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드라마
“야, 아르민! 뭐 해! 빨리 뽈 차자!”
“됐어. 니들이나 놀아.”
“왜?”
“애들은 좀 가라. 엉아는 지금 인생의 심각한 기로 앞에서 크나큰 고민을 하고 있단다.”
나는 한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앵앵대는 애송이들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저 새끼 또 저러네.”
“냅둬. 여자애한테 차였나 봐.”
“그러니까 자전거는 한 대 뽑고 나서 들이댔어야지.”
“이 자식들이!!”
삐약삐약거리는 주제에 발랑 까진 병아리들이 멋모르고 떠드는 말에 발끈할 내가 아니다. 내 인생 경험이 대체 몇십 년인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의 장남에서 한때 한 나라의 정점에 다다를 뻔했던 제복군인 피라미드의 꼭대기까지 다다른, 미래를 엿보고 온 이 조범석이가 고작 출생의 비밀 같은 시시한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질 리가 없다. 네? 제가 코흘리개 아르민이라구요? 그럴 리가요.
한라산 담배가 그립다. 부관에게서 뺏어 피우던 디스 플러스마저 그립다. 책임질 게 많은 어른들을 위한 그 구름과자가 이토록 그리울 줄이야···.
나는 창문 너머로 시선을 둔 채 고민했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절대 아빠가 사실 아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흔들리는 게 아니다.
사생아라는 꼬리표가 달리면 무척 인생이 피곤해진다.
내가 왜 비행기를 만들려고 하겠는가. 설마 항공 오타쿠의 미래 지식을 물려받아서, 같은 시시한 이유이겠는가? 아니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게 인류의 로망 그 자체여서겠는가?
당연히 유명해질 수 있어서다.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기 이름이 <카이저 빌헬름 2세호>여 봐라. 혹시 아는가? 귀족 작위라도 하나 줄지.
그런데 만약 내가 사생아라는 사실이 시한폭탄처럼 깔려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연 항공 개척 영웅이 한순간에 그냥 존재해서는 안 되었을 불륜 부산물로, 도덕적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
원래 사람들은 영웅의 몰락에 환장하는 법. 안 될 일이다. 안 될 일이고말고. 전생은 반역자에 이번 생은 호로자식이라니.
머리가 다시 엉망이 되고 눈앞이 흐릿해진다. 이건··· 그러니까··· 니코틴 금단 증상이다. 그래. 커피와 담배, 알코올에 찌들었던 군인이 둘 다 섭취를 못 하니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어질어질할 수밖에 없지. 진실을 깨달았으니 대처도 할 수 있다.
“야, 울어?”
“안 울어.”
“야!! 얘 운다!!”
“진짜? 진짜 울어?”
“다 꺼져.”
“아르민. 네가 잘생겼다고 해서 여자들이 다 넘어오는 게 아냐.”
“인생은 다 그런 거야. 쪼꼬 줄 테니까 실연 같은 건 털어버려.”
“꺼지라고!!”
아무래도 2차 성징이 끝나지 않은 이 몸은 호르몬에 민감한 듯하다.
갑자기 비가 내리는 모양이다. 망할.
***
흔히들 ‘독일인’이라고 하면 무뚝뚝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여기에 ‘프로이센인’이라고 덧붙이면 그야말로 심장마저 강철에 피 대신 수은이 흐르는 전쟁병기를 떠올리기 마련.
하지만 명심할지어다. 어지간한 이름난 석학들이나 유명 예술인들 중에서도 독일인이 꽤 많다는걸.
그런 섬세함을 보유한 몇 안 되는 프로이센인인 내가 엄마한테 다짜고짜 찾아가 ‘엄마, 나 혹시 아빠가 아빠가 아냐?’ 같은 미친 소릴 지껄일 순 없다. 그랬다간 우리 집은 단숨에 가정파괴의 현장이 되고 말 텐데. 길거리에 나앉기는 좀 그렇다.
아니. 솔직히 좀 어지럽다. 그렇잖은가?
