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벌인가 기회인가?
은은한 달빛이 차오른 밤, 평소와 똑같은 훈련으로 몸을 굴린 뒤, 씻고 들어온 참이었다.
날이 풀리고 있다고 해도 밤은 아직 추웠기에 숙소에 들어온 엔크리드의 어깨 위로 김이 솟았다.
이틀 뒷면 도강, 강을 넘어서 지형 파악 작전에 나서야 하는 걸 알면서도 훈련 강도는 변함이 없다.
기실 변할 게 없는 일이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든 하루를 쌓아 내일을 향해 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엔크리드의 일상도 똑같았다.
뱃사공이 지겨운 놈이라고 평한 그대로.
그렇게 돌아온 숙소다. 한쪽에서 크라이스와 뭐라 말을 나누던 엔리가 다가오다 멈췄다.
그의 눈이 엔크리드의 침상에 닿았다.
에스터가 이미 엔크리드의 침상 위에 자리를 잡은 채였다.
마도서를 갖고 놀다가도 잘 시간만 되면 제자리가 저기인 듯 저리 자리를 잡는다.
에스터가 침상 위에서 제 앞발에 머리를 기대고 엎드린 채였다.
그런 에스터의 시선이 엔리를 향했다가 도로 제 발로 향했다.
관심이 조금도 없다는 뜻이었다.
엔리는 그런 레이크 팬서를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했다.
함부로 그 곁을 지나려고도 안 했으니.
레이크 팬서가 그린 펄 평원에서는 수호 영물처럼 여겨진다고 했던가.
그렇게 침대를 사이에 두고 엔리가 목소리를 조금 높여 물었다.
“패스파인더 훈련을 따로 받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전에 보니까 그쪽으로 좀 아는 게 있던 것 같으신데.”
그런 적 없다. 간신히 길 찾기만 하는 정도였다.
다만, 엔리가 오해하는 이유도 알았고 이해할 순 있었다.
‘다 그쪽한테 배웠는데.’
무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상대는 기억할 수 없는 일이니.
일전 그린 펄 내의 키다리 풀밭에서 엔리의 지식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오늘을 반복하며 몇 가지를 배운 게 전부였고.
엔크리드는 이마를 긁으며 답했다.
“전혀.”
“그럼, 강 위쪽 길은 좀 아십니까?”
펜-하닐 위쪽이라면 북방 대 쪽에 가깝다.
용병 일에 종사하면서도 가본 적이 없었다.
“이제 봄이라 땅이 슬슬 녹긴 해도 아직은 딱딱할 겁니다. 그쪽 길을 오간 적이 몇 번 있는데 아는 바를 전해 드릴까요?”
엔리는 사려 깊은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이라 사냥꾼이 된 걸까.
아니면 사냥꾼으로 살다 보니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그는 앞뒤를 따져 현재 가장 필요한 일을 하는 타입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부대 내에 녹아들기도 했고.
지금도 크라이스와 뭐라 말을 한창 나누다 일어난 참이었다.
렘도 딱히 엔리를 들볶지 않았다.
렘을 빼면 나머지야 무시하면 무시했지, 딱히 시비를 거는 쪽은 아니니.
“사냥꾼 출신이라더니 어디서 좀 놀았나 보네.”
렘이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말했다. 손에는 도끼를 들고 삭삭 숫돌로 날을 가는 중이다.
그러며 시선을 한쪽으로 뿌리는데, 그쪽에는 앤드류와 맥이 있었다.
숙소 구석이다.
앤드류가 그 시선에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가 폈다.
“그만해라.”
엔크리드는 렘에게 경고했다.
“아니, 지금 또 차별대우하는 거요? 새로 온 사람 챙기겠다고? 그렇게 새 부인 들이고 전 부인을 허술하게 대하다가 등에 칼 맞고 그러는 거요.”
말이 앞뒤가 안 맞지 않나.
그리고 누가 전 부인이고 새 부인인가.
“미친놈.”
한마디로 렘의 성격과 삶을 일축한 엔크리드가 엔리를 향해 다가갔다.
엔리가 에스터 때문에 엔크리드의 침대에는 다가올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캬릉.”
침대를 지나치자, 에스터가 발로 엔크리드의 허벅지를 툭 치며 울었다.
그 앞발질이 어서 일을 끝내고 침대로 오라는 것 같았다.
‘너도 질투하냐?’
이거 렘만 문제가 아닌데.
숙소에 묘한 기류가 흐르긴 했다.
엔리와 앤드류, 맥이 합류한 뒤에 흐르는 기류다.
괜히 사고뭉치 분대가 아니었다.
새로 온 사람을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엔크리드도 굳이 이들을 섞으려 하진 않았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라는 걸 알기도 했고.
굳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일 필요도 없다고도 생각했으니까.
