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어머니가 구울이었나?
이건 무슨 짓이지?
잘그락거리는 자잘한 자갈밭, 왼쪽에는 강을 우측에는 산과 숲을 배경으로 마주한 양군이었다.
화살이 닿을 거리였다. 실제로 양군의 궁병 일부가 눈치를 보고 있기도 했고.
파리한 긴장감과 함께 화살 비를 통과해 서로의 목에 창을 꽂거나, 검을 휘두르거나.
그도 아니면 메이스를 휘둘러 투구째로 머리통을 깰 순간이었으나.
시작은, 이건 뭐랄까?
‘도발?’
“아이고, 물건도 못 써 보고 죽을 건데 어쩌냐?”
세 놈이 나와서 외치는데 목소리가 우렁찼다. 발음도 명확했다.
걸어서 삼백 걸음도 넘을 거리 같은데, 욕설이 귀에 딱딱 꽂혔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 건지.
시답잖은 짓으로 보이기도 했으나.
‘이게 먹혀?’
먹혔다. 안 그래도 사기가 바닥인데 저런 짓거리까지 그냥 두고 봐야 하나, 답답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냅다 화살을 쏘고 달려들면?
양군의 머릿수에 큰 차이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기가 떨어졌다는 건 시작부터 진 싸움이란 거다.
그러니.
‘지켜보는 게 맞긴 하는데.’
그냥 지켜본다고 답이 나오려나.
특출난 용병술을 쓰든지, 아니면 소수 정예로 흔들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전황을 보는 눈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손을 써야 한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엔크리드는 다른 이들보다 여유가 있었다.
적어도 여기서 죽을 것 같진 않았으니.
자잘한 부상이 있든 없든.
소대원이 곁에 있든 없든.
그냥 직감이었다. 그렇게 보면 비약적인 성장을 하긴 했다.
예전이었다면 당장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타이밍에 전황 따위나 보고 있다니.
‘배가 불렀나?’
잡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엔크리드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부대 하나를 이끄는 처지거나, 부하의 목숨이 달려 있다면, 이런 걱정이 당연하지만.
엔크리드는 미치광이 소대를 과연 자신이 이끄는 게 맞나 의문부터 드는 판이다.
이들이 알아서 자신을 따라오는 게 전부다.
그러니 당장은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할 터.
“앤드류, 흥분하지 마라.”
엔크리드가 손을 들어 앤드류의 가슴팍을 막았다.
“네?”
“숫총각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거듭 말함으로 앤드류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 줬다.
일전에 앤드류가 어떠했나.
정찰 분대로 같이 임무를 하면서 만났고, 그를 도발했을 때 썼던 말을 목청 좋은 적군이 그대로 썼다.
앤드류가 흥분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 줘야 했다.
“……이거 나 먹이는 것 같은데.”
앤드류의 중얼거렸다. 그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아니었다. 오해였다. 엔크리드가 재차 말했다.
“지금은 참아, 분노를 터트릴 기회는 온다.”
새로 온 대대장이 마커스라고 했던가, 연대장이나 기사단 관련 인물이 오지 않는 이상, 부대 지휘권은 그가 그대로 쥐고 있을 터.
마커스란 작자의 머리통에 꽃밭이 가득하지 않은 이상, 이대로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금 생긴 모든 분노를 담아 전투에 써라.”
“저 화 안 났는데, 저거 저랑 상관 있다고도 생각 안 했는데.”
“지금은 아니라니까. 참아.”
엔크리드는 겉치레로 말하는 앤드류를 달랬다. 적극적이었다.
숫제 어깨를 두드리며 뒤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앤드류가 힘없이 한 걸음 물러났다.
“큼.”
옆에서 듣던 엔리가 헛기침을.
맥은 난감한 표정을 보였고.
나머지 소대원들은.
“풉.”
렘부터 낄낄대기 시작했다. 표정 없는 작센까지도 슬쩍 앤드류를 보곤 희미한 미소를 보일 정도였으니.
