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14화 (114/170)

114. 기어서라도 나아갔기에

엔크리드를 숙소로 안내한 병사는 슬쩍 눈을 비볐다.

뭘 잘못 본 것 같았다.

‘이게 맞나?’

아닌 것 같은데. 눈이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

소대장을 본 순간, 라그나란 병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왜 벌떡 일어나냐?’

어지간하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 미치광이 소대 중에서도 게으른 미치광이라 불리던 라그나다.

그런 놈이 단숨에 몸을 일으켜?

이제까지 그를 지켜보던, 특히 최근까지 봤던 이들 모두가 허벅지를 후려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장면이었다.

‘저거 왜 저래.’

그저 일어나는 것만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는 놈이었다. 저 새끼는.

일어나라고, 나가라고, 눈앞에 적병이 쳐들어왔다고 귀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말해도 안 듣던 미친 게으름뱅이 새끼 아니었나.

“늦었습니다.”

라그나가 툭 말을 내뱉더니 제 검을 챙겨 들었다.

“그동안 퇴보가 된 건 아닌지 확인을 좀…….”

일어난 거로도 부족해서 대뜸 대련 신청? 그것도 저쪽이 먼저?

가끔 분대 내에서야 험한 말이 오가지만, 어지간하면 들은 척도 하지 않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대련을 제안했다. 검을 잡고 몸이 근질거린다는 듯, 의욕을 불태운다. 누가 봐도 당장 나서서 검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그런 자세였다.

“돌았니?”

게으른 미치광이 라그나를 두고 렘이 그 앞을 막았다.

“첫 대련은 언제나 내가 하는 거 몰랐냐? 안 그렇수?”

이건 또 왜 이래.

이쪽은 그냥 미치광이라고 불리던 놈이다.

그러니까 이 소대에서 제일 미친놈.

이유 없이 도끼를 휘두르는 미치광이.

시비 걸면 가장 먼저 발작하는 미치광이.

그 미치광이가 지금 웃고 있었다. 상대를 비웃는 것도 아니요, 살기 어린 웃음도 아니었다.

순수한 웃음이다.

야만인 특유의 외모와 겹치자, 순박해 보이기도 하는 미소였다.

“다쳤수?”

거기에 다른 사람을 걱정하기까지 한다.

저 미친 야만인이 도끼로 사람 머리 쪼개는 거 말고 사람도 걱정할 줄 알았다.

병사는 대대장의 직속부관 중 하나였다.

엔크리드란 소대장이 어떤 위인인지 알아보라 해서 안내하는 겸 붙은 참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너무 어색했다.

“부러진 건 아닌 것 같고.”

쟤도 나서네.

저 새끼 주둥이가 있긴 했구나.

한때는 부대 내에서 어지간한 부대원과 친근하게 굴기도 했다는데.

최근에는 그저 노려보기만 하는 미친놈이 된 병사다. 하도 말을 안 해서 어디서 혀를 잘라 먹은 줄 알았다.

이름이 작센이었던가.

저 새끼를 부르길 맑은 눈의 미치광이라 했다.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데 괜히 피부에 오도독 닭살이 오르게 만드는 맑은 눈빛이 참, 사람 기분을 염병 나게 했다.

“약 발랐습니까?”

맑은 눈의 미치광이, 그러니까 저 새끼가 말하는 것도 신기했는데, 나서서 소대장이란 작자의 손목을 살피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꿈 같은데.’

얘들 왜 이렇게 변한 건데.

마지막은 성스러운 미치광이였다.

이미 부대 내에 소문이 파다한 넷이었다.

각자 참으로 개성 있게 미쳤다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작자다.

덩치는 커다란 바위를 연상케 하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돌아다닌다. 무엇보다 다른 미친놈과 달리 친절했다.

그렇다고 말을 잘 듣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 부대원.

나서기만 하면 툭툭 치는 것만으로 적 부대 하나를 씹어 삼킬 것 같은데, 신의 부름이 없었기에 싸울 수 없다는 미친 새끼.

