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일격과 절단
“지랄들을 하네.”
실력과 인성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 준 놈, 저 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그놈이 입가를 비틀었다. 비웃음을 보였다.
“똥구멍을 하나 더 뚫어 주랴? 엔키?”
놈이 말하며 한 발짝 발을 뗐다.
엔크리드는 죽이기 전 딱 한 번만 말을 섞기로 했다.
“너 이름이 뭐였지?”
오른발을 앞으로 삐죽 내민 자세에선 놈이 멈춰 섰다.
“……하여간 시발 새끼, 혀는 오지게 잘 써요.”
놈은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이름이야 꼭 알 필요는 없으니.
“죽여.”
이름 모를 개새끼가 말하자, 놈의 주변을 감싼 아홉 명이 움직였다.
뭐랄까. 변방 수비대가 타락하면 저러지 않을까 싶었다.
각자 무기를 들고 날뛰는 걸 보니, 다들 한가락씩은 하는 것 같긴 한데.
무기에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팽!
그중 한 놈이 새총을 들고 쐈다. 순식간에 겨눠 당기고 놓는데, 동작이 유려했다.
새총이 작은 금속 알갱이 따위를 쏘아 냈고.
라그나는 고개만 까닥여 피했다. 눈을 노린 탄환이었다.
“새총.”
라그나가 중얼거렸다. 엔크리드는 그의 눈에서 평소에 보이지 않던 열기 따위를 봤다.
그럼, 뭐 걱정할 건 없을 터.
“혼자서?”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기에, 보니 벤젠스였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양새에, 엔크리드의 눈이 벤젠스의 허벅지로 향했다.
어쩌다가 다쳤나 묻기도 전인데.
“저 더러운 새끼한테서 절 구하려다가.”
벤젠스의 뒤, 걱정과 원한을 동시에 눈에 담는 묘기를 보이는 병사 하나가 말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어디 제 버릇 구울 줬을까.
하던 대로 했겠지.
일부러 병사 하나를 괴롭혀, 벤젠스가 나서게 하고 빈틈을 노려 허벅지에 구멍을 뚫고.
딱 저 새끼가 할 만한 짓이었다.
그와 반대로 벤젠스는 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부상을 감수했을 것이고.
만약 엔크리드가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 거다. 벤젠스는 죽음을 각오했을 터였다.
이런 인간이라면 그래, 친구로 사귀고 싶단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을까.
벤젠스 같은 인간이라면 괜찮을 터다.
하지만 저 새끼는 아니지, 친구라니, 얼토당토않다.
“날카롭다. 저거.”
벤젠스가 재차 말하고 엔크리드는 그제야 상대 이름이 기억 난 것처럼 오른 주먹으로 왼 손바닥을 딱 하고 때렸다.
“이름 기억났다.”
상대가 피식 웃었다.
“내 이름을 잊을 리가 있겠냐? 괜한 도발은 새끼가.”
놈이 말하며 팅- 하고 제 검을 뽑았다. 힘을 주면 휘어지는 형태의 검이다. 연철로 만든 휘어지는 세검.
팔랑거리는 칼날이 눈에 들어왔고.
엔크리드는 그걸 보며 입을 열었다.
“씹새끼였지?”
개자식이 별명, 이름이 씹새끼였지? 맞을 거다. 아마.
“……넌 죽여달라고 빌게 될 거다.”
놈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혹시 화났나? 아,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엔크리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둘이 시답잖은 말로 서로의 속을 달궜다.
개자식의 부하 아홉 명 중 새총이 또 움직였다.
퉁, 훙, 땅!
이번에는 엔크리드를 노렸는데, 어느새 다가온 라그나가 검집째로 검을 뽑아 탄환을 튕겨 냈다. 허공에 수직으로 날아오른 금속 알갱이가 반짝이며 안개를 뚫고 사라졌다.
“너 손 빠르네, 그 손에 구멍 내면 재밌겠다.”
새총이 말했다. 그 옆에 쌍 도끼를 든 놈이 있었다. 양손에 하나씩, 렘과 비슷한 무장이다.
