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16화 (116/170)

116. 타인의 죽음이 더 불쾌한 건 무엇 때문인가.

“검을 쥐는 법이다.”

엔크리드가 태어난 마을에 있던 삼류 용병은 검조차 제대로 쥘 줄 몰랐다.

그렇게 처음 만난 교관에게 배운 것.

엄지로 칼날을 눌러 잡는 방법.

오른손을 앞에, 왼손을 뒤에 두고 그립을 쥐는 법.

손잡이 머리를 쥐는 방식, 리캇소를 활용하는 법까지.

대부분 양손으로 검을 쥐긴 했지만.

‘한 손으로도.’

될 것 같은데.

고립의 기법을 통해 본래 좋았던 힘이 더 늘었다.

왼손으로만 롱소드를 잡고 휘둘러 봤다.

붕.

적당히 휘두른 검이 원을 그렸다. 마음에 들진 않는다.

하지만 가능은 하니.

다시 찌르기, 베기, 찌르고 베기.

사선으로 베고 수평으로 벤다.

바인드를 하는 흉내까지 냈다.

머릿속에서 상대를 그려 냈는데, 렘이나 소대원을 상대로는 한 합도 버틸 수 없을 듯했다.

한 손 검술이 문제가 아니라 익숙지 않은 왼손이 문제다.

상대를 바꿨다. 얼굴은 없지만, 검을 그럭저럭 다루는.

상상하다 보니,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상대가 나오기도 하고.

용병 시절 봤던 실력과 인성이 비례하지 않던 쓰레기도 튀어나왔다.

얇은 칼을 화살처럼 쏘아 내던 놈이다.

이미지를 그려내고 검을 휘두르고.

차악.

발바닥으로 바닥을 긁으며 검을 크게 휘두르자.

어느새 땀이 흘러, 후두둑 하고 사방으로 땀방울이 튀었다.

발바닥에 걸린 자갈이 타닥 하고 튀어 올라갔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검면으로 튀어 오른 자갈을 때렸다.

틱!

부정확한 타격 덕택에 튄 자갈이 제 부츠 코를 맞췄다.

“제대로 쥐었다면 마음먹은 대로 벨 줄도 알아야지.”

교관의 말이 연이어 떠올랐다.

멀뚱히 서 있는 허수아비를 베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엔크리드도 할 줄 알았다.

왼손으로는 무척 어렵지만.

‘원하는 대로 가지도 않아.’

새로이 쌓는다. 오른손으로 걸었던 길을 다시금 왼손으로 걷는다. 반복해서 휘둘러 감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할 법도 한 일이 엔크리드에겐 아니었다.

오히려 흥이 났다.

오른손으로 갔던 길을 왼손으로 되짚으며 놓친 것을 돌아보기도 했다.

엔크리드는 어느새 눈을 감았다.

그가 보는 건 현재가 아니라 과거, 과거의 자신이었다.

점점 깊게, 더 깊게.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서 헤매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때 그렇게 했었다면?’

그동안 수없이 했던 복기들.

전장, 싸움, 마물, 마수, 사람.

모든 걸 상대로 휘두른 검, 또 검, 칼날, 손, 사람.

발이 걸리고 머리가 터지고.

마물을 상대로 가까스로 살아남고.

목숨이 두 개인 것처럼 살았던 시간.

엔크리드는 다시 걸었다.

한 점의 집중이 자연스레 몸에 붙어 자신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야수의 심장이 중심을 잡아주니, 흥분해서 실수하는 법도 없었다.

대담함, 평정심은 엔크리드가 가진 무기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유용한 것이었다.

의지력을 보완해 주는 어떤 조력자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했으니.

다시금 검을 휘두른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반복하며 되새기는 과정을 겪으니.

오른손으로 했을 때보다 배는 빨리 숙달되는 느낌이 들었다.

투두둑.

땀을 흠뻑 흘리는 중이었다. 그립에 감아 둔 가죽끈이 끊어졌다.

힘이 빠져, 손을 늘어뜨리니 검 끝이 툭 땅에 닿았다.

이 정도로 근육을 혹사했다고 할 순 없지만.

확실히 안 쓰던 근육을 쓴 느낌이다. 왼팔이 슬쩍 저리는 것 같았다.

“넌 확실히 미친놈인 것 같다.”

멍한 엔크리드의 시선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초점을 찾았다.

“전장에 안 나갔나?”

엔크리드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고, 상대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말이다.