부관이 보기에 이 새끼야말로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기도를 보답받는 성직자는 신성력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 작자는 신성력을 쓰지 않는다. 그럼 뭐겠나.

응답받지 못한 기도, 그러니까 제대로 된 성직자가 아니란 건데.

‘뭐가 신의 말씀이냐?’

매일 신을 찾아서 그 핑계로 내뺐다.

군대에 들어왔으면 상관 명령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이럴 거면 여기에는 왜 있냐고.

성스러운 미치광이는 평소와 똑같은 미소로 입을 열었다.

“형제님, 훈련이 부족했군요. 그동안 노셨습니까? 평소에 게으르니 다치는 겁니다. 훈련하십시오. 훈련.”

신을 믿든 말든 어쨌든 간에 매사 친절하던 미치광이는 웃는 낯으로 사람을 갈궜다.

‘그냥 미치광이는 실실 쪼개고. 맑은 눈의 미치광이는 맑은 눈으로 손목이나 쏘아보고, 게으른 미치광이는 부지런해 보이고. 성스러운 미치광이는 사람을 갈궈?’

뭐가 이렇지? 뭔가 상황 설명하기가 굉장히, 매우, 심히 개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해 줄 건 이 작자뿐이었다.

부관의 시선이 엔크리드에게 향했다.

그는 옆에서 보든 말든 제 할 만을 뱉었다.

“부러진 건 아니고.”

그리 말하고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이어 말했다.

“조금 쉬면 돼. 이게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왜 사고뭉치 소대가 아니라 미치광이 소대가 되어 있냐고.”

길어야 여드레다. 그사이에 왜 사고뭉치가 미치광이가 되어 있는가.

엔크리드의 의문은 합당했고.

렘은 평소처럼 당당히 답했다.

“소대장이 없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우, 다 소대장 탓임. 아무튼 그런 거요. 전부 소대장 탓.”

그냥 미치광이가 미친 소리를 뱉었는데.

“그래서 대련은?”

그걸 게으른 미치광이가 받았다.

“작은 부상을 얕보면 중요한 순간에 말썽을 부릴 겁니다. 붕대부터 푸시죠. 미치광이라고요? 누가 그럽니까. 처음 들어 봅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소대장 형제님.”

뒤이어 맑은 눈의 미친놈과 성스러운 미친놈도 개성 넘치는 답을 내놨다.

부관은 엔크리드가 이들을 크게 나무랄 줄 알았다.

미치광이 소대라니, 아무리 대장이 없다고 해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

무엇보다 옆에서 이제는 울음을 그친 앤드류가 있지 않나.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소대원이다.

저 눈이야말로 소대 내부에 말썽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얘 눈은 왜 이렇고?”

아니나 다를까, 엔크리드가 따졌고.

“대련해 준 거요. 실력 향상을 위해.”

그냥 미치광이의 말에.

“음, 그건 잘했네.”

수긍했다.

이게 잘한 거야? 동료의 눈덩이가 파란데? 새파란데? 부어서 눈깔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래도 안 나간다. 난 대장 밑에 남을 거다.”

앤드류란 놈도 소대장 엔크리드를 보자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평소에는 대거리는커녕 슬슬 눈치만 보더니, 지금은 대뜸 대드는 것처럼 보이니.

“그래,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한다니까. 한판 굴러 볼까? 기다려라. 우리 소대장이랑 좀 놀고 올라니까.”

렘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연신 웃음이다. 행복한 웃음으로 보였다. 적어도 부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 뒤에 미치광이가 어쩌고저쩌고하며 엔크리드가 부대를 갈구는 걸 기다렸다.

“가서 알아봐. 왜 불렀는지. 왜 저 운 좋은 친구가 필요한지.”

부관이 일개 소대장의 안내를 자처한 것, 당연히도 대대장의 명령이었다.

그러니 이 작자가 무슨 짓을 하든 보고해야 했고, 엔크리드가 어떤 행동이라도 하길 기다렸는데.

