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52화 (152/170)

152. 기사는 무엇이 다른가?

에이시아는 돌아가는 길에 좀 독특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처음인 것 같긴 해.’

기사의 힘을 다룰 줄 모르면서, 맨몸으로 버틴 놈이라니.

‘위압’을 이겨 낸 건 아니다. 그저 버텼다.

아니, 모든 걸 끝내고 보니 손가락 반 마디 정도 발을 앞으로 뻗기까지 했다.

그녀는 준기사, 날카로운 시선은 상대의 작은 움직임까지 잡아챘다.

그는 앞으로 나오려고 했다. 전진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병사가 얼마나 될까.

있긴 한가?

없을 것 같은데.

‘그, 음, 깨달으면 괴물 같은 놈이 될 것 같긴 하다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신경 끄자.’

프록 놈이 남았으니, 알아서 하겠지.

자신은 부탁받았고,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그러니 돌아가면 끝이다.

에이시아는 그렇게 엔크리드를 잊었다.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 기세, 그 우직함은 참 마음에 들긴 했으나.

특히 얼굴도 마음에 들긴 했지만.

‘다시 볼 일은 없겠지.’

재능이란 참으로 냉혹하니.

행운의 여신은 언제나 불공평한 법이었다.

다그닥.

그녀를 태운 말이 발굽으로 땅을 차고 나아간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왜?’

벤젠스는 괜히 초조하고 불안했다.

기사단원이 와서 엔크리드를 봤다. 그의 실력을 확인했고, 재능 판독자라는 프록까지 왔다.

그 결과 가혹한 말이 오갔다.

‘왜 저렇게까지.’

의욕을 잃길 바라서? 너무 훈련에 열중하는 게 보기 싫었던가?

마커스 대대장의 속내가 뭔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왜 가만히 있는 엔크리드의 속을 들쑤신단 말인가.

기사가 될 수 없으니, 한계가 명확하니 관두라고?

왜? 굳이?

벤젠스는 엔크리드의 꿈을 몰랐다. 그와 마커스 대대장과의 대화도 몰랐고.

그러니 당연히 드는 의문이었다.

엔크리드가 제 빛바랜 꿈을 숨긴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귀에 대고 외치며 알려 주는 정도는 아니었으니.

“대대장 새끼, 성격 나쁘네.”

벤젠스는 괜히 마커스를 욕하며 엔크리드의 숙소로 향했다.

똑똑.

“나 벤젠스인데.”

“어? 못생긴 소대장이네, 무슨 일이슈?”

문을 두드리니 렘이 나와 속을 뒤집었다.

무시해야 했다. 괜히 말을 나누면 덤비기나 하겠지.

그럼, 그 결과는? 엔크리드야 허벅지를 한 번 무릎으로 찍고 끝이지만, 렘이라면, 쉬이 상상되질 않았다. 결론만 말하면 덤비면 안 된다는 거였다.

“엔키는?”

“자는데.”

자는 게 아니라 기절 아니었나?

근데 이 새끼는 뭐 이렇게 덤덤해.

괜히 제 소대장 의지 꺾는다고 마커스의 목을 도끼로 후려치니 마니, 할 줄 알았더니.

하긴, 숙소에서 그리 흥분하고 화내고 있을 바에야 진즉에 도끼를 휘두르고도 남았겠지.

그럴 놈이다.

안에 들어서니, 라그나란 놈은 다시 자고 있었다.

정말 잠들었나 싶어서 보는데, 숙면 상태였다. 코를 골진 않지만, 안정적인 숨소리와 함께 흉부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작센은 한쪽에서 연초 잎을 돌돌 마는 중이었다.

정성이로군.

핀이라는 여자가 합류했다고 들었는데 자리를 비웠고.

크라이스도 없다.

오전 불침번 때 본 프록만 보였다.

정오가 다 되어 가니 점심나절인데, 아예 여기에 자리를 잡기로 한 건가.

