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26화 (126/170)

126.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보장하진 않는다 (2)

라그나의 눈 안에서 불꽃이 터졌다.

의욕, 욕구 또는 어떤 무언가.

엔크리드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훙.

파공음이 먼저 귀에 닿았다.

귀로 듣는 순간, 칼날이 머리 위에 있었다. 엔크리드도 움직였다.

검을 수평으로 두어, 발레리산 강철과 누아르산 연철을 섞어 만든 검이 볼품없는 조악한 품질의 아밍소드와 만났다.

쩡.

칼날과 칼날이 만난다. 소음이 터진다. 그리고 만나기 무섭게 칼날은 헤어졌다.

라그나가 한 걸음 물러나고 엔크리드도 똑같이 한 걸음 물러났다.

서로 인사 겸 나눈 검격이라고 해야 할까.

고작 인사에 엔크리드는 또 새로운 무언가를 본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 그걸 뭐라고 봐야 할까?’

엄청 빠른 칼질? 아니면 기척 없는 내려베기?

수려했다. 아름다웠고 빼어났다.

라그나의 검은 그만큼 깨끗한 참격이었다.

자신은 대응은 그와 반대였다.

깨끗하지 못했다. 거칠었다. 날이 서지 않은 투박한 칼날 같았다. 무두질이 되지 않은 거친 가죽 같았다.

그래도 보였고 몸도 반응했다.

“다시.”

라그나가 말했다. 조금 전과 똑같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칼질로 보이는 궤적으로 칼날이 날아왔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참격.

엔크리드는 똑같은 자세로 막았다.

챙!

칼날이 부딪치며 불똥이 튀고.

찌르르.

칼날이 다시금 부딪친 순간, 라그나의 칼날이 사라졌다.

‘때릴 때부터 끊어치기.’

라그나는 검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지금 보여 준 한 수도 그와 같았다.

부드럽게 내려치는 듯했으나, 힘이 실린 끊어치기였다.

검을 수평으로 들어서 막았는데 양팔이 찌르르 울렸다.

그 틈에 라그나의 검이 뱀처럼 휘어지며 밑으로 내리꽂혔다.

노리는 건 허벅지.

끊어치기 한 번에 팔이 저렸다. 꼼짝없이 당할 차례였다.

저린 팔을 억지로 움직일까? 아니, 그건 악수다. 엔크리드는 손 대신 발을 써서 뒤로 뛰었다. 스텝을 밟으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 했다.

오른발을 뒤로 빼고 몸을 틀면 상대의 측면을 점하게 되는 법이니.

라그나도 멈춰 있지 않았다. 내리꽂던 검을 자연스레 당기며, 옆으로 발을 움직였다.

스스슥.

땅을 쓸 듯이 움직인 걸음 끝에 둘은 다시 서로를 마주 봤다.

라그나의 눈에 들어 있는 게 어떤 열정이라면.

그 반대로 엔크리드의 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저 눈.’

라그나는 욕구가 끓어올랐다. 의욕이 샘솟았다.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입과 혀가 아닌 손과 발로.

검으로, 무기로, 살기로, 의지로.

그런 것들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엔크리드도 그걸 마다하지 않았다.

‘좋다. 좋아.’

라그나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다.

엔크리드는 짧은 공방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뭔가가 가슴 속에서 터져 오름을 느꼈다.

검으로 나눈 인사 이후 끊어치기에 이은 자리싸움.

모든 것이 어우러지며 가슴 속 무언가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몸 전체에서 무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까.

활력? 정기?

모른다. 그저 한 가지 확실한 건, 힘이 넘쳤다.

인사와 끊어치기로 손목 상태는 확인이 끝났다.

묵직한 충격은 남았을지언정 통증은 없다.

‘괜찮다.’

그럼 이제 어울릴 일만 남았을 뿐 아닌가.

이번에는 엔크리드가 먼저였다.

혼신, 필살의 의지를 담은 찌르기였다.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모든 동작을 단숨에 이뤄 내 핑- 하고 검을 날린다.

내리꽂히는 매와 같이 검 끝이 공기를 갈랐다.

라그나는 날아오는 검 끝을 바라보며 몸을 틀었다. 요란한 발재간이 아님에도 그의 몸은 엔크리드의 찌르기를 피했다.

라그나는 피하며 웃었고.

엔크리드는 피한 라그나를 보고 만족했기에 웃었다.

옆에서 보면 무척 단순한 공방의 연속처럼 보였다.

찌르고 베고 피하고 자리를 먹고.

