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괴력의 심장
선두에 선 병사 중 벨이 있었다.
‘시발, 시발, 시발.’
그는 운이 없었다. 차라리 첫 번째 일격에 뒈지는 게 나았을 뻔했다.
거인이라니.
그걸 두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저런 걸 상대하려면 1중대가 나서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변방 수비대나?
거북이 중갑 부대는 아군의 좌측에 자리했고.
변방 수비대는 뭐 단체로 술이라도 처먹으러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벨은 등 뒤로 땀방울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긴장감에 손이 저렸다. 다리가 후들거릴 것 같았다.
거인은 처웃기만 하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아니, 실상 첫 번째 망치질에서 보여 줄 건 다 보여 준 셈이었다.
그 일격, 압도적 괴력이 만든 참상, 그런 걸 보고 멀쩡하면 대가리가 고장 난 것일 테지.
‘시발.’
벨은 죽음을 직감했다.
저 망치가 움직이면 곧 자신이 죽을 차례였다.
앞선이 터지고 어쩌다 보니 곧바로 자신이 선두에 섰으니.
“염병 났네.”
그의 바로 옆에서 분대장이 말했다.
그의 안색도 만만치 않았다. 흔들리는 동공을 보니, 도망가자고 외치지 않은 게 용했다.
도망가면 뒤에서 버티는 선봉 지휘관이란 작자들이 독전관이 되어 칼을 휘두를 테니, 실상 도망갈 수도 없겠지만.
옆에서 그리 겁먹은 분대장을 보니, 벨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염병, 그냥 뒈지지 뭐.
전장에 나서는 순간부터 목숨은 천국에 저당 잡힌 거다.
지금 채권 회수가 돌아왔나 보지 뭐,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뒈질 겁니다.”
벨이 말했다. 분대장이 그를 바라봤다. 벨은 분대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모든 걸 포기한 그런 미소를 보였다.
“발가락 하나 정도는 잘라가고 싶은데.”
거인의 가죽은 단단해서 어지간한 칼질로 벨 수 없다고 했는데.
과연 어떨까.
딱 붙어서 슥삭슥삭 베어 내면?
아무리 드래곤 통뼈라고 해도 바짝 붙어서 톱질하면 벨 수 있지 않으려나.
모르지, 한번 해 볼까나.
“전장의 꽃은.”
벨이 입을 연다. 처연한 음성은 아니었다. 그건 각오였다.
목숨을 내걸었으니, 어차피 내건 목숨 제대로 세차게 써 보겠다고.
벼락이 떨어진다고 피할 시늉조차 하지 않는 건 머저리니까.
벨은 그걸 엔크리드란 인간을 보고 배웠다.
끝없이, 정말 포기란 두 글자를 모르는 인간.
그런 인간을 곁에 두고 어찌 아무것도 배운 게 없을까.
벨은 배웠고, 실행하기로 했다.
벨의 말에 분대장이 반사적으로 말했다.
“보병이다.”
그럼, 이제 싸울 때였다.
그러니까 이제 죽을 때였다. 죽으러 가는 길이라고 해야 하나.
마침 거인 새끼가 바닥에 늘어뜨린 망치를 뽑아 올렸다.
드드득.
자갈을 긁으며 올라간 쇳덩이.
안개가 슬슬 걷히는 시간, 피와 살점 일부가 으깬 빵처럼 붙은 망치 머리가 보였다.
선명하게, 너무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저게 죽음이었다. 저당 잡힌 채권이다.
“크흐흐.”
다시 그 개 같은 동굴 웃음을 보인 거인이 망치를 들었다. 아까는 종으로 휘둘렀다면 이번에는 위로 들었다가 옆으로 눕힌다. 한 번에 좀 많이 죽이고 싶나 보지?
벨은 피할 수 있나,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바짝 숙이면 안 되려나.
저 큰 놈이 휘두르는 망치가 바닥까지 닿을까?
안 될 것 같았다.
거인이 무릎을 굽혔다. 망치 머리가 너무 컸다.
저걸 저 각도로 휘두르면 점프해서 피하지 않고서는 무리 같은데.
아니면 망치의 피격 범위를 피해야 하는데.
“이건 너무하잖아. 개새끼들아.”
아군 병사 중 하나가 뒤를 향해 울먹거렸다.