출장이 잦은 아빠가 사타구니에 붙은 독일산 소시지를 어디 바깥에서 붕붕 휘두르다 덜컥 배다른 동생을 데려온다고 하면, 나는 정말 무덤덤하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음.’ 하고 끄덕끄덕 현실을 인정해 줄 용의가 있다.
그런데 내가 혼외자라면··· 엄마가 바람을 피웠단 소리 아닌가? 엄마는 불쌍한 피해자고 아빠는 개새끼라는 내 확고한 고정관념이 펑 하고 폭발해버릴 것만 같다.
여자를 패는 건 쓰레기고 부인을 패는 남편은 안 타는 쓰레기지만, 이놈의 19세기에 매 맞는 아내는 그야말로 클리셰 오브 클리셰 아닌가. 별로 동감하고 싶진 않지만 19세기 유럽놈들 감수성을 고려하면 뻐꾸기 자식을 깐 아내가 ‘맞을 만하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정말 수두룩빽빽하리라.
아무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답을 내렸다.
정면 돌파하기로.
또다시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서재로 향한 것이다.
“이 시간에 안 자고 뭐 하고 있니.”
내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의 눈썹이 꿈틀댔다.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
내게 이런 말을 듣는 게 생전 처음인 그는 깜짝 놀란 듯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집에서 뻑하면 보는 게 가정폭력이었는데 그렇게 뭐, 대단한 유대 관계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뻔뻔스러울 만치 기세를 이어나가 등 뒤에 숨겨 두었던 술병을 슬쩍 앞으로 꺼내 들었다.
“웬 술이냐?”
“용돈으로 샀어요.”
“네가? 술을?”
“일하신다고 타지에서 한참 고생하다 오셨잖아요.”
“그래··· 고맙다.”
그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시선을 술병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나를 보지 않기 위해 술병만 뚫어지라 노려보는 느낌.
술꾼에게 술을 주는 것이 과연 현명한 판단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뭐라도 더 주워들으려면 일단 술이라도 먹여봐야지 않겠는가. 뺨 한 대 더 맞으면 혹시 이번엔 페니실린 제조할 줄 아는 화학자 미래 지식이라도-
“고맙구나. 아르민.”
“네에.”
“잘 마시마. 이만 들어가렴. 내일 학교 가야 하잖니.”
나는 그대로 들어가는 대신, 옆에 있는 의자로 다가가 풀쩍 앉았다.
“혼자 마시면 몸 상한대요.”
“네가 상대해 주겠다고? 허.”
나는 찬장의 유리잔 두 개를 가져와서는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얼른 신속하게 따랐다.
“이 맹랑한 놈. 네가 마시고 싶었나 보구나.”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그래. 마음만 받으마.”
미묘한 경계.
‘이 자식이 왜 이러나’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것만이겠는가? 나라도 뻐꾸기 새끼가 자꾸 친근한 척 들러붙으려 하면 생리적 혐오감이 치솟을 텐데.
하지만 나는 진실이 듣고 싶었다.
아니, 진실이 아니라도 좋으니 제발 내 마음이 편해질 소릴 듣고 싶었다.
베를린 장벽보다도 두툼하게 쌓인 것 같은 이 심리적 장벽 앞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돌려 그의 시선을 외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서류가 눈에 띄었다.
“미국 증권 시장 붕괴?”
“무슨 뜻인지는 아니?”
“미국인들 회사가 엄청 싸지고 있단 소리잖아요. 미국에 투자하면 망하지는 않겠네.”
“···똑똑하구나.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지.”
“아빠 닮아서 아닐까요.”
오늘따라 그는 영 고장 난 인형처럼 끼릭끼릭대는 듯했다.
또다시 고민하던 그는, 이윽고 대답하는 대신 혼자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딱 두 번.
잔을 비운 그는 내게도 잔을 밀어다주었다.
“첫술은 어른이랑 마셔야지.”
“네?”
“자. 한잔해봐라.”
