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왼손
애초에 도주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설령 도망만이 답이라고 해도.
‘갈 데도 없다.’
무엇보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는데.
어찌 그 길을 두고 돌아서겠나.
엔크리드의 앞에 놓인 이정표가 물었다.
오른손 없이도 벽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거라고 했던가.
어떤 화전민 마을의 촌장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었었다.
검이 없다면 창을 들을 것이고.
무기가 없다면 주먹으로 싸울 것이다.
양팔이 없다면 물어뜯고.
다리가 없으면 무릎으로 걸으면 될 일.
‘그러니.’
오른손이 없다면 무엇이 남았나.
어둠, 심연, 공포, 통증.
죽음이 찾아올 때마다 엔크리드를 휘어잡는 것들.
그런 어둠 속에서도 엔크리드는 언제나 빛을 봤다.
“포기해라.”
누군가 그리 말하는 것 같다.
최악의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 같았다.
제 입으로 말해 보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긴 하는데, 실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 그럴까. 모르겠다. 엔크리드 또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있나.
같이 칼밥 먹던 용병 동료가 하나둘 은퇴하는 걸 봤고.
그 외에도.
“난 안 되겠다. 괴물 같은 새끼들이 이렇게 많은데, 칼질은 무슨. 지랄이지.”
타인의 재능을 시샘하며 무너지는 이들도 봤다.
엔크리드도 그런 재능 따위가 부럽긴 했다.
그런데 부러워만 하면 변하는 게 없으니.
어떤 하루도 그냥 보낼 수 없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엔크리드가 아는 방법이었기에.
그래서 그렇게 했다.
이게 힘들었냐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루하루 괴로움의 바다를 헤엄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냥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해 왔다.
죽음 또한 그렇다. 견디면 된다는 걸 알았으니, 견딘다. 그게 전부였다.
‘일단은.’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전의 반복된 오늘에서 배우질 않았나.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
세 가지 길.
가로막는 모든 걸 활용해서 ‘오늘’을 반복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거다.
전처럼 발악만이 답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하기에.
“좋은 아침.”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피로한 눈으로 에스터가 엔크리드를 빤히 바라봤다.
이 인간은 뭔데 아침부터 이렇게 밝게 인사를 하는 건가.
에스터의 눈빛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더 자라.”
엔크리드는 에스터를 자신이 누웠던 모포 안으로 밀어 넣었다.
평소라면 꿈틀거리기라도 했을 에스터가 얌전히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모포 안에 에스터를 넣은 뒤 엔크리드는 밖으로 나갔다.
“후.”
숨을 한 번 내쉬고 고립의 기법으로 몸부터 풀었다.
언제나 그렇듯 몸을 풀면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바른 정신은 굳건한 몸에 깃드는 법입니다. 형제님.”
아우딘이 이 말을 했을 때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얼추 이해되기도 했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몸을 단련할수록 머리도 맑아졌다.
흘린 땀만큼 맑아진 머리가 팽팽 돌았다.
부목을 댄 손목은 부러지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 무리하다가 부러졌으나, 원상태로 돌아왔다.
훈련했을 때 단련한 것들.
근육 단련, 기술을 몸에 익히는 모든 건 오늘을 반복해도 유지됐으나, 부상은 회복되지 않았다.
다치는 건 몸에 남는데, 회복은 오늘을 넘어서야만 된다는 거다.
그러니 오른 손목이 멀쩡해져 벽을 넘는 건 불가능하고.
‘어깨에 힘을 빼고.’
시야를 넓게, 때로는 깊게.
생각을 이어가고 최선의 길을 찾아 헤맨다.
그리하여 얻은 길로 향하는 것.
첫걸음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
뭐긴 뭐겠나.
하던 거, 마저 하는 거지.
매일 그냥 하던 그것, 반복하던 것.
실제 죽기 전에 하던 것.
단련이고 훈련이다. 다른 게 있다면 다친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하는 거고.
