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놈들
19세기 프로이센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보자.
미국식 6-3-3 교육제도, 초6 중3 고3이라는 테크트리와는 꽤 다른 맛이 있는 게 이 지방분권의 나라 독일의 매력··· 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여기에 마법의 핫소스, <19세기>라는 접두사를 끼얹는 순간 끔찍한 신분제 적폐의 맛이 되어버린다.
내가 이제 막 졸업한 게 4년제 초등학교.
그리고 이제 진학하게 되는 곳이 9년제 ‘김나지움’.
그다음이 바로 각종 대학교.
한국에 인문계, 실업계, 각종 특목고 등이 있었으니 여기에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19세기 김나지움은 최상위 엘리트들을 위한 특목고에 속한다.
다만 원래 상당수 김나지움이 신학자나 성직자 육성을 위한 사립학교였던 탓에, 김나지움의 교과 과정은 막 첨단 과학기술이나 외국어보단 조금 더 곰팡내 풀풀 나는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 쪽에 집중되어 있다. 잘 생각해 봐라. 그런 건 먹고살기 바쁜 중인 계층이 갈고닦아야지, 최상류층은 교양이나 익히면 된다고?
당대 독일인들이라고 해서 뇌 대신 솜을 넣고 사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 김나지움이 적폐 같다는 이야기는 끝도 없이 나오고 있다. 명심해라. 독일은 맑스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노 씨가 아득바득 나를 김나지움 월반 특급에 태우려는 이유.
그건 바로··· 오직 김나지움 졸업생만이 대학에 입학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음. 적폐 같다, 가 아니라 그냥 적폐다. 정정하도록 하자. 참고로 여자가 입학할 수 있는 김나지움이 바로 올해, 1893년 독일 최초로 딱 한 군데 문을 열었다. 그전엔 아예 없었고. 으음. 19세기 굉장해.
김나지움이 아닌 다른 학교를 나와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있다. 예를 들어서 법률가를 양성하는 곳이 목적인 법률-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법대에 진학할 자격이 주어지고, 공고를 나와서 공대에 진학하는 루트도 있다.
하지만 인맥이나 사회적 명망 같은 걸 고려하면 역시 김나지움에 가는 게 맞겠지.
그러면 대체 왜 이렇게 빡센 김나지움에서 또 월반을 시도하려 하는가?
얼마 전까지 나는 정말 단순하게,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하는 1903년까지는 아직 10년이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10년이 아니었다.
“아르민, 넌 김나지움 갈 거야?”
“당연하지. 이 성적이면 김나지움 가야 하지 않겠어?”
“김나지움 가면 집에서 개인교사들한테 공부하던 귀족 집안 애들도 잔뜩 있을 텐데, 거기서도 잘할 수 있겠어?”
“하. 내가 다 씹어먹고도 남지.”
“와아··· 그러면 군대도 장교로 가겠네?”
“응?”
그 순간, 나는 머리를 교회 종으로 한 대 얻어맞는 듯한 충격에 빠졌다.
군대.
군대!!
그렇다.
그 전설적인 ‘프로이센군’에서 3년간의 군 복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대에 끌려가기 전에 비행기를 발명해야 했다. 그래야만 내가 꿀을 빨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하거나 김나지움을 졸업하면, 옛날 한국의 ‘석사장교’ 비슷한 ‘1년 장교’ 제도에 도전할 수 있다. 말 그대로 3년간 개처럼 군대에서 병으로 뺑이치는 대신 간부로 단 1년 복무하면 되는 제도인데, 아무튼 무조건 이걸 써먹어야만 했다. 솔직히 조범석이 평생을 군대에서 썩었으니 그 대가로 나는 군 면제나 그에 준하는 혜택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시발. 명색이 쓰리 스타였는데 병으로 군대라니. 그랬다간 정말 자살해버릴지도 모른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도 젊은 시절 군 면제 받고 싶어서 온갖 추한 짓 했다가 결국 끌려갔다던데, 나는 그 마음 이해할 수 있다. 또 짬밥을 먹긴 싫다!!
따라서.
1. 김나지움에서 점수를 따고 월반한다.
2. 정규 교과과정 외에도 비행기 제작에 필요한 별도의 공부를 병행한다.
