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01화 (101/170)

101.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3)

세 번째 방법, 그러니까 이틀 뒤 새벽에 상단으로 위장해서 크로스 가드 안으로 들어가자고 설득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감이 안 좋아.”

성벽을 타고 넘자고 했을 때와 똑같은 이유다.

토레스가 지지하고, 핀이 데면데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 뭐, 오늘도 여기서 묵어야겠네.”

굴을 파 둔 야영지다.

그 소식에 요리 전담 병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녁 반찬으로 그걸 꺼낼까요?”

레인져 핀을 필두로 한 전방 정찰대.

이들이 한 번 작전에 나오면 머무는 시간이 평균 반년이다.

물론 중간에 일이 터지면 한두 달 만에 복귀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벌써 여덟 달째 이곳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그리 있다 보니 별짓을 다 했는데.

개중에는 잡아 둔 짐승의 고기를 염장해서 햄을 만들어 두는 것도 있었다.

“그럼 한잔 마셔 볼까?”

핀이 신나서 그 말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전장에 있는 이들보다 더 신경이 곤두서 있어야 할 부대인데도 신경줄이 무딘 건지 두꺼운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이런 날을 위해서 평소에 더 예민한 건지도 모르지.’

식당으로 삼은 곳에서 연기가 나는 것도 주의했고.

주변 경계를 위해 돌아가며 크게 원을 그리며 순찰하는 일도 잦았으며.

눈 밝은 대원 둘이 항상 바깥쪽을 바라보며 경계도 했다.

그런 정찰대를 보고 있자니, 이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곧기만 하면 부러지기 쉽다. 필요하다면 부드럽게 휘어질 줄도 알아야지.”

이건 어떤 교관한테 들었더라.

‘교관이 아니었지.’

지방 도시를 순례하던 교단 소속의 성전사였다.

시간이 없어 가르침을 베풀지 못하겠으니 짧고 굵게 대련으로 해결하자고 했었다.

껄껄 웃으며 제 수염을 쓰다듬는 걸 보면 성직자가 아니라 산적이라고 해도 믿을 외모였으나, 그는 존경받는 성직자이자, 뛰어난 전사였다.

“휘어진다고 해서 물러지는 게 아니다. 중심이 굳건하면 쉬이 부러지는 법이 없지. 쉽게 설명해 주랴? 악 좀 그만 지르라는 거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악을 지르는 것처럼 들린다고 했던가.

그래서인가.

새삼 제 검이 어찌 보일지 궁금해지는 건.

치링.

마음이 가기에 그대로 움직였다.

“……술이나 한잔하자는데 또 왜 저래.”

꿍쳐 둔 술병을 찾아온 대원에게 막 술병을 건네받은 핀이 중얼거렸다.

일어난 엔크리드는 검을 뽑아 휘둘렀다.

반복된 오늘과 상관 있는 것도 아니요.

최근에 배웠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의문에서 시작된 칼질이었다.

그때 자신과 마주했던 성전사는 엔크리드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악을 내지른다고 했다.

부러질 수 없다고 발악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근육을 부드럽게 쓸 줄 알아야 검도 더 잘 튀어 나간다.”

껄껄 웃던 성전사의 얼굴 뒤로 분대원의 얼굴이 겹쳤다.

수백 번에 걸친 대련이다.

대련 중 렘은 어땠나, 그의 근육은 탄력 그 자체였다.

도끼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의 근간에는 여유가 있었다.

지지 않으리란 믿음 때문에?

‘아니.’

채찍처럼 휘어지는 팔뚝과 도끼, 렘의 얼굴, 부드러운 근육.

모든 게 섞여 내놓는 답이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힘을 썼다.’

라그나는 어땠나, 무기력해 보이는 손짓이지만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검술이 엮여 있으니.

작센도 아우딘도 마찬가지였다.

뻣뻣해 보이는 태도와 달리 작센도 항상 여유가 있었고.

아우딘은 팔을 이리저리 잡아 꺾으면서 엔크리드를 놀리기도 했지만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반면 자신은 어떠한가.

‘어깨.’

