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힘으로 함정을 (2)
콧수염, 이제는 스무 명도 남지 않은 그레이 독의 지휘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냅다 들어와?’
함정을 팠다. 먹음직스러운 함정을.
그렇다고 쉬이 걸려들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함정을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비슷한 형태의 함정을 마구잡이로 만들어 두는 거다.
뭐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모르면 어떻게 되겠나.
찝찝해서 덤비지 못할 것이다.
그리되면 반은 성공이었다.
“그렇게 되면 물러날 겁니다. 함부로 공격하지도 못하겠죠.”
아군 지휘부,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군사가 직접 전해 준 내용이었다.
이제는 흔적만 남은 수준인 독립 유군 그레이 독이다.
이어진 전장의 패배와 미치 휴리어의 죽음.
수차례 실패를 거듭했기에 책임을 져야 했다.
그 책임의 시작이었다.
콧수염은 후방에 있는 적의 부대를 흔들어야 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준비한 게 많았는데.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다 조진 것 같단 말이지.’
이건 숫제 눈 마주치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짓쳐들어와선 검을 들이민다. 베고 또 벤 뒤, 그제야 ‘우리 싸울래?’ 하고 묻는 격이다.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몸에서, 행동에서, 태도에서 그게 여실히 보임에야.
‘역시나.’
조졌다.
본대 후방에 자리 잡은 나우릴리아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지휘부에서도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까.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해?
휴리어 가문의 아들이 죽은 것? 괜찮다. 어차피 그 가문은 자식을 소모품으로 쓰지 않던가.
그러면 자신이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잡념이 계속 떠오르면 집중력이 흐트러짐이니.
고민은 뒤에, 다른 곳에 던져 두리라.
콧수염은 마음을 다잡고 검을 뽑았다.
챙.
무호흡으로 단숨에 발검, 뽑아낸 검을 눈앞에 세웠다.
‘다 죽여 버리면 될 일.’
적의 유격대가 함정을 뚫고 짓쳐들어왔다?
그게 당황할 일인가? 아니다. 이건 환영할 일이었다.
‘저놈부터 죽이고.’
미치 휴리어의 배에 구멍을 낸 놈이 처음.
그 뒤, 바로 옆에 있는 금발 검사를 죽인다. 다음은 도끼를 든 놈이다.
여력을 조금씩 남겨 둬야겠지.
한 번에 하나씩, 협공도 염두에 둬야 할 것이고.
생각을 정리하며 눈앞의 상대를 직시했다.
그런데, 이 새끼 원래 이 정도였나? 자세만 봐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다. 기세가 남달랐다. 미치 휴리어를 찌르고 도주하던 그놈인데, 분명하다. 잊을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때 간신히 살아난 그놈.
암살자의 위협에서도 살아난 놈.
그때도 이 정도였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실력이 늘었나?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었다. 베야 할 놈이라는 거다.
그 뒤에 있는 것들도 마찬가지고.
콧수염이 눈을 빛냈고.
그걸 보는 크라이스는 내심 불안감을 느꼈다.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은데.’
크라이스에게 상대를 알아보는 눈은 없다. 그래서 생기는 불안감이다.
상대가 함정을 팠고, 크라이스는 적의 의도를 읽었다.
그래서 부딪쳐 깨부수자 했다.
자신이 아는 미치광이 소대라면 힘으로 깰 수 있을 테니.
믿음은 있다. 그럼에도 불안이 전부 가시진 않는다. 성격 탓이었다.
본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버릇 탓도 있고.
그래서, 결과는?
일단 시작은 소대장과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작자의 싸움부터일 것이다.
크라이스의 눈이 둘에게 향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착각이 들었다.
봄의 햇살이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둘은 미동도 없었다. 검을 든 채로 멈춰 섰다.
허공에 퍼졌던 흙먼지가 바람에 날리며 흩어지고.
크라이스의 눈에선 둘의 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깡!
이후, 쇳소리가 터졌다.
