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33화 (133/170)

133. 봄은 마력을 품는 법이니

앤드류와 맥은 검을 들었고.

그 사이에서 엔리는 쇠뇌 대신 가져온 숏보우의 시위를 연신 당겼다.

틈이 보이면 쏘고.

엉겁결에 다가온 적이나, 바닥에 쓰러진 적병을 보면 손도끼로 머리통을 찍었다.

콱!

그는 렘처럼 한 방에 머리를 쪼개진 못했으나, 그렇다고 상대의 머리통이 멀쩡하진 않았다.

반쯤 부서진 머리통, 투구 틈으로 흐르는 피, 원망 또는 절망하는 눈동자.

그게 꼭 자신이 죽인 짐승 같았다.

엔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전장에서 감상은 사치임에야.

어쨌든 엔리가 한 일은 그게 전부였다.

나머진 앤드류와 맥, 둘이 다 했다.

미치광이 소대원이라 불리는 이들만큼은 아닐지라도, 이 둘도 녹록하지 않았다.

“이 새끼들, 그레이 독이 우습냐!”

적군 중 하나가 외친다. 아군 병사 몇을 해치운 병사였다. 사나운 눈빛, 손에 든 단창 끝에서 흐르는 피.

앤드류가 그를 상대했다.

다섯 합이면 충분했다. 두 번 막고 두 번 긋더니 단숨에 한 손 찌르기.

그 찌르기, 묘하게 엔크리드를 닮은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엔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맥도 능숙하게 적군을 찢고 베며, 앤드류가 더 앞으로 나가지 않게 붙드는 역할에 충실했다.

“거기까지.”

맥의 말이 들리면 앤드류는 딱 멈춰 섰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제 가슴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우어!”

뭐냐, 왜 갑자기 고함을 질러.

그는 렘에게서 무언가를 잘못 배운 듯했다.

“다 덤벼라! 이 물건도 덜 여문 새끼들!”

어설픈 도발, 무엇보다 제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리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어쨌든 흥분한 앤드류는 잘 싸웠다.

엔리는 뒤에서 그 둘과 다른 이들을 눈에 담았다.

투구 위로 점점이 묻은 피.

와아아아!

함성과 더불어.

“죽여, 죽여!”

살기 어린 외침.

“끅, 제발.”

삶을 갈망하는 읊조림.

죽고 죽이는 전장 한복판, 엔리는 깨달았다.

‘여기까지.’

누군가는 미치광이 소대를 보며 환호를 했고.

또 누군가는 미치광이 소대를 보며 감격했을 때.

엔리는 한계를 봤고, 깨달았다. 자신은 여기까지였다.

“우어!”

괴성 비슷한 걸 내지르던 앤드류가 휘두른 검이 슁 하고 공기를 가르며 적병의 쇄골과 목 사이를 갈랐다.

푸걱.

반쯤 꽂힌 검을 당겨 뽑는다.

“끄아아악!”

칼날의 움직임을 따라 적병의 비명이 울렸다.

한계라는 걸 깨달은 뒤, 엔리는 초원 사냥꾼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다만, 자신이 돌아갈 초원은 전쟁터가 되었으니.

이제는 도시로 돌아가 꽃집 미망인의 남편으로 사는 삶도 나쁘진 않을 터였다.

그녀, 그 미망인,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그 굳건한 여자.

엔리는 꽃집 미망인이 너무 보고 싶었다. 전장이고 뭐고 당장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여기서 사냥꾼 엔리, 병사 엔리의 삶을 끝내는 게 맞을 터였다.

“감상적이네.”

엔리는 홀로 중얼거리며 이제 끝을 향해 달리는 전장을 봤다.

적 지휘관은 발이 무척 빨랐다. 판단도 무척 빨랐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인지 지휘관의 깃대와 호위대는 쏙 빠졌단 소리다.

남은 부대 중 태반이 항복하고.

몇 명만 반항했다.

전장이, 전투가 끝나가는 중이었다.

그 사이로.

“미치광이 만세!”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환호가 대기를 찢는 중이었다.

승리의 환호였다.

* * *

아즈펜의 지휘관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그도 유능한 지휘관이었기에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챘다.

전장을 뒤엎은 게 누구인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곳은 어디인가.

도끼를 든 놈과 그 외 몇 놈들.

첩보가 필요했다. 적병 중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놈이 있다고 얘기해 주어야 했다.

이미 비둘기는 날려 보냈지만.

직접 경험한 지휘관으로서 최후의 책임을…….

“날 새는 줄 알았다. 이 새끼들아아아!”

간이 철렁했다.

갑자기 터진 외침, 전원 갖가지 무기로 무장한 채로 후위를 막는 부대다. 독립 유군으로 보였다.

아군은 아니었다. 확실히 아니었다.

오른쪽 어깨에 새긴 독수리 문양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으니.

“저것들도 없었는데 우리가 진 거야?”

지휘관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그의 호위대가 물 샐 틈 없이 그를 감쌌으나.

그게 한계였다.

