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63화 (163/170)

163. 벼랑 끝에 서게 됨에도

첫날, 훈련에 몰두하고 있으니 이장이 저녁을 대접했다.

오두막까지 이런저런 먹을 걸 가져다준 거다.

“드세요.”

가져다준 사람은 붉은 머리칼의 여자였다. 나이는 엔크리다보다 두어 살 어릴까?

“나쁜 마음으로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녀는 이장을 옹호했다.

“괜찮습니다.”

엔크리드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답하자, 여자의 안색이 밝아졌다.

“전 샤이예요.”

“네.”

간단한 인사 이후, 샤이가 얼굴을 붉히며 떠나자, 뒤에서 크라이스가 중얼거렸다.

“역시 마성, 저랑 같이 살롱이나 하자니까요.”

만약 네 살롱이 기사단의 이름을 갖게 된다면, 가령 스왈로우 나이트라든지, 호스트 나이트 따위가 된다면 그때 고민해 볼 문제라고 말해 줄까?

엔크리드는 말을 아꼈다.

마성이란 두 글자는 반응하지 않는 게 답이니.

풍족한 식탁은 아니나, 그래도 흰 빵에 멀건 스튜, 구운 콩과 옥수수까지. 끼니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서 고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일 테니.

프록의 식사 또한 따로 바랄 수는 없어서 루아가르네는 생채소를 먹었다.

아그작.

“벌레 먹은 채소는 이게 좋지, 별미가 섞여 있거든.”

구멍 난 민들레 잎을 씹으며 하는 말이다.

채소 사이에 벌레가 있으면 그걸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엔크리드는 비위가 상하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로 뭘.

핀과 크라이스도 마찬가지다.

하나는 레인져 출신, 그녀는 땅에서 나는 것, 움직이는 거라면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찰병이고.

크라이스 또한 고생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했다.

벌레 좀 먹으면 어때서.

엔크리드라고 다를까.

그리 저녁을 해치우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다시금 훈련, 또다시 훈련.

“정말 질리지도 않나 봐요.”

크라이스의 감상을 들으며 또 훈련.

욕실이 따로 없어서 우물에서 몸을 씻어야 했다. 적당히 기온이 올라 찬물로 씻어 내니 퍽 개운했다.

씻은 뒤에는 여기까지 오며 상한 장비를 점검했다.

검만 세차게 휘둘렀기에 칼날만 다듬으면 될 터였다.

미리 준비한 양의 지방 기름으로 칼날을 닦고 그걸 다시 가죽으로 문댄 뒤, 깨끗한 천으로 마무리.

비릿한 냄새가 남긴 하지만.

칼날이 상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가 빠진 건 없는지 확인했는데, 멀쩡했다.

‘훌륭.’

엔크리드는 새삼 보더 가드 대장간에 있던 대장장이의 실력에 감탄했다.

발레리산 강철과 누아르산 연철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이런 검을 만들 수는 없을 테니.

정작 두 개의 비싼 철은 많이 들어가지도 않았겠지만.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 다음 날이다.

언제나 그렇듯 새벽녘에 일어나 고립의 기법과 단련을 거듭했을 때다.

낮잠을 너무 자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핀이 주변 정찰을 나갔다. 아직 달이 보였는데, 그냥 주변을 돌아보기만 한다고 했던가.

레인져의 습성일 것이다. 주변 지형을 머릿속에 집어넣어 두는 건.

“도이치 풀만이오.”

그린 훈련을 거듭하는데, 동이 트자마자 엔크리드 앞에 까슬까슬해 보이는 짧은 머리칼의 남자가 다가왔다.

한쪽 손에 날이 넓은 글레이브를 든 애꾸였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안대와 흉터가 사람 인상을 상당히 거칠어 보이게 했다.

“잘텐벅 출신이지.”

도이치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잘텍벅이 어디였더라.

중앙 쪽이었던 것 같은데.