* * *
라그나는 한쪽에 물러서서 구경꾼으로 화했다.
‘나쁘지 않은데.’
콧수염을 기른 상대의 검, 날카로웠다. 제대로 배우며 익히고 다년간 단련한 흔적이 엿보이는 그런 검이다.
거친 면을 수없이 갈아, 매끈하게 만든 테이블 같았다.
잘 만든 그런 가구.
장인의 손길이 묻은 무언가.
그런 느낌을 주는 상대였다.
반면 엔크리드는 어떤가. 제 소대장은 거칠었다. 거친 면을 수없이 갈고 또 갈았음에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언가.
미완의 그릇 같은 그런 거다.
한쪽은 완성을 앞뒀고.
다른 쪽은 미완이다.
“뭐, 대장전 같은 거냐? 거, 심심하게 구네.”
옆에서 야만인이 중얼거렸다. 라그나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의외로 대답은 작센이 대신했다.
“심심하면 청소부터 하든지.”
태연하고 또 태연한 말투였다.
“이리 많은 이들이 제 주의 곁에 서길 원하다니,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또 그 옆에서는 무식한 종교쟁이의 말도 들렸다.
엔크리드 앞의 콧수염을 제외한 나머지가 장창을 들고 사방에서 포위한 상태였다.
얼핏 봐도 상대 숫자가 세 배가 넘었다.
얼추 오십 명에 가까운 전력이다.
보급 마차 안에 숨은 놈들도 기어 나왔는데 하나같이 무장 상태가 만만찮았다.
중갑 보병이라고 할 순 없어도, 개중에는 사슬 갑옷을 입은 놈들도 셋이나 보였다.
그런데도 태평했다. 다들 간덩이를 어디에 두고 왔는지, 아니면 붓다 못해 대충 목구멍에 걸려 있는 상태가 아닐까 싶긴 했다.
절그럭.
“저거 끝나고 시작할까?”
사슬 갑옷을 입은 적병 중 하나가 툭 말을 내뱉었다. 엄지로 콧수염과 엔크리드 쪽을 가리키면서.
자신감이 엿보이는 태도였다.
조금 전 라그나의 검에 죽은 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음에도 이렇다.
“그러죠.”
대답은 크라이스가 했다. 대장전을 이기고 시작하면 유리하다는 건 기정사실 아닌가.
쇳소리를 시작으로 엔크리드와 콧수염이 연신 불똥을 튕겼다.
라그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끊었다.
알 바가 아니었다.
그의 눈은 엔크리드의 손과 발을, 검과 움직임을 쫓았다.
완성과 미완이라면 누가 유리한가.
까-앙!
치지지지지징!
‘완성이.’
그게 당연하다. 다만, 미완이라 해도 그릇 자체가 다르다면 어떻게 되겠나.
‘끝났군.’
라그나는 내심 결론을 내렸다. 실력 차이도 실력 차이지만,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다. 저래서는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지는 법이었다.
* * *
칼날, 발, 검, 공기, 먼지, 열기.
그따위 것들이 스치고 지나감에도.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느끼지도 않았다.
엔크리드 오롯이 검에 집중했다.
“핫!”
상대, 콧수염이 검을 내리치며 기합을 토했다.
제대로 배운 검, 중검식의 기본을 따른 묵직한 일격이었다.
엔크리드가 양손으로 그립을 쥔 채, 검을 수평으로 틀어막으며 무릎을 굽혔다.
그대로 힘을 흘려 옆으로 비껴 내니.
키기기기기깅!
칼날과 칼날이 만나 불똥을 튕겼다.
상대가 힘으로, 엔크리드는 기교로 맞선다.
역으로 다시금 시작된 공수 교환에서는 반대로 됐다.
엔크리드가 힘 있게 검을 내리쳤고, 상대가 받아내며 흘렸다.
무척이나 매끈하고 깔끔한 솜씨였다.
미치 휴리어보다도 더.
물론 엔크리드의 머릿속에 미치 휴리어가 떠오른 건 아니었다.
