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02화 (102/170)

102.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4)

“무엇이 더 즐겁더냐?”

화살에 꽂혀 꼬치가 되어 죽는 것?

마법사의 넝쿨에 조이고 가시에 찔리는 것?

라이칸스로프에게 전신을 물어뜯기는 것?

나타난 사공이 말하며 웃었다.

그가 허락하기에 인지할 수 있는 웃음.

새삼 무척 신기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사공이 웃었다고 그렇게 누군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사공이 웃는 건 알지만, 정작 웃는 얼굴을 본 것도 아니요. 웃음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다.

머릿속에 상대가 웃었다는 것만 인지됐을 뿐.

질문을 들었기에 엔크리드는 답했다.

검은 강과 나룻배, 사공을 향해.

지금 하는 대답이 과연 사공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룻배를 향한 것인지, 검은 강을 향한 것인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도 입을 열 수 있었으니.

“화살이 제일 낫던데.”

라이칸스로프 무리에 물어 뜯겨 죽는 거나 마법사의 넝쿨보다야 그게 낫지.

“……미쳐라. 그리 미쳐서 날 즐겁게 해야지.”

어째 사공의 말문이 잠깐 막힌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엔크리드는 미치지 않았다. 전혀 아니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라 바로 답한 거였다.

“냉정하게 답한 건데.”

“미친 새끼가.”

사공은 웃음으로 시작해 화를 냈다.

물론 이 또한 누가 말해 주는 것 같다. 실제로 사공이 화를 냈는지는 모른다. 그저 짜증을 냈다는 것만 인지했을 뿐.

그거로 끝이었다.

검은 강 위로 까만 암흑이 덧칠되고.

눈을 감고 뜨자.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다.

여전히 같은 오늘.

엔크리드는 가뿐하게 일어났다. 몸에도 마음에도 무거움은 없다.

물론 늑대인간에게 물어뜯기고 내장이 손톱에 찢기며 죽은 통증이 남긴 했으나.

“후.”

그건 한숨 한 번으로 잊기로 했다.

진짜 잊을 순 없어도,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다 보면 괜찮을 것이다.

엔크리드는 덤덤했다. 태도도 마음도.

‘어깨에서 힘을 빼고.’

본래라면 살아남기 위해, 오늘을 벗어나기 위해 발악에 가까운 궁리를 할 시간에.

엔크리드는 고요했다. 조용한 호수와 같았다.

새로이 깨달은 것이 있지 않던가.

‘발악만이 답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내일을 위해 걷는 건 변함없다. 다만, 무조건 전력을 다해 뛰는 것만이 가장 빠른 길로 향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가장 빨리 갈 필요도 없을 것이고.

‘길은 세 가지.’

일어나 평소와 같이 몸을 놀린다.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구울이었다.

‘그놈들도.’

이상했다. 누군가의 명령으로 움직이거나, 또는 그런 일을 경험한 무리로 보였다.

‘마법사가 엮여 있겠지.’

그 마법사, 전에 경험한 놈과는 궤가 다른 수준이긴 했다.

‘장미 넝쿨의 렛샤.’

들은 이름이 뇌리에 선명했다.

잡을 수 있나.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긴 했다.

잡아야 했으니까.

이어 생각이 라이칸스로프 무리에 닿는다. 경험한 걸 역순의 흐름으로 훑는 과정이다.

‘마법사가 부린 수작이다.’

확신이었다.

성벽을 넘으면 마법사가 맞이하고.

개구멍으로 향하면 앞뒤를 가로막는 부대가 나타났다.

전면에는 넓적한 방패와 장창으로 무장한 정예병, 뒤는 궁수 부대가 막아섰다.

완벽한 준비다.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모르나, 이미 상대는 이쪽의 움직임을 읽고 있다는 게 결론이다.

그래서 첩자가 있나?

있었다면 라이칸스로프가 습격했을 때 어떻게든 표가 났겠지.

