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승부수였다.
‘잘 먹힐 것 같은데.’
성벽을 맞이한 핀은 확실히 전보다 경계의 시선이 흐릿하다고 느꼈다.
육감의 문 수준은 아니지만, 그녀도 레인져이자, 패스파인더로서의 감이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토레스는 이게 과연 맞는 길인가 의심했다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고민할 때가 아니잖아.’
하기로 했으면 한다.
그도 변방수비대의 일원, 나우릴리아 병사 등급제에 특급을 받은 병사다.
일당백은 아니어도 홀로 두셋 몫은 해내는 유용한 인력이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먼저 간다.”
굳이 핀을 앞세우지 않았다. 성큼성큼 손을 벽 틈에 넣고 오르기 시작했다.
엉망이 된 갬비슨도 벗었고, 투척 무기를 몇 개 썼다고 해도 허리에 절그럭거리는 롱소드는 그대로였다.
“……쟤는 대체 뭐 하는 애야?”
레인져인 자신보다 벽을 잘 탄다. 핀으로서는 할 법한 말이었다.
“나도 몰라. 가는 중이다.”
“뭐?”
토레스는 자기가 한 말을 곱씹고 괴상한 소리를 했다는 걸 알았다.
“전에는 조금 알았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모르겠다고.”
“하여간 뭐, 잘 따라와.”
엔크리드의 성벽 타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예술이었다. 원숭이 뺨을 후렸다.
고민도 없이 성큼성큼 손과 발을 움직였다.
그 뒤를 핀이 따라갔다.
급하게 오는 바람에 가지고 있는 말뚝이 두 개뿐인지라 성벽에 걸 줄도 두 개가 전부였다.
핀이 밑을 보니 토레스가 가까스로 쫓아오는 게 보였다.
낑낑대지만, 애초에 운동 능력이 뛰어난 놈이다.
‘그럼, 쟤는?’
다시 고개를 위로 돌려 본 핀이다.
이미 성벽 끝에 거의 다다른 엔크리드가 흉벽 밑에서 웅크린 자세로 멈췄다.
흉벽은 성벽 위로 두껍고 높게 만들어 수비를 위한 구조물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재주가 없다면 흉벽을 맨손으로 넘어서 성벽 안쪽에 떨어지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저긴 못 올라가나?’
그럴 것 같진 않은데.
핀 자신이야, 손끝으로 매달려 상체부터 당긴 뒤에 허리 탄력으로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혹시 몰라 들고 다니는 작은 갈고리를 걸면? 더 쉽다. 갈고리 걸고 줄을 감으면 폴짝 넘어가는 것도 가능했다.
넘어간 뒤에 뒤따라오는 동료에게 손을 잡아서 당겨 주면 될 일이다.
어쨌든 엔크리드가 못 넘어가서 멈춘 것 같진 않았다.
흉벽을 넘기 전, 매달린 엔크리드는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밑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간단한 수신호지만, 알아듣긴 어렵지 않았다.
[경비병.]
성벽 안쪽에 인기척이 있다는 건가.
정작 핀은 어떤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인져인 나보다 더 예민하다는 건가.’
사실 엔크리드도 느껴지는 건 없었다. 경험으로 아는 것일 뿐.
흉벽 밑에 매달린 엔크리드는 생각에 잠겼다.
‘무슨 수작을 부렸을까.’
육감 차단.
이것만은 오늘을 반복하면서도 통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주문으로 수작을 부린 건 확실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평온할 순 없을 테니까.
개구멍에서야 이미 굴 안에 들어와 있어 불길함을 느낀 순간 끝장났다고 치고.
라이칸스로프 무리도 이 땅이, 그러니까 크로스 가드의 앞이 항시 마물이 오가는 땅이니 놓쳤다고 쳐도.
성벽 위에 숨어 있는 병력의 기척 또한 눈치채지 못했다?
분명 무슨 수작을 부린 거였다.
예순 번째 오늘까지는 그 수작이 뭔지 알아내려고 용을 썼으나.