“우리 소대가 진지 방어 담당이다. 이리 내.”

2중대 3소대장, 벤젠스다.

시선은 진즉에 느꼈다. 굳이 의식하지 않았을 뿐.

벤젠스가 다가오더니, 엔크리드의 검을 받아 그립 가죽끈을 조여 줬다.

능숙한 솜씨였다. 양쪽으로 팽팽하게 당겨서 돌리고 다시 그립 안쪽에 고정했다.

“한 손으로는 하기 힘들어 보여서 해 주는 것뿐이다.”

벤젠스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지? 불에서 구해 줬을 때부터?

새삼 궁금해져서 엔크리드가 물었다.

“나 왜 싫어했냐?”

그 말에 벤젠스가 입술을 우물거리다 말했다.

“제니.”

“제니?”

제니가 누구지? 엔크리드가 두 눈을 깜빡였다. 기억력은 나쁘지 않다. 그러니 기억에 없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

또는 모르는 이름.

이번에는 전자였다.

여전히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벤젠스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약초 파는 제니!”

약초 파는 제니?

이번에도 모르쇠로 일관한 눈빛으로 보자.

벤젠스가 욕설 한마디를 중얼거리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네 낯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싫어했다!”

애가 성격이 들쭉날쭉하다.

조금 전에는 검 손질까지 도와줘 놓고 이러네.

“하여간, 그 번지르르한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으르렁거린 벤젠스가 벌떡 일어났다.

“검 관리 잘해라.”

마음에 안 든다며 걱정?

벤젠스가 등을 돌렸고 앞으로 타박타박 걷는 걸 보며 엔크리드가 피식 웃고는 손등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난 관심 없었다. 관심이 있던 건 그쪽이었지. 내 관심은 약초 쪽이었다고.”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기억이 안 날 리가 있나.

엔크리드는 도시에 자주 들르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면 얼굴만 보고 자신이 좋다던 여자가 생기기도 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말 그대로 환상에 빠진 변방 도시 처녀의 판타지일 뿐이었다.

약초 파는 제니라고 하니 기억이 나긴 했다.

벤젠스와 말 섞는 김에 놀린다고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저 친구 반응이 재밌으니.

이런 맛에 렘도 주변 병사를 놀려 먹는 거겠지.

“알 바냐!”

벤젠스가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는 친구다.

그렇다고 마냥 귀엽다고 하기도 어렵다. 눈치 빠르고 실력 나쁘지 않고 제 부하 잘 챙기고.

‘운이 나쁘지 않다면 쉬이 죽지 않을 타입이지.’

냐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개울을 찾아 땀이라도 씻어 낼까 하는데, 에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넌 왜 이렇게 기운이 없냐? 배고파?”

캇.

엔크리드의 물음에 에스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노려보는 것처럼 보였다.

“아픈가.”

말하며 에스터의 털을 쓰다듬고 골라 주니, 곧 갸르릉 소리를 내며 에스터가 눈을 감았다.

에스터가 피곤한 이유야 다른 게 없었다.

밤새 엔크리드의 몸에 깃든 피로를 제 몸으로 받아서 해소해 주다 보니 이런 거였지.

‘무식한 인간.’

속으로 욕하면서도 에스터는 엔크리드가 그리 싫지 않았다.

포기 따윈 모르는 향상심.

그건 자신과도 같지 않나.

주문 세계를 탐구하다 이 모양 이 꼴이 되긴 했으나.

그녀 자신의 향상심도 이 남자 못지않았으니.

에스터는 고개를 숙이며 잠을 청했다.

아무래도 피로가 쌓였다.

오늘의 마법사는 휴업이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이 몸으로 주문 세계 일부를 끌어다 쓰는 것 자체가 편법이었으니.

삐이이이익!

그리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에스터의 잠을 깨웠다.

제 머리를 긁던 엔크리드의 손도 덩달아 멈췄다.

고개를 위로 든 에스터의 눈에 엔크리드의 턱이 보였다.

그가 좌우로 고개를 돌리다 말고 일어났다.

“대장!”

엔크리드가 에스터를 바닥에 내려놨다. 한쪽에서 크라이스가 내달려 오는 게 보였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이어졌다.

삐이이이이이익!

롱 톤이었다.

길게 눌러 경고성을 발하는 방식이다.

나우릴리아군은 신호 체계 중 하나로 호루라기를 부는 방식을 택하는데.

