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기쁨의 포복
“문 못 여나? 살짝, 사람 하나 나갈 정도면 좋을 것 같은데.”
엔크리드가 말했고 그 말에 당황한 병사가 되물었다.
“지금요?”
엔크리드와 병사의 눈이 마주쳤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병사는 눈을 끔뻑였다.
아니, 이걸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지금 문 열면 저 밖에서 놀 무리가 들어온다는 것부터?
아니면 문을 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지금 문이 열릴까 봐 막고 있는 건 혹 안 보이냐고 물어야 하나?
병사가 말을 고르는 사이, 엔크리드가 절충안을 내놨다.
“정문 옆에 쪽문 같은 거 안 만들어 뒀나?”
대수롭지 않은 말투다.
저 밖에서 고슴도치처럼 화살에 꽂히면서도 덤벼드는 놀과 하이에나 마수가 한가득한데도, 말투가 무슨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안달을 낸다고 변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변하는 것도 없다.
이백여 번의 오늘을 경험하지 않았나.
저것들은 놔두면 계속 저런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저놈들한테 둘러싸여 날뛰어 봤는데 쟤들 몇 마리 죽어도 광전사처럼 덤비더라.’
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일단 들어오는 걸 막았으니, 그거로 시작이 좋았다는 생각도 했고.
시작이 좋으니, 다음도 좋으리라 기대하는 건 멍청한 짓이지만.
시작이 나쁜 것보다야 훨씬 낫긴 하지, 암.
어쨌든 매번 사람이 오갈 때마다 이 문을 열 순 없다. 급할 때 여는 작은 문도 만들었을 것이다.
보통 이런 규모의 성채 비슷한 걸 지을 때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
개척 마을이지만, 이후에 성을 축조할 의도가 부단히 엿보였다.
채석장도 그렇고, 모아 둔 일꾼과 장인이며 건축 관련된 인간들부터 불러온 걸 보면 짐작하기 쉬운 일이다.
물론 짐작은 크라이스가 했다. 엔크리드는 듣고서 그럴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였었고.
훈련과 수련에 매진할 때야, 하나하나 신경 쓰기 힘든 일이지만.
크라이스의 말도 말이고 이백여 번의 오늘을 반복한 참이기도 했다.
그럼, 눈치가 구울의 뇌만 한 새끼라도 이 정도는 알아채야 정상 아닌가 싶고.
어쨌든 앤크리드는 반복의 매듭을 끊어 내야 했다. 그러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고.
“쪽문은 있는데요.”
여전히 당황한 병사다.
“그럼 살짝 열어 봐. 물론 명령이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들어주면 안 될 것 같은데, 너무나도 태연한 상대의 태도가 병사를 움직였다.
“저쪽에 있긴 한데요.”
그래도 주저하긴 했다. 엔크리드는 쪽문 쪽으로 향했다. 역시 문이 있었다.
활짝 열면 사람 두엇이 나갈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정문에서 왼쪽이었다.
구우우욱!
벽 너머 바로 앞에서 놀의 외침이 들렸다.
그제야 머리가 좀 돌아갔는지 안내하던 자경단 병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 열면 들이치는 놈들 막다가 우린 다 죽습니다.”
열 수는 있는데, 열면 우린 다 죽어, 그러니까 안 돼.
완곡한 거절이다.
엔크리드는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에스터?”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라고 할 순 없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뜻이 통했다.
에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표범은 그새 조금 컸으나 여전히 덩치는 작은 편이다.
하지만 작다고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저거 요물이요, 요물.”
렘이 말했듯, 에스터는 보통 짐승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지금도 증명했다.
툭, 하이에나 마수가 짧은 다리로 발악하며 올라서려던 방벽을 에스터는 툭툭툭 하고 벽을 타더니, 그대로 위로 올라섰다.
발톱으로 벽을 찍고 그대로 벽을 땅 딛듯 디딘 거다. 발톱의 날카로움을 감안한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랜 동작이긴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벽을 땅처럼 걷는 것처럼 보였을 터다.
아는 엔크리드가 봐도 그렇게 보였다.
“벽을 타네?”