엔크리드의 눈과 귀, 손과 발 모든 건 오롯이 검을 휘두르고 싸우는 일에 집중했으니.
한 점의 집중과 야수의 심장, 칼날의 감각을 비롯해 모든 걸 사용하여 보는 것.
점과 점을 잇는 선을 만들고.
그 선으로 상대를 가르고.
막고 피하는 상대의 의중을 읽어 내고.
그렇게 십여 번의 공수가 오갔다.
엔크리드는 두 번의 위기를 겪었다.
한 번은 손목을 베일 뻔했으나, 검의 가드로 막으며 튕겨 냈고.
두 번째는 종과 횡으로 베는 공격을 연이어 보여 주다가 갑자기 찌르기로 변한 일격을 간신히 막았다.
복부 중앙을 노린 찌르기에, 엔크리드는 검면을 세워 뾰족한 검 끝을 막으며 옆으로 튕겨 내야 했다.
누가 봐도 묘기에 가까운 방어였다.
조금만 타이밍이 어긋났다면 가죽 갑옷 한복판에 새로운 구멍이 났을 터였다.
“흥.”
콧수염은 불의의 일격이 빗나가자, 코웃음을 쳤다.
이제 곧 죽이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엔크리드는 무시했다.
두 번의 위기 이후다.
엔크리드의 발이 왼쪽으로 비틀리며 스텝을 밟아 나갔다.
좋은 자리를 주지 않기 위해 콧수염도 발을 놀렸다.
검이 닿는 거리에서 둘이 빙글 돌았다.
그렇게 자리가 바뀌는 사이, 엔크리드는 의도적으로 오른쪽 어깨로 왼손을 가렸다.
자세를 바꾼 뒤, 오른손으로만 검을 쥐고 왼손을 허리춤으로 뻗는다.
콧수염은 엔크리드의 의도를 읽었다.
무수히 많은 결투와 다년간의 경험.
그는 한 치 앞을 예견했다.
안 그래도 검 한 자루가 더 남은 게 신경 쓰이는 판이었고.
이미 검 두 자루를 쓰는 것도 봤음에야.
‘왼손.’
엔크리드의 왼손이 내려가는 걸 본 순간, 콧수염은 힘 있게 검을 휘둘렀다.
오른쪽 위에서 좌측 밑으로.
크게 사선 베기.
중검의 일격, 이거면 됐다. 자신의 승리였다.
엔크리드는 왼손으로 검을 뽑지 않았다.
시늉만 했다.
이후, 수차례 호흡을 가다듬으며 준비한 일격을 내리꽂았다.
‘괴력의 심장.’
쿵!
심장이 뛴다. 폭발하듯 뛰는 심장에서 시작된 피의 질주가 전신을 치달린다.
치달린 피가 근육에 힘을 실어 주니.
평소보다 2배에 가까운 근력, 괴력이 치솟았다.
기합은 없다. 실핏줄이 솟은 두 쌍의 눈이 서로를 노려볼 뿐.
일격의 생사가 갈리는 시점이다.
묵직하게 날아오는 칼날을 마주해, 엔크리드는 오른손으로만 쥔 검을 수평으로 날렸다.
깡! 쩡! 퍼억!
세 줄기 소음이 거의 동시에 터졌다.
검격이 교차하며 서로 발을 내밀었다.
그리 위치가 변한 둘이다.
“……노린 거냐?”
“처음부터.”
서로 등을 보인 자세에서 콧수염이 물었고.
엔크리드는 답했다.
콧수염의 칼날은 깨끗했다. 핏물 따위는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반으로 쪼개진 상태였다.
엔크리드의 검은 그 반대였다.
발레리산 강철과 누아르산 연철을 섞어 만든 검.
‘명검이야.’
적어도 지금 자신에게는 그렇다.
콧수염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가슴팍이 쩍 벌어져 피가 왈칵 쏟아지고, 갈비뼈가 잘리고 부러지며 심장을 보호하지 못했다.
심장이 부서지면 프록조차 죽으니.
