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53화 (153/170)

153. 역시나 변하지 않음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형제님?”

라그나와 프록, 벤젠스가 나간 뒤다.

아우딘이 허공을 향해 말을 뱉었다. 내용은 질문이었으나, 어투와 태도는 기도를 올리는 것 같았다.

렘이 코를 파며 답했다.

“염병, 알아서 하겠지.”

답하며 렘은 생각했다. 기사가 꿈이라고 말하던 소대장에게 그건 절대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벤젠스에게야 걱정 따윈 필요 없다고 했고 그렇게 믿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일말의 불안감은 남아 있기 마련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런 말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전혀 모르겠는데.’

한 번도 그런 경우가 없었다.

자신이 서부에 있을 때는, 자신과 재능을 비견할 만한 이가 몇 없었다.

그중에서도 언제나 으뜸.

그러니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잘하겠지.’

걱정해서 뭐 하나.

불안하면 뭐 하나.

걱정과 불안 대신, 렘은 괴력의 심장을 단련시켜 주는 방법에 관해 고민하기로 했다.

‘돌아오면 굴리자.’

새삼 마음먹으며 불안을 흘린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스걱, 스걱.

작센이 나무결을 따라 무심히 단검을 놀렸다. 조각이다. 삐죽하게 솟는 어떤 모양을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손을 놀리며 작센은 아우딘의 질문을 속으로 되새겼다.

‘넌 절대 기사가 될 수 없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 무게가 다를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존재가 재능 판독자라는 프록이라면?

‘충격인가?’

일반적인 기준에서라면 충격이다. 가히 인생이 바뀔 한마디이기도 하다.

만약 자신에게 누군가 지금 원하는 일이, 전력으로 노력해 온 일이, 평생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말한 새끼 목구멍에 칼자국을 내줄 것 같은데.’

그럼 엔크리드라면? 소대장이라면?

‘흔들릴까?’

서걱.

작센은 단검을 놀리며 생각을 이어 갔다.

만약 소대장이 돌아와서 떠나겠다고 하면 어떨까.

‘후련할지도.’

그럼, 자신도 자신의 길을 가면 그만이니.

서걱, 작센은 조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후련하기도 하나, 조금은 아쉬울 터였다.

과연 그는 기사가 될 수 있는가.

그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긴 했다. 그 노력의 결과가 어찌 되는지 일말의 호기심은 있었다.

할짝.

에스터는 앞발을 핥고 털을 고르며 누가 자신에게 내일 당장 주문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걸 상상했다.

‘말한 놈 주둥이에 불을 붙여 줄 것 같은데.’

소싯적의 그녀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다.

마녀라는 소리도 간간이 들으며 살던 나날이다.

걱정? 불안? 그럴 시간에 주문이나 하나 더 읊겠지.

시답잖은 고민이었다.

엔크리드가 만약 모든 걸 두고 떠난다고 해도 에스터 자신에게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그녀가 필요한 건 엔크리드란 남자의 품에서 일어나는 어떤 저주 해제의 작용이지.

그의 검이나, 무력이 아니었다.

그의 꿈 따위는 상관없었다.

다만.

‘아쉽긴 하겠어.’

그리 열정을 불태우며 사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으니,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그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 생각 같은 건 없다.

꿈에 현신해 설득하는 것도, 모은 마력을 소모해서 뭔가를 할 생각도 전혀 없다.

‘그래도.’

오늘 밤에는 꿈에 현신해 줄 생각 정도는 들었다.

어릴 때, 아주 어릴 때 들었던 자장가라도 들려주고 싶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음률이니.

질문을 던진 곰 같은 덩치의 소대원.

아우딘은 꽤 높은 확률로 소대장에게 변화가 일어나리라 생각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까? 주여?’

차라리 아득바득 아무것도 모르는 채 검을 휘두를 때라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성기사가 되려는 이들에게도 같은 시련이 오곤 했고, 아우딘은 그걸 지켜보곤 했었다.

무언가 좀 알아갈 때.

자신의 변화가 체감될 때.

그때, 가장 무서운 시련이 시작된다.

자신을 추월해 간 재능을 보는 둔재의 기분은 어떠한가.

늦깎이 천재라는 말을 들으며 새로이 눈을 뜨는 시점이라면 어떨까.

시기와 질투로 뱀의 마음을 품게 되어 결국 주의 품을 떠난 자들도 있으니.

‘주여, 그대는 필요한 자에게 시련을 준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이것도 필요한 시련이겠지요? 그렇겠지요?’

속으로 읊조리는 기도다.

숙소 내에 미묘한 침묵이 머문다. 드러나는 불안은 없다. 차라리 벤젠스 같은 놈이 와서 뭐라고 떠들어 주면 좋을 듯했다.

그러면 아니라고, 너는 소대장을 모르는 거라고 그렇게 말이라도 할 것이니.

라그나도 불안해서 따라갔으리라.

봄의 햇살이 네모난 창문을 통해 들이밀어지고 시간이 흐르며 햇살이 흐려졌다. 흐려진 햇살 사이, 먼지가 허공에 뜬 게 보였다.