전장에 나서면 각자 알아서 싸우는 이들이다.
괜히 손발 맞추겠다고 따라다니면 제 명대로 못 죽기 딱 좋을 판일 테니.
제 목숨은 제가 알아서 챙길 것.
이게 사고뭉치 분대의 유일한 지침이니.
“진땀이 흐릅니다.”
합류하자마자 슬쩍 눈치를 보던 엔리가 그리 말했었다.
근데 이게 그나마 나은 분위기라는 건 알까.
이전, 새로운 부대원이 왔을 때는 분위기가 정말 살벌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분대장인 엔크리드를 무시했고.
그런 이들은 꼭 며칠 뒤에 어딘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쳐 후송되곤 했다.
렘의 짓일 때도 있었고.
다른 이의 짓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분대원 작품이긴 하겠지.’
엔크리드도 눈치 하나는 비상했다.
이번에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들은 다 아는 얼굴이고,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좋아하는 편 같으니.
그럼 적어도 어딘가 부러져서 나갈 일은 없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럴듯했다.
“펜-하닐 강 위쪽에서 주의할 게 몇 개 있을 겁니다. 대부분 알아서 하시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좋을 것 같으니. 혹시 납작한 돌판 같은 거 아십니까? 강 위쪽에 그런 돌이 많은데…….”
이후, 엔리에게 들은 것들은 전부 산지식들이었다.
직접 경험하고 겪은 것, 선대 사냥꾼 시절부터 이어져 온 요령들.
납작한 돌 중 황톳빛이 나는 걸 제외하곤 전부 불에 달구면 터진다는 것.
황톳빛 돌 밑에는 독사가 숨어 있을 때가 있다는 것.
강의 수심이 깊어지고 유속이 빨라지는 구간이 있다는 것 등.
하루 만에 전부 외울 순 없었으나, 대강이라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큰 차이였다.
그리 하나씩 듣고 외우고 있자니, 어느새 눈을 붙일 시간이었다.
언제 왔는지, 맥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다가와 속삭였다.
“부탁이 있는데.”
그 말에 근무를 나간 라그나를 제외한 나머지 분대원의 시선이 꽂히는 것 같았다.
육감의 경고다.
‘놔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이대로 놔두면 어떻게 되려나.
작전에서 돌아와 말라죽은 앤드류와 맥을 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전출 요청 좀 해 주시오.”
맥은 사나운 시선에도 끝내 할 말을 했다.
“음, 형제님.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그리 쉽진 않지요.”
아우딘이다. 이건 농담이었다. 상대의 반응을 보고 짓궂게 행동하는 건 사고뭉치 분대의 전통과도 같은 것이니.
다만 듣는 쪽에서는 이게 농담인가 싶을 뿐.
맥이 그 말에 ‘다 듣고 있었나’라고 중얼거렸고.
렘이 뭐라 입을 열기 전, 앤드류가 먼저 나섰다.
벌떡 일어나더니, 대뜸 소리치듯 말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본데, 그럼 덤비든가!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분대장, 아니 소대장 밑에서 배우겠다. 절대 안 나가!”
패기다. 젊다 못해 어리다고 말해도 좋을 병사의 패기.
그 패기가 기꺼웠을까.
“내가 먼저.”
렘이 벌떡 일어났다. 날을 갈던 도끼를 들고서다.
그가 혀를 내밀어 도끼날을 핥는 시늉을 했다.
“어딜 잘라 줄까.”
그걸 지켜보는데 엔크리드조차도 섬뜩했다.
이민족의 외모, 회색빛이 도는 눈,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덤비면 최소 팔 한쪽은 잃을 것 같다.
“네가 먼저 하면 난 병신이나 상대하라는 건가? 내가 먼저다.”
그 말에 작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뱉는다. 이게 앤드류가 합류하고 나서 그를 향해서 하는 첫마디였다.
“형제님들, 아시지 않습니까? 전 죽이진 않습니다. 주물러만 드리지. 그러니 제가 먼저 해야지요.”
셋 다 의욕이 넘쳤다. 그리고 그걸 본 맥이 엔크리드의 소매를 잡아서 흔들었다.
“시발, 말려, 쟤들 뭐야. 앤드류 님 왜 그런 말을.”
맥이 울기 전에 말려야 했다. 다 큰 남자가 찔끔찔끔 우는 걸 볼 순 없으니.
“그만해라.”
근데 이게 또 다행인 것 같은데.
렘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저리 상대하지 않는다.
‘어딜 잘라 줄까’는 실상 대련 한판 해 주겠다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호의다.
작센은 무시로 일관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말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호의인 거고.
아우딘 또한 마찬가지다. 호의가 아니라면 ‘형제님 자중하십시오’ 따위의 말이나 하겠지.
애초에, 마음에 안 들었다면 아까 같은 농담도 안 할 테고.
