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달이 뜨는 오늘에서
백여든여섯 번의 오늘, 엔크리드는 협응력이란 개념을 인지했고, 몸의 반응이 달라짐을 느꼈다.
턱.
뒤에서 날아오는 창날을 느낀 순간, 몸을 돌려 창대를 잡아챘다.
묘기와 같았다.
등을 찌르는 창날을.
엔크리드는 몸을 틀어 피했으며, 피한 자세 그대로 손을 뻗어 창대를 움켜쥐었으니.
마치 약속된 연극과 같은 장면이었다.
그 뒤는 퍽 하고, 칼날이 머리통을 후리는 소리면 충분했다.
인지하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면 몸이 절로 움직였다.
“고립의 기법은 형제님의 몸을 쉽게 통제하게 해 주는 기반이지요.”
아우딘의 말이 피부에 와닿았다.
만약 고립의 기법으로 수없이 몸을 단련해 두지 않았다면, 이리할 수 없었을 테니.
연상한 움직임이 그대로 구현됐다.
자연스레 제 동작의 허점도 보였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체력 안배와 이어지는 깨달음이다.
동작이 크면 그만큼 불필요한 체력이 소실된다.
그리하면 버틸 수 없다.
움직임에 낭비가 많으면 안 된다. 이제 알았으니, 줄이면 될 일.
정검식의 훈련도 도움이 됐다.
‘움직임을 예측하면.’
동작의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엔크리드의 검술 또한 한 단계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저 발악,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 생긴 부수적인 이득이었다.
이백 번이 채 못 되는 오늘을 반복하며 마물과 마수의 노린내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 됐음에도.
엔크리드는 웃었다.
성장의 희열이 그를 채웠다.
실패를 거듭함에도 그랬다.
그러면서도 발악은 멈추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내일을 향해 가는 걸음을 위해 궁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 궁리의 결과였다.
순간, 엔크리드는 전신의 신경이 곤두섬을 느꼈다.
이백 번이 넘어가는 오늘에서였다.
날아오는 칼날이 보인다.
정오가 지나갈 때쯤이었다. 왼발을 옆으로 비켜서 피하자, 칼날이 허공을 긋는다.
옆에서 창날이 쑥 들어오고 뒤에서는 도끼가 날아왔다.
엔크리드는 몸을 수그리면서 창대를 손바닥으로 밀어내고.
도끼는 어깨로 받아 내며 흘렸다.
드드득.
가죽 갑옷이 긁혔으나, 부상은 없다.
이후 또다시 창과 글라디우스라 부르는 칼날, 도끼, 몽둥이 따위가 날아왔다.
변종이 성인 남성 허벅지만 한 몽둥이를 수직으로 휘두르기도 했다.
검이 방해되는 게 느껴졌다.
움직임에 방해된다. 해롭다. 불편하다.
엔크리드는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아니, 아예 움직이다가 벨트를 풀었다.
몸이 가벼워졌다.
붕, 휙, 쭉, 삭.
모든 무기의 흐름이 보이는 건 아니다. 그저 보고, 하나씩 반응하기로 했다.
자신을 잊고 오롯이 보고 반응하는 것에 집중했다.
어느새 정오의 해가 정수리를 넘어 서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음흉한 하이에나가 연신 발목을 물려 했다.
엔크리드는 그 또한 피했다.
때로는 뒤로 피하고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옆으로 휙 돌아서 가까이 다가온 하이에나 마수의 배 부근을 무릎으로 찍기도 했다.
곧바로 뒤로 다가오는 놀의 품에 스스로 몸을 던지며 어깨로 밀어내고.
밀어내는 힘의 반작용을 이용해, 바로 서고.
이후 날아오는 칼날을 보며 손을 뻗어, 손목 어림을 툭 쳐 내니.
“그욱?”
놀의 칼날이 옆으로 흘러, 제 동료의 머리통 부근을 그었다.
“구우욱!”
화가 난 다른 놀이 분노를 머금고 망치를 휘둘렀다.
붕.
동작이 크고 궤적도 크다. 피하는 게 어렵진 않다. 문제라면 그런 공격이 한순간 대여섯 개가 동시에 짓쳐들어오는 것뿐.
그럼 어떻게 하나.
하나하나 보고 반응한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창대를 손으로 밀어내고 피하고 또 피한다.
상대를 죽이는 걸 배제한 채, 오롯이 회피의 감이다.
직감과 본능, 더불어 발달한 오감을 동반한 회피기였다.
어느새 노을이 지며 달이 슬그머니 머리를 든다.
엔크리드는 낮과 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오롯이 지금 자신의 주변을 노리는 것들만 ‘처리’하기 바빴다.
피하고 쳐 내고 비켜 내고 움직이고.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무슨 술래잡기 같았다.