크라이스가 있었다면 한바탕 청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을 터였다.

그리 햇살에 드러난 먼지가 사라진 저녁나절이 될 때쯤, 이제 슬슬 출출해지며 끼니나 때울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소대원과 에스터는 각자 할 일을 하며 침묵을 지켰다.

렘은 제자리에서 도끼를 던졌다가 받았고.

붕, 탁.

침묵 사이 퍼지는 소리다. 도끼가 허공을 도는 소리와 그걸 받아 내는 둔탁한 소음.

아우딘은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작센은 서걱, 카가각 따위의 소음을 흘리며 조각을, 에스터는 제 앞발을 핥았다.

그런 타이밍이다.

훈련이든 뭐든 먹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했다. 소대장이 돌아올 시간이기도 했다.

퉁. 끽.

문이 열리자, 모두의 시선이 앞쪽으로 향했다.

도끼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조각칼이 나무를 깎아 내는 소리가 멈추며 완벽한 침묵에 이르고.

“……뭐야? 나 기다렸어?”

핀이 들어오다 말고 숙소 안에 반만 발을 걸친 채 말했다.

뭔가 분위기가 묘해서 멀뚱히 보고 있자니.

“길 막지 말고 좀 나오지?”

뒤에서 엔크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핀이 안으로 들어서며 비켜서고.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엔크리드에게로 향했다.

* * *

검, 기사, 꿈.

에이시아에게서 보고 겪었던 것.

엔크리드의 눈에 다시금 열망이 타오른다.

라그나에게도 그 열기와 열망이 닿았다.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뜨거움이다.

‘역시나.’

흔들리고 포기할 인간이었다면.

자신에게 의욕 따위를 불어넣을 수 없으리라.

“검에서 빛을 뿜고, 수백 명을 일격에 베는 건 기사라고 해도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기사의 위를 받은 자라면 또는 그에 준하는 깨우침을 얻은 자라면 제 손에 들린 게 무엇이든, 순차적으로 수백을 베고 찔러 죽일 수 있습니다.”

라그나는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유려함에 놀랐다.

기실 그럴 만했다.

기사가 꿈이라 했으니, 언젠가 이런 말을 하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준비한 말이니까.

한때, 아직은 아니라며 기다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준기사가 전장에서 활약한 걸 본 직후였던가.

그때의 말, 이제는 지킬 때였으니.

기다리는 자에게 답 비슷한 걸 줄 때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한때 라그나 자신이 가진 의문이었다. 물론 자신은 금세 그 의문을 해소했다.

주저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정해진 경로, 그저 걸어서 닿기만 하면 될 일.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누군가에게는 피와 땀을 쏟아 내며 나아가야 하는 길이다.

그 격차가, 격차로 인해 타오르는 상대의 열망이.

라그나, 자신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언제나 그러하듯 말이다.

“기사가 된다는 건 만 명 중 하나의 재능에서 천 명을 추리고, 천 명의 재능에서 다시금 백 명을 추립니다. 그중 다시금 열 명을 추려야 보인다고 합니다. 검을 잘 쓰는 사람은 많습니다. 한계를 넘어서는 이들도 꽤 많습니다. 하지만 ‘윌’을 깨닫는 이들은 흔치 않습니다.”

기사단 내부 인원이 고작 수십에 머무는 이유다.

“이야, 그걸 알면 더 좌절하지 않겠나?”

뒤에서 프록이 사족을 붙였다. 언제 앉았는지,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무릎에 팔을 올린 채로 숫제 구경하는 자세다. 라그나는 무시했다. 엔크리드도 무시했다.

엔크리드는 라그나의 말에 집중했다. 경청했고 새겼다.

자신이 갈 길에 새로운 이정표가 새겨지는 순간이니.

“윌이란 곧, 기사가 인간 이상의 힘을 보이게 하는 모든 힘의 총칭. 다시, 윌은 의지, 의지란 곧 윌. 그런 윌을 깨닫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인간의 한계에 닿는 겁니다.”

재능을 모으고 모아, 그중 일부, 소수만이 제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한다.

그 한계를 넘어선 이후, 소수 중 일부가 다시 윌을 깨닫는다.

그 숫자는 만 명 중 하나일 수 있고.

만 명 중 하나도 될 수 없을 때 역시 있었다.

윌, 누군가는 의지력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어떤 힘이라 부르는 그것, 미지의 무언가다. 기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뒤 얻은 힘이라 해도 좋았다.

결론만 말하면 윌, 그게 없다면 기사가 될 수 없다.

라그나의 말이 그것이었다.

“한계에 닿으면?”

욕심과 욕망, 얽히고설킨 것들이 엔크리드의 입을 움직였다.

“그때가 시작입니다. 그 뒤에 윌을 깨닫는 건, 음.”

라그나는 말을 하다 말고 삼켰다. 자신의 방법이 맞을까? 모른다. 그럼 아는 걸 다 말해야 하는 걸까?

라그나는 자신이 아는 게 협소하다고 생각했다.

이거로 충분할까?

의문이 생기자, 입이 멈췄다.