“퇴각 신호는요? 호루라기 불렸는데 못 들은 거죠?”
신병이었다. 아직 덜 여물은 놈.
“염병, 시발, 젠장, 개자식들.”
다른 아군 하나는 연신 욕만 내뱉었다.
거인은 싸울 줄 알았다. 곧바로 휘몰아쳤다면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짧은 소강상태가 아군에게 공포를 심어 줬으니.
거인은 아군의 마음을 먼저 죽였다.
“흐!”
거인은 기합 소리도 개 같았다. 그와 함께다. 놈이 준비한 일격을 뿌렸다.
후앙!
다시금 공기를 찢어발기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괴력이 망치 머리를 수단으로 삼아 날아왔다.
훙!
벨은 방법이 없어 방패에 몸을 바짝 붙이고 맞으면서 뛸 생각을 했다.
그럼, 잘하면 살지 않으려나?
물론 죽을 터였다. 그래도 버텨 보고자 했다.
모든 병사의 눈에 죽음이 드리워진 순간이다.
벨의 눈에는 망치가 움직이는 게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이다.
훅, 그림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고.
‘어?’
그게 뭔가 인지하기도 전에.
쯔아아아아앙!
폭음이 귀를 때렸다. 얼마나 무식한 일격이었는지, 충격파에 뒤로 몸이 밀리는 기분도 들었다.
그제야 벨은 보았다.
“……뭐냐, 시발.”
절로 황당함을 표현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건 뭐, 입에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의 연속이니.
“야, 병신같은 덩치야, 급을 맞춰서 놀아야지?”
앞을 막은 그림자가 말했다. 아군의 등판이었다.
거인의 앞에 서니 한없이 작아 보이나, 그는 양손에 도끼를 들고 망치를 막았다. 도끼를 쥔 팔뚝에 핏줄이 터질 듯 섰는데, 무슨 짓인지 갬비슨의 팔 부분을 뜯어서 조끼처럼 갑옷을 입었다.
그래도 막았다.
옆으로 발이 조금 밀려 자갈밭에 흔적은 남았지만, 막긴 했다.
이건 뭐지? 상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살았네.”
신병이었다. 울면서 하는 말이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모두의 귀로 들어왔다.
벨은 모든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가슴이 벅찼다.
그도 눈물이 왈칵 흐를 뻔했다.
살았다는 기쁨과 동시.
본래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끔찍함을 안겨 준 이의 등이 더없이 든든해 보였으니.
거인은 괴물이다. 붉은 피의 마수다. 살육에 미친 폭력을 숭상하는 것들이라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여기도 있었다.
미치광이가, 괴물이.
나서서 싸우는 것만으로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그런 괴물이.
“주둥이에 꿀을 발라 놨나. 왜 입을 다무냐?”
그 괴물이 입을 열었다. 평소와 똑같이 참으로 개 같은 말투로.
그게 오늘은 천상의 오케스트라 같았다.
“이, 버얼레에가!”
거인은 분노했고 렘은 피식 웃었다.
뭐래, 병신이.
* * *
렘은 기분이 좋았다.
얼마나 좋았냐면 첫 전투가 떠오를 만큼 좋았다.
소대장과의 대련 덕이다.
대련 한 번에 이러는 게 말이 되나?
아마 그동안 쌓인 게 많아서 그런 탓이리라.
화끈하게 풀린 기분만큼 렘은 제대로 싸워 보고 싶었다.
엔크리드에게 보여 주고도 싶었다.
자, 보슈.
이게 바로 다음에 배울 거니까.
렘은 어린 시절부터 날아오던 도끼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렘도 야수의 심장을 배웠고 익혔으며 단련했다.
대담함과 평정심만 주는 거라면 왜 배웠겠는가.
쓸모도 없을 판인데.
당연히 쓸모가 있기에 배웠고 익혔고 단련했다.
익힌 이유, 야수의 심장은 대담함만 주고서 끝이 아니니까.
지금부터는 반 정도는 렘의 독창적 기예라고 해도 좋았다.
제 부족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
쿵.
심장이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뛰며 전신에 피를 휘돌린다. 혈류, 피가 몸을 도는 속도가 빨라지고.
쿵쿵쿵쿵!
혈관이 확장되며 근육이 부풀며 근육 밀도를 바꾼다.