“변방의 학살자 새끼들.”

적군은, 나우릴리아가 자랑하는 전투 부대, 변방의 학살자다.

전장을 우회해 은밀하게 이곳에 매복한 이들이다.

전장에서 돌아오는 적군의 뒤를 헤집고 쑤시고, 숫자도 줄이며 사기도 떨어뜨릴 요량으로 우회한 일군.

본래 거인의 일격이 제대로 먹혔다면 의미 없을 한 수가 지금은 치명타였다.

변방 수비대도 황당하긴 했다.

본래는 후방을 습격하고 적군의 뒤를 슬금슬금 건드리기로 했는데.

이건 뭔가.

적군이 쫓기는 들개 무리가 되어 돌아왔다.

앞뒤 사정 따질 순간은 아니었다.

수비대장은 자신이 할 일을 했다.

아즈펜의 후방이 빈 걸 확인하곤 후방 진지를 뒤엎는 대신 매복으로 작전을 전환했다.

혹여 적군이 오지 않으면 그대로 본군으로 회군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왔으니.

“다 조져.”

변방 수비대장의 입에서 사형 선고가 떨어졌다.

적 지휘관과 호위 부대는 반항했으나,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퇴각! 퇴각!”

지휘관이 그리 외치며 직접 달려들었다. 퍽 인상적인 장면이다.

퇴각을 부르짖으며 도망가지 않고 덤빈다는 건, 제 휘하의 병사를 하나라도 더 살리겠다는 것 아니겠나.

예의를 지켜야 했다.

변방 수비대장이 직접 나섰다.

크릉! 크릉! 크릉!

그의 손에 들린 건 프레일, 끝에 매달린 추가 회전하며 사슬이 울음을 토했다.

“고이 보내 드리지.”

대장은 제 말대로 했다.

싸움은 짧았다. 한쪽은 본디 무력으로 일군의 지휘관이 되었고.

다른 쪽은 머리를 굴리는 데 특화된 이였으니까.

훙.

프레일 끝에 달린 쇠추가 변칙적인 궤도를 그리며 떨어지고.

퍽!

아즈펜 지휘관의 머리가 깨지며 피와 뇌수가 튀었다.

그거로 끝이었다.

“으아아!”

나머지 도망가는 병사들을 처리하는 데도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쩍!

마지막 적병의 머리에 도끼를 꽂아 넣는 거로, 전투 종결이다.

변방의 학살자란 타이틀에 걸맞은 그런 전장이라 해야 할까.

학살의 현장을 뒤로한 채로 수비대장의 입이 열렸다.

“회군.”

변방 수비대가 본대로 발을 재게 놀려 돌아갔다.

적군 일부를 회군시키거나 보급로를 끊을 생각이었지, 지휘관의 머리를 깰 생각인 건 아니었다.

어떻게 전장이 이렇게 됐나.

궁금증, 호기심, 기대감 이런 것들이 섞여 그의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서 그들이 본 것은.

승리의 환호를 울리는 아군이다.

전장의 승리, 누가 봐도 압도적으로 밀어붙인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누가 있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각 전장에서 적이 준비한 칼날을 부러뜨린 이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이끄는 남자.

그 남자가 이끄는 부대.

환호 사이로 터지는 그 집단의 이름.

“미치광이 소대애애애!”

“미! 치! 광! 이!”

“미친 새끼드으을!”

대대장 마커스는 환호를 막지 않았다.

아니, 아예 이번 전장의 수훈자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렸다. 전령을 통해 미치광이 소대를 부르짖게 만든 거다.

환호와 환호 사이.

엔크리드와 미치광이 소대가 그곳에 있었다.

아군이 만든 둥근 원.

토레스도 그들을 봤고, 엔크리드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미친놈들 모임 맞지.’

저기 어디에 정상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아무도 인정하진 않겠지만.

직접 겪어 본바.

엔크리드 또한 미친놈이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를 하나 꼽자면.

‘저 미친 새끼들 사이에서 저리 지내는 것 자체가.’

미쳤다는 증거 아닌가.

더구나 퍽 잘 어울려 보임에야.

* * *

요정 중대장은 환호와 전장의 흐름을 보며 중얼거렸다.

“봄에는 마력이 있지.”

봄, 안온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돌아왔다.

새벽 나절에 시작한 전투는 정오가 지날 때쯤 끝났고.

해가 머리 위를 지나자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봄이라.

겨울에 태어나 봄에 고개를 드는 꽃처럼.

삭풍이 지나 다가오는 훈풍에는 언제나 마력이 있는 법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봄의 마력 앞.

그 마력을 전신에 담은 남자가 모두의 환호를 들으며 우뚝 서 있었다.

요정 중대장의 시선이 봄의 마력을 두른 남자를 쫓았다.

엔크리드.

미치광이 소대를 이끄는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 * *

엔크리드는 전장의 환호를 즐겼다.

‘나쁘지 않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도.

미치광이 소대를 찾는 것도.

자신도 안다. 이 전장의 흐름을 누가 바꿨는지.