놀란 병사가 중얼거렸다. 눈이 아까보다 두 배는 커진 것 같았다.
평소에 나무나 지붕 위로 다니는 걸 보면 이 정도 장벽을 타는 거야 일도 아니긴 한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놀라긴 하겠지.
성인 키의 세 배가 넘는 높이임에도 에스터는 너무도 쉽게 방벽을 넘었다. 하물며 넘는 거로 끝나지 않았다.
“어어, 저, 저.”
지켜보던 병사가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랄 만도 했다.
에스터가 그대로 방벽 너머로 휙 넘어갔으니, 간단히 결론만 말하자면 마물과 마수의 합주 사이로 뛰어들었다.
에스터가 해야 할 일은 불협화음, 놈들이 부는 합주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다.
엔크리드는 그런 기대가 있었고, 에스터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 줬다.
크르르릉!
쪽문 너머 놀과 하이에나와는 다른 낮고 묵직한 짐승의 울음이 들렸다.
부으으 하고 공기가 떨리며 심장을 후려치는 울음이다. 들으면 누구라도 오금이 저리는 그런 힘이 실린 것 같았다.
“표범은 쏘지 마!”
도이치 풀만의 외침도 연이어 들렸다.
구우우욱! 하는 놀의 울음 사이, 깨갱 하는 하이에나 마수의 울음이 섞였다.
꾸르억!
놀의 단말마도 몇 개 있었다.
구우욱! 구우우우욱!
놀의 주둥이에서 나오는 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앞을 막던 무리가 쪽문 앞에서 떨어져 나갔단 소리다.
집중하고 있던 엔크리드의 청각이 그걸 잡아챘다.
“지금.”
엔크리드의 읊조림에 병사가 에? 하고 되묻곤 움직이질 않았다.
이 새끼는 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시켜야겠는데? 이리 반응이 느려서야 어디에 써먹나.
“문.”
엔크리드는 병사의 손목을 쥐고 당기며 말했다. 손목을 그러쥔 손에 힘을 준 건 당연했고 기세도 일으켰다.
육감의 문을 열며 조절하게 된 살기 비슷한 투기다.
“히끅.”
자경단 병사가 딸꾹질을 시작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할까.
병사의 손이 마지못해 문 잠금쇠에 닿았다.
“열다가 잘못되면……”
“내가 책임져, 내가 이 마을의 군사 책임자다.”
그럼, 그 책임자가 왜 자살을 이렇게 하는 걸까.
병사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결국 손을 움직였다.
딸깍.
쪽문의 잠금쇠가 열렸다.
“잠그지 말고 막고 버텨라, 나중에 열어 달라고 할 거니까.”
“네?”
대체 자꾸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쪽문이 슬쩍 열렸다. 에스터가 마물과 마수 사이에서 깽판을 제대로 쳤는지, 놈들이 전부 뒤를 돌아본 채였다.
엔크리드의 눈에 놀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나마 투구를 쓴 놈이 없는 게 다행인가.
대부분 무기를 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위협이긴 하니까.
사실 투구 따위야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터였다.
쪽문 밖으로 발을 내밀며, 엔크리드는 팔을 늘어뜨렸다. 온전히 밖으로 나오자마자다. 몸에 최대한 힘을 빼고 휘슬 대거를 제외한 비도를 사방으로 던졌다.
활을 쏘는 것과 비도를 던지는 건 완벽하게 다른 일이었다.
손끝으로 무게감을 재고 순식간에 팔을 휘두르니, 네 자루의 비도가 뒤돌아본 놀의 머리통에 파바바박 꽂혔다.
머리통에 한 뼘 길이가 넘는 나이프가 꽂히고 살아남을 수 있는 놀은 없다.
그건 당연했다.
그렇게 네 마리의 놀이 죽고 마수 한 마리가 뒤를 돌아보는 사이, 이미 엔크리드는 그 앞에 닿았다.
휙.
위에서 밑으로, 중단에서 시작된 칼질이다. 불필요한 동작을 절제한 짧고 간결한 칼질이기도 했다.
그 칼질에 마수 한 마리의 등허리가 갈라졌다.
푸걱.