‘놔두자.’
중요성의 차이다. 마법사가 부린 수작보다 더 중요한 게 널렸고, 궁극적인 목적이 분명하니까.
오늘을 넘는 것.
그 시간 동안 단련하는 것.
그리하여 검을 길잡이 삼아 나아가는 것.
알아내는 걸 포기했다고 해서 문제가 되나?
문제가 될 건 전-혀 없었다.
이미 반복한 오늘을 통해 아는바.
‘이쯤이려나.’
엔크리드는 흉벽에 매달린 채 왼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매달리려면 성벽에 틈 따위가 있어야 하는데.
크로스 가드의 이쪽 성벽은 일반 마물을 비롯해 가끔은 콜로니를 이룬 마물도 상대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 덕에 여기저기 흠집이 많았고.
보수가 되긴 했으나, 틈도 많았다.
틈에 손가락을 걸고 발끝을 집어넣고 있자니 움직이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엔크리드는 성벽 위에 매달려 자리를 바꾸며 머릿속으로 성벽 너머를 그렸다.
처음 이곳에 도달했을 때는 예측하고 추측하기만 했으나.
지금은 렛샤라는 마법사의 위치까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확신이다.
이 오만한 마법사는 반복된 어떤 오늘에서도 제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
자리를 잡은 엔크리드가 다시 수신호를 보냈다.
[너희 먼저 가.]
핀과 토레스가 수신호를 보곤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핀, 그다음은 토레스.
흉벽에 매달린 핀이 손을 뻗어 토레스를 돕고.
그대로 둘이 넘어선 순간.
화르르륵.
머리 위로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횃불 일고여덟 개가 동시에 불이 붙은 것일 터였다.
한두 번 본 광경이 아니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분명 내 아이들이 움직였는데?”
렛샤의 목소리.
예상한 대로 바로 성벽 너머.
그녀는 자신을 모르지만, 자신은 그녀의 위치를 안다.
그것만으로 유리한 고지였다.
거기에 그녀의 이름도 알고, 어떤 주문을 부리는지도 알았다.
“이런 씨.”
토레스가 욕설을 뱉고.
“진짜네.”
핀의 중얼거림을 들은 엔크리드가 손을 뻗었다.
흉벽 가장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잡고.
한쪽 팔로만 몸을 끌어 올렸다.
렘을 비롯한 분대원들이 거듭 감탄했던 근력이다. 거기에 거듭된 고립의 기법으로 단련한 덕에 몸이 더 가볍다고 느꼈다.
쑥 하고 몸을 올리며 흉벽 위로 고개가 솟자마자 앞구르기 하듯 허공에서 몸을 휘돌렸다.
예전이라면 어림도 못 낼 묘기에 가까운 동작이었으나.
고립의 기법으로 단련하고 그동안 수없이 구른 덕에.
엔크리드의 몸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흉벽 밑으로 떨어졌다.
앞으로 말렸던 몸을 펴며 무릎을 굽힌 채로 바닥을 발로 찍었다.
훙, 쿵.
따로 낙법을 하지 못해 바닥이 찌르르 울었다.
엔크리드의 바로 앞, 마법사 렛샤가 보였다.
더없이 놀라 눈을 부릅뜬 얼굴로.
“너-언.”
입이 열리고 뭐라 말하기도 전, 엔크리드의 손이 움직였다.
삐이익!
휘슬 대거다.
렛샤는 놀랐으나, 당황하진 않았다.
이건 어디서 튀어나왔지? 이런 생각만 했을 뿐.
당연히도 믿는 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주문으로 구현한 무형의 장벽이 존재했으니까.
코앞에서 쏘는 쿼렐도 막는 방어막이다.
그렇게 제 방어막을 두드릴 걸 기다리는데.
엔크리드의 휘슬 대거는 그녀를 노리지 않았다.
그녀의 너머, 쇠뇌를 든 병사 넷의 목을 노렸다.
퍼버벅.
한 점의 집중을 발동한 엔크리드의 휘슬 대거는 목표를 정확히 맞췄다.
