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정답이었다.
중갑보병 중대 소속 4소대장은 중앙에서 최근에 이쪽 부대에 전입된 지휘관이었다.
‘지랄 났군.’
부대에 소속된 김에 적응과 실전 훈련도 할 겸, 마물 소탕 임무를 나선 참이었다.
물론 그런 것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긴 했다.
대규모 인면견 무리 소탕이 본래 임무였으니.
그래도 괜찮았다.
중장보병이 괜히 크로나 잡아먹는 병과란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으니까.
결론적으로 아군 부대의 위력을 알기에 나선 길이었는데.
갑자기 하피가 튀어나왔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왜 갑자기 하피인가.
지원을 부르고.
중갑보병으로 방진을 짜고.
그사이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 몇이 죽었다.
쇠뇌가 괜히 허공을 가르는 사이, 지원군이 왔다.
달랑 경갑보병 둘.
‘장난해?’
그것도 겁도 없이 하피의 공격 영역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저건 자살이다.
지휘관은 엔크리드를 몰랐고, 렘을 몰랐다.
그는 최근 전입되어 부대 내 분위기에 적응 중이었다.
물론 주술파괴자니, 상급 병사 사고뭉치 분대장이니 하는 건 들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러다 나온 소탕 작전이었기에 둘을 보자마자 화부터 났다.
“이런 씨!”
절로 욕설이 튀어나온다. 중갑보병과 경갑보병 사이에 은근한 알력이 있다고 해도.
제 눈앞에서 동료가 죽는 걸 보는 게 즐거울 리가 없었다.
하물며 하피한테 머리통 따위가 뜯기는 걸 누가 보고 싶단 말인가.
경갑보병 둘은 엔크리드와 렘이었고, 실상 이 둘만 달랑 나타난 건 다른 부대원을 굳이 기다리지 않고 둘이 먼저 합류한 탓이었다.
그러니 본대에 요청한 지원 병력인 궁병대는 아직 도착도 안 한 거고.
“야, 뒤로……!”
마음이 급해서 전하려는 말이 전부 나오지 못했다. 그는 도망가거나, 대가리를 숙이라고 하고 싶었다.
이쪽에서는 하피의 발톱과 공격을 버틸 수 있는 구조다.
두꺼운 천갑옷 위 사슬갑옷, 다시 그 위로 얇은 철판을 덧댄 흉갑과 강철로 만든 건틀렛에 그리브까지.
거기에 사각 방패를 들고 방어 진형까지 구축했다.
거북이 중갑보병대란 별명에 걸맞은 전략적 방어 태세다.
지원군이 오기까지 버티기 충분하다는 거다.
그러니, 이쪽보다 만만한 이들이 하피에게는 더 쉬운 먹이였을 터다.
하피가 새로 온 먹잇감을 발견, 한 마리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지휘관의 눈에 붉은 깃이 훅하고 밑으로 떨어지며 긴 궤적을 그리는 게 보였다.
돕고 싶어도 도울 수단이 없었다.
이젠 얌전히 뒈지는 걸 보고 후일 복수를 기약할 도리 밖에.
그리 하피의 발톱에 병사의 머리통이 쪼개지기 직전이다.
칭.
슈컥.
지휘관의 귀에 쇠의 마찰음과 살을 베는 파육음 따위가 들렸다.
그의 눈에 보인 건 하피의 등판뿐이었다.
하피의 몸집은 성인 남성과 비슷하기에 떨어지는 하피에 가려진 경갑보병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확히 보이진 않았다.
보인 거라고는 하피의 날개 한쪽이 찢어지며, 몸통이 실패한 물수제비처럼 바닥에 퍽 하고 나가떨어지더니, 허공에 한 번 퉁겨져 바닥을 구르는 모습뿐.
붉은 깃을 자랑하며 유방을 출렁거리던 하피의 반신이 피로 물들고, 흙먼지가 놈의 전신을 뒤덮었다.
“끼에에에에에!”
바닥에 널브러진 하피가 울부짖는다. 지휘관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이거 뭐지?
“……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 외마디 물음만이 남았다.
지휘관의 눈이 상황을 훑고, 곧 이해의 영역에 모든 걸 쑤셔 넣었다.
‘하피가 날아왔고.’
그걸 검으로 벴다?
그게 돼?
쉬이 볼 수 없는 묘기였다.
다가오는 하피의 발톱이 조금만 어긋났으면? 타이밍을 놓치면? 베는 힘이 부족하면?
모든 게 문제 아닌가?
저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거다.
쇄도하는 하피를 상대로 저런 짓을 하는 놈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변방의 학살자란 변방 수비대에서도 저게 가능한 놈이 몇이나 있을까.
끼이익!
‘우연, 행운.’
운이 엄청나게 좋은 거다. 자신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머리 위, 떠다니는 하피 중 두 마리가 활공하며 둘을 노리고 다시금 지상으로 쇄도했다.
