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57화 (157/170)

157. 의뢰 곁에 보물 하나

“마물이라니, 기사가 꿈이라고 하셨었죠? 그럼 가야죠. 당연한 거지 이건. 마물을 베는 게 바로 기사 아닙니까?”

크라이스는 마물을 베는 거야말로 기사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에게는 달리 들렸지만.

숫제 기사를 평가 절하하는 말 아닌가.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일인 병기란 존재를 고작 마물 사냥꾼으로 취급하다니.

“거기에 양민이 꾸린 마을이라니, 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의감이 끓어오르는군요.”

걱정이 담겨야 할 어조에 탐욕이 가득한 것 같은데?

숫제 눈깔이 금화로 변한 것 같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며 크라이스를 봤다. 크라이스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롯이 엔크리드에게 집중했다.

결정권자가 중요하지, 타인의 의견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뭐냐.”

엔크리드가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왕눈이 새끼. 자꾸 어딜 가자고 하다니.”

물끄러미 구경하던 렘이 침상에 반쯤 누운 채로 말했다.

눈치는 귀신 같네.

크라이스는 생각하고 비장의 무기인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장을 바라봤다.

응, 내 눈 크지 않습니까?

내 눈을 보는 겁니다.

자, 당신은 이 임무를 맡고 싶어집니다.

반쯤은 최면 효과가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맑고 큰 눈망울에, 엔크리드는 입술을 우물거리다 말했다.

“침을 뱉어 줄까.”

‘어디서 저따위 눈을.’

크라이스는 엔크리드가 눈으로 하는 말을 읽었다.

‘아, 이건 아니네, 안 먹히네.’

그럼, 다음 방법은? 크라이스는 평소처럼 머리를 굴리다가 곧 포기했다.

그는 영리했다. 머리가 잘 돌아갔고 눈치가 빨랐다.

크라이스 자신은 그게 어릴 때 하도 고생한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 고생 덕이었다.

‘대장한테 이런 수법은 안 먹힌다.’

감이 왔다. 이렇게는 안 된다.

그럼, 뭐가 남았나.

정면 돌파다.

언제나 곧고 직설적으로.

대장이 자신과 나머지를 항상 그리 대했으니, 자신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였다.

비상한 눈치였다. 크라이스는 놀랄 만큼 빠르게 태세를 바꿨다.

그야말로 떨어지는 유성과도 같았다. 그만큼 빨랐다.

“대략 백여 년 전쯤에 돌프라는, 대륙에서 손꼽는 상인이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과거다. 흥미를 끄는 게 우선이었다.

부유한 남자의 괴이한 취미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괴벽이라고 해야 할까.

돌프라는 상인의 취미 중 하나는 재산 일부를 숨겨 두고 보물 지도를 만드는 거였다.

역사서를 뒤적거리다 보면 나오는 야사(野史)다.

“그런데 이게 그냥 야사로 끝났다? 아니죠. 그러면 제가 얘기를 왜 꺼내겠습니까?”

중간중간, 크라이스의 어조에 힘이 실렸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꾼이라고 해야 할까.

말에서 열의가 느껴졌다.

돌프는 한때 이름 날린 상단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기 직전에 모든 재산을 빼돌려 전부 숨겨 버린 거다.

당연히 상속받아야 할 이들은 꼭지가 돌아 버렸을 거고.

여섯이나 되는 아내들도 다 같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그걸 왜!”

돌프는 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묵묵히 그들의 비난을 견뎠다고 했다.

그저 말하길.

“내 재산을 원하면 지도를 찾아.”

라며 말했다고 야사는 전했다.

편찬자가 돌프라는 상인이 죽기 전 그에게 물었다는 게 야사의 마지막 기록이었는데.

“왜 지도 같은 걸 만든 겁니까?”

그에 관한 돌프의 답이 걸작이었다.

“재밌잖아.”

암호로 점철된 지도만 스무 개가 넘었다.

