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18화 (118/170)

118. 도약

“덤벼!”

따다당.

몇 번이고 검과 창이 만났고.

벤젠스는 거칠고 힘이 좋았다. 보통 사람보다 아무리 근력이 좋다고 해도.

상대도 단련한 병사였다.

한 손만 써서는 힘으로 찍어 누르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럼, 어떻게?’

싸우며 생각했고 실행했다.

흘린다. 강격은 흘리고 빈틈은 찌른다.

점과 점을 잇는 선.

최적의 동선을 찾아 검을 찔러 넣고 반응을 보며 뒤로 물러난다.

발이 바삐 움직였다.

그러다 빈틈을 보면 위에서 밑으로 무겁게 중검식의 묘미를 살려 내려치기도 했다.

까가가각!

창대로 일격을 막은 벤젠스가 발을 걸었다.

이쪽은 엔크리드가 더 익숙한 싸움이었다.

그동안 에일 카라즈 식 박투술의 핀과 무수히도 싸워 보지 않았던가.

거기에 발라프 식 무투술을 배워 침대 기술이라는 그라운드 기술에도 익숙해졌다.

탁 하고 벤젠스의 발을 차 버리곤 빈틈을 노려 검으로 힘껏 창날을 후려쳐 버렸다.

땅!

순간 창날이 옆으로 틀어지고.

그 틈에 검을 억지로 목에 갖다 붙였다.

왼손 팔뚝 근육에서 우득 하고 뭔가 끊어지는 소리 따위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도 이기긴 했다.

“너, 왼손.”

“원래 단련했다. 자주, 안 볼 때. 비장의 무기였지.”

준비된 핑계란 언제나 아름답다.

하도 오늘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 핑계를 대는 일에 능숙해지기도 했고.

“염병.”

“대련은 갑자기 왜?”

“몰라, 보고 있으니까 한판 붙어 보고 싶잖아.”

기본기만 단련하고 있었는데?

딱히 대단한 움직임을 보였던가.

스텝, 찌르고 베는 동작의 반복.

그 외의 것이 있었나.

벤젠스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니까 엔크리드가 이미 자신보다 윗줄인 건 알았다.

실력도, 인성도.

의무 막사 화재 때 자신을 구해 준 것부터 이미 저 자식을 미워할 수 없었다.

왼손으로 검을 단련하는 걸 보고 무슨 짓인가 싶긴 했는데.

‘왜 왼손도 잘 쓰냐.’

다만, 뭔가 부족해 보이긴 했다.

“그, 뭐냐, 이상하다.”

“뭐?”

아니, 염병, 설명을 이따위로 하면 누가 알아듣나.

벤젠스는 스스로를 욕하며 다시금 머리를 굴렸고, 굴린 머리를 통해 얻은 걸 혀를 굴려 말했다.

“죽은 검 같다.”

이게 최선이었다. 더 설명하자니, 어설픈 말의 연속일 것 같고.

그렇다고 자기보다 잘 싸우는 놈에게 뭐라고 더 말을 한단 말인가.

근데 상황을 보자니, 이게 꽤 우스운 꼴이었다.

대뜸 나서서 싸우자고 하더니, 져 놓고 상대를 탓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잠시.”

엔크리드가 그의 말을 막고서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보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있긴 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벤젠스는 억울했다.

질투와 질시 때문에 나선 게 아니었다. 벤젠스는 그 순간 순수했으니까.

말 그대로 처음 창을 잡았을 때처럼.

종군을 시작하고 처음 마수를 잡고 흥분해서 아침저녁으로 창을 휘둘렀을 때.

그때가 떠올라 버렸다.

피가 끓었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오른 손목이 작살난 놈.

소문을 들어 보니, 살벌한 임무를 끝내고 돌아와선 제 소대원과 대련하고 잠든 놈.

그런 놈이다. 다치고 지쳤을 터다.

그런데 왜 저렇게 몸을 굴리지?

그런데 왜 저 새끼는 웃고 있지?

질투나 질시를 떠올릴 수 없었기에.

피가 확 하고 끓어올랐다.

“고맙다.”

그런데 대뜸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보던 엔크리드가 말한다. 그러곤 멀뚱히 선 벤젠스를 보고서.

“뭐 하냐.”

물었고.

벤젠스는 눈을 끔뻑이다가 답했다.

“아무것도.”

근데 뭐가 고맙다는 거지? 하여간 이상한 새끼인 건 확실하다.

훈련에 미친 미치광이라니, 잘 어울리는 별명 아닌가.

마성의 소대장보다는 확실히 더 좋은 별명이다.

엔크리드는 벤젠스의 말에 깨닫는 게 있었다.

‘어설픔.’

과거를 곱씹고 걸었던 길을 다시금 걸으며 느꼈던 불협화음.

잘못된 것을 느끼고 찾기보다, 매일 검을 휘두르기 바빴다.

더 좋은 방법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됐으니.

감각의 차이다. 오른손잡이의 오른손과 왼손은 손끝부터 모든 감각에 차이가 있다.

그게 먼저였다.

‘식사부터.’

