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명예를 느끼니
단상 뒤쪽으로 높게 자란 나뭇잎 사이, 붉은색과 분홍색이 섞인 꽃잎이 휘날렸다.
연병장 뒤편의 꽃밭에서 노란색 꽃이 화사하게 제 몸을 드러냈다.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 물론이요, 창칼이 오가는 곳에 꽃밭이라니.
보더 가드가 아직 교역 도시일 때의 흔적이라고 했던가.
그 후로도 저 꽃밭을 유지하는 건 도시를 책임지는 대대장의 의무 같은 거였다.
저게 바로 도시가 안전하다는 방증이라나 뭐라나.
겨울이 지나 봄이 왔음에.
오랜만에 보는 꽃이려나.
“이 도시가 안전하다는 상징이죠.”
꽃집 주인이 그런 말도 했었다.
도시 내의 꽃집 주인 몇이 보더 가드의 꽃밭 관리를 담당했다.
꽃을 보니 드는 생각.
어깨의 힘을 빼는 것도 중요했다.
너무 굳지 않게.
느슨하되 풀어지지 않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가끔 꽃을 보며 느슨하게 구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어깨에서 힘을 빼고 보니 꽃잎 모양이 마치 곧게 뻗은 검과 같다.
저 꽃 이름이 뭐였더라.
붉은 잎이 삐죽한, 별명은 확실히 기억나는데.
소드 플라워.
검 꽃이라 부르는 것.
봄의 마력에만 반응하는 꽃이라고도 했었다.
검 꽃잎을 보고 있자니, ‘검을 수직으로 내리칠 때, 더 깔끔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의문과 함께 답을 찾는 궁리의 여정이 머릿속에서 시작했다.
그 콧수염.
자신과는 아예 다른 길을 걸은 남자.
라그나의 검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정련된 무언가.
재능과 더불어 노력으로 쌓은 검.
그게 피부에 와닿았다.
그러니 갖고 싶어졌다. 품고 싶어졌다. 소유해 꿀꺽 소화하고 싶다.
여전히 갈망하며 갈증을 느꼈다.
사막을 걷는 여행자에게 물 한 모금.
그게 엔크리드에게는 검과 기사, 꿈과 기술이었다.
‘천천히.’
급히 달리다 보면 헛디디고 넘어지는 법 아니겠나.
하물며, 급하게 해서 이제까지 잘된 적이 있긴 하던가.
재능이 없어도 좌절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기에 볼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건 조급하지 않음이고 느긋하지 않음이다.
상반된 두 속도 사이의 중간.
느슨하되 풀어지지 않는 것.
그러하기에 자신이 뛸 수 있는 속도로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거다.
엔크리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단상 위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의 끝이 단상이었다.
그 앞에 마커스가 있었다.
마주 서고 바라봤다.
눈빛이 오갔다. 마커스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뭔가 재미난 장난이라도 하는 그런 눈이었다.
연병장은 조용했다.
뭐랄까.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따뜻한 햇볕 사이로 훈풍이 불고.
훈풍에 맞춰 꽃잎이 흔들렸다.
평온하고 고즈넉한 그런 오후였다.
아우딘의 신성이 몸에 닿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안온함이 주변을 감쌌다.
“고민했다.”
마커스가 입을 열었다.
조용한 가운데 울리는 목소리.
연병장 곳곳에 닿을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주변 사람 정도만 들릴 정도였다.
“뭘 말입니까?”
반듯하게 선 채로 엔크리드가 답했다.
“뭘 주면 만족할까, 이만한 공적을 쌓은 병사에게 뭘 줘야 할까.”
그 말에 엔크리드의 머릿속에는 좋은 검, 크로나 따위가 떠오르기도 했으나.
과연 거기서 만족할까?
설마, 전혀.
적당히 즐겁긴 하겠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마법 갑옷?’
이제는 자신의 품을 감싼 가죽 갑옷의 가치를 얼추 안다. 그 가치가 서서히 떨어지는 것도.