쓰러진 콧수염의 죽음은 당연했다.
엔크리드는 몰랐으나, 그가 바로 그레이 독의 마지막이자, 희망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레이 독이란 이름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순간이라 해도 좋았다.
“후.”
호흡을 한 번 뱉은 엔크리드가 검을 털어 냈다.
상대는 자신의 왼손을 의식했다.
그래서 처음부터라고 답한 거다.
이 순간을 위해 보여 준 거라고.
발렌 식 용병검, 미리 보여 주기.
상대의 머릿속에 공격 패턴을 심어 생각을 복잡하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된다.’
생각했고, 의도한 방향으로 검을 놀릴 수 있게 됐다.
승리의 기쁨보다, 그게 먼저였다.
‘돼.’
그 희열이 먼저 가슴을 채운다.
쌍검을 쓴다고 해서 그게 주가 될 필요는 없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걸 다루면 될 일이다.
‘창이나 다른 무기, 방패도.’
포기했던 것들까지 이제 손에 닿는 느낌이니.
그런 것들을 전부 다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물론 검처럼 딱 손에 붙진 않겠지만, 그저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쁘지 않아.”
끝내 상대를 죽인 엔크리드가 중얼거린 한마디다.
“난 왜 소대장이 싸우는 걸 보면 신나는지 모르겠수다.”
렘의 입이 열렸다. 실제 꽤 아니, 많이 신난 얼굴이었다. 빙글빙글 입꼬리를 말리며 웃고 있으니.
상대, 사슬 갑옷을 입은 셋은 태연했다. 콧수염의 죽음에도 덤덤했다.
“음, 저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쉽긴 하군.”
“상대를 얕봤다. 전력으로 붙는 상대는 전력으로 상대해야 하는 법이니.”
사슬 갑옷 셋이 주고받은 말이다.
그래, 너희도 눈은 있구나.
렘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음이다.
엔크리드는 오롯이 전력을 다했으나, 상대는 이후를 염려했다.
어디 실력도 더 떨어지는 놈이 싸움 이후를 의식하고 지랄인가.
그러니 뒈지는 게 당연하지.
“야, 한 번에 할까?”
한 발 나서는 렘이다.
턱.
“욕심이 과하시군요. 형제님.”
그런 렘의 어깨에 올라간 건 곰의 그것과 닮은 손이었다.
아우딘이 고개를 저었다.
“손 안 치우냐?”
신난 만큼 살벌함도 더해진 렘의 한마디와 눈빛이다. 아우딘은 여전히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욕심이 과하시다니까요. 야만적인 형제님.”
“이 새끼가?”
슁, 툭.
렘의 도끼가 움직였다. 세로로 정직하고 올곧게.
아우딘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뒤로 물러났다.
둘 사이로 싸늘한 공기가 오갔다.
아우딘의 웃는 얼굴이 언제부터인가 조각상처럼 굳은 듯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는 사슬 갑옷을 입은 셋은 황당했다.
이 새끼들 뭐지? 왜 자기들끼리 싸워?
그것도 우리 셋을 누가 상대하느냐고 싸우는 거지?
무시다. 무시였다. 기만이었다.
“미친 새끼들이.”
결국, 사슬 갑옷 하나가 먼저 나섰다.
끝이 둥근 쇠망치가 무기인 놈이었다.
놈이 불쑥 튀어나오자, 그 앞을 가로막는 검이 있었다.
“넌, 내 거.”
금발의 붉은 눈, 눈에 무슨 불꽃을 담아 둔 듯한 놈이다. 이어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검격이 이어지고.
망치를 든 놈이 크고 둥근, 라지 쉴드를 무기처럼 휘둘렀다.
공격이자, 방어였다.
떵!
방패를 후려친 라그나의 검이 수면을 때린 제비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고.
“새치기냐!”
그걸 본 렘이 튀어 나가고.
“질서를 어기시면 주님께서 노하십니다. 형제님!”
아우딘도 움직였다.
그러니까, 전투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