“보더 가드의 소대장, 엔크리드.”

단출한 인사와 소개였다. 이후 엔크리드는 계속 단련을 이어 갔다.

무슨 용무로 왔는지 모르겠지만, 멈출 필요는 못 느꼈으니.

* * *

도이치는 물끄러미 상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휘관으로 왔다고 들었는데.”

“그렇소.”

엔크리드의 단출한 답이 들렸다. 검을 휘두르며 하는 답이다.

도이치는 여전히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봤다.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목검을 들고 허공에 휘적거리는 게 보였다. 느리고 정확하게.

여기에 한 번, 저기에 한 번.

저거 도움이 되나?

“바쁜가?”

“그다지.”

이거 나 놀리는 건가?

도이치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와서 말을 거는데 반응이 왜 이따위지?

혹여 개척마을의 경비대장인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온 건 아닌지 떠볼 심산으로 온 참이었다.

그런데 태도가 참.

도이치는 괜한 시비를 걸어 상대에게 어떤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았다.

‘참자.’

고로 참아야 했다.

“이쪽 목책은 진액을 잔뜩 발라 튼튼하다오. 어지간한 마물이나 마수는 거뜬히 막고도 남지.”

“그렇군.”

“주기적으로 타격대를 조직해서 나가서 마수를 처리하고는 하는데, 이제까지 큰 어려움은 없었소.”

“그렇군.”

“내가 데려온 사람이 서른이 넘고, 훈련을 통해 자경단 규모를 늘렸거든.”

“그렇군.”

“채석장 관리까지도 얼추 내 사람이 한다고 보면 되고.”

“그렇군.”

“망루를 세웠는데 그 위에선 내 부하가 둘씩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키는 중이오.”

“그렇군.”

이 새끼 이거 좀 이상한 놈인가?

슬슬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했다.

지휘관으로 왔다면서 혹 보더 가드에서 이 마을에 어떤 압력을 행사하고 싶은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데.

이게 영 아무 관심도 없어 보였다.

아니, 최소한 마을 방비에는 뭐라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용병 나부랭이라서 무시하는 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관심이 없는데?

여기저기 들쑤셔 부족한 점을 들춰서 지휘권을 공고히 쓸 핑계로 쓰기도 하고 그래야 하지 않나.

도이치는 마을 이장과 상의한 내용이 전부 뒤틀리는 걸 느꼈다.

‘얘 좀 이상한 것 같아.’

애초에 눈깔부터가 정상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뭔가 넋을 놓고 허공을 보고 있다. 멍-한 눈깔이다.

검을 휘두르면서 뭔 생각을 하는 거야.

프록이랑 목검 들고 논다더니, 정말 그런 건가.

아니면 얘는 여기 뭐 하러 온 걸까.

복잡다단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도이치의 입이 생각 끝에 열렸다.

“여기 뭐 훈련하러 왔소?”

“반쯤은?”

그제야 슬쩍 시선을 돌려서 보고는 답하는 상대다.

그냥 꺼내 본 말인데, 정말 훈련하러 왔다고?

“콜로니를 이룬 마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했소.”

“그렇군.”

놔두자. 이거 정상 아니네. 도이치는 적어도 이 자식이 이쪽 지휘권을 뺏으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말할 테고.

“대장, 마물입니다.”

마침 부하가 자신을 불렀다. 최근에 영입한 놈인데 빠릿빠릿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세세하게 이런저런 걸 잘 챙기기도 하는 훌륭한 부하의 부름이었다.

“어, 그래.”

그리 돌아선 뒤다.

엔크리드는 내내 훈련에 돌입했고.

도이치는 제 할 일을 했다.

마을 방비를 단단히 하며 주변에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는 거다.

콜로니를 처리한 것도 이미 저들이 오기 전이다.

‘겨우 똥개 새끼.’

하이에나 스무 마리가량 모인 게 뭐 대수라고.

그들은 몰랐다.