엔크리드의 검이 척추와 내장, 뼈 일부를 단숨에 잘랐다. 두 동강을 냈다는 소리다.
그와 동시에 왼쪽으로 한 발짝 움직여, 다른 마수의 머리통을 무릎으로 찍었다.
허리를 트는 힘을 이용한 무릎 찍기에 우직하고 두개골이 함몰됐다. 안으로 움푹 들어간 머리통 덕인지, 눈깔이 앞으로 툭 튀어나오며 시신경이 덜렁거렸다.
그리 마수 두 마리를 죽인 뒤, 엔크리드는 마음 놓고 칼질을 시작했다.
회피의 감을 단련함으로 얻은 건 몸의 협응력.
보고 느끼고 반응하는 순간, 몸이 절로 움직였다.
엔크리드는 마수 사이로 파고들어 춤을 췄다.
길지 않은 짧은 검무에 놀 세 마리와 마수 두 마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머리통과 가슴, 다시 머리통.
놀 한 마리는 몸에 은화 크기의 구멍이 뚫리기도 했다.
짧게 끊어서 쳐 내리는 정수리 베기와 찌르기의 조합으로 이뤄 낸 결과다.
쿵.
그제야 엔크리드가 나온 문이 닫혔다.
‘구경이라도 했나.’
넋 놓고 바라봤는지, 문을 닫는 속도가 느렸다.
절그럭절그럭!
문을 잠그는 소리도 연이어 들리긴 했다.
‘잠그지 말라니까.’
하긴, 그런다고 저걸 열어 두겠나.
돌아가는 거야 나중 일.
지금은 할 일을 할 때였다.
엔크리드의 칼질과 무서운 손길로 주변의 놀과 하이에나 마수가 우수수 죽었고, 그걸 봤는지 놈들이 에스터와 엔크리드에게 달려들었다.
단둘이라도 뭉쳐서 싸우는 편이 유리하다는 건 당연한 거다.
에스터가 엔크리드 쪽으로 움직였다.
달려오면서도 에스터는 그냥 오지 않았다. 표범의 활약이 눈부셨다. 놀라울 정도였다.
타닥.
땅을 차더니 세운 발톱을 석- 하고 긋는다. 놀이든 마수든 발톱에 걸리면 그대로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쪼개졌다.
그게 머리가 됐든 가슴팍이 됐든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괴력과 절삭력의 조화다.
에스터가 달려들고, 놀과 하이에나 마수가 둘을 향해 무기와 이빨, 발톱을 들이밀 때다.
“에스터, 그럼 뒤 좀 부탁한다.”
그건 무슨 소리?
에스터가 눈으로 물었으나, 엔크리드는 답하지 않았다.
‘이 새끼가?’
에스터는 순간 분노가 차올랐다. 엔크리드가 시선을 끄는가 싶더니, 기척을 팍 죽였다.
그게 끝이 아니다. 제가 죽인 놀과 하이에나의 피 사이를 뒹굴더니, 배를 바닥에 붙이며 바짝 엎드렸다.
그러니 적의 공격이 누구에게 집중되겠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에스터와 엔크리드가 난입한 것도 순식간이고.
마수와 마물을 두 자릿수로 썰어 버린 것도 한순간.
에스터가 다가오며 시선을 끈 것도 한순간.
이후 엔크리드가 사라진 것도 한순간.
당한 마물, 놀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광전사를 보는 것 같았다.
“구우우우욱!”
그리 빨갛게 눈깔이 돌아간 놀이 분노를 터트리며 에스터를 죽이려 달려들고.
에스터는 요령 좋게 뒤를 몸을 뺐다.
엔크리드에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이미 포복 자세로 바닥을 기고 있는 걸 봤다.
놀 몇 마리가 제 몸을 밟는데도 숨을 삼키고 기어가는 걸 보니.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건 확실했다.
‘머저리가.’
저 머저리가 뒤를 봐 달라 했다. 에스터는 콧김을 훅 뿜으며 마력으로 강화한 육체를 움직였다.
괴력과 발톱에 깃든 마력 일부가 불가사의한 절삭력을 보인다.
