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05화 (105/170)

105. 이기는 법을 아는 도박

“잡아!”

적병의 외침이 울렸고, 당연히도 그들은 미친 듯이 쫓기 시작했다.

엔크리드가 뒤를 힐끗 보다가 슬쩍 방향을 틀었다.

후두둑.

그가 막 지나가려던 곳에 흙무더기가 쏟아졌다.

무너질 징조는 아니었다.

그냥 불운의 상징이지.

‘아니,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인가.’

쿼렐 하나가 머리통을 스치기만 하고 말았으니까,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창을 비스듬히 앞으로 세운 장창 끝이 굴 위를 스치고.

적병이 무섭게 달리기 시작했다.

전투 한 번을 치르긴 했으나.

‘체력이 빠질 정도는 아니고.’

문제가 있다면 광원이 없다는 것 정도긴 한데.

핀은 레인져, 발바닥에 눈깔을 달고 길을 본다는 패스파인더 출신이다.

어둠 때문에 그녀가 나자빠질 일은 없었다.

그건 엔크리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핀의 걸음을 흉내 내면서 다녔다.

완벽하진 않아도 발바닥으로 얼추 땅의 생김새는 짐작한다는 거다.

게다가, 이 길로 오간 게 몇 번인가.

이러고도 자빠져서 코가 깨지면 이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통을 투구걸이로 쓴다는 방증이다.

엔크리드가 기억력만큼은 뛰어나기도 했으니.

여타의 이유로 핀과 엔크리드는 어둠 속을 문제 없이 뛸 수 있었다.

“씹.”

토레스만 곤란을 겪었을 뿐.

움푹 파인 곳에 발을 디딜 때마다 놀라서 움찔했으니까.

그래도 운동 신경이 남달라, 금세 균형을 잡고 뛰었다.

화르륵.

횃불 소리와.

드드드득.

가끔 굴 천장에 창날이 긁히는 소리.

훅훅!

그 외에는 거친 숨결만 이어지는 추격전이었다.

여기서 핀과 토레스의 몸이 가장 가볍긴 했지만, 그렇다고 속도를 높여 따돌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금세라도 잡힐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다.

그렇게 뛰다 보니 앞에서 달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입구였다. 개구멍의 입구.

핀이 먼저 경사로를 달리다가 쇠뇌 하나를 뒤로 던졌고.

그냥 버리느니, 투척 무기로 쓰면 좋을 듯해 엔크리드가 그걸 도로 주워 힘껏 집어던졌다.

바짝 뒤를 쫓던 놈이 그걸 보곤 몸 옆으로 돌렸던 방패를 앞으로 세웠다.

팍!

그리 튼튼한 재질이 아닌지, 허공에 나뭇조각 따위가 튀며 쇠뇌가 튕겨 나갔다.

추격을 조금 늦추긴 했으나, 유의미한 건 아니었다.

토레스의 걸음이 조금 뒤처져 도와줄 겸 던진 것뿐이었다.

토레스가 그걸 보고는 엔크리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눈짓과 고갯짓이었다.

‘이 와중에 공치사는.’

핀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엔크리드도 경사로의 위, 입구 구멍에 손을 얹고 몸을 당겼다.

우스스, 흙먼지가 밑으로 떨어져 내리자, 토레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잠깐.”

갑자기 토레스가 말하며 토굴 경사로에 왼손으로 단검을 뽑아서 꽂더니, 몸을 비스듬히 뒤로 돌렸다.

‘오, 이건 또.’

반쯤 기울어진 벽에 몸을 기대서 뒤로 손을 털어 낸다.

발로만 지탱할 수 없기에 단검 하나를 꽂아, 균형을 지탱하고.

단검을 내던지는 거다.

‘이런 건 또 처음인데.’

엔크리드가 반복한 오늘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본래 반복하는 오늘이 매번 똑같진 않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팽하고 단검이 뒤를 향해 날아갔다.

퍽! 퍽!

횃불도 던져 버리고 온 주제에 적병은 방패로 날아오는 단검을 잘도 막았다.