3. 남들보다 몇 년 빨리 대학에 진학한다.
4. 남는 시간으로 비행기 제작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5. 최초로 비행기를 발명해 <하늘의 정복자> 타이틀을 달고, 엄청난 유명세를 얻는다.
6. 프로이센 군부에 비행기의 군사적 가치를 열심히 어필해, 군용기 개발에 협력하는 대신 안락하고 꿀이 질질 흐르는 꿀꽈배기 군 생활을 한다!
7. 몸 성히 전역해 항공기 사업을 일구고 떼돈을 번다.
그렇다.
이게 바로 내가 세운 원대한 계획.
‘그래서 엔진은 어떻게 만드나요’라거나 ‘그래서 무슨 돈으로 만드나요’라거나 ‘그래서 시간을 투자하면 만들어지긴 하나요’ 같은 다양한 질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해보면 될 거 아닌가 해보면.
만약 최초 타이틀을 달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대충 이 미래 지식이면 적어도 극초기 항공 산업의 선두주자가 되는 덴 문제가 없을 테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라이트 형제는 미국인.
그리고 미국과 유럽 사이엔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벽이 있다.
내가 비행기를 최초로 발명하더라도 라이트 형제는 신대륙에서 자신들만의 항공 사업을 일굴 것이고, 라이트 형제가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비행기의 발명가가 되더라도 나를 포함한 유럽인들은 이곳에서 나름대로의 항공 사업을 벌일 것이다. 뻔하지.
설마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제국주의 나라들이 외국인에게 사업 분야를 통째로 내줄까? 관세 장벽이든 뭐든 온갖 추잡한 짓을 해서라도 자국인의 사업을 지원해줄 텐데.
그래도.
명예는 못 참지.
나는 그렇게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며, 머리에 쓴 교모를 고쳐 썼다.
아, 그래. 얘네들 교복은 없는 대신 교모가 있더라고. 온 나라를 군대 내무반 꼴로 만든 프로이센이 정작 교복이 딱히 없다니.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지.
꼭 군납비리 덩어리 베레모라도 뒤집어쓴 것 같아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거 참 각 안 잡혔었는데.
***
“크, 크흠. 오, 오늘 참, 날씨가 좋군.”
“그러게요. 같이 공원으로 피크닉이라도 갈까요?”
“와! 피크닉 같이 가요!”
“하하, 그럴까?”
“밖에서 먹을 만한 걸 좀 쌀게요.”
집에 평화가 돌아왔다.
내 입으로 말하기도 병신 같은 이야기지만 반복하겠다. 집에 평화가 돌아왔다. 아니구나. 애초에 평화가 있었던 적이 없으니 돌아온 게 아니라 찾아온 거구나.
아버지의 가정폭력은 이제 끝났다.
한두 번 완력으로 억눌러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심리 클리닉 의사가 된 것처럼 적어도 마음에 쌓여 있던 응어리를 들어줘선가 아무튼 요즈음 아버지는 더 이상 주먹을 휘둘러대지 않았다.
술에 떡이 된 채 들어와서 언성을 높인 적은 몇 번 있는데, 내가 방에서 나오면 합죽이가 되어선 조용히 침실로 들어가시더라. 역시 19세기는 근력이면 다 되는 시대인가.
그리고··· 어머니는 갑자기 밝아지셨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꼬꼬마 어린이였다면 ‘아! 아빠가 더 이상 주먹질을 하지 않으니 엄마도 마음이 풀렸구나!’ 하면서 마냥 행복해했겠지만, 슬프게도 나는 알 거 다 아는 김나지움 학생. 이제 전 국민학생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 입 벌려보렴. 아-”
“아아-”
“건강하구나. 별문제도 없고. 김나지움은 좀 어떻니?”
“라틴어가 따분한 것만 빼면 괜찮아요.”
헤르만 에펜슈타인 의학박사에 관해선 내가 참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어머니는 가톨릭교도. 그리고 아버지는 결혼하기 위해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이 프로이센에서는 가톨릭교도도 어마어마한 색안경을 끼고 본다. 비스마르크가 무려 20년 동안 대놓고 ‘가톨릭은 카이저가 아니라 교황에게 충성하는 불순분자들’이라며 온갖 탄압을 가한 적이 있을 만큼 심각하다. 거기에 더불어 50% 유대인 핏줄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이 사람은 솔직히 나보다도 더한 익스트림 인생 난이도로 살아온 셈.