제 소대원이 한 일이다.

렘이 거인을 죽였고.

아우딘이 적병의 진형을 무너뜨렸다.

작센도 뭔가 했을 것이다. 아직 묻지도 듣지도 않았지만, 분명 그럴 터.

거기에 자신과 라그나도 전장 우측에 나타난 이들을 썰고 벴다.

살검을 무기로 삼은 용병대 열 명은.

본래 놔뒀다면 아군을 썰고 벨 이들.

‘잘했지.’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환호를 즐기는 것도 괜찮으리라.

“좋수?”

옆에서 렘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응.”

엔크리드는 여느 때와 같이 솔직했다.

“하여간, 참 쉬운 인간이라니까.”

렘이 놀리려다 말고 툴툴댔다.

뭘 이렇게 쉽게 인정하고 그러나.

때마침 복귀한 이들도 있다.

“앤드류 휘하 이 인 복귀했습니다.”

렘이 아무리 두들겨 패고.

아우딘이 부드러운 말로 위협한다고 해도.

자신이 미치광이 소대의 분대장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앤드류다.

투구에 점점이 튄 피만 봐도 이들도 꽤 거칠게 싸우고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지휘관 목이라도 베고 왔냐? 아니면 거인의 불알이라도?”

제 소대장을 놀려 먹지 못한 렘이 앤드류로 표적을 바꿨다.

“거인 하나 대신 이백 명은 내 손으로 벤 것 같은데?”

허세다. 누가 들어도 허세다.

그걸 말하는 앤드류도 알고 듣는 모두도 알기에 듣기 나쁘지 않았다.

뭔가, 소대 내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지랄은.”

렘도 낄낄 웃고 끝냈고.

라그나도 끓어오른 무언가를 해소한 듯 차분했다. 평소처럼 어딘가 풀어지고 늘어진 상태다.

무엇보다 작센 또한 미소를 보였음에.

아우딘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등 뒤에서 후광만 비치면 신의 부름을 받은 성기사처럼 보이는 위인이다.

그가 부드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검붉게 변한 몽둥이를 들고 있음에도 분위기는 안온했다.

크라이스는 한쪽에서 모두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결과를 보고 원인을 추측하는 건 크라이스의 버릇 중 하나였다.

‘그 대련부터 시작일까.’

눈치 하나는 소대 내에서 최고라 자부하는 크라이스다.

그는 엔크리드가 돌아온 뒤 시작한 대련에서부터 묘한 공기를 감지했다.

렘, 라그나, 작센, 아우딘.

무력의 주축이 되는 넷의 분위기가 변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단순히 말하면 그렇고.

좀 더 파고들면 뭔가 응어리가 해소된 그런 느낌이었다.

대련 한 번에? 평소에도 매일 하던 그 대련인데?

‘아니지.’

프록과 싸우는 소대장을 봤다.

이후 적 지휘관의 귀를 물어뜯는 소대장도 봤다.

그 기술이 발렌 식 용병검이든지, 또는 다른 기술이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크라이스는 꽤 오래 제 소대장을 지켜봤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성장.’

그것도 비약적인 성장.

끝내 저들과 비슷한 수준으로는 올라서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발악하는 소대장을 알기에, 도왔다.

그가 일어서서 걷고 뛰길 바랐다.

하지만 소대원 전부는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재능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이들을 수없이 봐 왔다.

엔크리드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자신들 곁에 서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전원 수고했다.”

소대원 전부를 앞에 두고 입을 여는 엔크리드.

그의 등을 바라보는 크라이스는 울컥했다.

여느 때의 소대장과 같지만.

여느 때의 소대장과 다르다.

오후의 햇살, 따뜻한 바람, 전장의 냄새, 녹슨 쇠와 피비린내, 죽음의 향기.

모든 것들이 어우러졌다가 물러났다.

크라이스는 자신이 무언가에 취했음을 인정했다.

엔크리드를 보는 것만으로 매혹 주문에 당한 듯했다.

봄의 마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륙에 내려오는 말처럼.

봄은 마력을 품는 법이라 했으니.

그렇게 엔크리드를 보는 모든 소대원의 시선은 비슷해졌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한쪽에서 지켜보다 다가온 대대장 마커스의 시선도 유사했다.

“환호를 외쳐라.”

대대장이 저벅저벅 걸어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린 엔크리드를 향해 마커스가 웃으며 말했다.

“전장의 최고 수훈자에게 바치는 환호를.”

짧고 굵게 터지는 환호와 미치광이 소대를 부르짖는 외침 사이.

대대장의 말 한마디가 넓게 퍼지고.

봄의 하늘을 깨뜨릴 환성이 터졌다.

우아아아아!

승리의 기쁨, 봄의 마력에 취한 이들의 외침이었다.

전장의 승리가 가져다준 기쁨이었다.

결국, 승리를 일궈 낸 이들을 향한 환호였다.

엔크리드는 조용히 그 환호를 즐겼다.

나쁘지 않았다. 정말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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