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어떤 하루도 같을 순 없다.
대대장의 막사를 나온 엔크리드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대대장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엔크리드에게는 그 또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기사, 꿈을 논했는데.’
당황하거나 비웃는 게 아니라니.
그 자체가 그에게는 신선한 일 아닌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긴 했다. 말했고 거절했다. 이제는 하던 일을 마저 해야 할 때다.
막사로 돌아온 엔크리드가 렘의 앞에 가서 섰다.
“뭐요?”
“계속해야지.”
감각을 전수해 달란 말이다. 하던 일이니 마저 하는 것일 뿐,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소대장을 보는 렘은 내심 과연 미친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과연 정상인가.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걸 가르치는 자신도 알겠다.
그런데도 하겠단다. 지겨워하는 법도 없다. 괴로워하는 모습은 상상도 안 간다.
좌절, 절망, 괴로움 이런 거와는 담을 쌓은 인간이었다.
그래도 새삼 궁금하긴 해서 물었다.
“지겹지는 않으시고?”
“응?”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을 보니, 할 말이 없다. 그래, 해야지, 아무렴, 부지런히 할 생각이다.
“합시다. 할 일도 없었는데 좋네.”
렘의 말에 앤드류의 표정이 밝아졌다.
요 며칠 렘이 제 소대장에게 붙자, 앤드류는 평화와 사랑, 삶과 희망 따위를 느꼈다.
“삶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해.”
“정신 차리십시오.”
앤드류의 말에 맥이 그를 달랬다.
엔리는 자리를 비웠다. 아니, 떠났다.
엊그제 부상자를 후송하는 부대에 합류하여 그대로 돌아갔으니.
본래 미치광이 소대 소속인 바, 본래는 이리 돌아가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로의 특전이요, 특혜였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 볼까 합니다.”
떠난다는 엔리의 말에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특혜가 되도록 손을 봐준 이가 엔크리드였다.
엔크리드는 엔리의 선택을 존중했다.
모두가 칼밥을 먹고 살 순 없는 법이니.
다만, 엔리의 빈자리가 느껴지긴 했다.
아무리 식사 당번과 근무에 열외라고 해도 주변 정찰 임무까지 발을 뺄 순 없었다.
그렇게 정찰 임무 겸, 크라이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적이 비운 진지를 탐색하기도 했는데.
엔리가 없으니 당장 길 찾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물론 엔크리드도 패스파인더 수준은 아니지만, 평범한 수준으로 길을 찾는 재주는 있었다.
그래도 훌륭한 길잡이인 엔리가 있을 때와는 다른 법이다.
그렇다고 다른 소대원을 시켜?
엔크리드의 길 찾는 능력은 다른 소대원과 비교하면 평범함이 아니라 비범한 수준이었다.
“길 찾는 건 못 하지만, 마수나 마물 찾는 건 잘하는데, 어찌 나온 김에 마물 둥지나 하나 털어 보는 건 어떠슈?”
‘괴력의 심장’, 기술의 전수가 디뎌지자 새로운 실전을 고민하던 렘의 말이다. 길? 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관심은 없었다.
“가다 보면 나옵니다.”
이건 라그나, 이 새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길치였다.
“주의 부르심대로 나아갈 뿐이지요.”
아우딘, 얘도 어떻게 보면 라그나와 버금갈 만큼 위험한 작자였다.
신의 부르심이라니, 수틀리면 제멋대로 하겠단 소리로밖에 안 들리니.
작센은 말은 없었지만, 이들을 이끌어 길을 찾을 의지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작센은 이들을 달래며 가느니, 훌쩍 없어져 버리는 쪽을 택하지 않을까.
맥이 남긴 했으나.
맥보다는 엔크리드가 조금 더 나았다.
어쨌든 미치광이 소대는 적의 진지를 훑긴 했다.
적의 진지를 파헤칠 때, 이미 아군 정찰대가 헤집고 간 곳임에도.
크라이스는 놀라운 재주로 제 주머니를 채웠다.
“과연.”
“그렇지.”
“오, 보석.”