이곳까지 오며 엔크리드가 해치운 마물의 숫자도.

마을로 향하는 길에 널린 마수의 시신도.

근처에 자리 잡은 ‘검은 칼’ 도적단 하나가 전멸한 것도.

그저.

‘도적놈들이 와서 시비 걸 줄 알았더니.’

도이치는 매일 보고를 들으며 도적놈들을 기다렸다.

보통 개척마을이라 하면 무슨 보물이라도 숨겨진 양 다가와 침을 흘리는 놈들인데, 영 기척이 없었다.

고요했다. 모든 일이 막힘 없이 착착 나아가는 중이었다.

‘운이 따르나?’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이 윙크한 듯했다. 그걸 자신이 미처 못 본 거고.

그렇게 보더 가드에서 이들이 온 지 사흘째.

땅땅땅땅!

종이 울렸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새벽녘 안개를 뚫었다.

‘도적인가?’

도이치는 단숨에 일어나 제 무기를 쥐었다. 외눈의 글레이브라 불리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해 주리라.

그리 문을 박차고 나섰다.

“모두…… 읍!”

도이치는 미처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무기를 당겨 앞을 막았다.

땅!

쇠와 쇠가 만나 공명한다. 제 글레이브 날을 때린 도끼날 덕에 호두나무로 만든 창대의 울림이 짜르르 손을 흔들었다.

“으랏!”

기합과 함께 도끼를 든 놈을 글레이브 창대로 후려쳤다.

뻑!

맞은 마물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이건 뭐지?

도이치는 당황했다. 아직 방어구를 걸치기도 전인데, 사방에 마물이 가득했다.

“구우우욱!”

쓰러진 놈이 울음을 토해 냈다.

묘한 울음을 토해 내는 놈, 상체가 길고 몸 곳곳에 점박이 무늬의 마물, 놀knoll이었다.

한 마리가 안에 난입했다면, 그게 무슨 문제일까.

당장 종친 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길 것이다. 처리하고 보고하면 그만인 걸, 생난리를 피우긴 왜 피우냐고.

대략 대여섯 마리의 놀과 하이에나 마수가 난입했다면?

종은 칠 수 있지만, 제 앞에 이리 나타나는 것에 화를 낼 것이다.

겨우 이걸 해결 못 해?

전직 용병단이?

그런데 지금은 뭔가.

“으아악!”

“싸워! 물러나지 마!”

“쏴, 쏴, 쏴 버리라고!”

“살려 줘! 살려 줘어어!”

“끄억!”

“꺽!”

생존의 위협을 느낀 외침과 단말마의 이중주.

그사이 제 부하들의 모습도 얼핏 비췄으나, 어떤 상태인지 확인도 어렵다.

많았다. 하이에나 마수와 놀이 해일처럼 몰려드는 중이었다.

구우우욱- 하는 울음과 함께 도이치의 앞에도 놀이 다섯 마리로 늘었다.

놀은 단체 활동을 한다. 지금의 울음은 도이치를 상대할 동료를 부르는 울음이었으니.

“으랏!”

도이치는 분전했다. 손도끼를 든 놀 네 마리와 창을 든 놀 한 마리를 상대로 싸웠다.

글레이브가 결국 놀 두 마리의 머리통을 쪼갰을 때.

“구우우우우우!”

놀이 다시 울었고.

상대가 다시 늘었다.

“이런 미친.”

아니, 이게 말이 되나?

도이치는 죽음을 예감, 아니 확신했다. 살아날 수 없는 벼랑의 끝, 그게 이곳이었다.

* * *

엔크리드가 새벽녘에 일어나는 건 오래된 버릇이었다.

‘시간이 부족하니.’

천재, 평범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한 번의 검을 휘두를 때, 엔크리드는 열 번 휘둘러야 했다.

그게 부족하다면 백 번을, 백 번이 부족하다면 천 번을.

