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03화 (103/170)

103. 이건 사랑?

‘행운의 여신이 날 저주한 게 아닌가 싶은데.’

새로이 시작한 오늘, 엔크리드의 시선이 하늘 위로 향했다.

파랗게 보이는 달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다. 일찍 일어난 탓에 자기 전에 본 달을 일어나서도 볼 수 있었다.

달이 참 밝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나.’

꿈에 나오는 사공이 벽이니 뭐니 하지만, 어찌 됐든 계속해서 재수 없게 죽는 셈이니까.

하물며 이번에도 그랬다.

몇 번이고 포위 병력의 틈을 노렸으나, 그때마다 정말 지독히도 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

빈틈을 노려 장창병의 발등을 찍고 파고들었더니, 갑자기 머리 위로 흙무더기가 쏟아지질 않나.

왜 하필 그 타이밍에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리냐고.

또, 떨어진 흙은 왜 하필 눈에 들어가는 건지.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마법사를 노리고 성벽 위를 달렸는데, 이제까지 튼튼하게 버티던 성벽 일부가 허물어져 디딤발을 없앴고.

그 외에도 비슷한 악운이 계속됐다.

변종인지, 늑대인간의 심장이 반대쪽에 있기도 했고.

한창 싸우다 숨을 돌릴 틈을 얻으려 등을 기댄 나무가 하필 썩은 나무라 등을 받쳐 주지 못해 균형을 잃은 적도 있었다.

뭐, 운이 따라 주지 않는 경우가 한두 번도 아니고.

타고난 재능이 없는 것부터 불운 아니겠나.

‘진짜 여신께서 장난치는 겁니까?’

그래도 이리 물어보고 싶긴 했다.

물론 답은 없었다.

답을 원한 질문도 아니긴 했다. 새로운 오늘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일 뿐.

오늘은 여신께 인사하는 거로 하루를 시작하는 거였다.

그대로 일어나 고립의 기법으로 몸을 단련하기 시작.

한쪽 무릎을 굽힘으로 반대쪽 무릎을 땅에 닿을 듯 자세를 낮춰 걷는 걸음이다.

한창 훈련에 매진하다 보면 다들 눈을 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크리드가 그에 맞춰 정찰대원 하나를 붙들고 말했다.

“이런 거 만들 수 있을까? 비상금 주머니로 쓸 건데.”

엔크리드가 말과 설명을 덧붙였다. 천 주머니이긴 한데. 소매 안쪽에 넣게 해 달라는 거였다.

고정되면 더 좋다는 말도 했다.

시간 남는다고 햄까지 만드는 이들이니.

이런저런 도구를 갖추고 있어서 재료를 구해 줄 필요도 없었다.

“네? 뭐, 금방 하기야 하죠. 근데 아침에 바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전에 만들어 주면 좋겠는데.”

엔크리드의 요청에 정찰 대원 중 하나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죠. 야, 내 근무 좀 대신 서 줘라.”

대원은 호탕했다.

고맙다는 의미로 어깨를 두드리고.

나머지 단련을 하고 나니, 핀이 다가왔다.

“아침부터 좋은 구경이라도 시켜 주는 건가.”

상의를 벗은 채로 검을 휘두르니 하는 말이다.

“쇠뇌 쓸 줄 아십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레인져의 기본 소양 중 하나지.”

그러냐고 하면 왜 물어보냐고 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기에 엔크리드는 미리 답했다.

“그냥 물어봤습니다.”

“……나 뭔가 할 말이 없네.”

“부츠 밑에 뭘 깔아 두면 걸음 소리가 그렇게 죽는 겁니까?”

“아, 이거? 이쪽이 예민한 마수가 많거든.”

핀은 왼손을 들어 제 귀를 가리키곤 이어 말했다.

“그래서 천을 몇 겹 덧대서 바닥에 깔고 부츠 안쪽에는 솜을 넣는 거지.”

당연히도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그거 좋군요. 제 부츠에도 하면 좋겠는데.”

“어렵진 않지.”

“토레스?”

“나도 하라고?”

“마수가 많다잖아.”

“그 마수를 만날 일은 거의 없긴 하겠지만.”

핀이 말을 덧붙이긴 했으나, 별문제는 없었다.

대원 둘이 붙어 부츠를 손봐 주기 시작했다.

“이 부츠 엄청 꼼꼼하게 만들었군요. 정성을 들인 태가 납니다.”

“그래?”

대원 하나가 엔크리드의 부츠를 살피며 말했다.

하수도에 시체 애호가 덕분에 만났던 신발 직공이 애를 써서 만들었단 소리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부츠에 천을 덧대 붙이고 안쪽에 솜을 까는 일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훈련도 끝냈고, 소리 없는 부츠도 만들었고.

“여기.”

아침나절에 부탁했던 주머니도 왔다.

손목에 걸어서 끈을 조이는 방식으로 소매 안에 쏙 넣으면 보이지 않았다.