그동안 단련한 보람이 있었다.
적병 넷이 고꾸라진다. 그리고 그들이 쓰러지기 직전.
렛샤가 반응했다.
“캿!”
그녀의 입에서 기묘한 외침이 터져 나왔고.
곧 바닥에서부터 훙 하고 가시넝쿨이 날아왔다. 낭창하게 휘어지며 허리를 후려쳐 왔다.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병사부터!”
엔크리드는 검을 뽑으며 외쳤다.
치링!
뽑은 검을 휘두른다. 너무 집중한 탓인지.
머리통이 뜨거웠다.
‘얇은 건 베고. 두꺼운 건 쳐 내고.’
엔크리드는 중검식이 아닌 유검식을 기초로 삼고 움직였다.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검술의 기본 원리 정도는 알아 두면 좋습니다. 중검식을 쓴다고 중검식만 배우면 멍청한 짓이죠. 상대의 검술을 알아야 대응도 하고 싸울 거 아닙니까?”
평소에는 게을러 빠졌고, 자신을 가르칠 때가 되어야 그나마 없는 열의라도 보이는 라그니지만.
가끔은, 정말 가끔은 열정을 불태우곤 했는데.
그런 날에 했던 말이었다.
이후 각 검술의 기본 원리 정도는 배웠다.
그동안 넝쿨을 상대로 칠십 번을 넘게 연습했고.
엔크리드의 일흔 번이 넘는 오늘이 빛을 보였다.
얇은 건 잘랐고.
두꺼운 건 쳐 냄으로.
퍼버벅, 투두둑. 텅.
어떤 가시넝쿨은 두께가 팔뚝만 했다.
숫제 몽둥이 수준의 충격이었으나, 검면으로 막고 자세를 낮추며 위로 흘렸다.
유검식이었다.
“이놈이!”
렛샤는 극도로 분노했다. 감히 내 넝쿨을 피해? 칼잡이 따위가?
그녀의 손이 움직이고, 곧 넝쿨 창 서너 개와 넝쿨 채찍이 날아들었다.
엔크리드는 어설프게 감에 의지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부릅떴다.
한 점의 집중을 모두 눈에 모은 그런 기분.
눈깔이 타는 듯한 그런 체감.
이렇게 하면 모든 게 보였다.
하나하나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다시금 같은 짓을 반복한다.
검으로 쳐 내고 휘둘러 때리고 흘리고 벤다.
느낌? 그딴 건 버렸다.
육감? 지금은 필요 없다.
굳이 감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다 보고 때리고 피하고 후리면 된다.
그리 두 번의 넝쿨 공격을 흘리고 피하는 사이.
주변에서 악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의 단말마였다. 토레스와 핀의 실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님에야.
특히나 다른 곳에서 시선을 끌어 주면 토레스의 능력은 빛을 발했다.
단검을 다루는 재주, 직접 보지 않았나.
“그래,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해 주마.”
렛샤는 분노를 안으로 머금고 눈을 빛냈다.
뱀의 눈을 닮은 마법사의 눈이 엔크리드를 직시했고.
엔크리드는 무시했다.
이미 몇 번이고 봐 온 것 아닌가.
야수의 심장이 쿵쿵 뛰며 말하는 듯했다.
아니, 렘이다. 렘이 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저딴 거에 당할 거면 그 심장 떼내슈.”
걱정하지 마라, 미친 렘 새끼야, 저런 거에는 안 당하니까.
사안에도 꿈쩍하지 않자 마법사의 넝쿨이 더 매서워졌다.
휘리릭.
얇아지고 빨라진다.
피비비비빙.
이제까지 렛샤가 부리는 넝쿨은 창과 채찍 형태가 가장 많았지만.
현 상황까지 몰아세우면 화살 형태가 나왔다.
실제 화살은 아니지만, 두께와 더불어 매섭게 쏘아지는 건 화살의 그것과 같았다.
인간은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 낼 수 있는가.
‘없다.’
