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배우고 익히고 가르치며 깨달으니.
새가 울고.
바람이 분다.
여름의 하늘은 화려한 태양과 함께하니, 금세 열기가 피어오르는 법이었다.
엔크리드는 몸 밖에서도 안에서도 열기가 끓어올랐다.
지난 석 달, 겉으로는 화평을, 뒤로는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결국, 아즈펜은 한발 물러섰다.
전쟁은 없다. 전투도 없다.
그럼 병영에 남은 이들은 무엇을 하겠나.
훈련과 휴식이 전부였다.
병사 용병제를 통해 의뢰를 나가는 이들도 많았지만.
엔크리드는 크로나가 부족할 일이 없었다.
검 두 자루는 멀쩡했고.
크라이스가 길드를 통해 벌어온 크로나를 꼬박꼬박 챙겨서 건네줬으니.
그래서 대부분 시간을 훈련에 썼다.
그럼에도 성장은 더뎠다. 적어도 다른 이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정체라는 말이 곧잘 나왔다.
정체, 멈춤을 말한다.
다들 엔크리드가 그리 정체된 채라 생각했으나.
정작 본인은 달리 생각했다.
왜 아니겠나.
‘윌.’
이제까지 엔크리드의 꿈은 무엇이었나.
잡을 수 없는 망령이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니, 닿을 수 없는 하늘이었다.
그 하늘에 닿는 계단이 보였다. 들렸고 생겼다.
이정표라 부르는 것들이다.
엔크리드에게는 윌이 그런 거였다. 계단이었고, 이정표였다.
한계를 깨란 말도 마찬가지.
정체? 아니다.
이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더없이 다르기에, 정체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정체라 보여도.
엔크리드 자신은 성장의 성과를 볼 수 있었다.
이리될 수 있었던 이유, 무엇이겠나.
이제껏 몸에 익히고 때려 박은 것들 덕분이었다.
야수의 심장을 시작으로 칼날의 감각, 한 점의 집중, 고립의 기법.
‘검술에 기초가 있다면.’
재능을 만드는 일에도 기초라는 걸 만들 수 있을까?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는 중 아닌가?
한 점의 집중을 통해, 때로는 야수의 심장을 이용해, 또 때로는 감각의 날을 세움으로.
그동안의 경험을 되새기고 또 되새긴다.
석 달 내내 엔크리드가 한 일이 그거였다.
거기에 자신을 찾는 병사들이 있었다.
배우면서 실력이 는다는 말, 실감했다.
“한번 겨뤄 봅시다.”
1중대, 변방 수비대.
두 부대는 보더 가드 상비군 중에서도 나름 실력자가 모인 집단이었다.
처음에는 일반 병사도 곧잘 왔으나.
이제는 이쪽 부대가 아니면 찾는 사람도 없었다.
대련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좋지.”
엔크리드는 덤덤히 그들을 반겼다.
곧 두 명의 남자가 땀을 뿜어내며 서로의 실력을 나눴다.
엔크리드는 번번이 이겼다.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여유가 생겨 잡기를 안 쓴다는 거다.
발렌 식 용병검을 제하고 기본기에 집중하며 싸운다. 그렇게 해도 충분했다.
렘을 비롯한 소대원과 싸울 때는 가진 모든 걸 쓰지만, 이들과는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배우면서 익힌바.
‘과했다.’
가끔 그런 병사가 보였다.
이런저런 걸 동시에 익히고 배우느라 기본이 흐트러지는 이들.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이게.”
문제점을 지적하면 이런 말이 돌아오곤 했다.
자신도 했던 생각이었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전투 방식.
지금도 많이 써먹고 있고.
하지만 그건 전투 방식이지, 훈련 방식이 아니다.
오늘의 반복, 그걸 위해 최대한 많은 걸 몸에 익히고 배우려 했었다.
그래서 쉬이 이뤄지는 게 있던가?
지금도 회피의 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괴력의 심장에는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한 점의 집중조차 목숨이 걸리지 않으면 쉬이 발동하지 않는 판에.