그중 첫 번째 지도를 파헤친 자는 보물을 얻었다.

돌프의 마부였던 남자였다.

거부가 된 남자는 이후 상단을 조직해, 쫄딱 말아먹었다고 했다.

두 번째 지도를 해독한 건 첫째 부인이었다.

그녀는 욕심이 많았다. 제 아들에게도 그 사실을 숨기고 홀로 남편이 만든 곳을 찾았고, 함정에 빠져 죽었다.

그랬다. 마부는 미끼였다. 그는 돌프가 준비한 마지막 안배였다.

야사에서 말한 것과 달리, 돌프는 제 재산이 누군가에게 넘어가는 게 싫었다. 특히나 제 가족에게 뭔가 주는 게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사실 그는 씨 없는 열매였습니다. 꿀을 빨지 못하는 꿀벌이었지요.”

크라이스의 말에 어느새 다들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 풀어내는 재주가 어지간한 음유시인 뺨을 후릴 판이었다.

그렇다. 돌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그는 아내가 여섯이었고 자식이 스물이 넘었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계획했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곳곳에 숨겨 둔 거다.

그중 몇 개는 이미 파헤쳐졌다.

대륙 제일의 트레져헌터라는 키르곤이라는 친구에 의해서다.

트레져헌터 키르곤이 이미 증명했으니.

“보물은 실재한다.”

역사의 비사다.

크라이스는 나름 이쪽에 아는 게 많았다.

왜 아니겠나, 크로나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 지도를 찾아서 파헤치면 진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보물 사냥꾼 키르곤이 그걸 증명했다.

그런데, 이거 참.

세상에 이런 운이 있나.

행운의 여신이 잠든 사이에 자기 뺨에 키스를 남기고 간 게 분명했다.

이전 전장에서 적의 진지를 훑었을 때, 크라이스는 용케 물건 몇 개를 챙겼다.

그때 나무 밑에서 꺼낸 물건 중 하나였다.

“음.”

사타구니 사이에 보관이라도 한 건지, 구린내가 풀풀 풍기는 지도였다.

집자마자 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였으나, 크라이스는 직감적으로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았기에 챙겼다.

보물 지도라는 건 흔히 돌아다니는 물건 중 하나였다.

가짜도 워낙 많았다.

길핀 길드에 이런 걸 알아보는 작자가 있었다.

좋은 말로 하면 감정사.

뒷골목 은어로 하자면 장물아비.

보물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파는 법이니.

“이거 진짜 같은데요.”

그의 한마디로 충분했다. 무려 백 년 전이다. 언어가 달랐기에 감정사란 놈은 알아보지 못한 말.

크라이스도 고문을 알아본 건 아니다. 해독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는데 의외로 해답은 프록에게서 나왔다.

루아가르네가 자신을 칭하길.

“난 학자야.”

프록이?

내심과 달리 크라이스는 불손한 눈빛을 보내진 않았다. 대신 글자 몇 개를 무작위로 해독해 달라 부탁했고, 그걸 토대로 조합해 답을 얻었다.

돌프의 여섯 번째 지도.

“보물이 있을 겁니다. 어마어마한.”

숙소 중앙에서 열변을 토한 크라이스다. 그의 얼굴은 붉었다. 산소가 부족함에도 말을 쉬지 않은 탓이다.

“하도 오래돼서 제대로 작동하는 함정도 없을 거니, 이건 그러니까 길에 떨어진 보석을 줍는 격이죠. 근데 겉에 누가 흙을 묻혀 놨네? 그거만 탁탁 털어서 가져가면 그만인 겁니다.”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으나, 엔크리드는 크라이스의 열정에 감화되지 않았다.

보물 지도에 명시된 곳에 가는 것도 확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차피 나가는 길.’

마물이든, 마수든, 전쟁이든.

손이 근질거렸다.

배운 게 먹히는지, 자신이 가는 길이 맞는지, 주변 모두와의 훈련과 대련, 가르침으로 얻어 낸 것들이 이정표로 향하는 발걸음이었는지.