지금처럼 긴 음을 길게, 롱 톤 방식으로 낼 때는 한 가지 경우를 말했다.

적습이었다.

“어느 쪽…….”

크라이스를 향해 묻다 말고 엔크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호루라기가 터지자마자 들리는 아군의 음성이 먼저 그들의 귀를 때렸다.

“기습이다! 적군! 적군!”

“반격해!”

“물러서지 마!”

“씨이발, 염병 났네!”

당황함과 위기의식이 만들어낸 불협화음이다.

따다다당!

그 사이로 쇳덩이가 만들어 내는 소음이 터지고.

금세 피가 뿌려졌다.

“끄악!”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섞이고.

엔크리드의 눈에도 습격자가 보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

달그락.

자갈을 밟는 소리로 자신을 알리는 걸음.

그만이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그런 걸음.

봄비가 그쳐 따듯한 미풍이 불었고, 햇살이 내려앉은 자갈밭은 온기를 머금은 채였다.

그런 자갈밭을 달그락거리며 밟고 선 상대다.

떡 벌어진 어깨와 얇고 단단한 가죽 갑옷, 귀 부분만 두고 머리부터 이마까지 가리는 아즈펜 공국 특유의 투구.

투구 사이로 흘러내린 빛바랜 갈색 머리칼에 묻은 물이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지나온 자리 뒤로 적병 둘이 단창을 휘두르는데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따당.

푹! 푸북!

막고 때리고 찌르는 과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련을 거듭한 정예병이라는 것.

저런 수준의 정예병, 만난 적 있었다.

그레이 독, 집요한 사랑꾼이라는 별칭의 아즈펜의 특수 부대다.

이런 기습에 활용하기 좋은 부대.

그러니까 그들은 그렇게 했다.

부대의 특징을 활용해 기습했다.

거기에 부대를 이끈 놈이 타박타박 걸어서 엔크리드 앞까지 다가왔다.

카르르릉!

잠이 들려다 만 에스터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에스터, 뒤로.”

엔크리드는 에스터를 몸으로 가리며 입을 열었다.

“안 죽었군.”

얼굴을 아는 상대였으니.

아즈펜의 지휘관, 그레이 독의 소대장이었던가.

그는 쉽게 흥분했었고 자신의 검에 가슴팍을 찔렸었다.

이름은 미치 휴리어.

아즈펜 공국의 소대장이었다.

강을 통과했는지, 전신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딱 봐도 정상은 아니다. 밤을 달려 길을 단축하고 도강 이후에 기습까지.

체력을 소모하며 이뤄 낸 결과가 지금이리라.

다만, 상태는 엔크리드가 더 안 좋았다.

‘손목이 버틸까?’

모르겠다. 미치 휴리어는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턱을 살짝 들어 하늘을 보며 읊조렸다.

“감사를.”

신에게 바치는 경의인가.

“다시 만나고 싶었다. 엔크리드.”

다시금 시선을 내리며 잇는 말.

“이름을 기억해 줘서 영광이긴 한데.”

“그럼.”

칭.

검을 뽑는다. 미치의 발검을 보는 순간, 엔크리드는 죽음을 직감했다.

손목이 멀쩡해도 어려운 상대였다.

실력이 늘어남에 따라 생긴 안목이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게 했다.

“덕분에 눈을 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미치도 엔크리드가 이해해 주길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현재가 기쁘기에 절로 나오는 말이지.

진지 습격으로 엉망이 된 적군의 사기를 나락으로 빠뜨리려고 온 참인데.

여기서 대어를 만났으니.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상대였고.

그토록 베고 싶었던 상대였다.

다시금 만나,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저자를 꺾고 넘어서야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미치 휴리어의 검이 움직였다. 위에서 아래로 수직 베기다.

땅!

엔크리드는 오른손으로 검을 바꿔 쥐고 마주쳤다.

우득.

한 방이면 충분했다.

덧대 둔 부목이 부러지며 오른손에서 힘이 빠졌다.

손목이 시큰거리며 저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다쳤군.”

봐주려나.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자신이라도 안 그럴 테니까.

상대가 다쳤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명예를 논하는 자리도 아니고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설사 결투라고 해도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전투 중에 약점을 공략하는 건 오히려 장려할 일이니.

“운 나쁜 놈.”

미치는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제대로 싸우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바에야.

따당.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들어온 칼날을 가까스로 막았다.

‘죽는다.’

다음 공격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이다.

“이 새끼가!”