타닥.

엔크리드의 공격은 변칙이 많았다. 갑자기 거리를 바짝 좁혀 라그나의 정강이를 걷어차려고도 했고.

라그나가 그걸 피하자, 그대로 검의 리캇소와 칼날을 잡고서 거는 하프소딩 싸움.

라그나는 뭐든 다 쳐 내고 비껴 내고 피한 뒤 검을 휘둘렀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젠장.’

렘은 그걸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존나 재밌을 것 같은데.’

엔크리드의 실력이 또 성장했다. 안 본 며칠 사이에 뭔가 또 변했다.

싸워 보고 싶었다. 손목이 멀쩡한 엔크리드와 겨뤄 보고 싶었다.

보는 것만으로 욕구가 차올랐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렘은 초조해졌다. 라그나랑 싸우다가 엔크리드가 모든 체력을 다 소진할까 봐.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지만, 지금 대련은 좀 그렇지 않나.

뭔가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전, 손목이 다쳤을 때의 대련과는 달랐다.

그때도 다들 놀라긴 했지만, 렘을 위시한 이들이 대강 봐줬고 양보하며 한 대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 새끼 조금 진지한 거 아닌가?’

렘이 보기에 라그나의 칼질이 그랬다. 자신과 싸울 때만큼은 아니어도 평소의 게을러 빠진 검이 아니었다.

적군과 싸웠을 때 지금의 반만 힘을 냈어도 적군 지휘관은 라그나란 이름을 뇌리에 새겼을 터였다.

‘새끼야, 진짜 적당히 좀 해라.’

렘은 손이 근질거렸다. 둘 다 웃고 있지 않았다면 진즉에 도끼를 들고 난입했을 것 같았다.

이걸 보고 몸이 달아오른 게 렘만은 아니었다.

‘내가 왜?’

작센은 자신을 부인했다. 전면에 나서서 싸우는 걸 좋아했던가?

아닌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검술 단련이야 부지런히 했으나, 그게 마음이 움직여서 한 일이었던가?

아니었다.

검술을 단련하는 것과 욕구에 이끌려 움직이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

적어도 작센에게는 그랬는데.

움찔.

자꾸 손이 움직이려 했다.

엔크리드가 걷는 걸음에, 자신이 소대장이라 부르는 작자가 휘두르는 검에 몸이 반응했다.

‘웃기지도 않는데.’

갑자기 이런 호승심이라니.

아무리 엔크리드의 실력이 늘었어도 지금 당장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작센이 보기에 라그나란 멍청한 게으름뱅이는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다.

지금보다 진지했다면, 그랬다면 진즉에 끝났을 터.

그런데 왜 저런 싸움에 몸이 반응하는 건가.

작센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기분에.

그는 마음을 다잡고 침묵했다. 이후 움찔하는 몸도 통제해 우뚝 선 채로 지켜만 봤다.

작센이 마음을 다잡는 사이, 싸움을 지켜보는 아우딘은 흐뭇했다. 기꺼웠다.

‘이제 슬슬.’

자신도 힘을 좀 써도 될 것 같으니까.

그는 마음이 급하지도 않았고, 호승심이 올라오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주께서 주신 것이기에.’

투쟁 욕구는 아우딘에게 이롭고 좋은 것이었다.

그런 것조차 없었다면 현재 그의 자리는 엔크리드의 곁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신의 곁이었을 테니.

신성을 사용한 대가로 이틀이나 끔찍한 두통을 앓았음에도, 아우딘은 내심 만족했다.

저것 보아라.

몸이 멀쩡한 분대장의 움직임이 그를 감탄케 하지 않나.

요정 중대장은 엔크리드와 라그나가 행하는 어떤 동작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천재였나?’

자연히 드는 의문이다.

분명 저만한 실력이 아니었는데.

의무 막사에서의 첫 만남.

이후 엔크리드를 마주했던 순간을 되새겼다.

‘운만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검을 다루는 것도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뛰어났다. 수많은 닭 중에 단연코 눈에 띄는 한 마리 학과 같은, 그만한 실력이었다.

그녀가 이제껏 지켜본바, 단기간에 이 수준까지 치고 올라온 천재라고 할 수도 있으나.

‘아닌데, 좀 다른데.’

그녀의 날카로운 안목은 엔크리드의 몸에 허점을 찾긴 했다. 응당 천재라면 하지 않을 버릇 같은 거였다.

요정의 감각은 어떨 때는 프록의 재능을 판독하는 능력보다 날카로울 때가 있었다.