그동안 수없이 고민했고 궁리하며 얻은 깨달음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나아간다. 또 나아간다.
그렇게 마음먹고 끝없이 반복을 이어 갔다. 가끔 뱃사공이 꿈에 나타나 ‘너란 놈은 대체 뭘까’ 따위의 말을 전하기도 했으나.
석 달 내내 훈련뿐이었다. 엔크리드의 삶이 그러하듯,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반복하고 또 반복.
한 주를 오늘처럼, 한 달을 오늘처럼 똑같이 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새로이 깨달은 것.
‘리듬.’
검을 휘두를 때 필요한 것들이다.
천재, 그러니까 라그나 같은 놈들에게는 스치듯 지나치는 것들이, 엔크리드에게는 한 발, 한 발 곱씹어 올라가는 발판이었다.
아침에 깨달으면 그날 내내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저녁에 깨달으면 그날 저녁 내내 잠자리까지도 즐거웠다.
캬-아.
에스터가 그런 엔크리드를 응원하듯 졸졸 따라다녔다.
에스터는 밤에도 꼭 붙어 자더니, 이제는 낮에도 숫제 떨어지질 않았다.
“넌 짐승에게도 인기가 있구나.”
프록이 이리 말할 정도로.
그리 말하는 프록을 향해 에스터가 손톱을 한 번 세웠으나, 둘이 다투는 일은 없었다.
이틀에 한 번은 요정 중대장이 찾아왔다.
“가을쯤이 좋을까? 약혼식은?”
그녀는 농담을 건네거나.
“대련이나 하지?”
검을 겨루고 돌아갔다.
요정의 검은 날카롭고 가벼우니, 그걸 통해 배우는 것도 있었다.
가르치며 배우고, 대련을 통해 배운다.
“자, 막아 보슈.”
렘의 도끼질은 여전히 험악했고 거칠었으나, 전과 달라진 것도 있었다.
그들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걸 띄우거나.
“이크!”
이렇게 놀라게 할 때도 있다는 것.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검과 엇박자로 찔러 내는 왼손의 검이다.
베고 찌르는 타이밍이 묘하게 달라지니, 박자에 불협화음이 낀 듯했다.
두 개의 손이 동시에 다른 박자를 탄다.
발렌 식 용병검, 엇갈린 칼날이다.
환검, 그것도 비열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발렌 식 용병검 중에서 드물게 진짜 기술 같은 거였다.
오른손의 검과 왼손의 검이 서로 따로 노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니.
“지금 건 꽤 괜찮았수다.”
렘이 말했다.
인정, 그것도 기쁨이다.
“무투술을 소홀히 하시면 주께서 진노하십니다.”
아니, 발라프 식 무투술을 배우는 거로 무슨 신이 진노까지 하겠나.
되지도 않는 소리지만, 엔크리드는 별말 없이 아우딘과 어울렸다.
발라프 식 무투는 타격기와 관절기가 섞인 기예.
실제 발렌 식 용병검 개싸움에 관절기를 섞어 미치 휴리어를 죽이지 않았나.
익히고 배운다.
배움의 희열이다.
인정받고 배우고, 역으로 가르치고.
그리 성장한다.
성장의 희열이 그를 채찍질하니.
검을 휘두르는 일이 즐거울 수밖에.
‘하나씩, 반걸음씩, 기어서라도.’
초심이다. 처음에 마음먹은 그대로.
엔크리드에게는 참 쉬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신기한 일이었다.
특히나 지켜보는 프록에게는 더더욱.
물론 엔크리드는 주변 시선보다는 오늘의 자신을 관조하기 바빴다.
사이사이 동체 시력과 더불어 감각 단련도 빼먹지 않았으니, 누구보다 바삐 살고 있기도 했고.
처음 엔크리드를 따라 훈련을 거듭하던 병사 중 일부만 여전히 훈련에 매진했다.
전투가 끝나고 풀어진 군기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 인간의 의지가 그런 것인지.
주변에서 노는 병사가 늘자, 훈련에 매진하는 이들이 줄었다.
그러면서도 남은 이들은 있다.
눈에 띄는 이들도 있고.