“재밌는 놈이네, 혼자서 우리를 전부 상대하겠다고?”
쌍 도끼가 라그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저건 안 좋은데,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라그나가 반응했다.
“미친 야만인 아류 하나.”
“……뭐?”
도끼를 든 놈은 금발의 붉은 눈을 지닌 새끼가 자신을 빤히 보며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빨간 눈에는 뜻 모를 적의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양손에 손도끼 두 자루라니, 저건 무장을 잘못 택한 거다.
그 외 검을 든 놈이 셋, 혈조를 깊게 판 특이한 검이었는데 세 명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
삼둥이였다.
“이번 전장을 끝으로 우리는 아즈펜 소속이 될 거다. 잘하면 귀족의 위까지도 받을지도 모르고.”
개자식이자 씹새끼가 말했다. 자랑질을 하고 싶은 듯했다. 전과 같았다.
자신을 살렸던 그때와 같은 표정, 이 싸움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 미리 말함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그런 낯짝.
그렇군.
엔크리드는 더 말을 섞지 않았다.
퉁.
나아가며 검을 내리친다. 상대는 자신을 얕봤다. 여전히 비웃은 채로 검을 튕겨 냈다.
티리리링.
특유의 휘어지는 칼날이 엔크리드의 손목을 노렸다. 롱소드를 때리며 검 끝이 아래로 꺾이더니 곧바로 손목을 노리며 다가왔다.
기검 중의 기검이다.
동방에서 배운 검술이라고 했었던가.
분명 그런 말도 했었던 것 같았는데.
엔크리드는 제 손목을 노리는 검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검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제 검날을 타고 흐르던 휘어지는 칼날이 위로 튕겨 나갔다.
퉁.
‘이 새끼 봐라?’
상대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 놀람 따위가 보였으나, 엔크리드는 흥미가 없었다.
배우고 익히고 단련한 대로 그저 나아가며 검을 휘두를 뿐.
기검을 상대하는 법 또한 배우지 않았나.
‘우직한 일격으로 시작하라.’
그리했다. 라그나가 알려 준 대로.
훅.
칼날이 공기를 가른다. 한 점의 집중을 통해 모든 게 손에 잡힐 듯 느려지고.
점과 점을 잇고 그 위에 힘을 덧씌운 사선 베기가 상대를 노리고 떨어졌다.
개자식은 급히 뒤로 발을 빼며 검을 위로 쳐올렸다.
피리리리링!
휘어지는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엔크리드의 목을 노렸다.
노리기만 했다.
그 전에 이미, 엔크리드의 사선 베기가 놈의 몸에 닿았으니.
더 빠르고 더 강하고, 더 섬세하기에.
일격이면 충분했다.
우드드득.
손에 저항감이 느껴진다. 이번 일격 또한 손에 감각이 남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으나.
갑옷과 기타 부수적인 것들을 베기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순 없었다.
엔크리드의 롱소드는 놈의 갑옷과 갈비뼈의 반을 가르고 검을 든 손목까지 잘랐다.
엔크리드의 목을 노리며 휘어지던 칼날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티링.
엔크리드는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멈췄다가 옆으로 검을 휘둘렀다.
후두둑.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앞으로 놀라서 눈을 부릅뜬 채로 죽은 과거의 잔재가 보였다.
엔크리드는 속으로 과거의 동료에게 말했다.
‘복수는 했다.’
그들은 답이 없다. 죽은 사람은 본래 답이 없는 법이다.
일격에 명줄이 끊긴 상대도 마찬가지다.
단말마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동방식 연검술을 쓰는 용병, 개자식은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프록과 미치 휴리어에 비하자면.’
부족하다. 제 소대원과 비교하면? 어딜 견주겠나, 비교하는 게 우스울 정도다.
다만, 엔크리드가 아니었다면 이쪽 전장도 엉망이 되긴 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거인이 나온 곳만큼이나 개판이 됐겠지.
상대적인 거였다.