아니, 전신에 힘을 주고 싸웠다. 점과 점을 이을 때도 그리했다.

항상 전력을 다해야 했으니까.

최선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게 바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는 거다.

엔크리드가 허공에 검을 휘두른다. 훙, 평소와 비교하면 허무할 정도로 힘이 빠진 채다.

‘이건 그냥 힘을 뺀 거고.’

몸에서 힘을 뺀다고 검술 자체의 위력을 죽이라는 게 아님에야.

방법, 길, 이정표 따위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다고 곧바로 할 수는 없다.

안다. 너무도 잘 안다.

엔크리드는 제 재능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저 어깨에 힘을 빼야 하는 걸 깨달았다는 것뿐.

다만, 깨달음 자체만으로도 두근대며 심장이 뛰었다.

기쁨과 희열이 전신을 채웠다.

똑바로 걸을 수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길이 보이며 생기는 희열이다.

그리고 엔크리드에게 검은 곧 삶이었고, 삶은 곧 검이었으며.

꿈을 향해 걷는 동반자였다.

그리 희열에 찬 채로 떠오르는 의문 하나.

‘발악만이 답인가.’

항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고 다짐했다.

수차례 마음을 다잡았다.

버티고 또 버티며 발악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해 왔으나.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생각과 함께 검을 내리그었다.

쉭.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전과 달랐다.

그걸 들은 엔크리드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조금 전 칼질.

그저 위에서 밑으로 휘두르는 칼질에 향수를 느꼈다.

언제였던가.

앤드류와 엔리가 함께한 키다리 풀밭에서였다.

흔히 말하는 손에 느낌이 나지 않는 검격.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수없이 해내는 그 일격.

조금 전 눈앞에 상대가 있었다면, 손에 감촉도 남기지 않으며 벨 수 있었을 터였다.

다시금 똑같은 느낌을 얻기 위해 수없이 반복했음에도 결국, 단 한 번도 ‘손에 느낌이 나지 않는 검격’을 다시 할 수 없었는데.

‘이게 되네.’

지금 제 손에서 그 검격이 이뤄졌음에.

이게 어떻게 기쁘지 않겠나.

“조금 전 칼질은 뭐가 좀 다른 것 같은데.”

“그러게. 흔치 않은 베기였다.”

핀과 토레스가 한쪽에서 궁둥이를 붙인 채 앉아 입을 열었다. 둘 다 보는 눈이 있었다.

이어 핀이 말을 덧붙였다.

“근데 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왜 자꾸 혼자 쪼개?”

“그건 나한테 묻지 말고. 나도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니까. 정상이 아닌 건 본대에서도 유명한 친구라고.”

엔크리드는 둘의 대화를 가뿐하게 흘려들었다.

다시금 검을 몇 번이고 휘두르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생각이다.

‘발악하되.’

어깨의 힘을 뺀 발악은 어떤가.

반복된 오늘 안에서 꼭 발버둥 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

악을 내지르는 것만이 길은 아니라는 거다.

중요한 건 무엇인가, 내일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발걸음, 마음가짐, 그사이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는 것.

깨달음이다. 깨우침이다. 새로운 배움이다.

또 그게 기뻐 웃고 있자니.

“아우, 생긴 게 저러니 저렇게 웃어도 괜찮긴 하네. 보통이라면 미친놈 같아 보여야 하는데, 왜 그럴듯하냐.”

핀이 술을 한잔 걸치며 하는 말이다.

“난?”

토레스가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었고.

그는 그대로 무시당했다.

대원 몇이 낄낄대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금세 곁을 허락한 이들이다.

그렇게 검을 세차게 휘두르는 사이, 핀과 토레스와 대원 몇이 술 몇 잔을 나눠 마셨다.

넉넉히 마실 양도 없을뿐더러, 독주도 아니었다.

도시 안이라면 흔히 구할 수 있는 싸구려 과실주였다.

그와 곁들어 식당으로 삼은 숲에서 염장하고 훈제한 햄을 몇 조각 잘라서 먹자니.

“넌 꼭 식당 차려라.”

