험하게 써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마지막 마법사를 벨 때 묘한 저항감을 느끼긴 했다.
그게 원인일까. 알 순 없다.
어쨌든 미친 마법사가 꿍쳐 놓은 크로나로 또 검이나 사야 할 판이었다.
‘이어 붙일까?’
발레리산 강철이라고 했으니 고치면 또 쓸 만할지도 몰랐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뒤로 돌아 나갔다.
충격파를 여러 대 맞은 탓에 배가 욱신거렸고 골이 띵했지만, 버틸 만은 했다.
그리 걸어가던 엔크리드가 열 걸음도 안 걷고 돌아왔다.
“안 꺼지네?”
마법사가 주문으로 수작을 부린 줄 알았는데.
머리 위, 광원이 그대로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눈살을 찌푸리며 위를 보자, 빛을 뿜는 돌멩이가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홀로 떠 있는 마법 도구라.’
크로나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나.
‘이건 뭐.’
고작 주먹만 한 돌이었다. 위로 툭 뛰어 낚아채니, 손안에서도 계속 빛을 뿜어냈다.
일단 나갈 때 횃불 대신 쓰기 좋을 물건이 될 듯했다.
엔크리드가 다시금 자박자박 걸어서 왔던 길로 돌아가고.
한참 뒤에야 검은 고양이처럼 보이는 레이크 팬서 한 마리가 바닥에 내려섰다.
‘마법을 보고 피해?’
에스터는 몹시 놀랐다. 세상에 이런 재주를 부리는 놈이 있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물론, 상대 마법사의 실력이 형편없긴 했지만.
그러곤 또 새삼 깨달았다.
‘내가 모르는 게 당연한 거긴 하지.’
그리 세상을 주유하며 살진 않았다. 오히려 은둔하는 삶을 살았지.
그러니 이런 재주가 있는 놈도 어딘가에는 있겠지.
어쨌든.
‘횡재했네.’
에스터는 마법을 탐구하고 지식을 탐닉한다.
한때는 다른 마법사의 마도서가 궁금해 몇 개 훔쳐서 보기도 했었다.
에스터는 손톱으로 이리저리 물건을 뒤적이고는 코웃음을 쳤다.
‘수준이.’
조악했다.
그녀 자신이 볼 때는 그렇다.
횡재는 이런 물건 따위가 아니라, 이쪽이었다.
바밀로라고 했던가.
마수, 마물, 인간의 시체로 기워 만든 존재.
마법사의 육체 능력을 보완하기 위한 가디언이었다.
흔히 마법사는 이런 걸 플래시 골렘이라 불렀다.
사람이 보기에 원초적인 불쾌감을 자극하는 존재겠으나.
마법사에게는 굉장히 쓸 만한 괴물이라 하겠다.
에스터는 없는 힘을 쥐어짜, 손톱을 세워 플래시 골렘 이마에 마법진을 새겨 넣었다.
검은 땅과 불의 세계.
그녀가 가진 주문 세계 너머에 기워 만든 괴물을 집어넣는 술식이었다.
죽은 마법사는 더없이 멍청했다.
처음부터 골렘을 깨웠으면 엔크리드의 승산이 더없이 낮아졌을 텐데.
물론, 그걸 자신이 그냥 두고 보진 않았겠지만.
곧 마법진을 새기는 작업이 끝났다. 술식을 통해 세계와 세계가 연결되며.
플래시 골렘의 전신이 조각나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먼지처럼 으깨져 사라진다.
에스터의 내면세계와 연결된 이계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골렘이 있던 자리에는 앉은 흔적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걸 본 표범이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에스터는 기진맥진했다. 남은 미량의 마나를 전부 소진했으니.
숙소로 돌아가 푹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도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을 순 없으니.
에스터는 플래시 골렘을 만든 마법사를 기리며 잊지 않을 이름을 지었다.
“본헤드.”
그는 자신이 본 주문을 탐구하는 이들 중 가장 병신같은 놈이었다.
* * *
“도시 밑 하수구에 마법사가 있다고?”
“네.”
“그리고 그걸 죽였고?”
“네, 그렇습니다.”
엔크리드도 무덤덤했고, 중대장도 무덤덤했다.
이후 확인을 위해 그녀가 자리를 비웠고 엔크리드는 씻고 장비를 점검했다.
곧바로 마수 처리 의뢰에 지원할 생각도 있었는데, 검이 부러져 버렸다. 당장은 검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뭘 하고 온 거요?”
들른 숙소에서 렘이 엔크리드를 보고 물었다.
“부츠와 전쟁을 치르고 왔다.”
“아니, 그 직공은 에고 부츠를 만드는 거요? 부츠가 그렇게 잘 싸운다고?”
반은 농담, 반은 놀람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에고 부츠는 에고 소드를 빗대어 한 말이고 에고 소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검을 말한다. 물론 전설 수준의 얘기였다.
렘뿐 아니라 다들 엔크리드를 빤히 보는 게, 무슨 일이 있나 물어보는 눈치였다.