나는 그가 번복하기 전에 얼른 쭈아압 한 잔을 모조리 들이켰다. 어우, 목구멍과 위가 찌릿찌릿해지는 이 감각. 그래, 이게 알콜이지. 그것도 독일산!
크어어, 이런 걸 마시고 사니까 독일놈들이 죄다 알콜 중독이 되는 거라고. 너희가 나쁜 거야!
“천천히 좀 마셔라. 어린놈이 술 좋은 건 알아가지고.”
“끅! 그래서 맨날, 엄마 때려요? 좋아서?”
“이 자식이 벌써 취했어?”
“저 사생아예요?”
내가 언제 뒤가 있었나.
알콜의 힘을 빌려 브레이크라곤 없이 그대로 저돌맹진하자, 내 눈앞의 이 남자는-
그대로 덥석 병을 들더니 냅다 나발을 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병이 무슨 강아지라도 되는 것처럼 슥슥 쓰다듬더니 의자에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너는 원래부터 네 어미를 닮았지. 네가 갑자기 요즘 달라진 것 같아서, 나와는 너무나도 달라서 과연 내 자식인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
“하지만, 그래. 너는 내 아들이다. 내 아들이 아니면 어떻게 벌써 돈 냄새를 맡겠나.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나는 돈 버는 기계 아니냐? 가장이면 모름지기 집에다 돈 벌어다 바쳐야지. 암암.”
그는 지극히 어설프게, 꼭 도자기 그릇이라도 만지는 듯 어색하게 내 머리를 몇 번 흔들었다. 잠깐 고민한 끝에야 그게 머리를 쓰다듬는 거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 중요한가? 이 로젠바움가의 삼대독자 아르민 로젠바움이 온갖 음해를 이기고 뻐꾸기가 아니란 사실을 공인받았는데! 역시 패배자 조 뭐시기와 달리 내 앞엔 오직 밝은 미래만이 가득한 셈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나는 다시금 미묘한 기분에 젖었다.
내가 뻐꾸기가 아니면 우리집은 폭력 가장이 있는 그냥 흔하디흔한 막장 집안 아닌가.
“그럼 엄마는 왜 때려요?”
“다 사정이 있다.”
“그냥 말해주세요. 저도 다 컸어요. 몇 달 뒤면 김나지움(중학교+고등학교)도 들어가는데요.”
나는 찬장에 있던 술병 하나를 더 꺼내 왔고, 이번에도 그는 병나발을 멋지게 불고는 천천히 썰을 풀기 시작했다.
“네 어미, 아말리아는 참 아름답지. 지금도 그런데 결혼하기 전엔 오죽했겠니.”
“네.”
“아말리아와 우리 집안은 오래도록 친분이 있었고, 나 또한 어려서부터 그녀를 봐 왔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네가 알진 모르겠지만, 난 무척 오래전부터 그녀를 연모해 왔지.”
나는 홀짝홀짝 술을 마시며 이 이야기를 감상했다. 굉장히 상투적인 오프닝이지만 원래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기는 또 다른 맛이 있잖은가.
아버지는 자신이 얼마나 어머니를 좋아해 왔는지, 둘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끊임없이 역설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발음은 점점 알콜에 파묻혀 개차반이 되어 갔다.
“-나는 공부를 잘해 월반까지 했고 이내 도이체방크에 취직해 젊은 엘리트로 명성을 드높이며 전 세계를 누볐다. 하지만 몸뚱이는 비루하기 그지없고 잘생기지도 않았지. 나는 몇 번이고 아말리아에게 사랑을 호소했지만 그녀는 가진 거라곤 반반한 면상뿐인 기생오라비 유대인 놈! 그 빌어먹을 놈을 마음에 품은 것이 확실해 보였고!”
“···그래도 결국 두 분이 결혼하셨잖아요?”
“그래. 불경기가 닥치면서 아말리아의 집안이 망해버렸거든. 그녀는 집안을 건사하고 빚을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나를 택했다. 그 놈팽이는 떠났고. 나는 처음엔 기뻤지만, 그 빌어먹을 놈을 볼 때처럼 생기 넘치던 모습은 이후 결코 볼 수 없었다. 돈으로 그녀의 몸은 살 수 있었지만 결코 마음만큼은···.”