요리사가 꿈인 정찰대원에게 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엔크리드는 술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오늘은 마실 생각도 없었지만, 마시려고 해도 마실 게 없었다.

검을 휘두르고 씻는 사이, 나머지가 냉큼 해치웠다.

“왜? 그 얼굴에 술도 마시고 싶다 이거냐?”

토레스가 괜히 툴툴거렸다.

웃으며 떠들 정도는 아니었으나, 적당히 풀어지는 시간이다.

물론, 이럴 때도 더듬이를 세우듯 예민한 이들이 몇 있긴 했다.

핀도 그중 하나였다.

술 한두 잔을 입에 대긴 했으나, 모두를 책임지는 위치 아니던가.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굴에 돌아온 밤이다.

개구멍이라 부르는 땅굴을 향하든, 성벽으로 가든.

본래라면 오늘 이곳에서 머무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했다.

핀이 떠나면 주둔지를 비우고 본대와 가까운 곳에 다시 집결하기로 했었다.

그 모든 게 상단으로 위장하기로 하며 틀어졌고, 본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밤이 다가왔다.

두 개의 달이 뜨고 주변을 파랗게 비춘다. 엔크리드는 굴에 들어가기 전 고개를 들어 두 개의 달을 봤다.

둥글고 크게 뜬 달은 언제나 보이는 달.

두 번째 새끼 달은 보름 때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달이다.

‘밝다.’

주변이 훤하다. 밤을 새워 봤자, 어차피 오늘은 반복된다. 도시 내 구두 직공의 가게 밑을 파고들며 이미 배운 바다.

그러니 자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건 의미가 없었다.

눈이나 붙여, 괜한 피로를 쌓지 않으려 했다.

이제 막 깊은 밤이 시작되기 시작하는 시점.

어제 반복한 오늘과 비교하자면 막 성벽 앞에 도착했을 때쯤이리라.

아우우우우!

꽤 가까운 곳에서 터진 음성이다.

엔크리드는 마법사에게 죽으며 제 육감이 발동하지 않은 이유를 대강 알아챘다.

불길함이 발동하지 않는 이유.

‘주문이 수작을 부릴 때.’

성벽을 오르는 내내 머리 위에 장미 넝쿨인지 장미 가시인지 하는 마법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수작을 부렸기에 위쪽의 기척을 읽지 못했다.

소리를 듣지 못했고 불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지금은?

“씹! 기상! 비상이다! 비상!”

경계 근무 겸 불침번을 서던 정찰대원의 외침이다.

늑대의 울음소리, 병사의 경고성, 이후 들리는 소리다.

타닥! 타닥! 타닥!

무언가 내달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달빛을 등진 마물이 나타났다.

대륙 동쪽 끝 어딘가에 모여 사는 수인이라는 종이 있다. 인간과 야수의 특성이 섞인 독특한 아인종인데.

지금 나타난 마물은 그 수인의 실패작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조물주가 빚은 실패작이기에.

그들은 언제나 피를 갈구하고 인간을 증오하니.

아우우우!

울음의 주인이다.

마치 발끝으로 서 있는 것처럼 발목이 뒤쪽으로 삐죽 솟았고.

회색 털로 전신을 감싸고 짐승 특유의 노란 눈동자가 빛났다.

주둥이는 쭉 튀어나왔고, 그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달빛을 등진 마물의 이름은 라이칸스로프.

다른 말로 하자면 웨어울프, 늑대인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수인이라는 종(種)이 아니기에, 대부분 마물이 그러하듯 말은 통하지 않았다.

선두에 선 놈은 애꾸였다.

왼쪽 눈 위를 선명하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선명하게 보였다.

하나만 남은 노란 눈알로 주변을 둘러본 놈이 입을 벌렸다.

카아아!

마물의 외침이 터졌다.

그게 엔크리드의 귀에는 돌격이란 소리로 들렸다.

“정신 차려!”

반사적으로 외쳤다.

오늘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도전도 하지 않아 멈춘 하루가 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결과는 후자였다.

웨어울프,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선두에 나선 놈을 제외한 다른 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달빛이 밝은데도 놈들을 한눈에 찾기 어려웠다.