라그나의 부족함은 의외로 프록이 채워 줬다.

“누군가는 홀로 만 번의 칼질을 한 이후에 깨닫기도 하고, 누군가는 명상을 수차례 거듭하다가 깨닫기도 하며, 누군가는 윌을 맞이한 순간 능력을 깨우치기도 한다. 그래서 어땠나? 에이시아의 위압은?”

프록이 설명하고 묻는다. 엔크리드의 시선이 돌아갔다.

툭 튀어나온 개구리 눈알을 향해서다.

“칼날이 들이치는 환상이 보였는데.”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말로 하자니 유치하다.

칼날의 폭풍? 칼날의 해일?

“감은 좋네.”

프록이 말하고 꾸르륵 소리를 냈다. 웃음소리였다.

“뭐라 하든 내 의견은 확고한데, 넌 안 된다니까.”

앉은 채로 턱을 괴며 프록이 말했다.

재능 판독, 프록의 의견이 틀릴 때가 있는가.

있다. 세상 어떤 일이든 완전한 건 없는 법이니.

프록 또한 그렇다.

그들은 완벽하고 완전하지 않다. 신이 아니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이는 건 있는 법이다.

가능성,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여야 가능한 법인데.

엔크리드란 인간에게는 그런 게 안 보였다. 전혀, 조금도, 실상 지금의 실력에 다다른 것도 놀랍다.

‘수없이 죽음의 위기를 넘어왔겠지.’

프록의 날카로운 감이 말한다. 저자의 실력에는 그런 위기의 순간이 최소 수백 번은 있었으리라고.

그리 간신히 살아남아 이룩한 실력이라고.

그런데도.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조금은 독특한 외모와 더불어 빼어나게 잘생긴 남자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꾸륵.

프록의 볼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감탄이었다. 프록의 감정 변화는 볼을 통해 나타나는 법이니.

물론 인간이 볼 때야 그게 분노인지, 기쁨인지, 감탄인지, 슬픔인지 알 길이 없지만.

엔크리드는 새삼 옛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안 된다고 하던 모든 이들.

언제나 그랬다.

자신이 걷고 밟아 온 길이 틀렸다고 한다. 세상 모두가 아니라 한다.

그래, 언제나 그랬다.

그러니, 이번에도 같았다.

“그렇습니까.”

무료한 대답, 상대의 지위를 존중한 존대.

딱 거기까지다.

저 프록이 목적이 무엇이든, 엔크리드는 제 길을 간다. 그게 자신이 할 일이요, 잊지 못한 꿈을 향한 여정이다.

그는 꿈을 찾아 방랑하는 행자.

방랑의 길에서 이정표를 찾아 걷는 사람이니.

“그럼, 다음을 물어도 되나? 한계에 다다르는 법 같은 거?”

엔크리드는 라그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라그나는 역시나 변하지 않음에 감탄했다.

알면서도 감탄하고, 알기에 감탄한다.

“가진 모든 기술을 갈고닦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닿는 건 자신만이 알 수 있으니, 그리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게 되고 그 한계에 도달한 순간…….”

라그나는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잘랐다.

“아, 알겠다.”

하던 대로 하란 소리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알아들었다. 그럴듯하게 설명하더니, 마지막에는 또 어려운 말로 점철했다.

하던 대로 하란 말을 뭐 그리 어렵게 하나.

“이봐, 여기서는 뭐 무릎 꿇으며 내 재능이 고작? 이런 한탄을 뱉을 때 아니냐?”

프록이 묻는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하는 말이다.

“그럴 시간이 없어서.”

엔크리드는 담백하게 답하고 검을 휘둘렀다.

자신이 가진 것을 되돌아보고 복기하고 나아가는 것.

언제나 하던 일.

하던 대로 했다.

‘저건 확실히 미친 새끼인데?’

프록의 볼이 더 부풀었다. 꾸르륵! 소리가 커졌다. 이번에는 강렬한 호기심의 표현이었다.

라그나는 그런 엔크리드를 구경하고.

프록은 자신이 이곳에 남은 이유가 된 남자를 바라봤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남자, 그의 목적은 라그나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엔크리드였다.

이건 재능 판독이 아닌, 오롯이 경험에 의한 감.

‘저런 타입이 사고를 치긴 하지.’

기사가 될 수는 없다. 그럼, 뭐가 될까? 그게 프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조금 더 지켜봐도.’

그렇게 프록은 자신의 잔류를 정했고.

엔크리드는 검을 휘둘렀다.

언제나처럼, 다시금, 반복해서.

프록이 보든, 라그나가 보든, 기본기를 단련한다. 이정표가 다시 보였다.

빛바랜 꿈이 색을 입기 시작했으니.

모두가 좌절과 절망을 걱정할 때.

엔크리드만은 희망을 보았다.

윌이라고 한다.

의지력이라 부르기도 하나, 그건 어떤 신비라고 했다.

그걸 익히면 되는 거였다.

한계에 닿고 한계를 넘으라 했다.

그게 대수일까.

이제껏 수차례, 쭉 해 오던 일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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