그렇게 달려든 하이에나 두 마리의 머리통을 세 조각으로 나눠 주고 잡힐 듯 말 듯 시간을 끌었다.
이게, 저 미친 남자가 말한 뒤를 봐주는 일이 될 터였다.
이런 걸 원해서 자신에게 이 개 같은 마물 무리를 넘기고 간 것 아니겠나.
에스터의 짐작이 맞았다.
엔크리드의 마음과 같았다.
놀에게 밟히고 적의 피와 살점, 내장으로 냄새를 숨기고.
작센을 흉내 낸 살기 죽이기로 포복, 엔크리드의 목표는 명확했다.
리더로 보이는 놀 새끼였다.
* * *
엔크리드는 자신의 재능이 변했음을 인지했다.
‘달라.’
달라도 너무 다름에, 그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엔크리드는 둔하지 않았기에, 그는 체감했고 인지했다.
이전에는 수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하나를 간신히 배웠다면 이번에는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회피의 감을 위한 오늘이었다.
그렇게 반복한 나날, 쓸데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었던 오늘도 있었다. 그런 날에도 발악했고 기었다.
멈추지 않았다.
그 모든 날을 앞으로 나갈 한걸음에 보탰다.
그래서 얻은 것.
변화는 검술에도 있었고 다른 부분에서도 있었다.
“살기를 뿌릴 줄 알면 숨길 줄도 아는 겁니다.”
무살의 찌르기, 작센이 쓰던 묘한 기술에 관해 물었을 때다.
“배울 필요는 없지만, 원리는 이해하면 뭐, 쓸 만은 하겠죠.”
입은 그렇게 말했으나, 눈은 아니었다.
그게 막 회피의 감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걸 꾸짖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더딜 것이냐, 나무라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엔크리드가 신경 쓰진 않았다. 안 되는 걸 어쩌겠나.
될 때까지 할 뿐.
그때는 알고 싶었기에 그저 물었고 답을 듣긴 했다.
살기를 완벽하게 지운 채로 동작으로만 하는 찌르기.
눈으로 봐도 저게 자신을 찌르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살기도, 기세도 전혀 가미하지 않는 찌르기란 거다.
그게 설명의 끝이었다.
회피의 감을 위한 이백여 번의 오늘 중, 제 살기를 조절하는 능력도 필요했다.
피하고 또 피하는 과정 중에서 절로 몸으로 느껴진 무언가.
살기가 아니라 감각만으로 반응했다. 반응 속도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기세가 아닌 처절하게 육체의 반응 능력만 탐구했다.
그 와중에 깨달은 거다.
엔크리드는 그 무언가를 활용했다.
제 기세를 숨기고 죽이는 법이다. 암살자의 그것과 비슷한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었다.
그저 기척을 조금 감추고, 숨을 느리고 길게 쉬는 것으로 흉내만 냈다.
‘이거로는 부족하지.’
놀과 하이에나의 피가 흩뿌려진 땅에 뒹굴고 아예 놀의 시신 하나를 부둥켜안고 기었다.
누군가 지금 엔크리드를 본다면 가히 감탄을 금치 못할 터였다.
마수 한 마리를 등에 얹고도 무서운 속도로 기었으니까.
‘기는 건, 특기 중 특기.’
포복 이동만 보자면 엔크리드는 일류 그 이상이었다.
그렇게 기고 또 기었다.
뒤에서 에스터가 캬악 하고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다. 돌아가면 육포 두 개 준다.’
속으로 생각하며 꾸준히 기었다.
둔덕을 만날 때쯤, 주변에 놀과 마수가 몇 마리 남지 않았다.
그대로 위로 기어 올라갔다. 바닥을 뒹군 탓에 몸에서 꼬릿하고 고약한 비린내가 났다.
마물의 피비린내는 언제나 그렇듯,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약했다.
엔크리드에게는 못내 익숙한 일이었다.
용병으로서 칼밥 먹고살 때는 이런 일이 일상이었다.
마물의 피는 생각보다 많은 걸 감춰 준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엔크리드는 둔덕 위를 다 올라오고 난 뒤, 만족감을 느꼈다.
목표가 그곳에 있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