반복되는 오늘, 몇 번이고 기척을 감춰 지붕 위에 자리 잡은 에스터다.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저건 뭐냐?’
말로 설명하자니, 뭔가 굉장히 말이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엔크리드는 놀의 파도 안에서 홀로 피했다. 그저 버텼다. 어차피 죽음이다.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왜. 왜.
‘왜 웃냐. 너.’
에스터의 마음에 의문이 피어오른다. 반복되는 오늘이 지나면 사라질 의문이나.
그녀가 놀랄 만큼 엔크리드가 하는 짓은 ‘묘기’라는 두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짓이긴 했다.
그는 마물의 파도, 놀과 어울려 노는 듯했다.
언제라도 죽을 것 같은데, 끝내 죽지 않는다. 도끼를 피하고 몽둥이를 피하고 쳐 내고 막아 낸다.
가끔 놀을 부둥켜안기도 했다.
어떻게 안 그러겠나.
가만히 있으면 맞아 죽을 판이니, 엔크리드가 뒤에서 부둥켜안은 놀의 팔을 제 팔인 양 쥐고 흔든다. 그거로 다른 놀의 공격을 막는다. 날아 오는 도끼날을 몽둥이로 쳐 냈다.
빡!
미친 짓이었다. 공격을 포기하는 대신, 오롯이 피했다.
노을이 끝나고 달이 뜨고, 하루라는 마차가 목적지를 향해 닿으니.
끝내 하루의 끝을 맞이하게 됨이다.
달빛이 은은히 사방을 비춰, 여름밤을 밝혔다.
악취와 사체의 냄새, 쇳덩이의 열기, 마물의 노린내 등만 가득한 곳.
엔크리드는 밤을 새웠다.
정확히는 하루를 끝냈다.
리더를 보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다는 소리였다.
‘아.’
그제야 몰입이 깨졌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한 일을 그제야 인지했다.
‘아.’
속으로 두 번째 탄성을 터트린다. 그럴 법도 했다.
무기를 버리고 오롯이 피했다.
왜? 왜 이렇게 했지?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얻었다. 오롯이 피하는 법이다. 보고 반응하는 법이다.
본래 엔크리드에게 없던 재능이었다.
반사 속도와 운동 능력의 변화다.
고립의 기법으로 쌓고 회피의 감으로 채우고 반복되는 오늘, 독과 칼날 사이에서 죽으며 쌓아서 만든 탑이었다.
덤벼든 놈만 수백 마리였다. 그걸 버텨 냈다. 다 죽일 순 없다. 그건 기사나 되어야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버티는 거라면, 오롯이 버티는 거라면.
‘가능해.’
짜릿한 희열, 그딴 게 전신에 차올랐다.
만 하루를 덤비던 놀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놈은 없었다.
엔크리드의 몸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볼에도 핏물이 흘렀다.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을 순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다만, 치명상은 없었다.
그리 보낸 하루의 끝, 오늘의 끝, 저녁노을을 보내고 달이 뜨는 걸 보는 순간, 하루가 끝났다는 걸 깨달았고.
“또 보자. 이번에는 여기서 말고.”
말이 끝난 뒤, 엔크리드는 눈을 감았다.
이거로 오늘이 끝날까? 버텨 내는 거로?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럴 리가 없다.
예상했다.
그리, 눈을 다시 떴을 때다. 당연하게도 주변이 변했다.
검은 강, 나룻배, 뱃사공이다.
“그거로는 안 될 텐데?”
그리 뱃사공이 지나치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가 뜨니, 오두막 천장이 보였다.
또 오늘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거로 반복되는 오늘, 이전에도 경험한바, 버티는 건 해결책이 아니라는 방증이니.
물론, 그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희열이 가슴을 벅차게 흔드나, 지금은 즐길 때가 아니었다.
수없이 반복한 오늘, 취합한 정보, 연상한 내용.
엔크리드는 일어나자마자 크라이스를 걷어찼다.
“일어나라.”
“악, 뭡니까, 아침부터.”
뭐긴, 뒈지지 않으려고 뭐 빠지게 뛰어야 할 날이 됐지.
약간의 편법이라고 해도 좋을 방법이 떠오른 건 백스무 번째쯤의 오늘에서였다.
그걸 실행해 볼 참이었다.
본래 목표로 한 ‘오늘 버티기’는 이뤘다.
엔크리드가 정한 오늘을 넘기는 최소 조건, 그걸 이뤘다는 말이었다.
‘회피의 감.’
괴력의 심장과 더불어 이제는 몸에 익었다고 해야 할까.
감이 잡혔다. 여실히 단련한 성과를 몸에 붙였다.
그럼 이걸 또 반복해야 할까?
이 빌어먹을 오늘을?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검을 단련하는 모습 때문에 주변 사람은 잘 간과하지만, 엔크리드는 말도 잘하고 머리도 잘 굴리는 편이었다.