생각보다 태평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깨어나면 위로를 해 줘야 하지 않나?

아니면 그 말을 아예 하지 않거나.

없었던 일로 대강 넘어갈 생각인가.

눈치를 보며 벤젠스가 흠하고 헛기침하자, 타이밍 좋게 엔크리드가 깨어났다.

눈을 뜬 엔크리드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어, 깼네.”

벤젠스가 먼저 반응하고.

뒤이어.

“기사 못 된다고 합디다. 가능성이 요만큼도, 구울 뇌만큼도 없다고 합디다.”

렘이 부리나케 쏘아 내고.

“형제님, 일어나셨습니까? 이거 좀 드시지요.”

그 옆에서는 아우딘이란 친구가 빵을 내밀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희고 촉촉해 보이는 빵이다.

최근에 도시 내에 괜찮은 빵집이 문을 열었다고 들었는데, 거기서 사 왔나 싶었다.

아니, 지금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지 않나?

라그나는 계속 자고.

작센은 꼼꼼하게 말아 둔 연초 잎을 가죽집에 차곡차곡 넣었다.

“음, 그래.”

엔크리드는 담담했다. 덤덤하게 답하고 빵을 물고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프록이 묵묵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기사가 될 수 없다고 했는데, 괜찮나?”

뒤로 고개를 돌린 엔크리드가 턱을 내렸다가 올렸다. 목을 끄덕였다.

“네, 뭐.”

상대 신분은 모르나, 준기사와 같이 왔다면 최소 기사단원이겠지.

거기에 재능 판독자로 나선 프록이라면 귀족과 준하는 직위를 가졌을 터다.

엔크리드는 생각하고 말했다.

충격 따윈 조금도 없는 모습이었다.

어쩌다 보니 숙소 입구를 가리고 서게 된 벤젠스가 눈을 깜빡이며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지난밤 대련의 설욕?”

엔크리드가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걱정돼서 왔다는 말이 쉬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뭐야, 못생긴 소대장, 복수의 칼날을 갈고 온 거요? 그럼 덤벼 보쇼.”

렘이 괜히 부추겼으나, 벤젠스는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덤벼 보지 않았던가.

아직 허벅지에 생긴 멍도 안 빠졌다.

엔크리드가 밖으로 나가고.

벤젠스는 멍한 시선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 위로 같은 건 안 해 주나?”

벤젠스가 엔크리드의 등을 보며 물었다.

위로까진 아니더라도 걱정 같은 건?

저러다가 검을 놓는다고 하면?

저러다가 포기한다고 하면?

저러다가 관두면?

괜히 재능 없다고 들쑤신 바람에 좌절이라도 하면?

벤젠스도 이게 우스운 상황이라는 건 알았다.

자신이 뭐라고 나서서 이러는 건가.

엔크리드가 관두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그저 우연히 목격한 그 상황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계산해서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마음이 그랬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벤젠스의 말에 렘이 낄낄 웃었다.

저 웃음, 평소와 같다. 가장해서 웃는 건 아니었다.

“누굴 위로한다는 거요? 소대장을?”

렘과.

“허허, 형제님, 형제님은 소대장 형제님을 잘 모르시는군요.”

아우딘.

“소대장은 소대장이지.”

작센조차 덧붙이고.

“흐암, 소대장은?”

일어난 라그나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벤젠스가 반사적으로 바깥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갔군. 훈련?”

그거야 모르지. 라그나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목을 좌우로 꺾더니, 제 검을 챙겨 움직였다.

벤젠스가 또 옆으로 비켜섰다. 라그나가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건 뭘까.

은근히 무시당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소대장은 아무렇지 않을 거요.”

렘이 마저 말하고.

그걸 들은 프록이 반응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경험.”

짧은 대화가 오가고, 프록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경험, 겪어 보면 안다는 말 아닌가.

그러니 자신도 나가서 보면 될 일이다.

실제 엔크리드란 놈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라그나가 나서고 곧바로 프록이 바깥으로 나갔다.