이들을 제하면 가장 좋은 대련 상대는 변방 수비대였다.
가끔은 아예 찾아가서 검을 겨루자고도 했다.
“언제나 환영이다.”
수비대장은 언제나 엔크리드를 반겼다.
그와도 검을 겨루기도 했고 다른 이들과도 어울렸으나, 정작 아는 얼굴인 토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너랑은 이제 안 싸워.”
“왜?”
“야, 질 싸움은 하는 게 아니라고.”
병사 등급제.
특급 병사를 논하는 이들의 말이다.
그중 일부는 다시 호승심을 불태웠지만, 엔크리드는 그런 이들보다 한 발은 더 나아갔다.
석 달, 시간은 언제나 쏘아진 화살이었으나.
엔크리드에게는 하루였다. 오늘이었다.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리듬은 하나가 아니야. 이미 아는 거 아니었나?”
보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여기에 머무는 게 지루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프록, 루아가르네도 엔크리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막 말하려고 했는데.”
지켜보던 라그나가 중얼거렸으나, 딱 그때 필요한 말이긴 했다.
리듬, 박자.
그렇지. 하나가 될 필요는 없다.
이미 발렌 식 용병검을 통해 배우지 않았던가.
엇갈린 칼날은 엇박자를 이용한 이중 공격이다.
한 호흡에 길게 늘어뜨린 박자도 있고.
짧고 단단한 박자도 있다.
배에 힘을 준 채로 버텨 내는 박자도 있다.
그렇게 배워 갔다.
“정박자에서 박자를 틀고, 그걸 스텝 한 번에, 아니, 지금 거기서 왼발은 반 발자국 더 나아가는 거다. 그럼 거기서 중검식 회전 베기가 가능하다.”
루아가르네는 꽤 적극적이었다.
이 프록은 왜 자신의 곁에 머무는가.
왜 숙소에서 먹고 자며 이곳에 있는 건가.
왜 자신을 가르치는가.
모든 의문은 뒤로 넘겼다. 아니, 잊기로 했다.
가르치면 배운다. 언제나 배움을 갈망하기에,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그럼, 여기서 오른발을 뒤로 빼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검을 회수하기 어렵습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이렇게.”
라그나도 나섰다.
뭐랄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다들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변한 것도 같고.
“아니, 이렇게 해도 되는 거요.”
렘도 나섰다.
발끝으로 균형을 잡고 몸을 틀어 내는 스텝이다.
기본기와 더불어 갖가지 상황에 맞춰 휘두르는 검, 움직이는 발, 반응하는 눈.
“감각을 넓히십시오. 이미 배우지 않았습니까.”
작센의 조언도 끼어들었다.
그렇지, 이미 배웠다.
라이칸스로프를 상대하며 감각의 영역을 확장해 보지 않았던가.
앞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를 본다. 자신을 중심으로 감각을 퍼트리는 거다.
“소대장 형제님, 모든 움직임에는 중심이란 게 있는 법이지요. 그건 무투나 검술이나 같은 겁니다. 중심선을 잡고 그 선을 상대에게 잇는 것. 그게 중요하지요.”
아우딘의 가르침도 덧붙었다.
그러니까 모두 전보다 더 열성적이었고.
엔크리드에겐 그 모든 게 희열로 다가왔다.
“장점은 있군.”
모든 걸 지켜본 프록의 결론이다.
“무슨 장점?”
렘이 곁에 서서 묻는다. 여전히 연무장이다. 여전히 뜨거운 햇살 밑이다. 여전히 땀이 흐르고 쉰내가 나는 오늘이었다.
“한 번 배운 건 안 놔.”
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둔재였다. 익히고 배우는 게 늦었다.
늦깎이 천재란 말이 돌기도 하지만.
‘그건 모르겠고.’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배운 걸 잊지 않았다. 끝없이 고민했다. 어떻게든 배우길 바랐다.
배운 걸 어찌 적용할까.
어떻게 구현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쓰는가.
끝없이 궁리한다. 그게 보였다.
그 또한 장점이지.
렘은 생각했고.