다른 방식으로 정보가 넘어갔을 수도 있고.

뱃사공이 웃을 만한 상황이긴 했다.

세 가지 길 전부 벽이라 할 수 있었고.

단순히 단련함으로써 넘어설 벽은 아니니.

‘재수가 없긴 없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매번 이렇게도 죽을 일이 있는지.

다만.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변하는 게 있던가.

없다.

엔크리드는 같았다. 여전했다. 마음이 흔들리는 일 따윈 없었다.

달그락.

엔크리드는 검의 손잡이 끈을 다시 맸다.

새로운 오늘을 시작한다는 표식이다.

엔크리드는 머릿속으로 오전 시간을 쪼갰고.

그에 맞춰 움직였다.

고립의 기법 이후, 검술 단련.

다시 하이드 나이프를 연습하고.

“대련 한판 할 수 있을지?”

핀에게 말해, 발라프 식 무투술을 단련했다.

“누가 쫓아와? 오늘은 어째 더 급해 보이냐.”

토레스가 제 장비를 챙기며 말했다. 저 몸 안에 숨긴 나이프가 몇 자루나 될까나.

엔크리드는 토레스가 나이프 여덟 자루가 달린 허리띠를 차는 걸 보며 생각하고 답했다.

“매일 최선을 다하는 거지.”

“그러다 몸 상한다.”

겨우 이 정도로 상할 몸뚱이는 아니었다.

“그럼 갈까?”

오전 나절부터 한바탕 어울려 준 핀이 말했다.

새벽부터 시작한 엔크리드의 훈련이 끝난 시점이기도 했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갈 수 없어 대강 옷을 갈아입고 나선 길이다.

가는 동안 핀이 아즈펜의 정찰대를 쉬이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미 들은 얘기였다.

덤불을 헤치고 나가며 핀이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보며 말하고.

“그거 독이야.”

“주의해야겠군요.”

엔크리드가 곧바로 답했다.

“너, 좀 신기한데.”

“뭐가?”

옆에서 단검 따위로 덤불 따위를 자르던 토레스가 끼어들었다.

“막 뭔가 아는 것처럼 굴잖아. 여기 와 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건 여자의 감일까, 아니면 레인져의 감일까.

“처음입니다.”

“말 편히 해.”

“그러죠.”

같이 자잔 말을 또 하려나.

첫 번째 오늘에서는 그랬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핀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묘한 시선으로 엔크리드를 바라봤을 뿐.

오늘이 반복되더라도 모든 일이 똑같이 일어나진 않았다.

사소한 몇 개는 변하곤 했다.

그렇게 도착한 개구멍의 입구다.

“여기 깊이가 얼마나 되지?”

들어가기 직전 엔크리드가 물었다.

“음? 부지런히 걸으면 한 시간도 안 걸리지.”

“그렇군.”

“그건 왜?”

“궁금해서.”

“어두운 데 가면 무서워? 걱정하지 마라. 누님이 손잡아 줄게.”

“그건 아니고.”

핀이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레인져가 먼저 간다.”

둔덕을 방패로 두고 내려간 길.

전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엔크리드는 둘에게 어떤 경고는 물론이고, 어떤 준비도 따로 하지 않았다.

대신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억했다.

“포위당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분대원 누구에게도 이런 질문은 해 본 적이 없다. 고로 배운 게 없다는 거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아는 건 있다.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

그럼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건 지금부터 고민해 볼 일이었다.

엔크리드는 답을 찾는 중이었다.

“어서 와라!”

적이 보였다. 장창과 방패로 무장한 부대다.

숫자는 최소 2개 분대.

횃불 몇 개가 눈앞을 확 밝혔다.

끼-익.

기다렸다는 듯, 뒤를 막는 숏보우로 무장한 적병 무리.

‘여기도 스물은 될 것 같고.’

다시 전면으로 시선을 돌려, 지휘관으로 보이는 작자를 봤다.