타닥타닥하고 바닥을 차는 소리와 함께 어둠을 가로지르는 그림자만 남을 뿐.

나무 사이, 달빛이 가려지는 곳, 그런 곳에서 노란 안광이 선을 그리며 빛났다.

달빛 아래 튀어나온 놈들은 뭉친 인간을 두고 뱅뱅 돌았고.

잔상이 보일 정도로 빠른 뜀박질이었다.

“이런 씨.”

엔크리드는 여기서 또 깨달은 점이 있었다.

불길함이다. 왜 어떤 불길함도 느끼지 못했는가.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핀의 경계병은 왜 늑대인간의 접근을 이리도 늦게 알아챘는가.

‘뭔가 수작을 부렸겠지.’

그러니까 여기에도 마법사가 관여했을 거라는 거다.

늑대인간이 저리 몰려서 온 것 자체도 이상한 일이고.

마법사가 부린 수작이 뭔지는 모른다. 결과만이 눈앞에 명확하게 나타났을 뿐.

대충 세어 봐도 열 마리가 넘었다.

“열이 넘는다. 안 좋다.”

토레스가 등을 붙이며 말했다. 엔크리드도 검을 뽑았다.

치링.

토레스와 등을 맞댄 채다.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적당히 발버둥 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죽어 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그럴 순 없지.’

언제나 그러하듯.

내일을 위한 한 걸음을 걷겠다.

엔크리드는 각오를 다지고 검을 바로 세웠다.

마물의 이름은 라이칸스로프.

심장에 마력이 깃든 마물이다.

식인귀 구울과 비교하기도 어려운, 상대하기 까다로운 마물이다.

보통 늑대인간 하나를 잡기 위해선 훈련된 분대 하나가 필요하다.

그보다 적은 숫자로 사냥을 시도하는 걸 권하진 않는다.

쉬이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나올 것이므로.

그리고 라이칸스로프가 무리를 이루면, 소대 단위로도 덤비지 말라 권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하, 스물도 넘겠다.”

잠깐 사이 숫자가 더 늘었다.

이쪽은 자신과 토레스를 포함해 정찰대 열 명.

늑대인간은 스무 마리가 넘었다.

그것도 마법사가 관여했다는 엔크리드의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듯, 포위하고 덤비는 무리다.

본능에 미쳐서 날뛰어도 상대하기 힘든 마물이 늑대인간이다.

듀얼문이 뜬 날에는 더 힘을 발휘하는 마물이기도 했다.

거기에 포위 공격까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죽겠는데?”

토레스의 자조적인 말이 답이었다.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엔크리드는 분전했다. 세 마리의 늑대인간을 죽였고.

네 번째 놈의 팔을 잘랐으니까.

그 와중에 휘슬 대거를 던져 늑대인간의 리더로 보이는 애꾸 놈에게 친구를 둘이나 만들어 줬다.

말 그대로 분전이었다.

무리를 이룬 라이칸스로프 집단과 싸워 남긴 흔적이니.

토레스도 비슷했다.

엔크리드보다 먼저 쓰러지긴 했으나, 그도 두 마리는 잡았다.

핀은 한 마리를 잡고 두 번째를 상대하다가 당했다.

다른 대원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엔크리드는 피를 뚝뚝 흘리며 찢긴 팔을 늘어뜨렸다.

마지막 일격을 먹일 심산으로 발을 돌리는데 발끝에 걸리는 게 있었다.

머리통이었다.

요리사가 되고 싶다던 대원의 머리통.

“조금 짜증 나긴 하네.”

죽으면 반복되는 오늘임을 알지만.

이런 걸 보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크오오!”

곧 늑대인간 여섯 마리가 단숨에 엔크리드를 덮쳤다.

당연히 살아남을 순 없었다.

전신이 물어뜯기며 죽는 건 처음이었는데.

이것도 당연히 괴로웠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간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감고 뜨니.

통증은 사라지고.

소리 없이 출렁이는 검은 강이 보였다.

검은 강 위에 둥둥 떠 있는 나룻배와 사공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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