수저, 포크를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마침 손끝 감각과 팔 근육을 같이 쓰는 방식의 훈련도 알고 있다.

‘하이드 나이프.’

좋다. 이게 길이 될 터였다.

“대장!”

다시금 크라이스의 목소리가 울리고.

“크르르.”

에스터가 적의를 보이고.

“이런, 씹.”

벤젠스가 욕설을 뱉는다.

“다시 만나게 해 준 신께 감사를.”

그리고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종교에 심취하게 된 미치 휴리어가 젖은 채로 앞을 막아섰다.

도망가 봤자, 본래대로 돌아가는 하루.

왼손 하나로 넘어야 할 벽이었다.

말이 무슨 필요인가.

검을 쥐고 싸우는 것만이 답인걸.

엔크리드는 말없이 싸웠다. 검을 휘둘렀다. 발을 걸었다.

상대의 패턴을 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죽었다.

통증, 어둠, 심연, 죽음.

다시금 죽고 일어난 뒤, 다음 날부터 왼손으로 생활을 시작했다.

“뭐 해요?”

크라이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배 채운다.”

“오른쪽 손가락도 다쳤습니까?”

“아니, 안 쓰려고. 안 써야 낫지.”

“과한데.”

응. 대충 댄 핑계다.

왼손 생활을 시작하고 스무 번의 오늘이 지난 뒤다.

그동안 벤젠스는 몇 번 더 대련을 요청했다.

피가 끓은 순수한 무력을 동경하던 병사의 얼굴이었다.

“좋다.”

스무 번의 오늘이 지난 뒤에 오늘에서야 그에게 죽은 검이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덕분이다.’

다시금 검을 휘두르고 죽는다.

그리 죽고, 죽고 또 죽고.

변화를 느낀 건 아흔 번째의 오늘에서였다.

‘달라.’

오른손을 걸었던 길을 왼손으로 걸으면 똑같은 걸 반복하게 되는 걸까.

아니다.

그때의 엔크리드와 지금의 엔크리드는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

‘한 점의 집중.’

몰입, 자신의 안에 침잠해 들어가면서도 검을 그어 가는 훈련.

고립의 기법을 통해 달라진 육체.

몰입과 달라진 육체.

그러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게 만드는 야수의 심장.

제 몸의 움직임, 그러니까 흔들리는 칼날이 어느 쪽으로 향하는가.

그럴 때 내 몸은 얼마나 움직이는가.

반복, 반복, 반복.

지겨울 정도로 계속된 훈련 중이었다.

엔크리드는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순간을 맞이했다.

슉.

슉.

슉.

칼날이 제 뜻대로 움직이는 걸 넘어.

정중환쾌유의 기본식을 대강 흉내 내는 데 막힘이 없다는 걸 느꼈다.

정확하고 무겁고 빠르고 부드럽고 기괴하게.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재능이란 무엇인가.

그걸 한마디로 정의할 순 없었다.

몸을 쓰는 재주도 필요할 테고.

모든 걸 잊고 집중하는 것조차도 재능의 일부일 테니.

쾌감조차 느낄 여력이 없었다.

검이 알아서 길을 찾아서 움직였다.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주변을 볼 필요도 없었다. 이리 움직이면서도 주변에서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니.

미천한 재능을 후천적 노력으로 뜯어고쳐 겪는 일이었다.

그러니 처음 겪는 일.

본래라면 평생 겪지 못했을 일.

몰입과 육체, 평정심이 잡아 준 균형 위에 예민함을 더해.

엔크리드는 반복이 아니라 딱 하루 만에 자신의 검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걸 느꼈다.

“후.”

동시에 부족함도 보였다.

세밀함이다.

그걸 채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단순히 검을 휘둘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트인 재능 사이로 보이는 것들.

왼손으로 생활을 대신하는 걸 넘어.

하이드 나이프를 아예 손에 익게 붙이면 될 것 같았다.

그러니 다시 반복이다. 부족한 게 선명히 보였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었다.

그렇게 다시금 반복한다.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괴로운 나날일 수 있으나.

‘이게 되나.’

왼손으로 하나씩 지나온 길을 밟아 가는 엔크리드는 즐거움을 느꼈다.

성장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

그것만큼 그를 불태우게 하는 건 없었으니.

감각을 더 날카롭게 갈고닦고 이제 얼추 준비됐다고 느낀 오늘.

“대련 한판 하자.”

어김없이 벤젠스가 덤볐다.

숫제 이제는 매번 매일 덤비던 친구다.

싸움은 길지 않았다.

따당!

창날을 쳐 내고 검을 휘릭 올리자, 뱀처럼 칼날이 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벤젠스의 목 앞에서 멈춘 칼날이다.

“씹, 왼손인데.”

“원래 단련했다.”

다른 오늘과 비슷한 핑계에 벤젠스가 입을 다물었다.

벤젠스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어떻게 왼손으로 이런 걸.’

한탄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저 선망이 생겨 대련해 달라 요청한 셈이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마침 엔크리드가 물었고.

벤젠스는 속내를 있는 그대로 말했다.

“돌아가면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에 엔크리드가 멀뚱히 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탐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긴 했다.