주문은 영원불멸하지 않으니.
마법 무구는 한계가 있다고 들었다.
어디까지나 오가며 들은 말이라 그게 진짜인가 싶었지만.
실제 써 보니 증명되지 않았나.
가죽 갑옷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가죽 건틀렛도 마법 무구 비슷한 것 같긴 했다. 아니라면 이만한 강도가 말이 되나.
이 건틀렛이 아니었다면 프록과 싸울 때, 손목이 나간 게 아니라 한쪽 손을 잃었을 거다.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손목 하나를 잃은 채 죽어 버리면, 외팔이 검사 비슷한 게 되지 않나.
팔을 잃는 것보다야 손목을 잃는 게 낫긴 하겠지만.
아니, 둘 다 최악이다.
이제 생각해 보면 조심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목숨을 잃는 것? 괴롭지만, 오히려 그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몸에 치명상을 입고 오늘을 넘어 내일로 향한다면.
‘생각할 게 많아지는데.’
그렇다고 엔크리드가 깊은 고민을 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렇게 머리를 많이 쓰는 타입도 아닐뿐더러.
실상 그럴 여력도 없었다.
‘잡생각.’
어깨의 힘을 빼는 정도가 아니라 방해가 되는 잡념이다.
잊는다. 오롯이 검, 꿈에 몰입해도 부족하리라.
과연 기사가 될 수 있는가.
여전히 가진 질문이고, 답은 아직이었다.
“그래서 생각했지.”
마커스가 마저 말했다. 엔크리드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말에 집중했다.
경청이다. 제대로 듣는 자세다.
“나 또한 진정성 있는 선물을 줘야겠다고. 기대해도 좋다. 소대장.”
기대라는 말이 나왔다.
어지간한 일에 감상을 내보이진 않을 것을 자기 자신이 잘 알기에.
솔직히 기대는 없었다.
이후 마커스 대대장은 크로나와 멋들어진 단검 한 자루를 줬다.
왕가에 큰 공적을 취한 이들에게만 수여하는 단검이라던가.
받아 보니 균형감이 형편없었다. 실용성은 없고, 그저 신분 증명용 단검일 뿐이었다.
“왕가의 비수를 내림으로 그대의 지위를 보장한다. 언제고 수도에서 그걸 내보이면 왕가의 손님이 될 수 있으리라.”
엔크리드는 정말 별거 아니라 생각했다.
진심으로.
하지만 단상 밑에서 보는 병사들 생각은 달랐다.
“……엔크리드.”
“엔크리드.”
“엔크리드.”
만세 따위를 부르는 유치한 외침은 없었다.
그저 병사 전부가 엔크리드의 이름을 연호했다.
함성과 기합도 없이 그저 읊조림.
일상적인 중얼거림.
입에서 나오는 말.
다만, 수백의 병사가 하나가 되어 말하니.
“엔크리드.”
그게 함성처럼 귀를 때렸을 뿐.
“클클, 어째 너보다 저쪽이 더 기뻐하는 것 같군. 돌아서 봐라.”
마커스의 말에 엔크리드가 몸을 돌렸다.
퍽 재밌는 광경이긴 했다.
전장의 끝, 도시로 돌아와 열흘.
전보다 부대에 있는 이들과 가까워진 것 같긴 했다.
이전에 자신을 보고 엉덩이를 대주느니 하는 추잡한 소리를 지껄이던 이들은 고개를 숙였고.
자신을 처음 본 이들은 존중과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전장에서도 이미 인정받은바.
그때의 대대장은 환호를 울리라 했다.
그건 누굴 위한 환호였던가.
정말 나쁘지 않은 경험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또 달랐다.
단상은 높았다. 딱 사람 하나만큼.
그래서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볼 수 있었다.
모든 병사가 뿜어내는 열기를.
그 열기가 마치 형태를 이뤄 자신을 감싸는걸.
자신이 해낸 일이 지금 이 자리를 만든 것임을 새삼 깨달으니.
“기사는 무엇으로 이뤄지는가.”
