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03)

백작가 미치광이

그라프(백작) 체펠린.

<체펠린 비행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비행선에 인생을 건 남자. 

체펠린이란 이름이 비행선의 고유명사가 되고, 그 비행선에서 이름을 따 <레드 재플린>이라는 음악 밴드가 나왔으니 아무튼 그의 이름은 그야말로 역사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지금은 어디까지나 미치광이 노인네 취급을 받고 있고, 독일에서 가장 콧바람 센 프로이센 군부는 이 영감과 전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리의 황제 폐하, 빌헬름 2세는 체펠린을 가리켜 ‘남부 독일인 모두를 통틀어 가장 멍청한 인간’이라고 입을 털었고, 실제로 체펠린이 비행선 제작 비용 100만 마르크를 투자받을 때 단돈 6천 마르크를 줬다. 참고로 프로이센보다 훨씬 작고 아담한 뷔르템베르크 왕가가 10만 마르크를 쐈으니 카이저의 인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래 나치 독일이 만든 함선··· 아니지, 만들려고 했던, 이구나. 아무튼 군함 함명에 ‘그라프 체펠린’을 쓰려고 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 사람은 뒤에 굉장한 존경을 받게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비스마르크, 샤른호르스트, 티르피츠 같은 쟁쟁한 이름과 같은 반열에 오르는 셈이다. 고흐도 그렇고, 역시 살아서 명성을 얻는 사람은 드문 법인가.

그러니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과 손을 잡고 싶었다.

암만 미친놈 소릴 듣는다지만 이 사람은 백작이다. 막대한 재력··· 은 없지. 비행선 개발한다고 자기 사재 다 꼴아박는 중이거든. 하지만 전국 각지에 뻗은 방대한 인맥, 특히 비행선과 관련된 인맥은 한 다리 거치기만 하면 고스란히 내 비행기 개발에 필요한 인맥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입지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심지어 항공 분야에서 보나.

체펠린 백작을 놓칠 순 없었다.

처음 백작을 만나기 전에는 ‘둔중하게 하늘을 떠다니는 체펠린 비행선을 날렵한 군용 전투기가 기관총 사격으로 격추시키는 시연’ 같은 걸 구상하기도 했었다.

어그로가 어마어마할 것 같지 않나? 순식간에 비행기의 입지는 튀어오르고 비행선은 폭발하는 이미지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행기, 날릴 수 있단 겐가?”

“제 계산이 올바르다면 엔진만 달면 됩니다. 그리고 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건 됩니다.”

“제기랄! 당장 사람을 불러보지. 전화, 전화기가-”

“지금 새벽 아닙니까?”

“그게 중요한가, 자네는? 참나. 이래서 프로이센 놈들이란 융통성이 없어.”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백작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불같았으니까.

원래라면 내 자료를 바치고 얼굴도장을 찍은 뒤 바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백작은 나를 순순히 풀어주지 않았다.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

“감사합니다.”

백작님께서 직접 제 침실을 안내해주시는 건 대단히 황공한 일이지만··· 말씀하시는 대사가 조금 무서워요. 그렇게 미소 지으시면 정말 더 불안합니다.

“내가 가만히 고찰해 보았는데, 비행선과 비행기는 서로를 침해할 일이 없을 것 같더군. 기차와 자동차의 관계와 유사하지.”

“그렇습니까?”

“자네가 구상하는 이 비행기는 대량 운송보다는 신속하고 빠른 이동에 적합해 보이는군. 좋아. 아주 좋아.”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엔 ‘실현이 된다면’이라는 접두사는 싹 생략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당연히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걸 확신하는 부류였으니까.

“생각해 보게. 거대한 비행선을 하늘에 띄우고, 무장을 탑재한 비행기가 그 비행선에서 일제히 튀어나오는 모습 말이야. 이 막강한 하늘의 권세 앞에선 그 어떤 군대라도 땅바닥을 기는 개미처럼 빌빌대겠지!”

“그날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떨리는군요. 대단합니다, 백작님!”

그건 우리 기술이 외계인쯤은 돼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첨언하자면 나는 지금 백작한테 도와달라고 징징대러 온 거다. 굳이 백작의 환상을 깨부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너무 졸렸다.

백작은 다 죽어가는 나를 침대로 석방해주긴커녕, 침대 옆 소파에 털썩 앉아서는 다시금 비행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침 좀 팍팍 먹게. 그렇게 비리비리하게 먹으면 젊은이가 힘은 좀 쓰겠나?”

“제가 베를린에서 당일날 오다 보니 입맛이 조금 덜하군요. 너무 맛있는데 속에 잘 들어가지 않으니 저도 참 슬픕니다.”

“허! 이래서 남자들은 군대를 가야 해. 자네, 언제 군대 가나?”