프록은 이쯤이 되어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되돌아보는 중이었다.
‘얼굴에 홀린 건지.’
아니면 기질에 홀린 건지.
재능이 보이지도 않는 자에게 열성적으로 가르치고 그가 나아갈 길을 열어 주다니.
참 비효율적인 일 아닌가.
뭐, 그렇다고 신경 쓰진 않는다. 프록에 욕구와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니.
루아가르네는 자신 또한 그런 것에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안다.
물론 욕구보다 앞선 것도 있었다. 정확히는 너무 욕구에만 휘둘리지 않고 살기 위해 언약을 맺은 거다. 언약은 약속, 맹세는 지켜야 하는 것, 프록에게는 그렇다.
‘돌아가긴 돌아가야지.’
프록은 생각하면서도 엔크리드를 가르쳤다.
석 달 내내 그리 배우고 익힌 것치고는 더디다. 프록이 보기엔 그랬다.
프록의 시선과 소대원의 가르침 사이, 엔크리드는 박자를 되새겼고 이런저런 기술을 다시금 몸에 붙였다.
완숙, 그러니 한계에 한 걸음 다가간 그런 기분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한계에 다가가란 말이 뭔지 감도 안 잡히는 판이니.
그러던 중이었다.
“호출이다.”
요정 중대장이 찾아와 불렀다.
“네.”
엔크리드는 땀을 흠뻑 흘린 채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요정 중대장의 이마에도 땀이 흘렀다. 그만큼 더운 날이었다. 습도도 높았다.
비라도 쏟아져야 할 듯했다.
하루 이틀 내로 비가 오긴 할 터였다. 경험으로 아는 일이었다.
“왔나?”
중대장이 호출해서 간 곳, 대대장의 집무실이었다.
“의뢰가 하나 들어왔는데, 어떤가?”
병사 용병제는 원하는 병사가 나서서 의뢰를 수급하는 구조지만, 가끔은 위에서 지시할 때도 있었다.
드물지만, 일반적인 병사 몇으로 감당이 안 되면 소대나 중대급 병력이 나가기도 하니까.
크라이스의 말을 들어 보면 최근에 왕국 내부에 마물이나 마수 무리가 난리를 치고 있다고 했다.
여름이 다가오면 본래 그런 경향이 있는데, 올해는 유독 심하다는 말도 들었다.
‘여름의 열기는 마물과 마수를 번성하게 한다.’
대륙에서 내려오는 유명한 격언이다. 이번 일도 그런 종류였다.
“근처 개척 마을의 임시 지휘권을 줄 테니, 그쪽 일을 처리해 주면 좋겠는데.”
대대장의 말이다.
봄의 전장이 일찍 끝났기에 올여름은 드물게도 전장이 아니라 도시에서 보내는 중이었다.
그동안 엔크리드는 연무장과 숙소에만 머물렀다.
시장에도 한 번을 나가질 않았다.
검을 잡고 나아가는 길, 기쁨에 취한 탓이었다.
“나갈 생각이 없다면 놔두고, 시간이 필요하면 고민해 보고 말해도 된다.”
대대장은 뭔가 피로한 얼굴이었다. 처리할 일이 많나? 아니면 잠을 설쳤나, 일이 많은 쪽인 듯했다.
주변에 서류가 가득한 걸 보면.
“네.”
엔크리드는 군례를 보이고 돌아섰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참이다. 요정 중대장이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물으면 또 실없는 얘기나 나오려나.
“새삼 내가 남자를 잘 골랐나 싶어서.”
당연히도 요정식 농담이다.
“그렇습니까?”
시답잖은 농담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니, 요즘 특히나 바쁜 크라이스가 안에 와 있었다.
명령지를 대강 추스르면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
“그거, 가죠, 갑시다! 가야지! 명령이니까!”
크라이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럴 때는 그러니까 크로나가 걸린 일이란 소리였다.
크라이스의 반응이 그랬다.
명령지에 마을 위치와 콜로니 규모가 대강 적혀 있었다. 마수 무리의 준동이다.
그 마수 무리 말고 위치를 본 크라이스의 눈이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