실력? 칼질만 잘한다면 그건 기사가 아니라 했다.
“그런 걸 바랐다면 용병질이나 했어야지.”
어느 도시의 검술 교관이 한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았다.
그때 물었다.
기사는 무엇으로 이뤄지는가.
무엇을 보고 기사라 말하는 건가.
“실력은 당연하다.”
실력 위에 명예와 공적이 쌓여, 자신을 증명하는 자.
“요즘은 좀 달라지긴 했어도 과거, 역사를 거슬러 전설을 논할 때는 그게 맞았지.”
그냥 검만 잘 휘두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가?
아니, 아니었다. 어릴 때의 꿈은 그리 시작됐으나.
나이를 먹고 재능의 한계를 확인하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놈의 검에 맞아 배에 구멍이 나고.
동료를 잃고.
실력과 인성이 비례하지 않음을 깨닫고.
한계를 알면서도 검을 휘둘렀다. 오롯이 한 마음으로, 오롯이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일이 오지 않는 오늘을 사는 것처럼.
반복되는 시간의 파도에 몸을 던졌다.
파도에 휩쓸리되, 그때도 검을 잊지 않았다. 바래고 찢긴 꿈을 품었다.
긴 시간, 엔크리드를 지탱해 준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기사란 자신이 정한 기준을 지키는 사람.
엔크리드는 그리 믿었다.
명예를 잊지 않고 나아가는 자.
그리되기로 했다.
그러니, 이런 자리가 기쁜 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이들의 앞에 서서, 자신을 증명함에.
명예를 느끼니.
“재밌네.”
엔크리드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감정을 느끼기 어려웠으나.
뒤에 있던 마커스는 엔크리드의 말에서 뭔가 생소한 무언가를 느꼈다.
전과 같았다.
한동안 잊었던 무언가.
검과 빛.
‘열정이라는 건가.’
마커스는 웃었다. 정말 재밌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준비한 선물이 눈앞의 남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무척 궁금했다.
“이상.”
마커스가 말하고.
엔크리드가 돌아서서 군례를 보였다.
“엔크리드.”
같은 이름을 읊조리듯 연호하는 병사 사이로 내려선다. 좌우로 비켜선 병사 사이, 길이 열리고.
“좋겠수다.”
제 소대원이 반기는 걸 봤다.
히죽거리며 웃는 렘과.
짝다리를 짚은 채, 무심히 바라보는 작센.
“기도에 화답하는 화신 같았습니다. 형제님.”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내뱉는 아우딘.
“이제 돌아갑니까?”
이런 행사 자체가 지겨운 라그나.
“좋네요.”
크로나가 안 될 것 같으면 관심도 없는 크라이스.
그 곁으로 앤드류와 맥이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엔크리드.”
“소대장.”
음, 이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긴 했다. 이게 즐겁지 않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돌아가자.”
그렇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돌아와서 열흘, 보더 가드는 조용했고.
논공행상이 끝났다. 그럼 뭘 해야 하나.
당연히 훈련이다. 당장 검을 어찌 휘두를지 고민하는 참인데.
“야, 오늘은 파티다. 다 먹고 죽자!”
단상 위에서 마커스가 본심을 드러냈다. 아니, 대대장이 저렇게 막 나가도 되나?
저 뒤에서 버티는 사람들 귀족 아니었던가?
아니나 다를까. 돌아선 엔크리드의 눈에 인상을 찌푸린 귀족 무리가 보였다.
그런데 어째 나서서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뭘까.
나서면 목이라도 베어 버린다고 했나?
‘아니지, 그건 렘 같은 놈이나 하는 짓이다.’
마커스는 수도 출신의 지휘관이다.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 저들의 반응은 왜 저런 건가.
딱 여기까지, 엔크리드는 귀족의 사정 따위는 무시하기로 했다.
기실 굳이 파헤칠 필요도 없었다. 알아서 뭐 하겠나.
안다고 달라질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파티!”
“우호!”
“좋습니다! 좋아요!”