오랜 시간, 참으로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끊임없이 고민한 이들에게만 보이는 그런 흔적, 엔크리드에게는 그런 게 보였다.

어디 천재란 종자들에게 그런 게 보이던가.

아니다.

지금 라그나와 같다. 제가 휘두르는 검에 고민 따윈 없는 것.

저게 천재의 표본이다.

그럼 엔크리드는 어떤가.

“핫!”

마침 엔크리드가 기합을 내지르더니 한 손으로 정수리 베기를 시도했다.

수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느꼈던 고민이 담긴 검이었다.

이쪽 길도, 저쪽 길도 가봤기에 지금 휘두르는 궤적이 최적임을 아는, 목적지로 향하는 길이 이것뿐이라는 걸 확신하는 그런 칼질.

깡!

둘의 검이 만난다. 까가가각 하고 엔크리드가 쥔 검의 칼날이 라그나의 검을 타고 한쪽으로 미끄러졌다.

노림수?

요정의 감각은 정확했다.

라그나는 힘을 줘 엔크리드의 검을 튕겨 냈고.

곧바로 검을 앞으로 뻗어 내며 짧은 종 베기를 시도.

그사이, 엔크리드의 왼손이 빛을 토했다. 푸르스름한 빛살, 허리춤에서 시작된 무언가, 햇살을 가르며 뻗어 나온 담금질이 만든 마법.

두 번째 검이었다.

후웅!

결론적으로 엔크리드의 검은 허공을 그었다.

두 번째 검, 발검은 무섭게 빨랐으나, 그 짧은 순간에도 라그나의 눈은 모든 걸 파악했기에.

그는 뒤로 물러나는 거로 검격을 피했다.

완벽하게 계산된 후퇴였다.

엔크리드의 두 번째 검은 라그나의 앞을 휑하니 지나갔을 뿐이다.

그 뒤 라그나는 뒤로 물렸던 검을 내리쳤다.

타이밍을 뺏고, 노림수를 부수는 일격이었다.

순전히 수 싸움에서 이겼다고 할 순 없었다.

이건 그러니까 가진 능력의 차이였다.

전투에서 필요한 건 단순히 힘만은 아니니까.

인지력, 감각, 경험, 검술.

라그나는 엔크리드의 왼손이 움직이는 걸 느꼈고, 봤다. 이후 그는 엔크리드가 보일 수 없는 속도로 발과 손을 놀렸다.

그렇게 끝난 대련이었다.

요정 중대장은 끝난 싸움을 보자, 조금 초조해졌다.

‘나도 싸워 보고 싶은데.’

그녀라고 호승심이 없을까.

이전에는 손과 발로 했으나, 이제는 검을 나눠 보고 싶었다.

어느 정도는 진심을 조금 섞어서.

자신의 나이들이 보여 주는 신기를 구경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그걸 본 엔크리드는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한쪽에서 대련을 지켜보던 크라이스는 호승심 따윈 생기지 않았다.

둘이 싸우는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호승심은 무슨.

‘늘었어.’

다만 문외한인 그가 봐도 엔크리드의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건 알겠다.

‘늦깎이 천재 같은 건가.’

놀랍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후 크라이스는 대련보다는 주변에 시선을 돌렸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상황이었다.

렘은 일어났다가 앉는 걸 세 번 반복하더니, 숫제 발을 동동 굴렀다.

뭔가 안달 난, 아끼던 장난감을 뺏긴 아이 같았다.

그 옆의 작센은 혼자 어깨를 몇 번 움찔거리더니 갑자기 묵직한 석상이라도 된 듯 꼼짝도 하지 않고 멈췄다.

숨은 쉬는지 궁금할 정도로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멈춰 있을 수 있는 건지.

그걸 보고 있자니, 어째 등골이 서늘했다. 깜깜한 밤, 홀로 공동묘지에 남은 기분이랄까.

‘아우.’

괜히 혀를 내두른 크라이스의 시선이 아우딘에게 닿았다.

신의 가르침에 푹 빠진 이 덩치 큰 병사는 숫제 흐뭇하게 웃으며 읊조리는 중이었다.

크라이스는 아우딘의 바로 옆으로 가 그가 읊조리는 걸 들었다.

“음, 좋군요. 이제 싸워 볼 만하겠습니다.”

“팔 하나 정도는 부러져도 괜찮겠군요.”

“목을 꺾는 건, 아, 신께 먼저 보내 버릴 뻔했군요. 그건 안 되죠. 아무렴, 안 될 일이지.”