방패 사이로 고개를 내민 놈인데, 이마까지 가리는 철 투구를 쓰고 있어서 눈만 보였다.

희미하지만, 눈깔에 희열 따위가 엿보였다.

이 상황을 반기는 그런 느낌이다.

“살쾡이 년아.”

지휘관이 입을 열고.

“이런 씨.”

핀이 앞뒤로 고개를 돌리다 말고 단검을 뽑아 역수로 쥐곤 자세를 낮췄다.

왼손은 얼굴 앞을 비스듬히 막고 오른손은 뒤로 빼며 상대 시야에서 나이프를 숨긴 채다.

그 모습이 살쾡이가 발톱을 숨기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토레스는 횃불이 만드는 그림자 옆으로 조용히 움직였는데.

뒤에서 숏보우를 든 병사 일부의 시선이 토레스를 따라왔다.

‘눈도 밝아.’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란 거다.

역시나 그렇다.

함정에 빠지면 끝이다.

기사급이 아니라면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런 함정.

핀도, 토렌스도 뛰어난 병력이다.

만약 여기가 굴만 아니었다면.

만약 앞뒤로 막히지만 않았다면.

‘그럼 해볼 만하겠지만.’

안 된다. 반항은 할 수 있지만, 죽을 것이다.

막 지휘관이 뭐라 외치기 직전이었다.

“잠깐.”

엔크리드가 왼손바닥을 보이며 나섰다.

검도 뽑지 않은 채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손짓이었다.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닐 것 같은데.”

토레스가 중얼거리고.

핀은 여전히 앞을 향해 흉흉한 눈빛만 빛내고 있었다.

“뭐냐?”

다 잡은 거라 확신하기에 생긴 여유다. 지휘관이 물었다.

엔크리드는 상대와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토레스의 말 대로 말이 통할 상대는 아니니까.

그저 잠깐의 여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싸우기 직전에, 상대가 격하게 움직이기 전에 확인할 게 있었다.

타박타박.

양손을 든 채 앞으로 나가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피력한 채.

엔크리드의 시선이 횃불 빛에 훤히 드러난 상대의 무장과 옷 따위를 살폈다.

‘흙먼지가.’

꽤 쌓였다.

걸어서 한 시간 남짓한 구멍이다.

적병의 몸에 묻은 흙먼지가 오늘 하루 만에 쌓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늘만 기다린 게 아니야.’

그러니 이건 확인차 던진 질문이었다.

“며칠이나 기다렸지?”

“……뭐?”

정곡을 찔렸는지, 상대 지휘관의 목소리에 당황한 감정이 섞였다.

그건 확답이었다.

‘확신을 하고 기다린 게 아니야.’

뭘까, 뭐가 이들을 여기에서 기다리게 했을까.

새삼 궁금하다. 물론 지금은 호기심이 중요한 건 아니긴 했다. 결과가 중요하지.

이곳에 며칠이고 이들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잘도 기척을 숨겼네.”

엔크리드가 재차 말했다. 모든 말이 상대를 떠보는 거지만.

지휘관이 그걸 알 턱이 없었다.

“이 새끼가. 너 뭐야? 너도 마법사냐?”

여기도 마법사가 관여했나?

대체 장미 넝쿨의 렛샤란 년은 뭐 하는 년인지.

“렛샤로군.”

하는 김에 한 발 더 나가 봤다.

“……시발, 뭔지 모르겠는데, 뒈져라.”

딱 여기까지였다.

곧 적병이 달려들고 화살과 장창이 엔크리드와 핀, 토레스를 노렸다.

지휘관은 손짓으로 제 부대를 향해 명령하고 물러났다.

핀은 그 지휘관이란 자식을 죽이고 싶은 눈치였으나.

방패로 앞을 틀어막고 긴 창으로 찔러 대는 적병을 뚫고 나갈 재주는 없었다.

그녀의 특기는 이런 곳에서 발휘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병사 수준의 전력만 보이는 거다.

토레스는 달랐다.