술 좋아하는 분대장 놈보다 나은 솜씨다. 바느질이 무척 촘촘했다.

당연히 이미 저 친구의 솜씨가 좋다는 걸 알고 시킨 거긴 했다.

이미 돌아가며 다 시켜봤으니까.

핀이 했을 때가 제일 끔찍했지.

솜씨가 없다면 한다고 덤비지나 않았으면 좋았을 건데.

그녀가 꿰맨 주머니는 주머니라고 부르기 흉한 모양에, 안에 손가락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크기였다.

당연히도 쓸 수 없는 물건이 됐고.

“하핫, 바느질은 오랜만이라.”

그랬던 오늘도 있었다. 참, 힘든 시작이었지.

되뇌는 엔크리드를 향해 어떤 오늘에서는 바느질로 힘든 시작을 선물했던 핀이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이제 가자고.”

아침 식사가 끝났고 준비도 끝났다.

다시금 개구멍으로 향하는 길이다.

‘일흔아홉 번째.’

반복한 오늘의 횟수를 되뇐 엔크리드는 부지런히 걸었다.

이미 수없이 가 본 길이기에 주저는 없었다.

핀은 간간이 뒤를 힐끗 봤는데, 엔크리드의 걸음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정찰대로 오래 일했었나?”

“나?”

“아니.”

토레스가 되물었다가 엔크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요.”

엔크리드가 걸으며 답했다.

“그래?”

토레스야 왜 저리 묻는지 모를 일이지만, 엔크리드는 더없이 잘 알았다.

캐물으면 핀이 답할 말을 이미 아니까.

“걸음이 달라, 레인져의 걸음이잖아.”

라는 답이다.

그동안 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뭘 했겠나.

그녀의 걸음걸이를 보고 따라 했다. 레인져의 걸음, 부츠 밑에 깔아 둔 천을 이용해 소리 없이 걷는 걸음이다.

시답잖은 대화 외에도, 간간이 풀 따위가 보이는 흙길을 조용히 걷는 중 엔크리드가 물었다.

“개구멍에서 적군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타당한 의문이었다.

“싸워야지.”

토레스가 먼저 답했다. 말하며 토레스가 발 앞의 자갈을 툭 찼다.

톡 하고 구른 돌이 황톳빛의 납작한 돌에 맞아 튕겨 나갔다.

엔크리드는 토레스가 찬 돌이 부딪힌 곳을 유심히 보며 귀를 기울였다.

“그럴 확률이 낮긴 한데, 있다면 내빼면 돼.”

기다렸다는 듯 핀도 답했다.

“그렇군요.”

대강 답한 엔크리드와 일행이 덤불이 가득한 둔덕에 도착했을 때다.

“그럼, 퇴로가 막히면 어떻게 합니까?”

엔크리드가 또 물었다.

막 둔덕에 발을 올리던 토레스가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바라봤다.

임무는 단순했다.

안쪽에 들어가 아군이 심어 둔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그 와중에 수틀리면 도망가는 거야 자유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자꾸 초를 치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럴 일이 없도록 하는 중이긴 한데.”

두 번이나 비슷한 질문이 나오니, 핀도 신경 쓰이는 듯했다. 말투가 딱딱해졌다.

“저 굴 높이나 넓이가 얼마나 됩니까?”

“응?”

“앞뒤로 막히면 다른 샛길은 없습니까?”

둔덕에서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계속되는 질문이다.

‘이 새끼가 진짜 왜 이러지.’

토레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까지 말없이 따라오다가 여기서 이런다고? 왜?

두려워서 이러는 건 아닐 것이다.

겨우 개구멍에 들어가는 게 무서운 놈이라면 인면견 무리 한복판으로 돌진도 안 하지.

지상으로 쇄도하는 하피를 상대로 칼질은 더더욱 안 하고.

“왜? 감이 안 좋나?”

토레스는 미신 따위를 믿지 않지만, 엔크리드의 감은 존중했다.

변방수비대 안에도 비슷한 놈이 있으니까.

감이 묘하게 좋은 놈들 말이다.

“그건 아니고.”

어차피 들어가야 한다. 감이 안 좋다고 하면 길이 틀어질 테니.

엔크리드는 덤덤하게 답했다.

핀이 그런 엔크리드를 돌아봤다.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건가?

그런 표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그냥 적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갸웃.

핀이 고개를 옆으로 눕혔다가 바로 세웠다. 속이 불편한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이 자식이 자꾸 딴지를 걸어서 그런 걸까.

“개구멍은 암거래상의 주요 통로지, 고양이나 우리 쪽이 쓰는 길이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은 가장 안전한 길 중 하나라고.”

핀은 엔크리드에게 설명하며 자신에게도 이 길을 택한 이유를 되뇌었다.

토레스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인져 수준은 아니지만, 별의별 임무에 다 참여해 본 몸이다.

‘이 정도면 안전하지.’

핀의 말이 맞았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개구멍 안 경사로로 발을 들이고 안으로 서너 걸음 들어갔을 때다.