그게 끝이었다.

맑은 눈의 미치광이가 붕대를 풀고.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표범이 파란 눈을 깜빡이며 하품하고.

냐아.

엔크리드가 자신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다른 부대원들도 부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안 가십니까?”

엔크리드가 물었다. 여기 같이 남아서 노닥거리자는 말로 들리진 않았다.

“아, 네, 갑니다. 푹 쉬시길.”

부관이 돌아섰다.

그가 떠난 뒤 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건 왜 따라온 거요? 며칠 내내 계속 눈깔만 굴리더만.”

“눈깔?”

“자꾸 쳐다보더라고. 죽여 달라고 그러는 줄 알고 내일쯤 머리통에 도끼 장식을 해 줄 셈이었수다.”

“미친 새끼야, 그럼 상관 폭행이 아니라 살해다.”

“그렇수?”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것이다. 특히나 저렇게 실실 웃을 때는 확실히 잘 알고 하는 짓이다.

“놔둬라. 괜히 상관이랑 문제 만들지 말고. 특히 저 양반은 대대장 직속이야.”

“수틀리면 전역하면 되는 거요.”

물론 그게 일반적인 전역은 아니겠지.

렘의 전역은 도끼 두 자루로 하는 군대 탈출기쯤 될 것이다.

엔크리드와 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작센이 제 연고를 꺼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목에 치덕치덕 발랐다.

손목에 싸르르 하는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차갑고 시원하고 간지러운 그런 묘한 느낌이다.

보통 약은 아닌 듯싶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왜 이렇게 부상 치료에 적극적인지.

어쨌든 엔크리드는 할 말을 했다.

“적당히 위에서 하는 말도 좀 맞춰 주면서 살자.”

부리나케 자신을 부른 이유라면 오면서 들었다.

전장 상황은 개 음경 직전까지 가고 있고, 사기는 떨어지는데 부대 내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미치광이 소대라는 별명이 소란을 증명하는 별명이었다.

이들의 목을 싹둑 베어 군의 기강을 드높이자니, 실력이 아깝고.

그렇다고 감내하고 손을 쓰자니, 하나같이 말썽을 장난 아니게 피울 것 같기도 했을 터.

‘중대장도 이들을 보호했겠지.’

요정 중대장,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알게 모르게 자신과 부대원을 챙겨 주는 편이었다.

이곳에 제 소대원을 데려온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중대장 직속의 독립 소대로 편제를 바꾸자마자 제 대장 없다고 안 나선다?

그게 얼마나 큰 문제처럼 보일지는 엔크리드도 알았다.

그러니 데려왔겠지.

어떻게 데려갔나 걱정하는 것과 별개로 이 정도는 엔크리드도 알았다.

물론 크라이스가 오는 내내 설명해 주기도 했고.

다만, 이들이 간과한 문제가 있다는 건.

‘내 말이라고 듣는 건 아닌데.’

싸움 말릴 때도 말로 안 돼서 몸을 밀어 넣는 판이다.

나가서 싸우란다고 싸울 위인들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랬다. 엔크리드가 한 말을 귓등으로도 듣는 이가 없었다.

전부 흘렸다. 위에서 하는 말을 맞출 생각 따윈 없는 거다.

‘어쩌겠나.’

이게 사고뭉치 분대, 미치광이 소대인 걸.

다시 붕대를 감은 작센이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무리하시면 안 되지만, 나중에 고생하는 것도 본인 몫일 테니.”

말려 봤자 듣지도 않을 것이다. 작센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 고생은 내 몫이지.”

여기까지 말을 나누고 있자니, 그제야 뒤에 서 있던 크라이스가 입을 열었다.

“난 보이지도 않는 건가요.”

“응? 왔냐?”

“보이긴 했다.”

“오셨습니까, 형제님.”

작센을 제외한 셋이 이어서 말했다. 작센은 슬쩍 눈인사만 했다.

어쨌든 그는 크라이스와 이런저런 일로 엮이기도 했으니까.