심장에서 시작된 주술적 기법이 적용된 몸은 그야말로 괴력을 지니게 되니.
렘은 이걸 괴력의 심장이라 부르기로 했다.
부족 사람은 이걸 노화를 방지하는 기술로만 쓰기에.
실제로 이건 렘만이 쓰는 기술이었다.
잘못 배우면 심장이 터져 죽거나, 혈관이 터져 죽거나, 근육이 괴사하며 뒈지니.
뭐, 배우기 어려운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엔크리드에게 보고 배우라고 했지만, 선택은 그의 몫일 터.
물론 배운다고 하면 천천히 하나씩 가르쳐 줄 터였다. 죽지 않게 조금씩 새겨 줄 생각이었다.
좀 아프긴 하겠지만, 그는 고통 따윈 무시하고 배울 테니까.
거인의 망치를 막고.
렘은 괴력을 뿜어 도끼를 휘둘렀다.
훙!
망치가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혔고, 렘은 그걸 도끼로 후려쳤다.
깡! 드드득! 펑!
도끼날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깨졌다. 숫제 터지듯 부서졌다.
최대한 흘려 쳐 냈음에도 이렇다.
렘은 왼팔을 밖으로 휘두르며 부서진 도끼날이 한쪽으로 날아가도록 팔을 뿌렸다.
그렇게 부서진 도끼날 일부가 거인이 입은 나무 갑옷 위로 파바박 박혔다.
‘좀 좋은 거 쓸 걸 그랬나?’
아예 변태 종교쟁이처럼 몽둥이나 쓰면 되긴 하는데.
렘은 무기를 가리는 편이 아니긴 했으나, 도끼가 제일 손에 잘 맞긴 했다.
툭.
남은 도낏자루를 버리고 발끝에 걸린 창 하나를 튕겨 올렸다.
왼손에 창, 오른손에 도끼.
양손에 든 무기를 든 채로 렘이 웃었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웃음, 오랜만에 상대할 만한 적이 나온 것에 대한 만족, 엔크리드와의 대련 이후 한껏 기분이 좋아진 상태에서 이어진 일이다.
“야, 좀 재밌게 놀자.”
이후 둘의 싸움은 격했다. 말 그대로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정도였다.
꽝! 꽝! 쩡! 쩌저저정!
바닥에 떨어진 창을 주워 찌르고 도끼로 후려치고.
무기가 부서지면 바닥에 널브러진 걸 줍고.
그것도 이제 떨어질 때쯤.
“야, 던지자.”
벨이 눈치 빠르게 제 손에 있던 무기를 던졌다.
창이나 손도끼 따위였다.
누군가는 거인을 노리고 단검도 던졌다. 눈을 노린 거였는데, 놈은 머리만 휘릭 돌려 그걸 이마로 받아 냈다.
퉁!
무슨 피부가 저따위인지.
날이 선 단검이 생채기도 못 남기고 허공으로 팽그르르 튕겨 나갔다.
그럼, 저런 놈과 싸우는 렘은 대체 뭐지?
모른다. 그저 저 괴물이 우리를 지켜 주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할 뿐.
엔크리드는 렘의 싸움을 봤다.
그의 전투는 격했다. 살벌했다. 무엇보다.
‘거인과 힘을 겨뤄?’
그럼 프록보다도 근력이 우월하다는 거 아닌가.
저건가. 다음에 배우라고 한 게. 잘 보라고 한 게?
두근.
가슴이 뛰었다. 뭔가 새로이 배울 게 있기에.
엔크리드에게 있어 배움의 욕구는 그의 근본적인 욕망이었다.
“이제 가도 되겠습니다. 장난질 치고 있는 걸 보니.”
옆에서 라그나가 말했다.
거인과 싸우는 렘은 즐거워 보였다. 그래, 저걸 보니 알겠다.
이길 수 있고 죽일 수 있는데도 지금 간을 보고 있었다.
왜?
‘나 보라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너무 나간 거 아닌가, 하긴 했다.
그냥 신이 나서 저러는 듯했다.
“이제 할 일 하러 갑시다.”
라그나도 애가 닳아 보였다. 왜일까. 왜 이리 싸우고 싶어 하는 건가.
평소에 의욕이라곤 조금도 없는 놈이.
“자.”