이쪽은 살검, 사람을 죽이는 걸 업으로 삼고 실력을 쌓는 도구로 삼는 놈들이었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이리 고이 죽을 수도 있지만.
그 반대가 되면 효율적인 살인마가 될 놈들. 미쳐 날뛸 게 분명한 놈들이었다.
“……뭐냐, 시발.”
검을 든 삼 형제 중 하나가 말했다.
“뭐겠나.”
그걸 들은 라그나가 답하고 새총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그 걸음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였다. 스텝을 어떻게 밟은 건지, 몇 걸음 만에 새총을 든 놈의 측면을 잡았으니.
“칫!”
놈이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칫’이란 말을 남기고 놀란 표정 그대로 목이 하늘로 날아간다.
언제? 대체 검은 언제 뽑았고, 언제 휘둘렀나.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깔끔한 솜씨다.
엔크리드의 눈에도 휘어지는 칼날이 잔상으로만 남았을 정도니.
“새총.”
라그나가 죽인 상대를 향해 읊조리고 움직였다.
“검 셋.”
삼 형제를 향해서다. 세 놈이 검을 뽑았다. 그냥 당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라그나는 셋의 눈에 어린 붉은 혈기를 봤다.
살인,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는 걸 수단으로 삼은 살검의 주인들.
이런 놈들이 더러 있었다.
제 실력을 키우는 방법도 제대로 모르는 병신들이었다.
힘없는 이들을 죽이는 거로 시작한 검, 그리하여 약자를 죽이는 것만 배운 검.
상대가 누구든, 상황이 어떻든.
라그나는 기분이 꽤 좋았다.
살면서 이리 의욕이 흘러넘치는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세 번? 다섯 번? 다섯 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도 짜증이 쌓여 있었다. 그 짜증이, 그 답답함이 엔크리드와의 대련으로 변해 버렸다.
작은 불꽃으로 시작된 무언가가 그의 눈에서 타올랐다.
본래 붉었던 눈에 빛이 흘렀다. 안광이다.
라그나는 안광을 남기며 검을 휘둘렀다.
휘릭, 땅, 푹, 팍, 서걱!
검을 든 살검의 주인 셋은 목이 찔리고 잘리고 턱부터 정수리까지 쪼개져 쓰러졌다.
라그나의 검은 무엇이 가로막든 다 벴다. 그게 검이든, 갑옷이든, 살이든, 뼈든.
인상적이었다.
“쇠스랑.”
라그나가 다음 상대를 찾았다.
쇠스랑을 무기로 삼은 놈이었다.
딱 고통을 주기 위해 택한 무기로 보였다.
상대는 침을 꿀떡 삼켰다.
아무래도 임자를 제대로 만난 듯했으니.
“한 번에 덮쳐!”
놈이 외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들 움직였다. 그러고는 본인은 휘릭 등을 보였다. 냅다 튀었다.
엔크리드는 여기서 놀라 눈을 부릅떴다.
본래의 라그나라면 저리 도망가는 놈 따위 눈길도 주지 않을 텐데.
그 라그나가.
파박.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리 움직였다.
땅을 박차더니, 좌우로 검을 휘두른다. 어찌나 빨리 검을 휘둘렀는지, 라그나를 중심으로 날개가 펄럭이는 것 같았다.
그 날개는 등이 아니라 양손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칼날의 잔상으로 만들어진 날개는 창을 든 놈의 머리통을 쪼갰고.
단검을 다루던 여자의 양팔을 잘랐다.
까강!
그리고 중간에 걸린 단검의 칼날도 반으로 갈랐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무서운 위력을 보인 참격이었다.
“끄야아아아!”
단검을 든 여자의 비명이 사납게 공기를 질주했다.
이후 라그나는 그대로 내달려 도망가던 놈을 쫓았다. 쇠스랑을 든 놈이 몸을 틀며 삐죽 쇠스랑을 세웠다.
통짜 쇠로 된 무기였는데.
라그나는 또 이전과 같이 검을 휘둘렀다. 자세를 보면 뒷날 치기다. 분명 상대의 무기를 옆으로 쳐 내며 역으로 뒷날로 치는 동작인데.