“대학교 가고 나서 1년 과정으로-”

“떽! 독일 건아, 그것도 엘리트라면 사관학교는 가야지! 남의 위에 설 수 있는 남자가 되려면 당연히 장교로 가서 전쟁터에 한 번쯤 가봐야 해! 세상에, 프로이센인 주제에 군대를 뺄 생각을 하겠다니. 믿을 수 없군!”

내가 먹은 짬밥이 백작님보다 많을 것 같은데, 적어도 나는 전쟁터에 간 적은 없으니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반박을 하면 안 되지만.

나는 아침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풀려나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젊은 놈이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자고 있나?”

“에? 에에??”

“자네 설계도 보다가 궁금한 부분이 있어서 말인데. 얼른 일어나서 이리 좀 와보게. 뭐 하나!”

그제서야 슬슬 내가 뭔가 큰 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미 늦었지만.

***

체펠린 백작가에 체류한 지 며칠이 지났다.

방학이라 정말 다행이다. 대입 준비도 해야 하고 머리가 터지겠는데 여기에 갑자기 붙들려버리다니. 내가 아무리 밥 먹듯이 수업을 짼다고 해도, 아예 학교에 출석을 안 한 적은 드물었다고.

“미안하게 됐네. 우리 남편이 오랜만에 활기가 돌아서 내가 말리기도 뭣하더군.”

“아닙니다. 저야 체펠린가의 후원을 받기 위해 찾아왔으니까요. 백작님께서 제 연구에 이토록 큰 관심을 보여주시니 저로서는 무척 설레고 기쁩니다.”

체펠린 백작부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내 이곳저곳을 빠르게 스캔했다. 그렇게 빤히 보시면 조금 저도 당황스러운데.

“군대는 어쩔 거예요? 정말 저 사람 말대로 사관학교 갈 겁니까?”

“하하. 아닙니다. 하지만 제 발명이 성공한다면 이 나라 군대에도 크나큰 도움이 될 테니 저 하나가 입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라에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발명에 대한 건 잘 모르겠지만 입은 참 살아 있네요.”

“하하하···.”

“저 사람이 그놈의 비행선에 미쳐 있는 동안 사기꾼을 얼마나 많이 만나 본 줄 알아요? 이쯤 됐으면 진실한 사람과 승냥이쯤은 대충 구분돼죠. 당신은 적어도 승냥이는 아닌 모양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백작이 나를 탈탈 털려는 건 당연히 이놈이 사기꾼인지 진짜배긴지 검증하려는 의도겠지만, 왜 백작부인께서도 저를 그렇게 탐색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로젠바움 씨.”

“안녕하세요오.”

“두 분 모두 좋은 밤 되셨습니까.”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응접실로 체펠린가의 두 따님이 들어왔기에 나는 얼른 인사를 드렸다.

내가 이런 말 하면 너무 자뻑 같지만, 내 얼굴은 솔직히 사기다. 내가 연기만 할 줄 알았고, 몇십 년만 늦게 태어났으면 그냥 헐리우드로 건너갔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니 두 따님들께서도 나를 무척 좋게 봐주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용돈 좀 챙겨 둔 거 있으면 백 마르크만-

“내 앞에서 애들 유혹하는 건가요?”

“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어디까지나 인사였습니다, 인사.”

“내 딸들 앞에선 웃지 마요.”

“넵.”

피곤하구만. 어차피 아슬아슬하게 부르주아 계층에 걸친 로젠바움가와 명성 드높은 체펠린 백작가가 맺어질 가능성은 0에 수렴하잖은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 내가 작심하고 여자 후리고 다녔으면 돈을 수십 배는 끌어모았겠지만, 그랬다간 역사에 카사노바 2호기로 낙인찍히지 않겠나. 2호기는 사양하고 싶다. 비행기 발명이라는 위업이 치정에 얼룩지면 좀 모양 빠지고.

딱 적당한 수준의 응대만 하며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길 잠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체펠린 백작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보게, 로젠바움 군!”

“네, 백작님.”

“자네 실험실로 가지.”

“제 실험실? 아, 풍동 말씀이십니까?”

“그래! 좀이 쑤셔서 안 되겠어. 비행선은 어차피 마무리 단계니까, 자자. 자네가 사기꾼이 아니라면 망설일 게 무에 있겠나?”

나는 그에게 반강제로 붙들린 채 베를린으로 돌아갔고, 내가 모셔온 손님을 접한 불쌍한 우리 가족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제, 제 아들놈이, 폐를 끼쳐서 그만.”

“당신이 로젠바움 씨인가 보구려. 반갑소. 체펠린 백작이오. 도이체방크는 내게 별로 대출을 해주지 않더군.”

“죄, 죄송합니다. 대출은, 제, 제, 제 영역이, 아니라.”

“얼어붙으셨군. 미안해서 어쩌나.”

“차나 커피를 드릴까요?”