기사라도 되지 않는 이상에야, 그렇다.
하지만 그래야 한다면.
화살 비를 쳐 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도저히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긴.’
죽었다고 복창하고 해야지.
군인 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보병 정신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냥 엔크리드란 인간이 그런 것이다.
포기는 없다. 후회도 없다.
나아가는 길에 제 인생의 모든 걸 걸었다.
양손에 검을 꽉 쥔 엔크리드는 화끈한 안구의 통증을 느끼며 집중했다.
‘점과 점을 잇고.’
잇는 선을 기반으로 전부 쳐 낸다.
얇게 꼬아진 넝쿨이 밑에서 위로 솟아,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 개수가 열 개를 넘어서는 걸 확인한 순간, 숫자를 세는 걸 포기.
엔크리드는 제 몸을 중심으로 집중력을 흩뿌렸다.
라이칸스로프 무리와 그레이 독 부대 사이에서 깨달은 것, 집중력 흩뿌리기.
그거로 인해 영역 내에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는 것.
그 이전, 개구멍 안의 싸움에서 배운 것도 있다.
순간적인 판단력.
모든 상황, 찰나의 순간 주저 없이 행동하는 것.
엔크리드는 두 개를 섞고 그대로 행했다.
퍼버버벅.
곧, 그의 앞 허공에서 넝쿨이 사방으로 찢기며 녹색 체액을 터트렸다.
렛샤의 이마에 핏대가 서고, 눈알에도 핏발이 섰다.
넝쿨은 멈추지 않았다.
엔크리드의 칼도.
그리고 병사들과 싸우던 핀과 토레스도 힐끗 그 광경을 봤다.
이제는 그냥 잘 싸운다는 말로도 부족할 것 같은데.
토레스는 생각하며 병사 하나의 등 뒤에 선 채로 멱을 땄다.
퉁!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로 쿼렐이 날아왔다.
팍하고 볼트가 토레스가 죽인 병사의 뱃가죽에 꽂혔다.
“잘 보고 쏘지 그러냐?”
우드득. 끄으으악!
그 타이밍에, 한쪽에서 들리는 비명이다.
뱀이라도 된 것처럼 바닥을 스르륵 움직이는 핀의 작품이었다.
다리가 꺾여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꺾여 비틀린 병사가 거품을 물었다.
핀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쿼렐에 꽂힐 판이니.
그사이에도 엔크리드와 마법사의 싸움은 계속됐고.
누구도 둘 주변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날카로운 가시넝쿨이 바늘처럼 날아들었는데.
가끔 몇 개가 튕겨 나와 주변 성벽 따위를 쑤셨다.
아군 마법사 손에 죽고 싶지 않은 이들이 모두 물러났다.
그 덕에 토레스와 핀이 한숨 돌린 것도 있었고.
푹푹 성벽에 구멍을 내는 뾰족한 가시넝쿨 촉(鏃)을 보면 토레스도 가까이 가고 싶진 않았다.
‘이거 병사를 죽인다고 해결될 일인가.’
그러며 토레스는 깨달았다.
결국, 여기 싸움의 향방은 저 둘에게 달렸다고.
마법사가 이기면?
토레스와 핀도 죽은 목숨일 것이다.
그런데 엔크리드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지?
토레스가 보기에도, 핀이 보기에도 엔크리드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아까까지는 피하던 넝쿨 일부가 그의 몸을 스치기 시작했으니.
그에 맞춰.
“몸에 두른 가죽 쪼가리를 믿고 덤볐느냐?”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혀 흥분하지 않은, 승기를 붙잡은 걸 확신하는 나지막한 읊조림.
‘안 좋은데.’
토레스는 생각했고.
그게 맞았다.
엔크리드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한계에 금세 봉착했다.
다만, 그건 엔크리드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렛샤가 승기를 확신하고.
토레스와 핀, 적병이 이 싸움을 주시하는 이 타이밍.
양손으로 쥐고 휘두르던 검을 왼손으로만 쥔 엔크리드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승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