“구경하려면 이것부터 묶어 줘.”
그렇게 시작하기 전, 대뜸 말하자 한쪽에서 멀뚱히 구경하던 벤젠스가 다가왔다.
“내가 네 부하냐? 이런 걸 시켜 먹게?”
엔크리드가 검을 들이밀자, 벤젠스가 툴툴대면서도 그립의 끈을 조여 줬다.
이 자식 목이 떨어지는 걸 봤을 때는 기분이 참 지랄맞았지.
에스터가 당했을 때도 그렇다.
호수를 품은 눈, 검은 표범이 날아가는 걸 본 순간, 분노 비슷한 게 치솟긴 했다.
그 기분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염병, 또는 지랄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 나 대신에 죽으려고 하는 건지.’
씁쓸한 기분이 여전히 남았다. 잔상처럼 벤젠스의 떨어진 목과 나가떨어진 에스터가 떠올랐다.
‘에스터 저건 또 왜 오늘따라 기운이 없어서.’
본래 저 표범은 어떤가.
살벌했다. 병사의 정강이를 할퀴고 뜯고 목숨을 취하는 그런 야수였다.
작다고 얕보면 목까지 기어올라 순식간에 목줄을 물어뜯는 맹수였다.
그런데 그렇게 맥없이 당해?
‘기운이 없긴 했지.’
어쨌든.
저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으니.
엔크리드 또한 그리하기로 했다.
목숨을 걸고 검을 그어 보는 거다. 훈련에도 마음을 담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기로 했다.
“넌 정말 미친 것 같아. 쉴 땐 쉬어야 하는 거다.”
벤젠스가 엔크리드의 검을 도로 건네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그걸 왼손으로 받으며 답했다.
“제니 때는 미안했다.”
“……알고 있었냐?”
벤젠스가 제 머리를 한번 헝클이더니 툭 말을 뱉는다.
“네 잘못 아닌 거 안다.”
역시 이 새끼는 특이해.
기분이 들쭉날쭉 한다.
못 알아들었을 때는 그렇게 화를 내더니.
엔크리드는 다친 손으로 벤젠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굴 안 보는 여자도 대륙 어딘가에 있을 거다.”
“……개새끼가?”
일그러지는 벤젠스의 얼굴을 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이 맛이긴 하다.
렘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니까.
괜히 사람 놀리고 괴롭히고 그러는 게 아니다.
벤젠스가 투덜대면서 물러나고.
엔크리드는 검을 쥐고 섰다. 왼손으로 쥔 검 끝이 비스듬히 하늘을 가리키고.
반복된 오늘, 죽은 오늘에서 무엇을 경험했던가.
과거를 곱씹었다. 기초를 다졌다. 몰입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건 희열이었다.
전과는 다른 형태의 기쁨이었다.
오롯이 하나에 빠져들기에 느낄 수 있는 그런 쾌감.
벤젠스와의 농담으로 마음에 남은 잔상을 털어 내고 오롯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드는 순간.
엔크리드는 지나간 오늘에서의 경험을 다시 체험했다.
반복하고 되새긴다.
이번에는 그립에 감아 둔 가죽끈이 끊어지는 경우도 없었다.
“시작은 발이다.”
수없이 스쳐 간 검술 교관들.
그들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는 것.
기초다. 걷기 전에 서는 것, 서기 전에 기는 것.
기본으로 돌아온다. 정중환쾌유를 따지기 전에 배워야 할 것들이다.
검을 쥐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한 반복 훈련.
엔크리드는 그걸 했다.
슉! 훙, 붕.
둔탁함 사이로 꽤 날카로운 소리가 섞이고.
시간의 흐름을 잊고 수차례 검을 휘두르고 있자니.
삐이이이익!
롱 톤 방식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음?”
무슨 이유인지, 넋 놓고 보고 있던 벤젠스가 먼저 반응했다.
“뭐냐!”
그가 외치고 돌아서고 엔크리드도 몰입된 자신의 세상에서 나오고.