연신 혼잣말 비슷한 걸 터트리던 크라이스는 크로나 주머니, 보석 박힌 단검 따위를 찾았다.
귀한 물건은 없지만, 크로나로 바꾸기 좋은 물건들도 꽤 있었다.
“원래 전장에 나갈 때는 물건을 숨기고 나가고 그러잖습니까.”
크라이스의 말마따나 그러는 병사도 있었다.
값이 나가는 보석 같은 걸 막사 앞 땅을 파서 묻어 둔 뒤, 자신이 죽으면 이걸 파내서 가족에게 가져다 달라는 둥 말하는 그런 짓 말이다.
물론 자신도 죽고 그 부탁을 들은 전우도 죽으면 의미 없는 일이지만.
누가 전장에 나가며 전멸이나 궤멸을 생각하고 나서겠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 숨겨 둔 물건을 찾아내는 재주만큼은 크라이스가 으뜸이었다.
이미 아군 정찰대가 한 번 뒤집은 곳인데.
침상 밑 땅, 막사의 흔적이 남은 곳에서 근처 나무를 찾아 땅을 파면 어김없이 뭔가가 나왔다.
“그건 다 어떻게 찾는 거냐?”
엔크리드가 순수한 호기심을 보였다. 한쪽에 서서 주변을 경계한다지만, 기척 따윈 없으니 할 일이 없기도 했다.
“뭐겠수, 크로나 냄새를 맡는 거지. 저놈 코를 보슈, 금화를 닮은 것 같지 않수?”
렘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이쪽도 심심하긴 마찬가지다.
사람 코가, 그것도 미남 축에 속하는 사람의 코가 어떻게 주화를 닮을까.
시답잖은 렘의 말에도 크라이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거리를 해 봤자 자신만 불리하다는 걸 잘 알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앤드류가 배워야 할 재주였다.
“생각하면 금방 나오는 답이죠.”
크라이스가 오른 검지로 제 관자놀이 부근을 툭툭 때리며 말했다.
언제 준비해 왔는지, 등 뒤로 매는 가죽 배낭이 이미 두둑했다.
“생각?”
엔크리드가 되물었다. 진정 궁금했다. 머리를 식힐 수단 겸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뭘 숨긴다면 어디에 숨길까, 혹 진지가 다 박살 나고 나만 살아남게 되면? 인간이란 게 그렇잖아요? 희망을 쉽게 버릴 수 없는 거니까. 그럼, 진지가 다 터졌다고 치고 내 물건은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 숨길까요?”
“……한눈에 봐도 알아볼 장소.”
“네, 이 나뭇가지가 특이하잖아요. 막사랑 멀지도 않고, 출진 중에 잠깐 들르기 딱 좋지 않아요?”
맞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크라이스가 말하며 눈을 빛낸다. 전과 같은 열정 어린 눈빛이었다.
“귀한 물건일수록 더 잘 숨기고 싶은 법이니까요.”
이 자식, 정말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물론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답을 알게 되면 대단치 않게 생각되지만.
이 모든 걸 출발하기도 전에 예측하고 생각했다는 게 놀라운 거다.
“살롱은 여전히 차리고 싶고?”
“제가 왜 이렇게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전 말년에 살롱 차려서 밤새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놀고먹으며 크로나를 긁어모을 겁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뭐랄까. 조악한데.
정작 이 말을 하는 크라이스는 진지했다.
진지하기만 할까, 그걸 위해 뭔가 희생할 수 있다면 반쯤 목숨을 걸 각오도 되어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엔크리드 자신의 꿈이 더 허무맹랑함에, 타인의 꿈을 비웃을 수가 있나.
기사보다야, 귀부인 살롱을 차려서 크로나를 벌겠다는 꿈이 더 현실적이지 않겠나.
그러니, 비난도 비판도 비웃음도.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꽃집 미망인과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평온하게 살고 싶다는 엔리의 꿈 또한 마찬가지다.
기사가 되고 싶다.
새삼 엔크리드는 설렜다. 그리되고 싶다고 바라 마지않던 꿈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 같아서.