“형제님, 괜찮습니다. 신께 귀의하십시오.”
아우딘은 아예 수도승이 되라 권하기도 했다.
라그나는 흘깃 앤드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기회는 있다.”
무슨 기회? 아니, 능력이 없어서 안 한 게 아니라니까.
“나한테 왜 그러는 겁니까?”
앤드류는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었다. 실제로 엔크리드가 자신을 도발할 때 했던 말도 잊은 참이었다.
지금 이렇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정말 영원히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몰랐는데.
검을 단련해야 했다.
가문을 살려야 했다.
그에게 다른 건 사치였다. 그는 충실하게 삶을 채워 나가는 노동자였다.
그런데 왜 이런 거로 놀려?
“괜찮다잖아. 새캬.”
렘이 주먹으로 툭툭 앤드류의 어깨를 쳤다.
앤드류는 억울했고, 없던 분노가 치솟았다.
자연히 그 화는 전면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화를 터트렸다간 내일 아침 뜨는 해를 볼 수 없다. 그의 본능은 분노의 대상을 변경했다.
‘저 미친 구울 같은 새끼들 때문에.’
물건 어쩌고 외친 놈들이 문제다. 적병 새끼들의 주둥이를 찢어 주고 싶었다.
이후에도 욕설이 오갔다.
아군에서도 몇 놈이 나섰으나, 어째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말싸움이라니.
이게 무슨 짓인지 싶지만, 상대의 전략과 의도가 참 명확하긴 했다.
사기를 밑바닥까지 떨어뜨리겠다는 거다.
저런 말 몇 마디에도 아군의 분위기가 꽤 나빠지는 걸 보면 확실했다.
다만.
엔크리드의 주변에서는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전장 전체로 보자면 보잘것없는 변화 같아도.
“그, 음, 도시에 돌아가면 좋은 샬롱을 소개해 주지.”
“홍등가에서 첫 경험을 뺏기진 말라고.”
“처음은 노련한 연상이 좋지. 내 이모님을 한 분 아는데 어떤가?”
주변 병사의 진득한 농지거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안 닥쳐?”
앤드류가 사납게 사방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의 희생으로 이쪽만큼은 분위기가 전환됐다. 상대가 욕을 할 때 가장 좋은 대처법은 무시였다.
“재주가 좋군요.”
엔크리드의 의도를 읽은 크라이스의 한마디였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본래 모든 건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거였고.
크라이스는 자신이 지휘관이라면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본래라면 후방에서 싸움이 언제 끝나나 한가로이 있을 시간에 전장에 섰다.
자연히 살아남는 방편, 그러니까 이기는 싸움을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중 첫 번째다. 분위기를 바꾸는 것.
그걸 엔크리드가 시작했다.
“재주? 정말 걱정돼서 한 거다. 먼저 나서서 싸우지 말란 명령이 있었으니.”
분명 농담인데.
이걸 전부 노리고 한 걸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감각, 본능적으로 취한 것 같은데.
‘하여간 묘한 사람이야.’
이게 또 엔크리드의 매력이기도 했다. 치열하게 살면서도 저런 농담을 잊지 않았고, 칙칙한 분위기를 용납하는 법이 없었다.
앤드류는 놀림을 받아 얼굴이 벌게졌지만.
미치광이 독립 소대 중심으로 분위기가 변했다.
어쩔 거냐, 싸움이나 하자.
뭐, 이런 느낌, 그런 기질이 풍기기 시작했단 거다.
본래 그런 취지의 인간들이 모인 소대다 보니, 슬슬 몸이 근질거리는지 렘이 입을 열었다.
“근데 언제까지 구경만 하는 거요.”
차라리 한바탕 싸우면 속이 시원할 건데.
양 군 모두 긴장감만 가득 머금은 채, 시작을 안 했다.
활시위를 바짝 당겨 살을 먹인 채 그대로 버티는 판국이었다.