카아.
주변 공기가 달라진 걸 느낀 에스터도 막사 안에서 나와 엔크리드 곁에 섰다.
그런 에스터의 머리를 손끝으로 툭 건드린 엔크리드가 말했다.
“오늘은 나서지 마라. 피곤하잖아.”
뭐지? 이 인간? 에스터로서는 당연한 의문이 드는 말이다.
자신이 오늘 지쳤다는 걸 알고 하는 말 같다. 어제 피로를 풀어 주려고 한 수작을 눈치챈 건가?
물론 아니었다.
반복된 오늘을 통한 경험으로 아는 것뿐.
“대장!”
크라이스가 외치며 달려오는 게 보이고.
엔크리드는 잠시 검 끝을 바닥에 푹 찍고 고민했다.
오른손으로 바꿔 쥘까?
그게 의미가 있을까?
부상은 회복되지 않는다. 죽으면 도로 돌아갈 뿐.
왼손으로 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나.
고민은 없었다. 애초에 엔크리드는 깊게 고민하고 고뇌하는 종류의 인간이 아님에.
오늘에 갇힌다는 선택지는 없다.
도망간다는 선택지도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면 될 일.
그게 이거다.
투두둑.
몇 개의 자갈을 쳐 내며 검을 땅에서 뽑아서 앞으로 겨눴다.
“……돌아가면 신전에 헌금을 해야겠구나.”
미치 휴리어, 자갈을 밟고 나타난 그가 말했다. 푹 젖은 머리칼과 손에 들린 검.
정련된 자세와 날카로운 눈빛, 확실히 전과는 다르다.
“뭐라는 거야.”
옆에 있던 벤젠스가 으르렁거리듯 창을 겨눈다. 그 옆에서 에스터는 실제 으르렁거리며 짐승의 울음을 토했다.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퍼지는 묵직한 울음.
겁 많은 인간이라면 오금이 저릴 소리인데도 미치 휴리어의 걸음에는 주저가 없었다.
타박타박, 서슴없이 걸어 거리를 좁혔다.
“내가 먼저 간다.”
말하고 엔크리드가 앞으로 나서니.
“대장, 손목은!”
뒤에서 크라이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왕눈이도 어지간히 놀란 듯했다.
갑자기 쳐들어온 적군, 거기에 아군이 픽픽 쓰러지는 판이니.
으악, 악!
시발! 막아!
죽여라!
사방이 시끄럽다. 쨍쨍거리는 쇳소리 사이.
미치 휴리어의 걸음이 멈추고.
엔크리드는 크라이스에게 답했다.
“왼손은 멀쩡해.”
저게 무슨 미친 소리야?
크라이스가 제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소대장의 개소리가 통 이해가 가질 않아서다.
그건 이 자리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헛소리로 들리기 충분했다.
다만, 말과 달리 엔크리드는 기백만큼은 상대 못지않았다.
상대의 기세가 주변을 아우르고 짓눌렀다.
벤젠스는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주변을 압도한다는 게 이런 것이리라.
에스터조차도 압박을 느꼈다.
크라이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주변 병사의 도움을 받을 형편도 아니었으니.
수틀리면 죽을 위기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이런 압박에도 엔크리드의 등은 왜 커 보이는가.
그가 서 있다. 앞에 섰다. 등을 보였다.
그 몇 가지 사실이 압박을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상대의 기백에 맞서는 기백.
그래, 그런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미치 휴리어와 엔크리드 사이에 눈빛이 오갔다.
“다시 만나길 바랐다.”
“내 덕에 눈을 떴을 거고?”
그 말에 미치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말로 상대의 마음을 흔드는 건 발렌 식 용병검에서도 기초 중의 기초였다.
반복된 오늘을 통해 아는 거로 상대의 마음을 흔든 뒤다.
엔크리드가 다친 오른손을 흔들었다. 마치 뭐라도 되는 것처럼.