제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의뢰는 접수.”

엔크리드의 말에 크라이스가 몹시 기뻐했다.

“거기 들르는 건 미정이다.”

크라이스가 이어진 말에 몹시 실망한 눈치였다.

찢어질 듯 눈을 뜨고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라고 중얼거렸다.

그걸 본 렘이 옆에서 낄낄 웃었다.

엔크리드는 몰랐지만, 지도가 진짜라는 걸 안 순간부터 크라이스는 이걸 꺼내 먹으려고 궁리했다.

혼자서 보물을 찾으러 간다? 그건 마물에게 제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 삼아 식사를 즐기란 소리와 다름없었다.

그럼, 길드 애들이랑?

그리되면 자신과 길드원의 살과 피로 열리는 만찬이 되겠지.

실력이 뛰어나며 마물과 마수, 도적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을 무리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용병을 고용해? 그럼, 최소 분대급 이상을 고용해야 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터였다.

그렇게 처음 노린 건 렘이었다.

“의뢰 하나 하시죠.”

“암살 의뢰만 받아 주마. 대상은 세 명 한정이다. 음흉한 들고양이, 입 짧은 게으름뱅이, 신에 심취한 덩어리.”

렘은 들을 생각도 없었다.

라그나와 작센이라고 다를까.

아우딘에게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장에도 자주 나서지도 않는 몸인데, 보물찾기는 무슨.

“눈 큰 형제님이 신에게 전부 공물로 바치겠다고 맹세하시겠다면.”

이딴 말이나 하겠지.

소대장에게 부탁하자니, 근 석 달을 무슨 미친놈처럼 검을 휘두르지 않았나.

가까이에서 말 붙이기도 어려웠다.

“네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

괜히 에스터에게 말하자.

“캬아!”

에스터가 불쾌함을 전신으로 표시했다. 더 다가가면 또 발톱으로 할퀼 태세였다.

에스터를 처음 본 날, 성별을 알아내려고 슬쩍 손을 댄 이후부터 에스터는 자신을 몹시 싫어했다. 아니 혐오했다.

영물이라지만, 표범 주제에 어떻게 저런 감정 표현을 하는 건지, 그 또한 신기한 일 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반쯤 포기해야 하나 싶을 때다.

아무리 크로나가 좋아도 목숨을 걸진 않는다. 크라이스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의 꿈이 살롱이나 차려서 평생 크로나 걱정 없이 사는 거 아니겠나.

위험 없는 도시의 한복판, 적당히 밤을 즐기면서 사는 거.

물론 살롱도 위험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야 살면서 즐기기 딱 좋은 수준의 스릴 아닌가.

어쨌든 반쯤 포기한 일이었는데, 소대장이 간다면?

최근 엔크리드의 실력은 어떤가.

“틀렸어, 나도 못 이긴다.”

이건 공식적인 변방 수비대장의 말이다.

“나에게 다섯의 명사수와 마법사 둘을 준다면 해 볼 만하지.”

이건 토레스 소대장의 말.

다섯의 명사수와 마법사 둘이라면 크라이스라도 엔크리드를 잡아 볼 법했다.

자신이 없어도 나머지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슬슬 재밌다.”

렘도 인정한 바가 있고.

“탐난다.”

요정 중대장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이 모든 게 무엇을 말하나.

어지간한 구울 무리로는 대장의 옷깃 하나 건들지 못한다는 소리 아닐까?

사실 우리 소대장은 진짜 천재가 아닐까?

의심은 없다. 이미 눈앞에서 프록과 싸우는 것도 봤다.

그러니.

“아, 왜요. 갑시다. 좀 가죠.”

크라이스는 졸랐고.

엔크리드는 무시했다.

“나도 같이 가지.”

그 사이 프록이 합류했고.

“좋습니다. 좋아요!”

크라이스는 반색했다.