신경이 예민한 놈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구역질하는 이들도 나온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하지.
이런 분위기가 벌써 며칠 째라니.
렘을 비롯한 이들도 슬슬 짜증이 나는 판이고.
다행인 건 새로 합류한 셋, 앤드류와 맥, 엔리의 안색이 좋다는 거다.
근무도 같이 서고.
렘이나 다른 소대원의 괴롭힘에 뭉치다 보니 서로 사이가 좋아졌다.
엔리야 한발 물러나서 어울리는 처지지만.
애초에 렘을 비롯한 소대원을 버텨 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님에야.
그러다 보니 이들은 아군 전체에 팽배하게 퍼진 패배감에 휩쓸리진 않았다.
시달리고 근무 서기 바빠 죽겠는데, 다른 생각할 겨를이 있나.
“입 한번 털어 보실래요?”
크라이스가 대뜸 말했다.
아군의 스탠스는 분명했다. 적군의 공격을 기다린다는 것.
크라이스는 그걸 이용해 엔크리드에게 제안했다.
고약한 혀를 가진 렘을 비롯해 모든 소대원이 인정하는 엔크리드다. 그의 발상과 한마디는 상대의 속을 뒤집기 충분하다는 것.
“딱히 할 말은 없는데.”
말재간이 뛰어나건 말건, 이런 분위기에서 무슨 말을 하나.
엔크리드는 진심이었다. 그래도 크라이스는 재차 제안했다.
“그래도 분위기 전환 삼아.”
그래 볼까.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으니.
적군과 아군이 칼과 창이 아닌 혀로 싸우고 있었다.
엔크리드가 슬며시 움직였다. 독립 소대는 딱히 정해진 자리도 없었다.
그들이 움직이자, 자연스레 길이 열렸다.
지나가며 아는 얼굴의 병사 몇이 어디 가냐 물었다.
엔크리드는 묻는 이들에게 덤덤한 어조로 답했다.
“한마디 거들어 주려고.”
그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다.
물건으로 지랄하고, 뭐 여왕의 남창들이 뭘 할 줄 아느냐고 시끄럽게 떠들기 바쁜 적군이었다.
그리 선두에 섰는데, 그곳에 벤젠스가 있었다.
“후방에서 복귀하자마자 선두냐?”
“우리 부대가 가장 전력 유지가 잘된 부대다.”
일부 섞였던 궁병 대신 전원 창병으로 전환한 소대로 보였다.
이쪽이 2중대 3소대였나, 그러니까 엔크리드는 2중대 앞쪽에 자리 잡은 거였다.
벤젠스를 한번 보고 저 멀리 선 적군을 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것도 같았다.
엔크리드는 아예 몇 걸음 더 나갔다.
그 곁으로 렘과 라그나, 작센이 붙었다.
화살 비거리가 닿는 정도를 넘어, 작정하고 쏘면 고슴도치가 될지도 모르는 거리인데도 엔크리드는 과감했다.
어차피 말로 싸울 거라면.
사기가 떨어져서 문제라면.
대담함을 보여 주는 건 어떤가.
“거기, 나와!”
나서서 외친다. 상대를 향한 도발이었다. 이쪽은 이리 나섰는데 너희는 어쩔래? 과감한 질문이기도 했다.
이제까지 싸움이 어땠다고 그랬더라.
말싸움 후에 병급 병사의 결투 신청.
지휘관이 아닌 자들의 싸움으로 기선을 제압했다고 했던가.
그럼, 여기도 비슷하게 하면 되지 않나.
‘내가 하지 뭐.’
크라이스는 따라나서는 대신 몇 가지 말만 전했는데, 그게 엔크리드의 귀에는 합당하게 들렸다.
“다섯 정도 연속으로 잡아 낼 수 있죠? 그러면 될 것 같은데.”
요는 이거였다.
병급 결투에 엔크리드가 나서면 지휘관이 나서느니 어쩌니 해도 무시하고 압살하는 거로.