뭐냐고 이게.
어지럽네.
“그래서 때렸다고요?”
“어린놈의 새끼가 뭘 알아! 네가 이 비참한 감정을 이해해?! 차라리! 차라리 내게 욕이라도 했으면! 침이라도 뱉었다면! 어째서 뺨을 맞고도 입 다물고 있냔 말이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인형 같은 눈깔 대신 제대로-”
“미치겠네, 진짜.”
나는 이 상상을 초월하는 찌질함에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고 앞에 놓인 술만 연신 들이켰다.
이 시대에선 이게 일상인가? 혹시 우리 아빠 정도면 발로 깐 적도 없고 술병으로 후려친 적도 없으니 아직 세이프 존, 뭐 이런 건가? 하긴 대충 100년 뒤의 대한민국조차 법원이 몸소 강간범과 강간 피해자를 결혼시켜주는 나라였으니 어쩌면 19세기 동물의 왕국 프로이센에서 이 정도는 오케이일지도 모른다···.
술에 떡이 된 그는 나를 붙잡고 한참을 알아듣지 못할 하소연을 늘어놓았고, 나는 힘으로 그를 붙든 채 이 취객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왜냐고? 가부장의 권한은 무척이나 막대하고, 내가 부여잡을 돈줄도 이 사람이니까.
“아무튼 더 이상 엄마 때리진 마세요.”
“나도 그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너도 보지 않았느냐? 그 싸늘한 표정. 날 버러지로 보는 듯한-”
“그런 적 없다고요! 그거 피해망상이야! 제발 제가 아빠 때리는 호로자식이 안 되게 해주세요.”
“허, 이제 힘으로 이겨 먹으니 좋으냐?”
“집안의 평화를 지키려고 이러는 거라구요.”
정신병원에 가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아빠였구만.
망할.
***
나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내가 미래 귀신에 씌여 게거품을 물게 된 후, 아버지는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의사를 구했다.
이제 다 낫고 퇴원했으면 끝 아닌가··· 싶겠지만, 당시 날 진찰하던 의사가 내게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원인 모를 장기 발작 증세가 나은 뒤 사람이 달라지고 갑자기 똑똑해짐.’
이걸 연구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더라. 우리야 공짜로 진료받는 셈이고, 특히 어머니는 내 건강에 뭔가 문제가 있을까 봐 노심초사했으니 더더욱 이 제의를 고맙게 여겼다.
“이번에도 딱히 문제는 없구나. 흠. 급격한 성장. 이것도 혹시 연관이 있나-”
“그냥 제가 잘 먹고 잘 뛰고 잘 커서 아닐까요?”
“그치만 네 아버지도, 네 할아버지도 전혀 건장하질 않았거든. 외가도 그렇고.”
“얘가 요즘 자꾸 닭가슴살을 달래요. 그게 도움이 된 걸까요? 건강하니 참 다행인데.”
의사, 헤르만 에펜슈타인(Hermann Epenstein)은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짐짓 끄덕거리며 앞에 놓인 공책에 무언가를 끼적였다.
“잠깐 나가서 놀고 있으렴. 네 어머니와 이야기할 테니.”
“네에.”
나는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온 뒤, 그대로 바깥 정원으로 빠져나가는 대신 살그머니 문에 귀를 바싹 붙였다.
- 당신은 나날이 더 아름다워져 가는 것 같소.
- 부끄러워요···.
- 여자를 때리기나 하는 그 악한을 내가 단숨에.
- 제발. 그 사람을 너무 그렇게-
“씨발.”
아니, 집안 꼬라지 다 수습했더니 왜 엄마가 그러고 있어.
나는 간호사가 오기 전에 얼른 밖으로 나가서, 아빠 주머니에서 몰래 꼬불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내 나이 아홉 살.
커피보다 술담배가 먼저라니.
이게 실화냐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