이번에는 진짜 무서웠다. 소름이 쫙 돋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말을 그렇게 했어도 달려들 것 같진 않았다.

입에서 중얼거리는 건 공포 그 자체였는데, 태도는 진중했다.

아우딘은 가만히 제자리를 지켰다.

마지막으로 요정 중대장이다.

묘한 농담을 하던 요정은 제 검을 쥔 채로 엔크리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고요한 숲과 같으나, 금방이라도 떨쳐 일어날 폭풍 같다.

크라이스의 감상은 그랬다.

이 작자들 참 대단하다 싶었다.

주변에 구경꾼이 몰리지 않았다. 승전 이후 며칠이 지나자 한껏 올랐던 사기가 은근히 가라앉았다.

언제 다시금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판인지라 각자 개인 정비에 바빴다.

몇몇 병사가 눈을 돌려 구경하긴 했지만, 그리 관심을 두진 않았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 이미 한차례 보여 주지 않았나.

후방에서 엔크리드가 복귀했을 때 이들의 대련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때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다.

안목 있는 이들은 바빴고.

나머지는 구경할 마음이 없기에.

요란한 구경꾼은 없었다.

구경꾼도, 곧 전투가 벌어질 법한 분위기도, 공기도 이들에게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 전장에 곧 나서야 하는 걸 아는 이들인데도.

‘서로 싸우고 싶어서 난리라니.’

그것도 노리는 상대는 하나다.

이제 막 모든 부상을 떨치고 일어난 엔크리드, 제 소대장이다.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렇다고 해서 크라이스가 그들을 나무라는 일은 없었다.

평소에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는데.

지금은 더했다.

이들 사이에 피어오른 열기가 만만치 않았다.

‘괜찮으려나.’

라그나와의 대련은 자기가 봐도 격했다. 끝내고 쉬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대로 쉬겠다고 하면 렘이 지랄할 게 분명했다.

다른 이들도 그리 기분 좋게 넘어가진 않을 것 같고.

크라이스의 걱정은 기우였다.

“다음.”

엔크리드는 땀을 흠뻑 흘린 채로 활짝 웃었다.

몸에서 솟구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는 엔크리드는 미친 듯이 몸을 굴리고 싶었다.

그 말에 렘이 폴짝 뛰었다. 실제로 그는 바닥에서 솟구쳐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내 차례요! 내 차례! 끼어들면 죽일 거요! 중대장이든 뭐든.”

눈깔 돌아간 렘이었다.

중대장은 나서려다 멈췄다. 양보의 미덕을 살리기로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보니.

엔크리드도 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니.

그날 엔크리드는 굴렀다.

그가 원하는 대로 신나게, 검을 맞댔고 휘둘렀고 이검류도 보였다.

“쓸 만하군.”

요정 중대장도 제 기회를 살릴 수 있었다. 두 개의 검을 쓰는 것에 대한 간단한 평가도 내렸다.

한 바퀴로 끝나지도 않았다. 라그나가 두 번, 렘이 세 번, 아우딘이 두 번, 요정 중대장이 한 번, 끝내 나서지 않은 작센을 제외하고 엔크리드와 겨룬 횟수다.

크라이스는 혀를 내둘렀고.

해가 떨어질 때쯤에야 대련이 끝났다.

지치지도 않는지.

대련이 끝나고 엔크리드는 퍼져서 누워 버렸고.

어느새 나타난 에스터가 그걸 보곤 모두를 사납게 노려봤다.

이렇게 될 때까지 무슨 짓이냐고 그리 노려보는 것 같았다.

다만, 누구도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더없이 만족했다.

‘표정.’

언제였더라.

키다리 풀밭 정찰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였나.

그때 렘과 라그나가 대련하는 걸 보고 느꼈다.

둘의 표정이 자신과 대련할 때와 다르다는걸.

그때 그 표정을 끌어내고 싶었고.

오늘에야 그렇게 했으니.

물론 렘과 라그나를 비롯한 모두가 전부 제 실력을 발휘한 건 아니었다.

그건 자신도 잘 알았다.

하지만, 보긴 했다. 달라진 표정을.

웃음을, 미소를, 만족을.

작은 목표 하나를 이룬 그런 기분이었기에.

엔크리드는 희열을, 쾌감을 느꼈다.

마약과도 같은 기쁨.

성장함으로 얻어 내는 충족감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다만, 너무 무리한 탓일까.

그날 밤, 또 개 같은 악몽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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