“이 새끼들.”

단검을 막은 병사 둘이 험한 소리를 뱉었다. 눈이 시퍼렇게 빛났는데, 잡히면 곱게 죽이진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엔크리드는 잡혀 보기도 했다.

잡히면 가히 좋은 끝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창날 꼬치구이가 되거나.

머리통에 칼날이 꽂히거나.

사실, 어떤 죽음도 다 반길 수는 없는 법이긴 하니까.

“미친.”

단검을 막은 걸 보고 토레스가 혀를 내둘렀다.

횃불과 달빛이 비친다고 해도 어두운 곳이다. 그걸 막아?

어지간한 훈련으로 저런 병사를 양성할 순 없는 법이다.

토레스는 적병이 단검을 막는 걸 보고 확신했다.

‘변방수비대급이다.’

그럼, 잡히면 뒈진다는 소리다.

바로 옆에서 자신에게 손을 뻗은 엔크리드가 있긴 해도.

‘안 되지.’

“몇 명까지 될 것 같아?”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따로 만나면 전부 다 상대할 만할 것 같은데, 저렇게 뭉쳐서 오면 뭐.”

엔크리드도 답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묘하게 엔크리드의 얼굴에 긴장감이 흐릿했다.

얘는 왜 여유가 있냐.

토레스는 생각하며 부지런히 위로 올라왔다.

뒤에서 창병 중 하나가 토레스와 비슷한 재주를 뽐냈다.

훙.

숏소드를 쓰로잉 나이프 삼아 던진 거다.

솜씨도 좋네.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검을 뽑아 쳐 냈다.

칼날 중간쯤에 숏소드 날이 걸렸다.

치링! 퉁!

튕겨 나간 숏소드가 옆쪽 바닥에 푹 하고 박혔다.

시퍼런 날이 달빛과 아래에서 불쑥 솟는 횃불을 반사해 빨갛고 파랗게 빛났다.

“빨리.”

검을 쳐 낸 엔크리드의 한마디다.

토레스의 동작이 더 빨라졌다.

“나와!”

가장 먼저 나온 핀이 그사이에 드르륵 하고 하나 남은 쇠뇌의 도르래를 당겨 현을 고정하곤 외쳤다.

엔크리드와 토레스가 좌우로 비키는 사이, 핀이 쇠뇌의 방아쇠를 당겼다.

퉁 하고 쏘아진 쿼렐 한 발이 횃불 때문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구멍 안으로 쑥 사라졌다.

연사식 쇠뇌가 아닌 탓에 한 발이 한계였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그게 대가리에 꽂혔는지, 아니면 방패로 막았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뛰어.”

이번에는 핀이 먼저 말하고 움직였다. 엔크리드와 토레스가 그 뒤를 따랐다.

중간이 토레스, 끝이 엔크리드였다.

방향은 본래 본대가 주둔했던 야영지 쪽이었다.

핀은 달리면서 연신 머리를 굴렸다.

‘어디로 가지?’

본대 쪽으로? 만약 이게 작정하고 판 함정이라면?

그렇다고 강변으로 향하면 아즈펜의 레인져가 있진 않을까?

아니, 애초에 이런 소란을 부리고 움직이면 마수와 마물의 표적이 될 텐데.

구울 열댓 마리야, 어찌 상대한다고 쳐도.

이러다가 재수 없게 군체를 이룬 놈들이랑 마주하면?

군체를 이룬 마수나 마물을 소수 병력으로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다.

그냥 몰려다니는 마수와 콜로니라 부르는 군체라는 이름의 집단이 된 마수는 아예 다른 얘기였다.

레인져인 그녀는 마수와 마물의 생태를 잘 알았다.

‘여기서 최악은 뭐지?’

잡히는 거다. 마수와 마물은 일단 다음에 생각해야 할 터였다.

“야영지로.”

그런 핀의 고민을 엔크리드가 끝내 주었다.

뒤를 힐끗.

가장 뒤에서 따라오는 엔크리드가 보였다.