특히나 편법을 쓰는 것에 거부감도 없는 쪽이었고.
* * *
엔크리드는 목표를 정했고, 이뤘다.
‘버텼다.’
하루를 온전히 보내, 그 끝을 보는 것.
그 마지막이 결과론적으로는 다시 본래의 오늘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니, 직감이었다.
‘벽을 넘는 건 이런 방식이 아니겠지.’
버티는 건, 언제나 답이 아니었다.
버티는 게 답이었다면 마법사 렛샤와 늑대인간 때도 도주로 끝나야 했다.
도시 내 지하도에 제 레어를 만든 미친 마법사의 트랩 또한 피하면 그만이었다.
이건 저주, 그러니 파훼할 방법이 필요했다.
엔크리드는 정확한 답은 몰랐으나, 어느 정도 생각한 바는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오늘을 벗어날지 고민한 시간도 있었으니, 그리 떠오른 방법이다.
애초에 죽고 죽이는 과정이 있기에 오늘이 반복된다면, 그 과정을 시작조차 못 하게 하면 어찌 될까.
‘해 보면 될 일.’
결과는 과정 뒤에 따라 오는 것.
“제가 용병으로 꽤 오랜 시간 일했다는 걸 말했습니까?”
무장을 챙겨 나온 뒤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주르륵 내려와 턱을 스쳤다.
역시나 덥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무장을 챙겨 입은 것만으로 체온이 훅 올라간다. 딱 좋기도 했다. 따로 몸을 풀지 않아도 근육과 관절이 깨어나는 것이니.
오늘은 고립의 기법이고 훈련이고,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이 정도가 딱 좋긴 했다.
“음?”
엔크리드의 말에 루아가르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인간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픈가?’
루아가르네의 시선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엔크리드는 제 할 말만 했다.
“사교도 놈들과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마경 성지교.”
모른 척 시치미 뚝 하고 말하자, 루아가르네가 반응했다.
“……사교도를 말함이냐.”
여전히 반응이 남달랐다. 싸늘한 공기가 오간다. 살벌한 기세다.
엔크리드는 기세를 무시한 채 말했다.
“혹, 압니까?”
이건 좀 어색하군.
엔크리드는 연기력도 단련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으나, 루아가르네는 딱히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당장 상대의 어색한 말투나 태도보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
사교도란 말이 나왔다. 그녀에게 그들은 무조건 쳐 죽여야 할 놈들이었다. 맹세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때 놓쳤던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이제야 기억이 나다니.”
말하며 엔크리드가 제 이마를 툭 쳤다.
이것도 좀 어색한 것 같은데.
연기도 단련이 필요하긴 했다.
너무 예행연습이 없긴 했지.
물론 루아가르네는 여전히 신경 쓰지 않았다.
“도이치 풀만이란 놈의 뒤에서 따라다니던 친구, 기억납니까?”
“입술 두껍고 못생긴 인간.”
프록의 심미안은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그래, 생선을 닮은 얼굴이었다.
엔크리드는 그 외에도 몇 놈을 더 안다. 이미 이백 번이 넘는 오늘을 반복하지 않았나.
그동안 알아 둔 게 그 한 놈뿐일까.
다만, 그 생선을 가장한 사교도가 가장 골치 아픈 놈인 건 확실했다. 반복한 오늘에서 루아가르네는 항상 그놈을 쫓았고 돌아온 적이 없었다.
“맞습니다.”
“확신하나? 사교도라고?”
“네, 제 검과 모든 걸 걸고.”
루아가르네는 엔크리드가 제 검을 얼마나 소중히 하는지 안다. 그건 자신이 심장 맹세를 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렸다.
인간치고는 말에 무게감이 있었다.
믿음이 갔다는 말이다.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은 직접 가서 물어도 됩니다.”
“가 보지.”
그게 끝이었다. 예상보다 화끈했다. 루아가르네는 그대로 제 채찍을 꺼내 손에 둘둘 말곤 뛰듯이 걸었다.
그대로 도이치 풀만을 찾아갈 기세였다.
아마도 거기서 보이지 않으면 어디서든 찾지 않을까.
“그, 뭡니까? 그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는?”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크라이스가 물었다.
어색하긴 했나? 그랬을 거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너도 좀 움직여야겠다.”
엔크리드는 발을 떼며 말했다. 오늘을 반복하며 몇 번이고 시간을 가늠해서 재 봤다.
마물이 어떻게 그리 몰려오는지, 대체 뭐가 문제인지.
원인을 찾아도 봤다. 문제를 모르면 모를까.
안다면.
‘막는 건 쉽지.’
적어도 엔크리드에게는 그랬다.
이미 수 차례 해 본 일이기에 주저함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