“주는 건 무엇이든 기쁘게 마시겠소. 고맙소, 부인.”

백작의 크고 아름다운 저택에 있다가 베를린의 우리 집으로 오니 어쩐지 평소보다 더욱 집이 좁게 느껴졌다. 응접실은 더더욱 그렇고.

“내가 이 젊은 친구의 미래에 조금 투자를 하려고 하네만.”

“투자,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비행기를 개발하고 있다더군. 직접 실사를 하겠지만, 실물이 제시한 자료와 일치한다면 내가 약간의 도움을 줄 생각이오.”

“그러시군요.”

그 순간, 압도적인 거물의 존재감에 찌그러져 평소보다 어깨가 절반으로 접혀 있던 브루노 로젠바움 씨의 허리가 꼿꼿해지고 눈에서는 살인광선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로젠바움가의 가장은 접니다. 물론 조만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아비투어(대입자격. 일종의 수능)를 취득할 아르민은 성인이라 봐도 무방하겠지만, 마침 제 직업과 연관된 일이니 조금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흠. 크흠. 일단 실사부터 하고.”

“계약은 신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투가 꼭 내가 이 젊은 친구의 작품을 훔쳐 먹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군그래.”

“그런 건 아닙니다. 처음으로 아비 노릇 좀 해보는 것 같아 신이 났을 뿐입니다.”

오. 아버지. 태어나서 철든 이래 아버지가 번쩍번쩍 빛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군요.

대충 돈 문제에 관해 무언가 이야기가 오간 뒤, 그제서야 우리는 내 실험 기체가 있는 풍동으로 갔다.

“이게 그건가.”

“시제 기체입니다.”

내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를 보던 체펠린은 한참 동안 요모조모 내 날틀을 뜯어보았고, 작동 방식이나 내가 온 사방에서 끌어온 각종 조종타 등을 유심히 보았다. 

“이건 뭔가?”

“뒤를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보시다시피 수평과 수직으로 있는 이 꼬리날개로 방향을 조절하기 때문에, 비행 후 방향을 조정하려면 방향타로 꼬리가 제대로 조작되는지를-”

“멍청하구만.”

백미러를 본 백작은 다짜고짜 내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니, 왜?

“당장 이 거울이나 특허 신청하게!”

“예?”

“자동차에 이걸 부착하면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것 아닌가! 에잉. 내가 이런 것도 떠먹여줘야 하다니. 잘 다듬어서 팔아먹어 보란 말이야! 돈도 없어서 후원이나 구하고 다니는 놈이 제가 갖고 있는 보물도 못 알아봐!”

그, 그렇습니까.

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조범석의 멍청함을 저주했다. 조범석이 네 이놈! 돈 될 만한 아이템이 있었으면 재깍재깍 미래 지식을 뱉어놔야 할 것 아니냐! 이렇게 멍청하니까 그렇게 죽었지.

“이거, 누가 조종할 셈인가?”

“당연히 저죠.”

“안 돼. 릴리엔탈이 한순간에 골로 가버린 거 모르나? 자네가 조종을 맡는다면 나는 한 푼도 투자하지 않겠네.”

안 돼. 하늘 정복이라는 내 야망을 이 미친 늙은이가 막고 있다니! 하여간 영감들이란 도움이 안 된다.

“알겠습니다. 꼭 사람을 구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자원할 놈들은 천지겠군. 아니, 내가 한번 타보고 싶은데.”

“절대 안 됩니다.”

“망할 꼬맹이 같으니.”

“이제 성인입니다.”

내가 못 타는데 당신이 탈 수 있을 것 같아?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엔 절대 그렇게 못 하지.

그렇게 체펠린 백작은 비행기 대신 뜬금없이 차량용 백미러라는 아이템을 챙겨 사라졌고.

얼마 뒤 그가 보낸 사람이 왔다.

“자네가 아르민 로젠바움인가?”

“그렇습니다. 백작님께서 엔진에 정통하신 분을 보내주겠다 하셨는데.”

“그렇네. 그분과는 약간의 면이 있어 종종 도움을 받고 있지. 나는 다임러(Daimler)사에서 일하고 있는 빌헬름 마이바흐(August Wilhelm Maybach)라고 하네.”

우리는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하지만 새롭게 찾아온 사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여담)

원 역사에서 체펠린 백작은 슬하에 무남독녀(1879~)였습니다. 아르민은 84년생입니다.

빌헬름 마이바흐는 그 ‘마이바흐’ 브랜드 맞습니다. 다임러에서 일하던 마이바흐가 독립하며 체펠린 백작과 함께 마이바흐사를 세워 체펠린 비행선의 엔진을 제작했습니다.

1차 대전 패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의 비행선과 비행기 생산을 금지하자 사업이 망해버린 마이바흐사는 자동차 제조업으로 사업 방향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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