셋 다 숨을 헐떡이긴 하지만, 묘하게 여유가 있어 보이는 눈과 입매다.

‘왜?’

왜 여유가 있어 보일까.

아, 입이 다물어져 있다. 이렇게 뛰면서도 헐떡이지 않았다. 자신도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자기보다 무장이 더 무겁지 않던가? 허리에 롱소드도 차고 있는데 저렇게 뛰면서 여유가 있어 보이네?

핀은 왜 방향을 그쪽으로 잡는지 물을 수 없었다.

그저 판단해야 할 뿐이다.

엔크리드는 핀의 결정에 더 관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어디로 가도 망했다는 생각이 들 테니.

‘알아서 가겠지.’

아마도 엔크리드의 말을 따라 야영지로 향할 거다.

그것도 되도록 왔던 길을 되짚어서.

레인져의 습성이다. 안전하다고 판단한 길을 되짚는 건.

이미 몇 번의 오늘을 겪어서 아는 거였다.

그렇게 도로 뛰어가는 사이, 엔크리드의 손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띠에서 검집째 검을 풀더니, 달리며 좌우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바닥을 향해 검을 찔렀다가 위로 들어 올렸다.

툭, 붕, 툭, 붕.

검집째 움직인 검을 따라 허공에 납작한 돌이 떠올랐다.

엔크리드는 검을 몽둥이 삼아 그걸 뒤로 쳐 냈다.

“흥!”

바짝 뒤를 따라온 창병이 다섯이 넘었다.

부대 내에서도 발이 빠른 놈들이었다.

그들 중 전면에 섰던 이가 코웃음을 쳤다.

넓적한 돌멩이 따위로 제 앞길을 막으려는 게 가소로웠다.

그는 방패를 들 것도 없이 창대를 앞으로 내밀었다.

피할 것도 없었다. 쳐 내고 속도를 죽이지 않으려 한 짓이었다.

탁.

창병은 제 의도대로 됐다고 생각했다.

돌을 쳐 내며 허공에 솟은 기묘한 곡선을 그린 긴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사악!

“악!”

뱀이었다. 납작한 돌 밑에 뱀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런 씹!”

창병이 급히 숏소드를 뽑아 휘둘렀다.

삭!

뱀의 몸통이 잘렸다. 마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독을 품긴 했다.

그중 창병 하나가 운이 나빴다. 돌 밑에서 독사가 튕겨 나가며 정강이를 휘감았고, 부츠와 갑옷 사이를 파고든 뱀이 다리를 콱 물었다.

극독은 아니었지만, 통증과 함께 다리에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다리가 물린 창병이 단검을 꺼내 제 다리를 문 뱀의 머리를 찔렀다.

푹.

그리 죽인 놈의 입가로 피와 노란 액이 흘렀다.

“독사다!”

병사가 단검 집을 뜯어서 끈처럼 만들어 종아리 위를 졸랐다.

제자리에 멈춘 건 당연했다.

그리고 나머지의 걸음이 주춤한 것도 당연했고.

시발, 독사라니, 음흉한 새끼들.

독에 당한 병사가 어금니를 깨물며 앞을 바라봤다.

엔크리드는 그사이에도 숫제 검집으로 돌을 쳐 내는 묘기를 부리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독사가 달린 돌이었고.

이후에는 일반 돌팔매도 섞여 있었으나.

그걸 구분할 지식이 없다면.

냅다 다 피하거나 쳐 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개자식이.”

뒤따라온 지휘관도 상황을 보더니, 눈을 부라렸다.

살쾡이 같은 계집을 잡기 직전이었는데.

“방패로 막으며 뛴다!”

그의 판단은 주효했다. 돌이든 뱀이든, 눈만 빠끔 내밀고 방패로 막은 병사를 제지할 순 없었으니까.

물론 엔크리드도 독사 따위로 저들을 물리치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엔리에게 이것저것 배운 게 도움이 되네.’

황톳빛 납작한 돌 밑에 독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침 이 길을 지나기에 써먹었다.

아주 쓸 만했다.

한 놈을 눕혔고, 나머지의 걸음을 느리게 했으니.