“조만간 성을 한 채 매입할 예정이란다. 방학 때 초대할 테니 한번 놀러오렴.”
“성이요? 우와! 의사 선생님, 대단해요.”
“하하하. 고맙다. 천 년이 다 되어 가는 성이라 대대적으로 수리를 해야 하지만, 또 그런 게 멋있잖니.”
하지만 물려받았는지 아니면 본인이 일으킨 건진 헷갈리지만, 일단 이 사람··· 부자다. 우리 로젠바움가도 적어도 굶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지만, 이 사람은 부동산 갑부란 말이다. 성을 턱턱 사버린다고.
거기에 자꾸 친한 척하며 말을 걸어대서 알게 된 거지만, 이 양반 엄청난 중세 덕후였다. 성을 수리하면 거길 프랑크 왕국이나 신성로마풍으로 풀 세팅할 거라나 뭐라나.
결혼 안 하고 돈 많고 취미생활하며 꼴리는 대로 사는 사람. 누군가는 굉장히 부러워할 만한 삶이었다.
“저는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고 싶어요.”
“오, 그건 무리야. 그걸 만들겠다고 설치는 놈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릴리엔탈 모르세요? 그 사람은 하늘을 날았잖아요.”
“대단한 사람이지. 하지만 그건 그냥 장난감이야.”
“제가 진짜 확실한 방법을 알거든요. 좀만 투자해 주시면 제가 띄울 수 있어요.”
“하하하! 맹랑한 녀석!”
내가 당장 ‘엄마랑 불장난하는 쓰레기 자식! 내 정의의 도끼를 맛봐라!’ 하면서 이놈의 뚝배기에 V자로 자국을 새겨줄 수 없다면, 최소한 돈이라도 뜯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나도 최대한 붙임성을 가지고 이 사람과 친해져보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슬퍼하실라. 그런 글러먹은 생각은 그만하고 부지런히 학교 수업에 전념하렴. 가족을 지켜야지?”
“그건 그렇죠.”
단순히 내가 지금 반가톨릭, 반유대주의 뭐 이런 걸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수십 년 동안 무수한 인간군상을 접한 조범석이의 직감에 따르면, 이 헤르만 에펜슈타인이라는 인간은 굉장히 위험한 새끼였다.
조 중장의 이론에 따르면, 사고 치는 놈보다 더 위험한 놈은 사고 치는 주제에 굉장히 당당한 놈이었다. 남편 있는 유부녀와 바람 피우는 주제에 왜 자꾸 그 아들이랑 친해지려고 시도하는 거지? 죽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새끼.
눈깔이 수상했다.
아주 가끔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거두고 나를 힐끗 바라볼 때,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처럼 감정 없는 얼굴로 나를 ‘관찰’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면 절로 경계심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그의 초대를 받아 ‘소박한’ 연회에 끼게 되었다.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어서 무척 기쁘군요. 오늘은 제 절친한 친구, 하인리히 괴링(Heinrich Ernst Göring)이 잠깐 베를린으로 돌아온 것을 기념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괴링입니다. 아이티 영사로 재직 중이지요.”
나야 어른들 노는 곳에 낄 수가 없었으니 당연히 애들끼리 모이게 되었는데, 괴링 씨는 참 힘이 좋았는지 자식들이 그야말로 가득가득. 하지만 부모를 따라 같이 아이티에 가거나 혹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이곳저곳 흩어져 있어서 오늘 이 자리에 온 아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코딱지만 한 아기 한 명에게 큰 관심이 생겼다.
“에베베베벱. 에베벱. 안녕, 애기야?”
“빼애애애앵!!”
올해 갓 태어난 아기.
헤르만 에펜슈타인 박사가 대부가 되어주고 이름까지 딴 이 아이의 이름은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
어쩌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확신했다.
“혹시 너도 비행기에 관심 있니?”
“뺘?”
아, 얘구나.
친해져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