그는 벽을 차며 상대의 예측을 벗어나는 동작을 보이더니 허공에서 손을 털었다.

그의 손에서 쓰로잉 나이프 4자루가 날았다.

엔크리드의 눈에도 어디로 날아가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토레스가 숨겨 둔 한 수였으나.

퍼버벅.

부족했다.

궁병도, 전면을 막아선 놈들도 전부 두툼한 가죽을 두른 방패로 전신을 가렸으니.

‘노릴 거면 차라리 발가락 따위를 노려야겠는데.’

딱 여기까지.

벽을 넘을 해답은 뒤로하고, 엔크리드는 생각해 둔 바를 실행하기로 했다.

단련된 정예병을 상대하는 것.

그것도 다수의 정예병이다.

엔크리드에게는 지금 순간이 무척 생소한 경험이었다.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단체로 자신을 노릴 일이 뭐가 있었겠나.

그만한 실력도 없었음에야.

그동안 검을 휘두르는 수단이 늘었고.

찌르기 변태를 죽이고, 미치 휴리어란 작자도 벴다.

암살자가 자신을 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정말 처음이었다.

단체, 부대, 병력을 상대로 소수의 위치에 선 싸움.

전장이라면 주변 아군을 이용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그런 기회도 없다.

‘그렇다면.’

이건 되레 실력을 키울 기회가 되진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재밌어.”

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이 미친 새끼.”

웃는 엔크리드를 향해 질린 표정의 장창병이 창을 내리꽂았다.

죽기 직전에, 입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재밌다고 중얼거리며 웃는 놈이 가히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엔크리드는 그딴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장 이것저것 시험해 볼 생각만 가득했지.

‘한 점의 집중과 칼날의 감각으로는 안 된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시야가 좁아져 버리면 답이 없다.

구울 무리나 늑대 마수 무리, 또는 인면견 무리를 상대했을 때처럼 중검식으로 베고 으깨 버리면?

‘안 돼.’

상대는 마수가 아니라, 전략과 전술을 쓸 줄 아는 부대 단위의 적이다.

머리를 굴리고 궁리한다.

평소와 같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전보다 어깨의 힘이 조금 빠진 것뿐.

그렇게 며칠을 개구멍으로 진입하려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성벽의 마법사를 만나러 갔고.

렛샤의 넝쿨에 수없이 당하며 궁리하다가 막히면 달빛을 벗 삼아 늑대인간 놈들과 춤을 췄다.

물론, 그 춤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었다.

엔크리드는 작정했기에, 조급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

어깨의 힘을 뺐다고 하루를 허투루 보내겠다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마흔두 번의 오늘 끝에 하이드 나이프를 손에 익혔고.

“그게 왜, 돼?”

당연히 토레스는 놀란 토끼 눈이 됐다.

그로선 하루 만에 자신의 비기를 흉내 낸 셈이니까.

“운이 좋아서.”

되지도 않은 변명이지만, 토레스도 할 말은 없었다.

“하루 만에?”

이딴 말이나 중얼거릴 뿐이었다.

토레스에게 보여 준다고 하이드 나이프가 더 숙달되는 건 아니었기에.

엔크리드는 마흔두 번을 넘어서 일흔 번을 넘는 오늘을 보냄으로 토레스의 속을 편하게 해 줬다.

더는 그의 앞에서 하이드 나이프의 재주를 보여 주지 않은 거다.

이제는 홀로 계속 반복하면 그만이었다.

나날이 발라프 식 무투술도 숙달됐다.

에일 카라즈 식 무투술을 익힌 핀과의 대련 덕분이었다.

그리 오늘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 끝에.

엔크리드는 하이드 나이프도, 발라프 식 무투술도, 성벽 위의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도, 성벽 위를 기어오르며 악력을 기르는 것도, 늑대인간 무리를 상대하며 검술을 단련하는 것도.

‘전부.’

더는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럼, 다음은 무엇이겠나.

오늘을 넘어 내일로 향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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