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27화 (127/170)

127.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보장하진 않는다 (3)

“음.”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엔크리드의 신음에 에스터가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인간.’

어쩌자고 몸을 이렇게 굴리는 건지.

에스터는 이전에 배운 바가 있었다. 가진 힘을 몽땅 써서 피로를 풀어주면 되레 제 몸이 먼저 지친다는 것 말이다.

그리된 이유가 무엇인가.

엔크리드가 주워 온 마도서에 너무 심취한 탓이었다.

‘쓸 만하긴 하지만.’

판별하고 구분해서 쓸 게 많았다.

홀로 고심하다 보니, 불현듯 지금 당장은 자신의 주문 세계를 볼 수조차 없는 신세라는 생각이 들어 처량해졌다.

‘내가 왜 이런 꼴을.’

“후으.”

처량하다 느낀 건 짧은 순간뿐이었다. 제 신세를 한탄하기도 전에 자신을 품에 안은 남자가 다시금 신음을 흘리니.

어떤 순간에도 하루의 시작을 단련으로 시작하는 미친 인간.

몸에 뭘 품고 있는지는 모르나, 이 남자가 품은 무언가가 제 몸에 걸린 저주를 서서히 붕괴시키는 중이었다.

‘할 일이나 하자.’

남자의 몸 상태가 좋을 때 그 붕괴 속도가 더 가속화되기에 에스터는 평소처럼 피로를 풀어 주기 위해 애썼다.

주문 세계를 열지 못하는 대신, 제 몸을 매개 삼아 남자의 몸에서 피로를 뽑아내 흐트러뜨린다.

그 와중에 그녀의 심상 안으로 가끔 남자의 꿈이나 생각 일부가 투영되기도 했다.

이전에는 무작정 검만 나타나거나.

깊고 검은 우물 따위가 보이기도 했는데.

오늘은 꿈 일부가 엿보였다.

꿈은 남자가 지닌 과거의 조각 같았다.

난잡한 꿈을 통해,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 자신을 안은 남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기에 그 얼굴이 선명히 보일 따름이었다.

그걸 본 에스터는 눈살을 찌푸렸다.

‘더럽게 못생겼네.’

실상 못생겼다기보다는 뭐랄까, 한없이 야비함을 품었다고 해야 하나.

분위기가 그랬다. 정확히는 엔크리드란 인간이 저 남자를 보는 시선이 그런 거겠지만.

에스터는 남자의 꿈을 지켜봤다. 꿈에서는 길었으나, 현실로는 한순간.

‘그만 헤매.’

평소처럼 할 일이나 하라고.

에스터는 남자를 나무랐다. 저딴 꿈을 꾸니 피로를 흩트리기 힘들지 않나.

그 한마디에 꿈이 끝나고 남자의 입에서 나오던 신음이 끊겼다.

곧 깊은 잠에 빠진 남자의 숨소리만이 에스터의 귓가에 들렸다.

* * *

엔크리드는 눈을 뜨자마자 이게 꿈인 걸 알았다.

‘또?’

다만 또 같은 꿈을 꾼 게 놀라울 따름이다.

검은 강의 뱃사공이 나왔다면 오히려 그러려니 했을 텐데.

과거의 한순간, 벌써 몇 번째 꾸는 꿈인지.

한때 이걸 악몽이라 생각했으나 하도 떠올리고 되새기다 보니 이제는 그저 그런 순간이 되었다.

“넌 음, 그냥 살려 주마.”

삐죽 솟은 살기.

눈깔이 세모지게 생긴 용병.

그 옆에 드러누운 건 함께 일을 시작한 동료.

얼굴을 안 지 고작 사흘밖에 안 됐어도 서로 등을 맡기고, 싸워야 할 처지였다. 아니, 처지였었다.

일의 시작은 마수 토벌 의뢰였다.

“하피 한두 마리가 말썽인데, 잡아 주면 좋겠소.”

왕국 변두리 쪽에 있는 마을인지라, 주민 모두가 주머니를 털어 크로나를 모았다고 했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찾아온 촌장의 아들이 용병 다섯을 고용했다.