“혹시, 저 앞에 무장 병력이 기다리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입니까?”

엔크리드가 또 물었고.

“아니, 시발.”

결국, 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긴장하지 않는 척을 한다고 해도 적군의 도시에 들어가는 길이다.

이따위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하기 싫어? 싫으면 빠지든가.”

듣다 보니 성질이 났다. 버럭 화를 낸 핀을 본 엔크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저거 왜 저래?”

괜히 토레스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좋은 말도 한두 번인데, 신경 거슬리는 말만 골라서 한다.

원래 저랬나?

아닌데.

토레스도 할 말이 없었다.

“갑시다.”

핀이 성질을 내며 멈추자, 이제 엔크리드가 되려 앞장서며 말했다.

성질이 난 핀이 뭐라 한마디 더 하려는 순간이다.

토레스와 핀은 순간 묘한 느낌을 받았다.

둘 다 자기도 모르게 엔크리드에게 시선이 꽂혔다.

왜?

묵직한 기세, 그래, 그런 게 엔크리드에게 뿜어져 나왔으니까.

토레스도 특급 병사였고, 핀도 그에 뒤지지 않는 기량을 갖췄다.

둘은 엔크리드의 기세를 느꼈다.

“조금만.”

엔크리드가 둘을 분위기로 누르고 입을 열었다.

“조심하자는 겁니다.”

끊어서 하는 말에 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새끼 뭐지.

분명 재수 없게 굴었는데, 지금 이건 왜 이렇게 멋있냐.

솟구치던 짜증이 갑자기 사라지는 기적이 핀에게 일어났다.

‘이건 사랑?’

핀의 정찰대원 전부가 인정하는바, 금방 사랑에 빠지는 여자였다.

그렇다고 일을 소홀히 하진 않긴 하니, 그건 다행이었다.

사랑은 사랑이고.

남자는 남자고.

일은 일이고.

핀은 인정했다. 조금 풀어진 건 맞다고.

고양이가 잡혔다고 해서 자신들의 거취가 드러날 일도 없었고.

도시 안에 들어가는 게 위험하긴 하지만, 실상 몸 하나 빼내는 건 자신 있었다.

그걸 위해 그동안 아껴 둔 ‘길’로 가기로 했으니까.

“그러지.”

핀이 먼저 인정했다. 그녀는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더 신중하게 발을 떼기 시작했다.

토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묘한 눈길로 엔크리드를 쳐다보긴 했으나.

“당연히 조심해야겠지.”

이내 입을 열고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엔크리드는 둘의 태도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

괜히 잔소리를 갈긴 게 아니었다.

기세를 일으킨 것도 마찬가지고.

이 앞에서 기다리는 애들 멱을 따고 살아남으려면 틈을 열어야 했다.

반대로 이쪽은 조금의 틈도 보이면 안 되고.

함정을 판 장창과 방패로 무장한 정예병.

그리고 뒤를 막는 궁수.

합쳐서 사십이 넘는 숫자다.

실수를 용납할 수준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그렇게 했다.

실수 없이 아랫배에 힘을 빡 주도록.

과연.

일반 병사의 신중함과 레인져의 신중함은 달랐다.

“묘하네.”

횃불에 의지해 걷는 내내 핀은 고개를 푹 숙여 걸었고.

패스파인더와 사냥꾼의 뺨을 왕복으로 후려칠 능력의 레인져가 그녀 말대로 묘한 흔적을 찾았다.

“발자국이 묘해.”

핀이 말했다. 그래, 그러라고 신나게 떠든 거다.

상대는 흔적을 지웠다.

하지만 작정하고 주변을 의심하는 레인져의 눈을 전부 피할 순 없는 법이었다.

엔크리드는 여길 뚫으며 처음부터 정면 승부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동안 반복한 오늘이 몇 번인가.

그 오늘을 통해 배운 것도 있었다.

굳이 정공법으로 뚫을 필요는 없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뒤가 찝찝한데요.”

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엔크리드가 준비한 대사를 뱉었다.

빼어난 연기력이 필요하진 않았다.

수차례 해 본 거니까.

여기까지야, 사실 그동안도 몇 번이고 마주한 순간이다.

그러니 할 일을 할 뿐이다.

“진짜 앞에 뭐가 있을 것도 같은데.”

핀이 말하고.

“이런 씨, 뭐라는 거야.”

토레스가 긴장한 채로 앞뒤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엔크리드는 적절한 시기라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퇴로 확보부터 하죠.”

그러니까 뒤로 돌아가서 길을 닦자는 말이었다.

정확히는 궁병대가 대기하고 있을 뒤쪽을 조지자는 말이지만, 당연히 이 둘은 그런 사실은 모를 것이다.

핀과 토레스의 시선이 엔크리드에게 향하고.

“만약 뒤에서 누가 퇴로를 막으면…….”

말을 끝낼 필요도 없었다.

“접수, 가자.”

“이거 일진이 안 좋나.”

토레스와 핀이 연달아 말하며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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