주로 정보를 주고받고 창부를 소개받고 약을 파는 관계지만.

크라이스는 이들한테 뭘 바라면 안 되는 걸 잘 알기에 이 정도로 만족했다.

그 뒤는 대련의 시간이었다.

막사 앞에 우르르 몰려나가자, 그제야 엔리가 아는 척을 했다.

“말 걸기도 무섭군요. 어떤 면에서 보자면 대뜸 나선 앤드류 님이 존경스러울 정도로.”

엔리의 얼굴은 멀쩡했다. 어떻게 보면 처신을 잘하는 거고.

‘다르게 보면 딱 이 정도라는 거지.’

부대원 중 누구와도 마찰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들 중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었단 거다.

엔크리드는 함부로 사람을 재단하진 않았다.

그래도 제 부대원의 안목은 안다.

그들 전부가 엔리를 곁에 두지 않는다는 건.

이 작자가 부대 내에서 제 몫을 한다는 걸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렇다고 이제 집에 돌아가느니.

전역하는 게 좋겠다는 둥 그런 헛소리는 하지 않았다.

자신이 뭐라고.

정작 전부 그만두라고 했고 관두라고 했음에도, 자신은 지금까지도 검을 잡고 있는데.

그래,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다.

기어서라도 나아갔다.

그게 지금의 엔크리드였다.

기어서, 반걸음씩이라도 나아간 결과다. 프록을 상대해 손목이 나갔음에도 보여 줄 수 있었다.

달라진 무언가를.

그동안 쌓은 어떤 것을.

지금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목이 무리하지 않는 정도로만.

그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먼저라고.”

렘이 나서더니, 웃으며 도끼를 휘둘렀다. 시작한다는 말도 없었다.

엔크리드도 마주 검을 휘둘렀다.

렘의 팔이 채찍처럼 휘어지고 도끼날도 그렇게 보였다. 늘어지며 휘어지게.

그에 맞선 엔크리드의 검도 휘었다.

고속으로 휘두르기에 잔상이 남으며 도끼날과 칼날이 만났다.

따-앙!

한 번의 격돌, 한 수의 교환.

그것만으로 렘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것 봐라?”

렘이 중얼거렸고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진해졌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밤 중에 울린 소리에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뭐냐?”

“또 미치광이 소대야?”

“오늘은 또 뭔데?”

그러다가 미치광이 소대에서 일어난 일인 걸 알곤 병사 무리는 자연스레 구경꾼이 되어 몰렸다.

평소처럼 자기들끼리 싸운 게 아니라 새로운 얼굴이 보였고, 그게 좋은 구경거리가 됐다.

물론 그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었다.

벤젠스라든지, 아니면 이전 전장에서 함께 싸운 벨이라든지.

또는 엔크리드에게 바느질해 준 분대장이나, 변방수비대의 일부, 승급전에서 엔크리드를 상대했던 이들까지.

따다당.

쇠와 쇠가 만나고 불똥이 튀며 소음이 터졌다.

모두가 렘과 엔크리드의 대련을 잠시 지켜봤고, 전부 말을 잃었다.

“그, 음, 뭐냐, 이건?”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구경꾼 전부의 말을 대변했다.

엔크리드가, 그 엔크리드가.

최근 승급해서 상급 병사가 됐다고 해도.

어쨌든 자신보다 실력이 현저히 부족했던 상대.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머저리 분대장이라 불리기도 했던 그 작자가.

따다다다당!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검을 휘두르고 내치고 찌르고 렘의 도끼와 어울렸다.

최근에 미치광이로 이름을 더 드높이며 적군 열을 베는 것으로 아군 일부에겐 동경심까지 얻게 된 렘과 동수였다.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게 끝도 아니었다.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기다리는 놈들이 많으니까.”

대련 중 렘이 멈추고.

그 뒤에는 라그나가.

그 뒤에는 아우딘이.

번갈아 가며 엔크리드와 싸웠고, 엔크리드는 그 모두에게 쉬이 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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