빨랐다. 하피의 발톱이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휘관의 눈이 지원군이랍시고 온 경갑보병 둘에게 꽂혔다.
하피가 들이치는 각도가 아까와 달랐기에.
지휘관의 눈에 둘의 대응이 명확히 보였다.
봤으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움직임이었기에 여전히 할 말은 없었지만.
도끼를 든 병사는 날아오는 발톱을 몸을 꺾어 피하더니, 도끼를 휘둘렀다.
휘둘렀다는 것만 인식했는데.
어느새 쩍 하고 하피의 머리통이 수직으로 쪼개졌다.
머리통이 쪼개진 하피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퍽 하고 터진 토마토처럼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생긴 긴 핏자국과 낭자한 마물의 피, 머리 터진 하피.
한 마리가 또 죽었다.
도끼질이 보인 광경이다.
나머지 병사 하나도 비슷한 짓을 또 했다.
처음 하피의 날개를 찢은 병사는 검을 들더니, 다시금 수직으로 벴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검을 휘두르는데, 칼날 앞으로 하피가 달려드는 것 같았다.
하피의 움직임을 예측해 검을 휘두른 결과다.
이 또한 묘기가 아니고 뭐겠나.
퍼억!
다만, 이번에는 조준이 엇나갔는지 하피의 가슴팍을 후려쳤고.
병사의 검이 하피의 반신을 쪼갰으나, 병사도 검을 놓쳤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끼엑.
여성의 유방을 닮은 하피의 젖무덤 두 개 사이에 꽂힌 검이다.
퍽 하고 바닥에 구르며 또다시 피를 흩뿌리는 마물이다.
내장을 쪼개고 부쉈으니.
저 또한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위로 올렸다.
남은 하피의 숫자는 여덟.
이쪽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나타나자마자 세 마리가 죽었다.
‘변방 수비대?’
지휘관은 상대를 오해했다. 일개 병사라고 보기에는 실력이 너무 압도적이었으니까.
특급 병사라는 게 이 정도였나?
전출 오기 전 변방의 학살자에 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지휘관의 눈에 둘의 뒤쪽 일부 무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전원 투사 무기, 투창이나 장궁, 쇠뇌 따위를 들고 오는 이들이었다.
망토를 두르고 독수리 문양의 견장을 찬 이들.
진짜 변방 수비대다.
이들을 이끄는 수비대원도 상황을 확인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다.
‘실력이.’
더 늘었다. 이제는 쉬이 이긴다고 확답할 수 없을 정도로.
수비대를 이끄는 건 토레스였다.
여러모로 엔크리드와 인연이 있는 변방 수비대 소속의 소대장이다.
마물을 죽이는 것만으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다만, 토레스는 날아오는 하피를 상대로 저런 묘기를 할 자신은 없었다.
그것도 두 번 연속으로는 더더욱.
‘운이 따라서?’
중갑보병 소대 지휘관과 똑같은 생각을 한 토레스다.
그런데 그 타이밍에 세 번째 하피가 날아들었다.
토레스의 시선이 하피에서 밑으로 떨어졌다.
그 자리에 막 죽은 하피의 가슴에서 검을 뽑는 엔크리드가 보였다.
“어이!”
토레스가 외쳤다. 위를 보라는 경고성이었다.
* * *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엔크리드는 점과 점을 이었고.
시간을 쪼갰으며.
직감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 첫 번째 하피의 날개를 잘랐다.
“휘유.”
옆에서 렘이 휘파람을 불었다. 손아귀에 남은 아찔한 저항감이 쇄도한 마물 하피의 묵직한 무게감을 알려 줬다.
벨 만했다.
무리는 없다. 이후 다시금 검을 든다. 하피가 날아오고 이번에는 가슴 정중앙을 베며 검을 놔 버렸다.
그대로 쥐고 있으면 손아귀가 찢어질 듯했다.
판단은 정확했다.
점과 점을 잇는 일격, 힘을 실은 검격.
결과는 마물의 죽음이다.
허리를 숙이며 검을 내려친 엔크리드의 머리 위로 하피의 발톱이 지나쳤다.
쌕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했으나, 위험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피하면 그만.’
단순한 공격 패턴이다.
피하고 베고 찌른다. 검술의 응용이다.
척척 걸어 죽은 하피의 출렁거리는 가슴 위, 인간이라면 빗장뼈 부위에 발을 얹고 검을 뽑았다.
“끼이익.”
질긴 생명력이다. 가슴이 반쯤 쪼개져 그 안에 있던 내장 따위가 흘러내렸는데 눈을 깜빡였다.
아직 살아 있었다.
엔크리드는 제가 벤 하피를 보고 있었지만, 그의 감각은 주변, 특히 위에서 내리꽂히는 하피를 주시했다.
보지 않아도 공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감각이다.
“어이!”
외침이 들렸으나, 그보다 먼저 움직이는 중이었다.
죽어 가는 하피의 날개를 검 끝으로 찍고 힘을 줬다.
우득!