전신에 피 칠갑을 한 벤젠스가 달려와선 미치 휴리어의 등에 창을 내질렀다.

훅!

창날 끝이 제법 날카로웠다.

미치 휴리어는 보지도 않고 발을 뗐다. 왼발을 축으로 몸을 휘릭 돌려 창날을 피하곤, 그대로 사선으로 검을 내리쳤다.

팍!

그의 칼날이 창대 중간을 때렸다.

그럼에도 벤젠스는 창을 놓치지 않았다.

되레 위로 올려치며 창대로 미치의 가슴팍을 치려 했으나.

의미 없는 반항이었다.

창대를 때림과 동시에 미치 휴리어의 발이 움직였고.

반쯤 몸을 튼 자세에서 어느새 완벽하게 뒤를 돌아보는 자세가 된 미치 휴리어의 검이 허공을 갈랐으니.

검이 창대에서 떨어져 나온 후 그려 낸 궤적이 땅과 수평을 이루자.

찌걱.

벤젠스의 목이 베였다.

위험을 감지한 벤젠스는 가까스로 뒤로 몸을 물렸으나, 늦었다.

이미 반쯤 잘린 목이다.

창을 놓고 제 목을 움켜쥔다.

아, 멍청이, 얌전히 도망가도 될 것을.

벤젠스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미치 휴리어는 그런 벤젠스의 옆에 선 채로 엔크리드를 보며 말했다.

“네 목도 이렇게 잘라 주겠다.”

서걱!

반쯤 잘린 목을 다시 벤다. 목이 떨어진 벤젠스의 머리가 굴러왔다.

뭘까.

죽으면 반복되는 오늘이 오는 것을 아는데도.

기분이 참 개 음경 같았다.

지랄맞았다. 염병 같았다.

캬앗.

지켜보던 새파란 눈의 표범도 달려들려 했으나.

표범은 단창을 휘두르는 병사에게 막혔다.

“짐승 따위가.”

적병이 중얼거리며 에스터를 유린했다. 저쪽도 도망가지 않으면 곧 죽을 터였다.

“가, 에스터.”

엔크리드가 말하고 어느새 다가온 미치 휴리어가 검을 높이 들었다.

미치 휴리어는 거짓말쟁이였다. 목을 자른다고 해 놓고 결국, 엔크리드의 가슴팍을 찔렀으니.

“생각해 보니, 내가 당한 건 이쪽이었다.”

덤덤한 말투다. 그의 검이 엔크리드의 심장을 꿰뚫었다.

남은 휘슬 대거를 던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오른 손목이 이런 상태로는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제대로 붙어 보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잘 가라.”

말하며 미치 휴리어가 엔크리드의 가슴을 찌른 검을 뽑았다.

푸부북. 드드득.

가슴팍을 헤집은 칼날이 빠져나가자, 붉은 생명력이 왈칵 쏟아져 바닥에 흘렀다.

끄르륵.

피거품을 물며 앉은 채로 앞으로 허물어지는 엔크리드의 눈에, 잘린 벤젠스의 목과 한쪽으로 튕겨 나간 에스터가 보였다.

카악!

‘기분이 참.’

지랄맞았다.

묘했다. 제 죽음보다 타인의 죽음을 보는 것 자체가 더 기분 나쁜 일이라니.

죽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이제는 수없이 겪어서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익숙함은커녕 통증과 고통, 두려움을 머릿속에 심어 주는 심연.

심연을 헤매고 일어나면 다시금 아침이 오는 것을 알면서도.

죽고 싶지 않게 만드는 그런 어둠이다.

꿈은 꾸지 않았다.

그러므로 뱃사공도 없었다.

엔크리드는 다시 눈을 떴다.

냐아.

가슴팍에서 에스터가 얼굴을 비볐다.

늦잠, 소대원이 없는 아침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개 같은데.’

엔크리드는 상황이 진심으로 개 같다고 생각했다.

오른 손목은 나갔고, 소대원은 없다. 오후가 되기 전에 적의 정예가 진지를 기습하고.

거기에는 미치 휴리어란 새끼가 포함됐다.

‘도망간다고 해결되지도 않을 것이고.’

안 될 것이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같은 하루로 돌아갈 뿐.

벽을 넘지 않으면 오늘을 벗어날 순 없다.

그럼 어떻게 넘어야 하나.

엔크리드의 시선이 밑으로 떨어졌다.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에스터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에스터의 머리털을 쓰다듬는 왼손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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