그중에 엔크리드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이 새끼도 있었고.

까아악.

까마귀를 닮은 울음소리.

출렁이는 젖가슴, 내리꽂히는 하피의 발톱.

하피의 일격에 꽤 오래 알고 지내던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

“적당히 눈치 보면서 나서라, 그리 나서다간 제명에 못 죽는다.”

혀는 독해도 마음 씀씀이는 쓸 만한 용병이었다.

이렇게 죽을 친구는 아니었는데.

세모꼴 눈 새끼가 뒤에서 찌른 덕분이었다.

하피의 일격에 맞춰 앞뒤 동시 합격이라니.

마물과 인간의 합격술에 당했다.

이후 세모꼴 눈깔 용병은 검을 뽑아내 휘둘렀다.

티리리링!

기묘한 소리를 뿜어내며 얇은 칼날이 주변을 훑는다. 휘어지며 뻗어진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속도였다.

쌕!

놈의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무척 독특했다.

그리고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검은 동료의 머리통에 구멍을 냈다.

심장에도, 허벅지에도, 팔뚝에도, 낭창거리며 휘어지는 칼날이 만든 묘기는 동료를 죽였다.

전부 죽인 뒤에 놈이 한 말이 넌 살려 준다는 거였다.

비릿한 웃음, 흩어지는 살기.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그 눈.

엔크리드는 화를 내지 않았고, 소리도 지르지도 않았다.

묵묵히 검을 들었다.

“뭐? 나랑 싸우자고?”

말이 필요 없었다.

몇 번 검을 나누지도 못하고 어깨에 구멍이 났다.

“넌 살려 준다니까.”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가 버렸다. 엔크리드가 이후 살아난 건 반 이상이 운이었다.

“전부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마수와 마물이 머무는 땅에서 가까스로 살아나 도착한 마을.

거기서 몸을 추슬러 다시금 목숨 건 여행을 통해 도착한 도시.

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소속된 길드에는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새 놈은 길드의 중추가 되어 있었다.

그런 놈도 결국 몇 년 뒤에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귀족의 딸을 잘못 건드렸다고 했던가.

그때, 엔크리드의 동료를 죽인 이유도 비슷했다.

“시발, 네가 뭐라고 지랄이냐?”

놈의 오래된 버릇을 안 다른 용병이 그를 나무랐기에 생긴 일이었다.

자신을 살려 준 이유? 물어보진 않아 모르겠지만.

뭔가 자기만족 같은 게 엿보이긴 했었다. 상대도 되지 않은 용병, 자신은 아무나 죽이는 게 아니기에, 죽은 놈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그런 자기만족.

“불쌍한 새끼.”

떠나며 놈이 남긴 말.

엔크리드는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실력과 인성은 별개라는 생각도 했다.

‘개 같은 새끼였지.’

꿈은 꿈일 뿐.

엔크리드가 그저 그런 인간이었다면.

상대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검을 들어 그때의 죄를 묻겠지만.

그 하나를 위해 제 인생을 태우지 않았다.

하피에게 심장을 잃은 동료를 위해 제 삶을 던지지 않았다.

그 모든 원한과 기억을 두고 꿈을 향해 제 삶을 불사를 뿐.

그게 엔크리드의 삶이었다.

굳건하고 우직하게.

‘너 따위는 죽일 가치도 없다.’

그리 상대가 자신을 바라봐도, 상처받을 바에야, 오롯이 나아갈 뿐.

어둡고 습하고 두렵고 괴로운 기억이 자신을 침식하려 해도.

묵묵히 그걸 견디고 떨쳐 낼 뿐.

‘의미 없는 일.’

절망과 괴로움이 어깨를 짓누르는 게 검을 휘두를 때 도움이 되던가.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길에 좋은 이정표가 되어 줄 수 있던가.

아니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절망할 시간에 검을 휘둘렀다. 동료의 죽음을 곱씹을 시간에 검을 휘둘렀다. 복수를 다짐할 시간에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죽여주랴?”

꿈이 비틀렸다. 어째 뱃사공이 놈의 뒤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난잡한 바다가 되어 사방이 물들어 갈 때다.