이거야 원,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근데 꼬맹아, 내가 좀 바쁘긴 하거든? 일단 우리 소대장 나리께서 임무에 나가면 보도록 할까? 그때 시간이 펑펑 남아돌 예정이니까. 그때는 나가고 싶다고 울어도 안 보내 줄 거다.”
렘이 여전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섬뜩하긴 했다.
앤드류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걸 정신력만큼은 일품이라고 해야 할까.
“언제든 덤벼! 난 가드너 가문의 앤드류다. 피하진 않겠다!”
목숨을 건 각오로 보이는 게 엔크리드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걸 보며 크라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엔리는 한 걸음 물러나 바라봤으며.
렘은 실실 웃음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
아우딘은 그저 ‘형제님 진정하시지요, 어차피 겪을 일이니’라고 중얼거렸다.
작센이야, 무표정하게 둘의 전신을 훑을 뿐이다. 아주 작게 속삭이긴 했다.
“손가락 몇 개쯤은 잘라도 되지 않을까.”
저게 진심일까 봐 더 섬뜩한데.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다치게 하지 마라. 같은 분대원이다. 곧 전장에 나설 몸이고.”
경고이자, 다짐을 받아 두는 거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말릴 순 없는 노릇이니.
그럴 능력도 안 되고.
“대련한다고 큰 소리 나지 않게 하고.”
“걱정 마슈. 혀부터 잘라 낼 테니.”
그 농담 좀 그만하라니까.
“덤벼! 덤비라고!”
공황에 빠진 앤드류를 진정시키느라 잘 시간이 지나 버렸다.
엔크리드가 어찌어찌 상황을 수습하고 잠자리에 들자, 에스터가 품에 들어와 가슴팍을 때렸다.
그게 늦게 들어온다고 나무라는 것처럼 느껴져, 에스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그러자 표범이 곧 갸르릉거리며 엔크리드의 품에 파고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엔크리드라고 해서 앞날이 아예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가끔 꿈에서 뱃사공이 끔찍한 말을 내뱉음에야.
오늘도 그랬다.
눈을 감고 잠이 들었더니, 까맣게 굽이친 강이 보였다.
“갇혀서 울부짖어라, 그 울음이 내 양식이요, 즐거움이 될 테니.”
까까까까!
어떻게 웃으면 저딴 웃음소리를 내는 걸까.
오늘에 갇히는 건 괴롭고 두렵다. 더는 다음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불안감에 가슴이 저렸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잠에서 깬 엔크리드는 악몽을 털어 냈다.
그거로 끝이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하고.
길을 걷는 건 그대로이니.
“좋은 아침.”
새벽 나절에 눈을 뜬 엔크리드는 홀로 중얼거리고는 똑같은 하루를 시작했다.
고립의 기법으로 시작해 발라프의 침대 무투술.
이후 렘과의 대련, 라그나와 검술 단련.
작센과 함께 살기를 뿌리는 것과 육감을 단련하는 것까지.
“어떤 부분에서 직감은 위험한 무기입니다. 상대가 능숙하게 속일 줄 안다면 그대로 속아 버리니까.”
작센의 말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전하다.
단련하고 경험하고 실전을 통해 갈고닦는 것.
앤드류와 맥, 앤리는 엔크리드가 있을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 지내긴 했다.
엔크리드가 보기에 방식은 지랄 맞아도 분대원 전부가 호의를 보이는 것 같았으니.
받아들이는 처지에서야.
‘꽤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남는 게 있지 않을까.
자신이 그랬듯 말이다.
그렇게 이틀.
“가자.”
새벽 나절, 잠이 든 분대원 사이를 지나쳐 숙소 밖으로 나섰다.
펜-하닐 강을 넘어 지형 파악 임무를 나서는 날이었다.
대대장 직속 명령이다.
실패하면 골치 아픈 일이지만.
성공하면 그만한 보상이 따를 일.
이번에 온 대대장이 그런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크라이스가 신나게 떠든 내용이다.
“마커스라고, 전쟁광이라던데요? 대신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꼭 벌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나우릴리아 왕국의 군 정책이 만든 괴물 같은 거죠.”
공을 이룬 자에게는 그만한 대가를.
죄를 지은 자에게는 용서 없는 칼날을.
왕국의 군대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지휘관이란 거다.
그럼, 지금 나서는 임무는 무엇일까. 어떤 목적일까?
‘이건 벌일까.’
아니면 기회일까.
엔크리드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을 증명하고 위명을 쌓는 것.
그게 자신 또한 바라는 바 아니었던가.
“또 만나는군.”
성문을 나서기 전, 강을 건너는 임무에 합류한 인원이다. 정확히는 엔크리드가 합류해서 만난 거로 해야겠지만.
소대 지휘관으로 임명받아 나선 사람, 변방 수비대의 토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