설레기만 했을까, 전신에 짜르르하고 감동의 물결 따위가 흘렀다.
그래, 걷고 있다.
다가가고 있다. 기어서라도 반 발자국이라도.
그러니 찢기고 바랜 꿈아, 기다려라. 내 친히 너의 곁에 서서 같이 걸을 테니.
“자, 다 됐습니다!”
크라이스는 이후 몇 군데를 더 뒤진 뒤, 엔크리드에게 얇은 칼날의 투척 단검을 두 자루 줬다.
“쓰세요. 별거 아닙니다.”
이걸 왜 주나 했더니.
“아니, 왕눈이 뒤치다꺼리나 해 주러 여기 온 거요?”
딱 열을 셀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마자 렘이 화를 냈다.
이거 막아 달란 소리겠지.
“돌아가면 대련이나 할까?”
달래는 거야, 이제 일상이니.
그렇게 부대로 돌아오면 또 훈련을 거듭할 따름이었다.
대대장과 면담한 이후도 같았다.
진전없는 훈련의 연속.
다시 다음 날이 됐을 때, 엔크리드는 고립의 기법 이후 대뜸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집중.’
한 점의 집중을 통해 모든 감각을 오롯이 검에 집중하며.
평소와 똑같았으나, 달랐다.
어떻게 매일이 같겠나, 엔크리드 자신은 몰랐지만 이미 그는 형편없는 재능을 가졌던 과거와는 달랐다.
재능을 보충해 줄 것들이 많았음에.
경험, 새로이 배운 것들.
야수의 심장, 한 점의 집중, 칼날의 감각, 고립의 기법.
그 이후에 쌓인 단련의 시간까지.
이전보다 배는 진한 그 시간.
엔크리드는 그 시간에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눈이 흐려지고 동공이 풀렸으나, 휘두르는 검은 더 날카로워지기 시작했고, 발은 더 날래졌다.
‘프록, 미치 휴리어, 전장.’
홀로 복기하고 궁리하며 검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 순간 모든 게 흐려지기 시작하고.
심장, 야수, 괴력, 싸움, 전장, 궁리, 복기.
잊히고 뒤로 밀려나며 세상에 검과 자신만 남기 시작했다.
흐릿한 잔상과 잡념 몇 개만 남은 채다.
그리 검을 세차게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회복된 오른 손목은 전보다 더 탄탄하게 휘었다.
이건 신성의 효과일까, 아니면 요정 중대장이 준 약의 효험인가.
그게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잡념이 떠올랐다가 흐려지며 그 또한 사라진다. 곧 모든 게 사라진 뒤다.
엔크리드는 몸 밖에서 제 몸을 바라보는 그런 감각을 느꼈다.
유리된, 자신의 몸과 자신을 분리한 그런 말도 안 되는 감각의 연속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 검을 봤다.
휘두르고 찌르고 베고 당긴다.
자르르르륵.
자잘한 자갈을 밀어내며 땅을 밟아 대는 발이다.
스텝을 바꿔 가며 움직임에 검의 방향이 바뀌고 위치가 변한다.
엔크리드의 눈에 검이 만드는 궤적만이 남았다.
점과 점, 점을 잇는 선.
흔들리는 칼날, 묵직한 일격, 섬광처럼 찔러 내는 검 끝, 정해진 대로 휘둘러 상대를 옥죄고, 반 바퀴 휘돌며 팔이 채찍처럼 휜다.
파아아앙!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이전의 엔크리드를 아는 이들이라면.
특히나 그의 시작을 아는 이들이라면.
놀랄 수밖에 없는 장면이라.
그 숱한 시간, 그리도 검을 휘둘렀음에도 언제나 비슷한 곳에 머물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만 존재하는 고장 난 허수아비였다.
설 수 없으나, 기어코 꿈틀거리는 허수아비.
그 허수아비가 지금 오롯이 제 발로 섰다.
‘겁나 늘었수다.’
막사 앞에 나온 렘은 새삼 감탄했다. 언제 저렇게 자신을 잊고, 검에 빠져들 수 있게 되었던가.