냐아.

어디선가 나른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거로 끝이었다. 꿈이 흐려지고 깨졌다.

‘그만 헤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아하고 맑다. 그러면서도 뜨겁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에스터?’

엔크리드는 이유 없이 푸른 눈의 표범이 떠올랐다.

깨지고 조각난 꿈의 끝.

뿌우우우우우.

뿔 나팔 소리에 엔크리드는 눈을 떴다.

이번에는 현실이었다. 익숙한 천막 천장이 보였다.

제 품에 안긴 표범은 쥐 죽은 듯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아련한 온기가 가슴을 데웠다.

천막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직 아침 해도 뜨지 않은 채였다.

새파란 빛이 은근히 스며들었다.

뿔 나팔 소리에 반응한 게 엔크리드만은 아니었다.

“좋은 아침이유.”

렘이다. 벌떡 일어난 렘이 제 무장을 챙기기 시작했다.

“흐미, 시벌, 아직도 춥네.”

야만인은 특히나 추위를 싫어했다. 이전처럼 삭풍이라 부를 바람도 없는데도 신소리를 뱉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평소처럼 그리 두껍지 않은 갬비슨과 두 자루 도끼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 일어섰다.

아우딘도 자리에서 일어나 제 몽둥이 두 개를 챙겼다.

“축복이 가득한 하루가 되길, 좋은 아침입니다. 형제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뭐라 타박을 하는 이도 없다.

언제 일어났는지, 제 무장을 이미 챙겨 입은 작센과.

오늘만큼은 게으름뱅이란 말을 하기 어려울 만큼 벌써 움직이는 라그나다.

그렇다고 라그나가 벌떡 일어나서 부리나케 움직인 건 아니지만, 조용히 제 무장을 챙겼다.

엔크리드도 그들을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남은 휘슬 대거가 세 자루.

속옷 대용의 얇은 셔츠를 입고 그 위로 오른쪽 어깨 부근이 찢어진 가죽 갑옷.

가죽 갑옷은 얇고 부드러워서 착용감이 좋았다. 갬비슨까지 걸친 뒤, 부츠와 건틀렛까지 끼면 완벽했다.

허리춤에 가드소드 한 자루.

왼쪽 다리에 나이프 한 자루.

이전 프록과 상대하며 오른쪽 건틀렛에 찢어진 흔적이 남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가죽 갑옷도 건틀렛도 전부 반쯤 망가졌다고 봐야 했다.

‘재봉으로 해결이 되려나?’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지금 해결할 일은 아니었다.

앤드류와 맥, 엔리도 미치광이 소대에 있으니 막내니, 짐 덩이니 하는 소리를 듣는 거지, 노련한 병사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에 앤드류는 이전에 적의 병사를 죽이는 전과를 올리며 제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 주기도 했다.

그때의 흥분은 이제 가셨으나, 자신감은 남았다.

그들도 무장을 챙겼다.

“뭡니까?”

앤드류가 물었다.

“뭐겠냐?”

렘이 한심한 눈빛으로 앤드류를 바라봤다.

“숨어 있던 놈들이 나온 것 같은데.”

맥은 앞뒤 상황을 머릿속에 넣고 말했다. 새벽 나절부터, 특히나 안개 때문에 시야도 확보되지 않은 시점에 뿔 나팔을 불어 댄 이유가 뭐겠나.

크라이스도 눈을 비비며 같은 생각을 했다.

빌어먹을 아침부터 쳐들어오면 피부 안 좋아지는데.

잡생각은 잠시고, 이후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아군은 평소보다 정찰에 병사를 더 많이 운용했다. 경계 근무도 마찬가지였고.

승리의 기쁨으로 술을 나눠 마시지도 않았다.

음식을 더 내주지도 않았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각 부대의 지휘관은 각자 부대의 분위기를 다잡았을 것이다.

이긴 싸움은 이긴 싸움으로 두되.

다음을 위한 준비였다.

전장에는 이런 격언이 있었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역시 괜찮은 지휘관이라니까.’

크라이스는 마커스를 높게 평가했다. 그의 모든 선택이 이해가 가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집합! 전군 집합!”