“보고부터 다시 하고 오마.”
중대장이 곧 돌아올 터, 괜히 자리를 비워 책잡힐 일을 만들진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에스터는?”
밖으로 나가기 전, 엔크리드가 주변을 돌아보며 묻자 구석에 있던 아우딘이 답했다.
“자주 자리를 비웁니다. 저녁이 되면 형제님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오겠지요.”
걱정하지 말란 소리였다.
하긴, 영리하다 못해 영악해 보이는 표범이다. 누가 어찌 해하진 못할 것이다.
그대로 중대장의 집무실로 돌아가자 얼마 안 있어 중대장이 돌아왔다.
“있더군. 스펠 트랩도, 죽은 마법사도.”
“네.”
“도시 밑에 있던 잠재적 위험이었다.”
“그렇습니까?”
“수고했다.”
중대장의 농담을 경계하던 엔크리드가 군례를 보였다.
왼손으로 검 손잡이를 내리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이후, 다시금 숙소로 돌아와 분대원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다들 놀랐다.
“거기서 마법사가 왜 나오는 거요?”
“음, 역시 베어서 죽이면 되는 겁니다.”
“하수도에?”
“몹쓸 놈을 징치하셨군요. 형제님.”
거기에 왜 마법사가 있는지는 엔크리드도 통 모를 일이었다.
부상까진 아니지만, 피로는 쌓였기에 이틀을 푹 쉰 엔크리드는 검을 이어 붙이려다가 대장장이에게 신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건 다 망가졌어. 안 돼. 무슨 짓을 한 건가? 뭐? 마법사를 베?”
대장장이가 엔크리드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마법사 일은 묻기로 했다. 괜히 시민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이었으니.
위협은 있었으나, 이제는 없다.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지켰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에 엔크리드도 큰 불만은 없었다.
“그 말이 진짜라고 치고, 내가 주문에 맞설 무기를 만들 위인으로 보이나?”
보더 가드에서는 꽤 알아주지만, 그렇다고 대륙에 이름을 날릴 만한 장인은 아닌 대장장이.
딱 그 정도였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젓자, 대장장이가 답했다.
“앞으로는 그런 짓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건 다시 못 써. 괜찮은 검? 지금은 없어. 하나 만들어 줘? 발레리산 강철은 없고 일반 철로 해야지.”
발레리산 강철은 쉬이 구할 수 없는 물건이긴 했다.
“아쉬운데, 그건.”
“며칠 기다려 보든지, 마수 때문에 일정이 좀 꼬여서 그렇지, 아는 사람이 이번에 누아르산 연철을 좀 들고 온다고 했으니. 비싼 건 알지? 두둑하게 들고 와야 할 거다.”
대장장이가 말하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군침이 도는 소리였다. 누아르산 연철은 보통의 연철보다 강도가 몇 배는 뛰어나, 무기에 쓰면 명검 소리는 못 들어도 대장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싼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발레리산 강철보다 구하기 더 어려운 물건이고.
그러니 기대가 될 수밖에.
대장장이 가게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이봐, 이봐! 어이, 병사!”
익숙한 목소리가 엔크리드를 잡았다.
시장 한복판이었다. 가로질러 가는 길을 붙든 이가 반쯤 뛰다시피 걸어와 엔크리드를 향해 낡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꽤 부피가 큰 주머니였다. 부츠 하나쯤은 너끈히 들어갈.
“자.”
“뭡니까?”
“신발, 다 낡았더구먼, 신어.”
신발 직공이었다. 그는 모르지만, 엔크리드는 벌써 수십 일을 봤던 구멍이 뚫린 구둣방의 주인.
“이걸 왜?”
“주면 그냥 받으면 그만이지, 뭘.”
직공은 쑥스러운지 툴툴대며 돌아섰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픽 웃음이 났다.
직공은 자신이 한 일을 모른다. 그저 의뢰를 처리한 것에 고마움을 느낀 게 전부였을 것이다.
부츠 하나.
괴이한 취미의 마법사를 죽인 것치고는 별거 없다 할 수 있겠으나.
부츠는 새것이었다.
마무리가 특별히 더 꼼꼼해, 어디 하나 거슬림이 없는.
그걸로 충분했다.
엔크리드는 부츠를 챙기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엔크리드는 손에 익진 않지만, 라그나가 비상용으로 갖고 있던 아밍 소드를 허리에 차고 마수를 죽이러 떠났다.
실전, 지금 필요한 게 실전이란 것에는 이의가 없었다.
조금, 마음이 급하기도 했다.
마법사의 굴을 탐험하며 얻은 경험을 어서 빨리 몸에 다 녹여 내고 싶었기에.
그는 어느 때보다 의욕이 넘쳤다.
“마수를 죽이러 가는 게 너무 신나 보이는 건 내 착각이요?”
렘이 함께했고 나가는 길에 웃으며 말했다.
“아니. 맞아, 신나.”
엔크리드는 여느 때처럼 렘의 말을 잘 받아쳤다.
진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