첫 번째 동작에서 쇳덩이 쇠스랑을 반쯤 베어 버리는 것부터 달랐다. 곧이어 역으로 돌아와 뒷날로 놈의 목을 벴다.
서걱.
뭐냐, 저건 힘을 조금 더 줬으면 쇠스랑부터 잘렸겠는데.
그리 부지런히 움직여 남은 건 하나였다.
“시발.”
양손에 도끼를 든 놈.
“넌 메인 디쉬.”
뭐랄까.
평소의 라그나와는 뭔가 아주, 매우 달랐다.
그는 그대로 걸어와 도끼를 든 적과 마주했다. 생긴 건 렘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라그나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터였다.
“다리부터.”
말을 곧 실현한다. 라그나의 검이 움직였다. 도끼를 든 놈도 실력자라 할 수 있겠지만.
이건 뭐랄까.
엔크리드 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자신이.
노력과 훈련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으아아아!”
도끼를 든 놈은 발악했다. 그게 전부였다.
라그나는 놈의 허벅지를 먼저 벴고 이후 양팔의 힘줄을 잘랐다.
투둑 하고 도끼를 놓친 놈의 정수리 위에 검을 올려 둔 라그나는 새삼 자신이 꽤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다.
색다른 기분이긴 했다.
‘이게 흥분할 일일까?’
어쨌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사, 살려 주면 그 숨겨 둔 곳에 보무우…….”
쩍.
상대가 뭐라고 하든. 라그나는 듣지 않았다.
결국, 살검을 지닌 열 명의 용병대 중 마지막 남은 놈은 머리통이 쪼개져 죽었다.
라그나는 쓰던 검의 이가 전부 나가고 손잡이도 덜걱거리는 걸 확인하고 버렸다.
그리고는 삼 형제가 쓰던 검을 몽땅 챙겼다.
“음, 검이 세 자루나 생겼군요.”
그러더니, 엔크리드처럼 양쪽 허리에 검을 차고 하나는 등 뒤로 비켜 맸다.
“넌 삼검류냐?”
“아니요. 하나씩 쓸 겁니다.”
엔크리드의 물음에 라그나가 고개를 젓고서 재차 말했다.
“조금 전에 제가 쓴 기술이 뭔지 아십니까?”
평소보다 말이 빨랐다. 그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알 리가 있나.
그저 베고 자르고 그게 전부였던 것 같은데.
인상적인 건 있었다. 무엇으로 막든 라그나의 검은 다 잘랐다. 단검이든, 뭐든.
엔크리드가 생각하는 사이, 라그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평소보다 빠른 말투로.
“절단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몰개성한 이름이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그 기술의 위력은 여실했다.
절단, 자르는 것.
검으로 베는 걸 자신만의 요령으로 이룩한 어떤 기예를 말함이었다.
“가르칠 겁니다.”
라그나가 통보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을 지켜보던 벤젠스는 혀를 내두를 수도 없었다.
‘괴물 새끼들.’
그런 말밖에 떠오르질 않았으니.
엔크리드는 바닥에 떨어진 도끼 두 개를 챙겼다.
렘이 거인과 싸우다 무기를 부숴 먹었으니, 새로운 도끼가 필요할 터였다.
달리 챙길 건 단검을 다루던 놈의 투척 단검 몇 자루가 전부였다.
휘슬 대거를 다 쓴 게 아쉽긴 했다.
‘새로 만들면 좋긴 할 텐데.’
그리 전투를 끝내고 정비하는 사이다.
앞쪽에서.
와아아아!
“아우딘! 아우딘!”
함성이 터졌다.
전면이다. 아우딘이 향한 곳, 무슨 일이 일어난 듯했다.
엔크리드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어느새 해가 솟아, 안개가 걷히는 중이다. 슬슬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게 무슨 주술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걷힐 강변의 안개였을 뿐이니.
그리 걷힌 안개 너머.
아우딘이 있었다. 홀로 오롯이 선 채로.
그가 선 곳, 적군의 한복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