병사 무리가 소리를 질렀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뭐, 좋은 거라도 나오나. 이래 놓고 싸구려 포도주만 주면, 내 도끼로 저놈 새끼 머리통을 찍어 버리고 싶을 것 같은데.”
파티란 말에 렘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근데 이 새끼 또 기분이 좋아 보이네.
기분만 좋으면 상관 머리통을 쪼개고 싶어 해서 문제지.
‘아니, 그게 내 머리가 아니라 다행인 건가.’
생각해 보면 렘이 진지하게 자신의 머리를 쪼개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가끔 농담으로 머리를 쪼개서 안에 뭐가 들었나 보고 싶다곤 했어도.
그건 진심은 안 담긴 말이니까.
“귀찮군.”
라그나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고.
엔크리드는 라그나의 마음에 한 표를 던지고 싶었다.
훈련이나 하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었던 콧수염의 검을 몸에 붙이고 싶었으니.
“굳은 머리로는 굳은 것밖에 못 봅니다. 쉴 때는 쉬어야 하겠죠.”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옆에서 작센이 말했다. 예민한 감각 덕인가.
자신의 상태를 알아본 그런 눈치였다.
“다들 잘 쉬십시오. 그, 전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뒤에서 크라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실시간으로 멀어졌다. 뛰면서 말한 탓이다.
파티가 열리면 자연스레 열리는 게 도박장이다.
그럼 뭐, 크라이스가 노는 판인 거다.
실제 도박을 하는 게 아니라 그 판을 키워서 수수료를 받는 게 목적인 거고.
여전히 크라이스는 도박 따위에 크로나를 탕진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잖아요. 왜 무작위로 나오는 패에 크로나를 던집니까. 던지길. 도박꾼이라도 만나면 무작위도 아니고 반드시 털릴 텐데요.”
도박에 크로나를 쓸 이유가 없단 거다. 나름 타당했다.
크라이스가 병사 무리 사이로 사라졌다.
엔크리드가 사라지는 크라이스의 등을 바라봤다. 새삼 저 눈만 큰 병사가 기발한 전략을 꺼내 들었다는 점이 퍽 어색했다.
“머리를 쪼갤 일은 없겠군요. 야만적인 형제님.”
뒤에서 아우딘이 읊조렸다.
앞쪽, 대대장이 시원하게 술병을 드는 게 보였다.
“이거 괜찮은 술이다! 오늘은 전부 같은 술을 마신다! 이의 있나? 있는 놈은 덤비든가!”
저 양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술을 내밀어 즐기라 하고 마커스가 외쳤다.
그걸 빤히 보고 있자니, 핀이 다가와서 말했다.
“한잔할까?”
“음?”
술을 입에 댄 것도 꽤 지난 일 같은데.
그럴 일이 없었다. 훈련하기 바빴다. 술을 마시면 몸을 통제하는 게 둔해진다. 그건 곧 제대로 된 훈련을 할 수 없다는 말.
파티를 즐기는 것과 술을 마시는 건 별개였다.
그래서 좋은 말로 거절하려는데.
“아니, 인간 여자, 그 자리는 내 자리 같은데. 그쪽은 내 약혼자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다.
음?
“……약혼? 요정 같은데?”
핀이 중얼거렸다. 엔크리드가 뒤로 한발 물러섰다.
요정 중대장이 소리 없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랑 마시지.”
이건 명령인가, 제안인가.
핀과 요정 중대장의 출현에 묘한 기류가 생기자.
“캬아.”
그 사이로 에스터도 끼어들었다.
에스터가 꽤 사나운 울음을 토한 뒤 엔크리드의 품으로 쏙 들어왔다.
이거 뭔가 상황이.
“……염병할 마성.”
그걸 본 렘이 중얼거렸다.
오해라고 하기도 전에, 주변에 지켜보던 병사 무리가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엔크리드를 부르며 환호했다.
“마성의 소대장!”
염병, 이제 좀 잊었다 싶었더니.
마성이란 두 글자가 또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