밖에서 전령의 목소리가 울렸다.

크라이스는 이 와중에 적군이 숨은 게 묘하다고 생각했다. 왜 진지에서 틀어박혀서 버티는데?

튀려면 튈 것이고 마지막 항전을 하든지, 아니면 지원을 요청하거나, 어떤 짓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냥 숨어?

왜?

단순한 질문에 대한 답이 언제나 단순할 순 없지만.

때로는 명료하고 담백하게 나올 수도 있는 법이었다.

‘지금 상태도 제 놈들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지. 뒤집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즉, 숨겨 둔 수가 더 있다는 것.

대대장이라고 그걸 모르진 않을 것이다.

이제는 누구의 예측이 더 정확하냐의 문제일 터.

아즈펜이 준비한 칼이 더 날카로운가.

아군 지휘관의 방패가 더 단단한가.

뭐, 이런 부분은 크라이스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니.

“혼자 남을 거 아니면 무장 챙기지?”

잠시 생각에 빠진 크라이스의 머리를 엔크리드가 툭 쳤다.

“아, 네.”

어쨌든 오늘은 이쪽 곁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지.

엔크리드는 크라이스의 속내가 보였다.

당분간 곁에서 안 떨어질 생각으로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갬비슨을 껴입진 않을 테니.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지만, 크라이스가 제 목숨을 소중히 하는 거 보면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긴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놈.

그리 보였다.

막사 밖으로 나가니 사방이 분주했다. 뿔 나팔과 전령의 말에 각자의 방식대로 움직이고 모이는 병력.

“흐흐, 냄새가 난다. 냄새가.”

어째 렘은 기분이 좋아 보였고.

“안개가 거슬리지만, 음, 괜찮네.”

라그나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감각을 세우면 안개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작센은 오늘따라 친절했다.

“주께서 말씀하시길, 오늘 천국에 빈자리가 많다고 하시니.”

아우딘의 기도는 최근 그 어떤 때보다 사납게 들리기도 했다.

천국의 빈자리를 채우겠다고? 작정하고 패 죽이겠다는 말로 들렸다.

앤드류와 맥, 엔리까지.

몸이 가볍다.

어제 대련할 때, 엔크리드는 끝없이 솟는 힘을 느꼈다.

마치 내일의 힘까지 오늘 끌어다 쓰는 그런 기분이었는데.

‘좋아.’

어제 그리 험하게 몸을 굴렸음에도 오늘도 상태가 좋았다. 아니, 어제보다 더 나은 것 같은데.

‘손목에 통증 없고.’

베이고 찔린 상처도 이미 새살이 돋았다.

신성과 요정의 약이 만들어 낸 합주였다.

“전군 출격! 이동한다! 앞으로! 앞으로!”

앞쪽, 전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안개를 뚫고 아군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변의 안개는 그 어느 날보다 짙었으나.

주술 같진 않았다. 순전히 감이었으나, 적도 머저리가 아닌 이상, 한 번 쓴 수법을 두 번 쓰진 않을 것이고.

아군도 그에 관한 대비는 해 뒀으리라 생각했다.

“좋수다. 좋아.”

렘 새끼는 연신 입을 털었다.

“뭐가?”

“오늘은 뭔가 재밌을 것 같수다.”

가끔 보면 렘 새끼의 머리통에는 뭐가 들었을까 싶은데.

문제라면 엔크리드도 그런 감이 있었다.

안개 너머, 뭔가 새로운 적이 다가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전투의 흥분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는 거다.

주변 모두, 선두에 선 지휘관까지 긴장한 채로 도열을 마쳤을 때.

“시이발!”

선두에 있던 아군의 목소리가 터졌다.

“쏴! 빨리 쏴!”

흐릿한 안개 너머, 엔크리드는 묘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흐릿한 회색 그림자였다.

체구는 곰 같았고, 머리는 한참 위에 있었다.

아우딘보다도 큰 덩어리다.

엔크리드 자신보다 한 배 반은 높은 곳에 머리통 비슷한 게 달린 괴물 그림자가 화살 비를 뚫고 내달려오는 중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