언제 저리 홀로 설 수 있게 되었나.
망가진 허수아비는 이제 없다.
쭈그려 앉아 턱을 괴고 보고 있자니, 벅차오르는 기분도 들었다.
정말 언제 저렇게 늘었는지.
그 옆, 라그나도 막사 밖으로 나와서 섰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에, 라그나는 제 소대장의 검술이 무르익었음을 알았다.
이미 대련을 통해 경험한 바이기도 했으나.
저리 몰입해 검을 휘두르는 걸 보면 기분이 묘해졌다.
누군가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것 같았으니.
의욕이 치솟았다.
그 기분에 라그나도 조용히 검을 뽑았다.
스릉.
그러곤 한쪽에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우딘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을 잘 만들었어.’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건 어떤 재주가 있어야 할까.
제 몸을 하나하나 파고들어 인지하고 움직여 보고, 통증을 느껴도 보고 한계 이상으로 굴러 보는 단련이 필요한 법이다.
한계를 두드리게 하는 것, 그게 바로 고립의 기법이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가상으로 그렸던 고립의 기법 최대 수혜자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관절 또한 부드러웠다.
다시는 전과 같은 충격에 손목이 다치진 않을 것이다.
최근에는 관절 단련에 힘을 썼으니.
‘주여, 당신의 종이 기쁨을 표합니다.’
타인을 보고 순수한 기쁨을 느끼다니, 드문 일이다. 드물기에 더한 기쁨이라.
작센은 묘한 기분이었다.
‘잘한 거였다.’
감각을 가르친 것도 여기에 남아 있는 것도.
이득과 손해를 따져 움직인 게 아님에도 후회가 되지 않았다.
한때는 이곳에 남은 게 시간 낭비라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의 소대장을 보니 전혀, 정말 조금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에스터는 한쪽에서 제 앞발에 턱을 괸 채로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마법, 주문은 곧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되는 길이다.
그걸 통해 얻는 기쁨과 희열은 가히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음이라.
그리하여 그녀는 주문의 길을 걸었다.
탐구의 기쁨,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희열 위에 제 세계를 구축하는 충족감까지.
그 모든 게 그녀를 이루는 구성품이다. 마법을 탐하고 주문 세계를 구축하도록 만들어 주는 힘이다.
그럼 지금 저 인간이 저리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건 무슨 이유인가.
지금 엔크리드란 인간의 모습이, 마치 주문 세계에 빠져든 자신을 떠올리게 했으니.
검에 관해서야 기초 수준의 지식만 있음에도, 저 남자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러니 드는 생각이다.
‘뭐가 당신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걸까?’
순수한 호기심, 주문, 탐구자이자, 탐험가로서의 궁금증이다.
에스터로서는 놀라운 변화이기도 했다.
평생 모든 걸 외면한 채 주문만을 파고들어 이리 저주받은 몸이 된 그녀였으니.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자기 모습에, 에스터는 새삼 놀라다가도 즐겼다.
새로움은 그녀에게 활력소이니.
이런 감정 또한 새로웠다.
곧 엔크리드란 남자의 검이 멈췄다.
훅 하고 멈춰선 채, 전신에 흐르는 땀이다.
에스터가 움직였다. 입에 천 하나를 물고 톡톡 뛰었다.
그걸 엔크리드에게 전해 주자,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보던 엔크리드가 그걸 받아 들곤 말했다.
“고맙다. 에스터.”
냐-아.
별말씀을.
엔크리드는 받아 든 무명천으로 땀을 한번 닦아 내고는 새삼 날씨가 너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안온함, 날씨의 영향일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오롯이 검에만 집중한 덕일까.
뭔가 가슴을 막고 있던 답답함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리 후련해지고 나니.
“렘.”
그가 부리는 기술, 괴력의 심장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보였다면 잡아끌어야 할 터.
그리하여 제 안에 집어넣으면 될 일이었다.
마음먹은 대로 될지는 지금 해 보면 될 일이었고.
“다시 하자.”
여느 날과 다름없다 느껴지는 하루였으나.
어떤 하루도 같을 순 없었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