미치가 반사적으로 검을 움직였다.
말로 놀라게 하고 오른손을 움직여 다시 한번 속인 뒤, 왼손에 든 검을 아래에서 위로 푹 찔렀다.
발렌 식 용병검 이중발검이다.
왼손 찌르기가 완벽하다고 할 순 없었다. 마음에 차지도 않았다.
고작 이틀 정도 검을 놀린 것에 불과하니.
땅!
막혔다.
어설픈 찌르기도 찌르기지만, 무엇보다 미치 휴리어의 실력이 몰라보게 늘었다.
어찌 보면 오늘을 반복한 엔크리드와 비슷할 정도로.
아래에서 위로 찌른 검을 제 검으로 맞서 튕겨 내고, 그대로 왼발을 앞으로.
유려한 동작이 이어졌다.
미치의 검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엔크리드의 가슴팍을 베었다.
파가각.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자, 가죽 갑옷이 미치의 검을 한 번 버텼다.
하지만 그게 한계였다.
카아악!
뒤에서 다시 에스터가 뛰어들려고 했고.
“미친 새끼가!”
벤젠스가 벌컥 화를 냈으며.
“대장!”
크라이스가 외쳤다.
미치 휴리어는 주변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하든 할 일을 했다.
엔크리드가 피할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양발의 위치를 앞뒤로 바꾸며 스텝을 밟아 거리를 좁힌 뒤, 검을 찔렀다.
푸우욱!
“오른손은?”
미치가 찌른 채로 묻는다. 엔크리드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부목을 댄 오른손, 부상이다.
“음.”
뭐라 대답하려는 엔크리드의 입에서 진홍색 피가 흘렀다.
“운이 없었구나.”
우드드득.
칼날이 뽑힌다. 심장이 쪼개진 사람은 살 수 없는 법이니.
그 뒤로 크라이스가 뭐라 하고 벤젠스가 덤비고 에스터도 덤비고.
하여간에 왜 자꾸 덤비는지.
그런 일들 뒤, 엔크리드는 통증과 함께 심연의 어둠을 만났다.
다시 찾아온 죽음이다.
그리고 눈을 뜬 뒤, 또 왼손 훈련을 반복했다.
어떤 날은 조용히 훈련에만 임했고.
어떤 날은.
“제니는 보는 눈이 있는 여자였지.”
“……죽여 버린다?”
괜히 벤젠스를 놀리기도 했다.
그렇게 십여 번의 오늘을 반복.
“오른손 다쳤잖아!”
흥분한 크라이스가 저리 외치는 걸 듣기도 했다.
“왼손 남았다니까.”
“뭐라는 거야, 진짜!”
발렌 식 용병검을 섞어 썼지만 영 통하질 않았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레슬링 기법을 섞었다.
검을 뽑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휘슬 대거를 던지고, 거리를 좁히며 검을 뽑는 척하다가 발을 걸어 버렸다.
미치는 무릎을 굽혀 무게 중심을 낮추는 것만으로 엔크리드의 발을 버텨 냈다.
“어딜.”
다음은 다시금 검을 휘두르는 작업이다.
처음에는 한 합을 못 버티던 것이 서른 번쯤 지나자 두 번, 세 번 버티기 시작했고.
마흔두 번째의 오늘에서.
처음으로 엔크리드가 의도하지 않았던 변화가 있었다.
“나랑 한판 하자.”
지켜보던 벤젠스가 대뜸 대련을 요청한 거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느낀 엔크리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랑?”
“그럼, 누구랑 하겠냐?”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버릇과도 같은 거였다. 그는 대련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으니.
본래 벤젠스는 엔크리드의 상대가 될 수 없었으나, 지금의 엔크리드는 왼손으로 검을 쓰는 중이었다.
“봐주기 없다.”
벤젠스가 말하고 창을 내밀었다. 그 기세가 꽤 살벌했다.
팅, 엔크리드가 인사 겸 창날을 검으로 때렸다.
대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