‘압도적으로.’
상대를 죽이고 또 죽임으로 실력 차이를 보여 주라는 것.
상대도 지휘관이 나서게 만들어 꺾어 버리라는 거다.
크라이스의 큰 눈을 보니 뭔가 생각이 있어 보였다.
사기를 진작시킴으로써 뭔가를 하겠다는, 그런 수작질.
엔크리드는 크라이스의 머리를 믿었고 그의 꼼수를 믿었기에, 그렇게 전장에 나섰다.
도발과도 같은 전진에.
아군도 웅성거리고.
“뭐야?”
“아, 미치광이 소대장이다.”
“엔크리드?”
“주술파괴자?”
아는 사람은 아는 얼굴, 그러니까 부대 내 알려진 사람이다. 무엇보다 최근에는 실력으로도 꿀리지 않는다는 걸 증명했음에.
아군 전체는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벤젠스조차 나서는 엔크리드를 보니 뭔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유? 모른다.
전장의 분위기는 날 선 칼날과 같았고.
이제까지는 그 칼날이 아군 쪽에 겨눠진 듯했었으나.
지금 바람이 다른 방향으로 불기 시작했다고, 그렇게 느꼈다.
크라이스는 자신이 노리는 바가 먹히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뭐, 어떻게든 하겠지.’
아군 지휘관이 뭘 기다리는지도 대강은 알 것 같았다.
마커스 대대장이란 사람의 소문을 들으며 그의 전투 스타일도 짐작했으니.
뭐든 준비하고 있을 거였다.
크라이스는 그 시작을 조금 돕기로 했다. 만약 헛다리 짚은 거라면, 그냥 얌전히 물러나면 그만이고.
어쨌든 손해는 적고, 이득을 취하는 쪽으로 머리를 굴렸다.
엔크리드가 나서며 분위기가 흔들리자, 적군 중에서도 입을 털던 이가 나섰다.
“나왔다. 이 새끼야.”
엔크리드는 딱히 상대를 놀릴 게 없다고 생각하며 나왔으나, 나오면서 벤젠스를 스치듯 지나치지 않았나.
벤젠스가 자기를 왜 싫어했더라?
결론만 말하면 얼굴 때문 아니었나?
“넌 뭐냐, 왜 구울 대가리를 달고 나오냐.”
무심한 한마디, 바람을 타고 흐르며 외친 소리가 아련히 울리며.
아군과 적군의 귀에 닿는다.
별 내용이 아니었다.
다만, 서로 얼굴 생김새가 어렴풋이 보이는 거리.
적병, 구울 대가리는 엔크리드의 얼굴을 봤다.
‘시발?’
잘생겼다.
괜히 짜증이 치솟는 그런 낯짝이었다.
“뭐?”
“어머니가 구울이었나?”
엔크리드는 적병의 모친이 혹여 다른 종은 아닐까 의심했다.
합당한 의심이라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적의 얼굴을 가리키자.
“뭐, 이 씨발 새끼가?”
적병이 곧바로 분노를 토했다. 말 두 번 섞은 거로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아우딘은 그걸 듣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신도 벌할 말이로다.’
렘은 푸학 하고 웃어 버렸다.
다른 이들이라고 뭐 다를까.
맥이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꾸역꾸역 뒤에서 따라온 앤드류는 그제야 표정이 환해졌다.
그래, 저따위 얼굴로 무슨 말을 한다고.
생김새가 너무 자유분방하지 않나.
비가 오면 콧구멍으로 빗물도 받을 것 같은 들창코에.
눈깔은 왜 저 모양이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동공 색깔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눈이 작았다.
얼굴에 부스럼은 왜 그리 많은지.
구울이라 오인할 만했다.
“하하하하!”
앤드류가 너무도 해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발, 어디 손도 혀만큼 매운가 보자.”
적병이 도발에 넘어갔다.
혀로 시작되어 창과 검, 피로 이어지는 순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