벤젠스는 머리가 복잡했다.

저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나?

“원래 우리 소대장의 실력이 어땠을까? 현재 수준은 말이 되는 걸까? 어떻수? 못생긴 소대장 생각은?”

렘의 말이 연이어 들렸다. 그가 침상에서 뒹굴다가 에스터를 보고 괜히 손가락으로 찌르려고 했다.

에스터가 손톱을 드러내며 그었는데, 렘이 손가락을 휙 당기며 그걸 피했다.

에스터의 푸른 눈이 렘을 바라봤다. 렘은 웃으며 손바닥을 보였다.

괜한 장난은 그만 치겠다는 의미 같았다.

그걸 빤히 바라보던 벤젠스는 아무 말이나 답하고 돌아섰다.

‘잘생겨서 좋겠다. 새끼야.’

뭐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왜 자꾸 못생겼다고 지랄인 건지.

렘 새끼를 보니 울컥한 것도 있었다.

어떻게 실력도 뛰어난 놈이 얼굴도 저렇게 생긴 건지.

아, 다행인 점은 있다.

성격이 참 유별나지 않던가. 괜히 미치광이 소대라 불리는 게 아니니.

성격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낫다.

세상이 몰라줘서 그렇지.

돌아서 제 숙소로 돌아가는 벤젠스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마지막 렘이 한 말이 귀에 꽂혔다.

“원래 우리 소대장의 실력이 어땠을까? 현재 수준은 말이 되는 걸까? 어떻수? 못생긴 소대장 생각은?”

타박타박.

말이 안 되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된다.

특히나 성장 속도가.

본래의 엔크리드는 어땠나. 매일 검을 휘둘러도 제자리에서 발악하는 안타까운 머저리였다.

“나라면 진즉 은퇴했지.”

구경하는 병사들이 숫제 이런 말도 하곤 했다.

벤젠스의 기억에도 있던 말이다.

그때 엔크리드를 서슴없이 비난하던 놈들이 꽤 많았다.

“근데 저 병신은 어떻게 분대장이 된 건지, 거, 염병 났네, 구멍이 명기인지.”

혐오감이 불쑥 치솟는 말을 하던 놈도 있었다.

그때의 벤젠스는 엔크리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매일 검을 휘두를 자신도 없는 놈이 말도 안 되는 거로 상대를 비난하는 거냐? 미친 새끼 같으니라고.”

그 새끼를 어떻게 했더라.

그래, 아주 박살을 내놨다.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새끼도 그 새끼가 하는 말도, 엔크리드도, 매일 검을 휘두르는 그 우직함도.

그때 엔크리드를 욕했던 놈은 많았다.

마침 그중 하나가 눈앞에 보였다.

“거기, 너.”

부름에 병사가 다가왔다.

“네. 소대장님.”

“지금 엔크리드 소대장의 실력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네?”

“실력 말이다.”

“에, 음, 늘었죠.”

엔크리드를 욕했던 병사의 눈에 이제 다른 감정이 섞였다.

선망과 열의다.

“왜 늘었을까?”

“네?”

‘뭐지, 이 머저리는?’

병사의 표정에서 그런 말을 읽은 벤젠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벤젠스는 그를 보내고 생각했다.

기실 이유는 하나다.

매일의 우직함, 그 우직함을 이뤄 내는 건 무엇인가.

‘포기를 몰라.’

좌절도 모르고 절망도 모른다. 자신이 엔크리드를 싫어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던 이유? 같았다.

싫은 이유도 좋은 이유도.

그는 돌아서지 않는다. 물러서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며 미래를 그린다. 꿈을 꾼다. 제 삶을 위해 나아가는 인간.

그러하기에 빛이 나는 인간.

그러하기에 빛을 끌어모으는 인간.

“염병.”

벤젠스는 괜히 검이 휘두르고 싶어졌다. 다음에 대련할 때는 몇 번은 더 버티고 싶었다. 그걸 목표로 삼아 보고자 했다.