본래 그리 휘둘러도 보답을 받는 법이 없었으나.

‘아.’

연이은 작은 깨달음, 루아가르네의 가르침 속에 박힌 배려의 흔적들.

그걸 찾아내 먹고 씹는다. 씹는 과정에서 얻어 낸 맛을 다시금 찾아 표현하니.

검이 움직였다. 엔크리드는 매일이 새로웠다.

그전에도 그랬으나, 최근에는 더욱더.

무엇보다 고립의 기법을 하는 중에도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으니.

‘협응력.’

보고 느낀 순간 몸이 반응하는 걸 말함이다.

반응 속도의 차이다. 회피의 감이란 그걸 기반으로 하는 기술이었다.

평범한 훈련으로는 몸에 붙이기 어렵다.

그럼 자신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죽어도 된다, 죽어도 한다.’

그저 필살, 죽음을 각오해서라도 무언가를 할 각오.

야수의 심장이 평정심이 아닌 대담함만을 줄 때.

엔크리드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필요한 건 작은 계기면 충분할 것이다.

딱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했을 때다.

구우우우!

한순간 불온한 공기가 퍼졌고, 새벽녘의 푸른빛이 스러질 때쯤, 앞쪽에서 비명과.

땅땅땅땅!

비상종이 울렸다.

“습격! 마물이다! 마물!”

음?

엔크리드는 그동안 훈련에만 매진했으나, 남는 시간 크라이스가 마을을 둘러봤다.

“목책이 꽤 튼튼해요, 만약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을 안이라면 뭐, 얼추 버틸 정도는 될 정도로.”

“트리뷰셋이나 망고넬 같은 공성 병기는 없지만, 대신 목책이 상당히 튼튼합니다. 애초에 버티는 걸 예상해서 지은 것 같아요. 결론은 이거죠.”

혹여 이 마을이 위험할 수 있냐는 질문에 관한 크라이스의 답이었다.

“괜찮아요. 일이 터지면 다른 도시에서 곧바로 지원군이 올 테니, 작정하고 버티면 여기서 한 달도 넘게 버틸걸요?”

라고 했었다. 콜로니를 이룬 마물 무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었는데.

“아니잖아. 왕눈아.”

엔크리드가 읊조렸다.

파바바박!

구우우우우!

땅을 차는 소리, 흙먼지가 휘날리며 내달리는 마물의 발걸음, 마수의 내달림.

숨도 안 쉬고 내달리는 무리가 보였다.

숫자를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의 마수와 마물이다.

그우욱!

카우우우!

서로 울음을 교환하며 인간이 만든 길을 밟고 내달린다.

시장 좌판 위로 놀의 도끼가 떨어졌다.

퍽- 하고 깨진 나무 파편이 비산했다.

“꺄아악!”

그걸 본 인간의 비명이 그 위에 얹혀졌다.

놀과 하이에나 무리였다.

마물 놀의 위험성.

몇 가지가 머리를 스쳤다.

첫째 놈들은 단체 활동을 한다. 한 마리만 나타나도 하이에나 마수를 이끌고 다닌다.

그래서 골치다.

둘, 각 개체도 절대, 절대 만만한 놈들이 아니다.

셋, 놈들은 하이에나 마수 한정으로 커플을 이루는 편이라는 것.

생각은 생각.

몸은 몸.

엔크리드는 검을 들고 나섰다.

자신이 묵은 오두막 뒤쪽은 전부 작업하는 마을 주민들이었다.

자경단은 도이치인지 하는 놈이 머무는 곳은 마을 중심부 쪽이니, 여기에 머무는 전투 가용 인원은 얼마 되지 않을 터.

“으? 으허허?”

엔크리드의 뒤쪽, 오줌을 누러 나온 채석장 일꾼 하나가 기겁하며 뒤로 풀썩 쓰러지는 소리다.

“루아!”

엔크리드는 다급한 마음에 프록의 이름을 반 토막만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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