그가 곧 입을 열어 말했다.

“오냐. 그럼 언젠가 제니도 넘어올 거다.”

“이 개새끼가?”

어떻게 번번이 이렇게 흥분하는 걸까.

제니는 벤젠스의 발작 스위치였다.

엔크리드는 웃으며 그를 밀어냈고, 벤젠스도 피식 웃어 버렸다.

‘제니한테 고백은 하게 해 줘야지.’

그럼, 여기서 죽어선 안 될 것이다.

삐이이이이익.

호루라기가 울었다.

백열두 번째 오늘이 시작됐다.

달그락.

자갈을 밟고 미치 휴리어가 나타나고.

“대자앙!”

크라이스가 오늘은 조금 늦었다.

오늘이 반복된다고 해서 매번 같진 않다.

물론 크라이스가 늦건 말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오른쪽 허리에 검집을 차고 왼손으로 그립을 쥔다.

“이건, 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미치 휴리어가 엔크리드를 보고 중얼거렸다.

엔크리드는 듣지 않았다.

어느 순간 호루라기 소리도, 미치 휴리어도, 벤젠스도, 에스터도, 크라이스도.

자신도 잊었다.

오롯이 검만 담았다. 검과 상대, 점과 점을 잊는 선.

빠름은 무엇인가.

치리리리리링!

검집과 만난 칼날이 마찰음을 토해 내고.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뽑은 검이 최적의 동선을 그려 내며 미치 휴리어의 이마로 떨어져 내렸다.

핑.

그런 소리가 엔크리드의 귓가로 들렸다.

시간을 쪼갠 틈, 몰입의 상태에 돌입해 전력으로 뽑아낸 선제공격.

이 일격만큼은 지금 오른손보다 낫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챙!

미치 휴리어의 검도 뽑혀 나왔다.

까-앙!

칼날과 칼날이 만난다.

십자로 교차한 칼날, 엔크리드는 힘으로 밀어붙였다.

두드드드득!

미치의 발이 뒤로 밀렸다.

그대로 발을 떼면 넘어질 판이었다. 그는 그대로 버텼고, 엔크리드는 검을 뺄 틈도 주지 않고 거리를 좁혔다.

그렇게 손을 뻗지 않아도 될 만큼 거리를 좁힌 뒤다.

엔크리드는 자신의 검을 놔 버리고는 검을 쥔 미치 휴리어의 손을 그러쥐었다.

순간 전력으로 손을 짓누르니.

우득.

경쾌한 뼈 마찰음이 들렸다.

“미친 새끼가!”

빡!

미치 휴리어가 무릎을 엔크리드의 허벅지 어림을 때렸다.

엔크리드는 그러면서도 상대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으나.

이어진 상대의 주먹에 광대뼈 부근을 맞고서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주먹 참 맵네.’

“에스터!”

물러나며 외치자, 눈치 빠른 표범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내 검!”

공격하란 소리가 아니다, 이 표범아.

엔크리드의 마음은 제대로 닿았다.

에스터는 이 무식한 인간이 하는 짓을 보고 혀를 내두르던 중, 이름에 반응해 튀어 나갔다.

뒤이어 터진 외침에 그녀는 제 이빨로 엔크리드의 검 그립을 콱 깨물고 뒤로 던졌다.

에스터는 고작 이 동작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오늘은 마법도 휴업이고 몸도 정상이 아니었으니.

붕, 덜그럭. 퉁.

검이 낮게 날아 엔크리드의 한 걸음 앞에 떨어지고.

팍!

에스터가 있던 자리로 창이 날아와 꽂혔다.

뒤에 있던 적병이었다.

단창으로 바닥을 찌른 놈이 재차 발로 에스터를 걷어차려고 하자.

땅!

이번에는 벤젠스가 그걸 막았다.

“어딜, 새끼야.”

창을 맞댄 적병이 흥하고 콧김을 뿜어내고 둘이 서로를 향해 창날과 창대, 주먹과 발을 날리기 시작했다.

엔크리드는 그 틈에 검을 집어 올렸다.

“손은 괜찮고?”

오른 손목에 부목을 댄 건 엔크리드다. 그러니 그가 묻기 적합한 질문 같진 않았으나.

“이 새끼.”

미치 휴리어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엔크리드를 노려보게 만드는 질문이 되긴 했다.

조금 전 격돌로 그의 엄지가 부러졌으니.

힘을 받아 주는 엄지 없이는 검을 제대로 쥘 수 없을 터.

미치는 부러진 엄지를 한 번 보고 상대를 바라봤다.

이제 보니 엔크리드란 놈 왼손으로 검을 들었다.

본래 왼손잡이였던가?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자신과 싸울 때는 오른손이었다.

그것도 전력을 다했었고.

그걸 기억하기에 이 상황이 황당할 따름이지만.

“미안하지만, 난 양손잡이다.”

미치 휴리어가 말하며 반대쪽 손으로 검을 잡았다.

왼손.

엔크리드는 당연히 왼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고.

“응, 나도 오늘부터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복하는 오늘을 통해 왼손을 쓰는 데 꽤 익숙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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