그대로 벤젠스는 걱정은 집어치우고 검을 휘둘렀다. 단련의 시간이다. 부대 내에서 몰아치는 훈련 열풍에 그도 손을 보탰다.

* * *

엔크리드가 일어나자마자 한 생각은 이거였다.

‘훈련.’

오전 훈련을 몽땅 빼먹었다.

오늘은 특히 할 일이 많았음에도.

고립의 기법부터 시작해서, 회피의 감, 야수의 심장, 한 점의 집중, 괴력의 심장, 칼날의 감각, 발라프 식 무투, 검술 기본식 단련까지.

‘오전 훈련을 빼먹었으니, 오전에 할 걸 오후로 미루고.’

쉬는 시간을 줄인다. 휴식이 중요한 걸 알지만.

특수한 상황 아닌가.

오전부터 기절해 버리는 바람에 시간이 날아갔으니.

당장 준기사 에이시아가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그런 의문은 전부 뒤로 미뤘다.

할 일부터 해야 하니.

매일의 반복.

잊지 말아야 할 단련의 시작이다.

그리 눈을 떴는데, 기사가 될 수 없다는 둥, 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벤젠스는 왜 왔나 싶었고.

아우딘이 건네준 빵을 씹고 연무장으로 나서서, 기법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후.”

땀이 흠뻑 나는 건 금방이었다. 속옷이 젖는 것도 금방이었고.

기절했다가 일어난 것치고는 머리가 무겁지도 않고 어디 아픈 곳도 없었다.

그때 그 순간에는 막 죽을 것만 같았는데.

훈련에 집중하되 생각은 이어졌다.

두 개의 검을 다루다 보니, 동시에 무엇을 하는 게 익숙해졌다.

‘그건 대체 뭐냐.’

기세를 일으키는 법은 이제 자신도 할 수 있다.

노려보는 것만으로 고양이를 꼼짝 못 하게 옭아맨 적도 있다.

하지만 상대에게 보이지도 않는 환상을 보이게 할 순 없었다.

그런데 엔크리드는 그런 환상을 봤다.

칼날, 무수한 칼날의 폭풍.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폭풍의 칼날.

물러서지 않으면 죽게 되리라는 그런 강요.

종용이었고 강요였다.

마치 에이시아의 칼날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상대가 검을 뽑았던가?

아닌 것 같은데.

“후우.”

깊은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금 훈련, 훈련, 훈련이다.

그리 밀린 오전 훈련을 마칠 때쯤이다.

“기사가 될 수 없다고 했는데 충격은 없는 건가?”

프록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와 묻는다.

“충격?”

충격? 무슨 충격?

실제 그런 생각과 함께 되물었다.

“이거야 원.”

프록이 제 두꺼운 손가락으로 코를 긁었다.

“재밌는 놈일세.”

프록이 이어 말한 뒤다.

라그나가 뒤에서 다가왔다.

“뭘 봤습니까?”

엔크리드의 시선이 라그나에게 향하고.

라그나는 걸어와 검을 들었다. 수직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검면이 그의 얼굴 반을 가리며 반만 보였다.

칼날에 뿌옇게 그의 얼굴 반쪽이 비췄다.

아직 저녁이라 하기는 어려운 시간이다. 햇살이 고즈넉하게 주변을 비추는 그런 순간이었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햇볕 사이, 라그나가 있었다.

엔크리드가 휘두르던 검을 멈춰 라그나를 보자, 그의 입이 재차 열렸다.

“기사는 무엇이 다른가?”

이어 뱉은 라그나의 말이 물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옆에서 프록이 듣든 말든, 둘 다 상관하지 않았다.

기사가 보여 준 건 무엇인가.

라그나가 말하는 것, 안 그래도 알고 싶은 참이었다.

훈련을 끝내고 물으려던 걸, 라그나가 먼저 말을 꺼내니.

들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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