양쪽 팔 근육에 부하가 걸리고, 허리와 허벅지까지 힘이 실렸다.
그대로 죽어 가는 하피를 위로 들쳐 올렸다.
뻑!
날아오던 하피가 거기에 맞아 나뒹굴었다.
하피로 하피를 막은 뒤, 엔크리드는 흘리기를 응용해 충격을 분산시키려 옆으로 굴렀다.
의도하고 예상하여 몸에 남은 충격을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구르자마자 일어난 엔크리드가 탁탁 뛰어서 바닥에 떨어진 하피의 머리통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장작을 쪼개듯 후려친 칼날에 하피의 머리통이 쩍 하고 쪼개졌다.
이거로 네 마리.
렘이 하나, 엔크리드가 셋을 죽였다.
처음 떨어진 놈도 이미 주변 병사가 쿼렐을 머리에 박아 뒀으니.
파닥파닥, 머리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던 하피 무리가 하나둘씩 멀어진다. 하피는 승산 없는 싸움을 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놈들이 도망갔고.
엔크리드는 팔을 늘어뜨린 채,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몇 번 더.’
싸우고 싶었다. 경험을 더 쌓아야 했다. 아직 배운 걸 익히고 되새기는 중이었다.
적응하고 배우는데 실전이 더 필요했다.
그럼, 하수구에서 얻었던 걸 완전히 몸에 붙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좋수?”
옆에서 렘이 낄낄대며 말했다. 눈치 빠른 야만인인지라, 자신의 상태를 이미 알아챈 듯했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이 정도면 이제 비범한 실력이라 할 수 있수다. 근데 참 신기하긴 하단 말이우. 실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떻게 또 하루 만에 이렇게 되는 건지.”
깊게 파고드는 건 아니지만, 의문은 표한다. 당연했다. 하루 만에 최악의 재능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는 게 어디 정상일까.
엔크리드는 매일 하는 변명을 뱉었다.
“운이 좋았지.”
렘은 운으로 실력을 이리 기를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따질 생각은 없었다.
아무렴 어떻단 말인가.
이 작자가 이리 신나서 검을 휘두르는 걸 보니, 자기도 재밌는걸.
“예전에 하피에게 쫓겨서 간신히 살아남은 적이 있었는데.”
엔크리드가 중얼거렸다.
“그랬수?”
“그랬지.”
딱히 감정이나 의미를 담은 말은 아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지.
엔크리드는 그때 죽은 동료가 떠올렸다. 그리고 털어 냈다.
‘이게 복수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하피 무리를 죽인 것에 만족감은 있다. 아쉬움이 더 큰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둘, 소속이, 아니 근데.”
거북이처럼 등껍질 방어 진형을 갖추고 버티던 지휘관이 다가왔다.
황당한 듯했다.
“4중대 4소대 4분대장 엔크리드입니다.”
군례로 답하고 말하니.
“분대장? 변방 수비대가 아니라?”
아닌데.
“변방 수비대는 이쪽.”
아는 얼굴, 토레스가 다가왔다. 그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엔크리드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눈이 엔크리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실력이 늘었을까.
“지원을 오긴 했는데.”
화살 한 발도 못 쏴 봤다.
이게 뭔지, 대체.
곧 중갑보병중대 4소대장과 토레스가 대강 인사를 나누고 상황을 정리했다.
엔크리드는 둘의 대화를 듣다가 대뜸 물었다.
자신에게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끝난 겁니까?”
“……뭘 묻는 건가?”
“마물 소탕, 이제 끝인 건지 궁금해서.”
뭐지, 왜 묻는 거지?
하피 네 마리를 죽인 경갑보병 둘.
일반 병사 둘이 중갑보병소대를 구했다. 대단한 업적까진 아니지만, 포상받을 만한 일인 것 같은데.
그중 하나는 진지하게 이게 끝이냐 묻고 있고.
이민족으로 보이는 다른 한 놈은 옆에서 낄낄 웃기 바쁘다.
뭐지, 이 미친 새끼들 조합은.
소대장은 생각하며 답했다.
“본래 타격 목표는 무리를 이룬 인면견 무리 소탕이니, 끝은 아니다.”
소대장은 파견 목적을 잊지 않았다. 보더 가드 주변에 인면견 무리가 집단을 이루는 바람에 상단을 비롯해 행상 무리의 발이 묶였다.
덕분에 나선 길 아닌가.
성벽 바깥, 상단이 오가는 가도에 인면견 무리가 나온 건 아니지만.
근처에 한두 마리씩 모습을 보이는 걸 미뤄보아 곧 문제가 생길 게 자명했다.
주변 마물과 마수를 소탕해 도시 안전을 보장하는 임무다.
“합류하고 싶습니다.”
엔크리드의 말에 소대장은 생각했다.
‘더 싸우고 싶다는 건가? 싸우고 싶어 안달 나 보이는데? 내 눈이 이상한 건가?’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 정확한 거였다.
소대장이 보는 게 정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