“후우, 후우, 왜 야영지야?”

그쯤 내달리던 적의 걸음이 늦춰지자, 핀이 속도를 조절해 옆에 붙더니 물었다.

토레스도 궁금한 참이었는지 그도 곁에 다가왔다.

뒤를 힐끗 본 엔크리드가 말했다.

“후, 저 숫자를 상대하려면 우리도 아군이 있어야 하니까.”

그 말에 핀의 인상이 구겨졌다.

“하아, 하, 거긴 이미 비었어, 내 부대원은 자리를 옮겼다고.”

핀은 오해했다.

토레스도 오해했다.

엔크리드는 놀란 척을 하고서 말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길을 꺾을 순 없어. 야영지를 끼고 다시 방향을 정한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서 앞장도 섰다.

핀과 토레스도 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갈 수밖에.

그들은 뒤통수가 뜨끔뜨끔했다.

어느새 다시금 쫓아온 놈들이 입김을 피워 올리며 거리를 좁히는 게 보였다.

저렇게 오와 열을 맞춰서 내달리는 게 되네?

신기하긴 했다. 얼마나 훈련받은 정예병이면 저런 게 가능할까.

그걸 본 후에야 핀은 상대 부대의 정체를 알았다.

“씹, 아무래도 그레이 독 새끼들 같은데?”

그레이 독, 회색 사냥개 부대.

그보다 귀에 익은 이름은 집요한 사랑꾼.

여러모로 엔크리드와도 인연이 깊은 놈들이었다.

미치 휴리어가 저 부대 소속이었고.

휘슬 대거란 선물을 혼혈 요정으로 포장해서 보내 주기도 했으니.

상대가 변방수비대에 버금가는 정예란 소리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엔크리드는 놀란 척 말했다.

“앗, 정말?”

다만, 그게 또 묘한 여유를 보이는 말투 같아 보이는 게 문제였으나.

엔크리드를 제외한 둘 다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상대가 강할수록 더 좋다.

속으로 엔크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이 있기 전까지, 일흔여덟 번의 오늘이 있었다.

그동안 엔크리드는 무엇을 했나.

정예병 수십 명을 상대로는 순간적인 판단 능력을 길렀고.

로저라는 놈에게 괜한 질문을 던지며 놈의 정보를 캐내기도 했다.

그렇게 알아낸 모든 걸 쏟아 내는 중이었다.

셋 다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을 보니, 절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후! 후! 훅!”

옆에서 토레스가 호흡을 조절하며 달리고.

“징, 후우, 그러운 새끼들!”

핀도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입까지 터는 걸 보면, 어지간히 저 새끼들이 싫은 것 같긴 했다.

그렇게 야영지를 향하는 길, 엔크리드는 일부러 우회했다.

핀은 눈치챘지만, 별말을 더하지 않았다.

레인져가 먼저 간다는 구호도 있을 만큼, 이런 상황에선 자신이 앞서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엔크리드가 너무도 태연히 앞을 맡았다.

먼저 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따라가는 수밖에.

그렇게 도달한 야영지다.

그들이 파 둔 굴, 이제는 흙으로 덮어 흔적을 지운 곳.

한쪽에 우두커니 선 나무 몇 그루와 작은 둔덕 몇 개.

그리고 건너편에 기대하지도 않던 광경이 보였다.

아우우우!

늑대인간 무리였다.

“이런, 씨!”

마물, 그것도 멀쩡한 몸으로 만나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늑대인간이 스물이 넘게 무리 지어 있었다.

정면에 선 놈이 이끄는 걸 보니, 아예 콜로니를 이룬 놈들이었다.

‘아, 최악.’

핀은 이 순간 삶을 포기할 뻔했고.

토레스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눈알이 바빴다.

엔크리드만, 오롯이 그만, 다음을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여기가 분기점.’

반은 도박이지만, 반복한 오늘은 도박이 도박으로 남지 않게 했다.

그러니까 이기는 법을 아는 도박이다.

엔크리드는 이기기 위해 발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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