“나도 같이 갈까?”

핀도 손을 들었다. 그녀는 레인져다. 그것도 무척 뛰어난 레인져.

걸어 다니는 맵 메이커라는 패스파인더 수준은 아니지만, 길도 잘 찾고 싸움도 잘한다.

“조오옿습니다!”

크라이스가 재차 나섰다.

엔크리드는 그걸 보며 피식 웃어 버렸다.

둘을 말릴 필요는 없었다.

의뢰가 현재 자신에게 돌아올 정도에 대대장이 직접 집고 말한 거라면.

‘위험한 일.’

그런 일이기에 가슴이 뛰고 승낙한 거긴 하지만.

위험은 줄이는 게 답이니, 인원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콜로니를 이룬 마물, 개척 마을의 보호, 임시 지휘권과 일행으로는 프록이 있다.

여기에 렘이나 다른 대원 하나를 더 데려가면 어떨까.

“같이 갈래?”

엔크리드는 생각 없이, 아니 솔직히 어느 정도는 같이 가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아, 나 바쁜 거 모르슈?”

어느새 침대에 들어가 모포로 몸을 감싼 채로 빈둥거리던 렘의 답에, 엔크리드는 새삼 참 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기는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기 바쁜 놈이.

그러면 라그나라도 데려갈까 싶어 물어보니.

“안 내킵니다.”

안 내켜? 게으름을 피우고 싶나? 요새 게으름이 부족했나?

라그나도 침상에 붙어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아예 고개도 안 돌리고 하는 답이었다.

“주께서 가르침을 주지 않으시는군요.”

아우딘도 거절.

작센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근무는 제대로 서고 있다고 들었는데, 숙소에 들를 여유가 없는 듯했다.

결국, 아무도 못 데려간다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그러려니 했다. 실상, 엄청난 위협이 있으면 부대를 보내겠지.

자신을 콕 집어서 보내겠나, 그런 생각을 했으니.

개척 마을 근처에 콜로니를 이룬 마물 무리 확인, 기회가 되면 타도.

명령서에 마을 병력의 지휘권을 갖게 된다고 적혀 있으니.

‘마을 자경단이 있으면.’

숫자가 그리 부족하지도 않겠지.

그럼 나갈 준비만 철저하게 하면 될 일이었다.

이 세상은 여행객에게 만만하지 않으니, 어지간한 준비로는 나갈 엄두도 못 내는 게 맞았다.

보통이라면 넷이 훌쩍 떠나는 것도 고개를 갸웃할 일이나.

레인져와 프록이 끼어 있는 판이고.

하물며 나우릴리아의 병사 등급제로 보자면 특급 병사 수준의 검사가 지휘관이다.

어지간한 위협에 당할 무리가 아니었다.

도적과 마물이 판치는 세상이라지만, 이 정도면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소대원 중 누구도 따라오지 않는 것도 상관없는 거였다.

“출발은 보름 후다.”

엔크리드는 말했고, 크라이스는 여전히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진짜 안 됩니까?”

“봐서.”

엔크리드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맡은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오가는 길에 상황을 봐야 할 터였다.

크라이스로서는 간절할 따름이다.

마침 자신이 찾은 보물 동굴이 그쪽이었다. 개척 마을에서 고작 하루 걸리는 거리였다.

“좋습니다. 좋아요.”

크라이스는 더 졸라봤자 의미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일행은 준비를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여행길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행상이라 불리는 이들의 최소 조건이 무력인 세상이다.

도시에서 도시를 오가는 행상도 최소 열은 뭉쳐서 전력을 유지하고 다니는 판이다.

이러니 용병이나 나우릴리아에서 행하는 병사 용병제가 환호받는 거고.

그런 세상에 고작 넷이 나선다.

걱정은 없으나, 그렇다고 준비를 허술히 할 필요도 없었다.

엔크리드는 오랜만에 마을로 나서기로 했다.

시장에 나가서 구할 물건이 몇 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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