하여간 그리 재촉하니, 엔크리드도 발을 뗐다. 렘이 보라고 한 건 다 본 것 같으니.
라그나는 우측으로 향해야 했는데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발을 뗐고.
엔크리드가 그를 붙잡아 움직였다.
“이쪽만 정리하면 그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뒤에서 크라이스가 바짝 붙어 말했다.
그런가.
엔크리드에게 전체 전황 따위는 안 보였다. 지금이, 현재가 중요할 뿐.
그렇게 우측으로 움직이자, 그곳에 모인 적군이 보였다.
한껏 여유가 있어 보이는 열 명.
이건 뭘까.
운명의 장난 같은 건가.
얼굴이 보이는 곳까지 다가가자, 엔크리드는 중앙에 선 작자가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저 작자는 왜 여기 있을까?
상대도 똑같이 엔크리드의 얼굴을 알아봤다.
기실 엔크리드의 얼굴은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미남이긴 했다.
“너, 살아 있었냐?”
상대가 엔크리드를 알아보곤 눈을 크게 뜨고 몇 번 깜빡이더니,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의 미소는 눈까지 휘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세모꼴의 눈이 비틀리는 걸 보면 가히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랬지.”
엔크리드가 덤덤히 답하자, 라그나가 눈으로 물었다.
아는 사람?
“용병 시절에…….”
엔크리드는 설명하려니 말을 길어질 것 같아 축약했다.
“만났던 개자식.”
음, 그렇지, 딱 이 정도면 충분한 쓰레기다.
아군의 등을 찌르고 여자를 강간한 다음 죽이는 버릇이 있는 개새끼이니.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귀족을 건드렸다가 어디 도망갔다고 하더니, 이곳에 있었나.
“야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그게 할 말이냐?”
친구? 엔크리드는 드물게 불쾌함을 느꼈다.
저런 거랑 친구?
라그나가 또 눈으로 물었다.
“아니, 개자식.”
다시금 짧고 굵게 말해 주니, 라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긴 넌 혀 하나는 잘 놀렸지. 근데 용케 살아 있었네? 뭐, 어디서 엉덩이라도 대주고 다녔나?”
용병 시절에도 저런 비난은 흔히 듣곤 했다. 얼굴 때문에 듣는 얘기다.
종군하고서도 종종 들었다.
이번에는 참 오랜만에 듣긴 했다. 최근에는 누가 자신을 저리 놀리지 않았다.
실력으로 증명했음에, 누가 저런 말을 하겠나.
그렇기에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상대의 도발을 받아넘겼다.
라그나도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죽을 놈인데 뭘.
“저건 그럼 대장이 썰고.”
라그나가 말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나머지 아홉은 제 상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열 명을 고작 셋이서?”
“난 안 싸웁니다. 이 둘만 노리면 되는 겁니다.”
크라이스가 뒤에서 말했다.
엔크리드는 주변을 한번 훑었다.
이 열이 무슨 짓을 했을까.
딱 봐도 아군이 선뜻 덤빌 기세가 아니다.
주변에 널린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숭숭 구멍이 난 시신들.
개자식이 자주 쓰던 무기의 흔적이었다.
엔크리드는 슬쩍 시선을 흘려 나머지 시신도 확인했다.
검과 창, 단검 따위에 찍히고 베이고 찔린 상처가 보였다.
그런데 뭔가 상처가 묘하게 더럽네.
구멍이 난 부위도 그렇다. 마치 고문이라도 하는 듯한.
“살검에 취한 놈들입니다. 살인을 통해 실력 향상을 도모하는 것들이죠. 괜찮습니다.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바르게 걷지 않으면 한계가 명확한 법이라고.”
라그나가 옆에서 말했다.
그랬었다. 발렌 식 용병검에 얽매이면 그리된다고, 한계에 다다를 거라고.
그러니, 새로이 기본기를 쌓으라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 새로이 쌓고 다시금 나아갔다.
이정표가 생긴 길이었다.
엔크리드는 검을 뽑았다.
치리링.
“저건 내가.”
라그나가 말한 대로, 원한이 있다고 해도 좋았고 복수극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좋았다.
엔크리드는 하피에게 심장을 뜯긴 동료와.
그때 죽은 이들을 기려 보기로 했다.
저 변태 쓰레기 새끼의 목을 베는 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