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03)

이 독일은 간신이 필요해요 (2)

인류 역사상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동력 비행기 <빌헬름 대제>호.

체펠린 백작 또한 당연히 이 경이로운 현장에서 쾌감을 느꼈다. 아니, 남들의 몇 배는 더 짜릿했다.

저 비행기야말로 그의 승리를 뜻했다.

그의 노력의 결실이 마침내 저 눈부신 하늘을 누비고 있었다.

창공을 날던 비행기가 착륙한 그 순간부터, 이제 비행기 대신 체펠린 백작의 명성이 저 창공을 뛰어넘어 우주 저편까지 치솟아 우주유영을 시작했다.

“체펠린 백작이다!!”

“백작님!! 안아줘요!!”

“사랑해요!!!”

“남부의 자랑!! 하늘의 정복자!!”

“허. 허허. 허허허허허.”

하지만 기쁨은 잠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가 멀다 하고 목에 힘을 빡 주고 힘껏 고함을 질러야만 했다.

“비행선에 투자하지 못하겠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백작님. 어쨌거나 하늘을 날았잖습니까.”

“그렇지. 그러니-”

“그러니 성공한 비행기에 투자해야지요.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사 이름이 <체펠린 비행선 회사>잖아! 비행기 말고 비행선! 그런데 이제 와서 곁다리로 하던 일이 터졌다고 해서.”

“그럼 사명을 고쳐야지요.”

투자자들.

체펠린 백작이 회사 자본금의 절반을 대긴 했으나, 그 말인즉슨 나머지 반은 다른 사람들이 십시일반해서 모은 돈.

그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체펠린 백작을 비웃거나 비난하긴커녕, 그가 제시한 비행선의 미래를 보고 피 같은 돈을 맡긴 이들.

하지만 오직 비행선만을 꿈꿨던 백작과 달리, 이들은 ‘아무튼 날틀이 날았으니 된 것 아닌가?’라고 여긴다는 차이가 있었다.

“그래. 비행기는 날았지. 그것으로 비행선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증명을 해낸 셈 아닌가? 비행기는 근본적으로 대량 수송에 적합하지 않아. 하늘길을 열 수 있는 건 비행선뿐이니-”

“백작님. 그 비행기조차 이제 걸음마 단계입니다. 첫 발을 뗐을 뿐이라고요. 일단 비행기 상용화부터 하고 나서 생각합시다.”

<체펠린 비행선 회사>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여전히 돈 잡아먹는 괴물인 비행선에 대한 연구는 접고 비행기에 몰두해야만 한다.

하지만 결코 비행선을 포기할 순 없었던 백작은 고심 끝에 다시 한번 뷔르템베르크 왕궁으로 향했다.

“어서 오시오, 백작! 뷔르템베르크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위대한 이여!”

“황공하옵니다, 전하. 비행기는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카이저가 그대를 멸시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이제 와서 슬며시 한 다리 걸치려 하는 모습이 참 꼴사납단 말이지. 누가 뭐라 해도 그 비행기 제작을 후원한 이는 당신이고, 우리 모두 당신이 막대한 가산과 시간, 열정을 헐어 비행 연구에 도전했단 사실을 잘 알고 있소. 당신은 우리의 영웅이오.”

“감사합니다.”

“그래서, 다음 비행 일정은 어떻게 되오?”

복권까지 발행해 가며 추가 투자를 약속한 뷔르템베르크 국왕이었지만, 체펠린이 다시 비행선을 만들겠다고 하자 대답이 없었다.

“백작.”

“예, 전하.”

“비행선은··· 조금 시일이 지나서 도전하면 어떻겠소? 비행기 제작으로 충분히 수익이 발생한 이후에 말이오.”

“어째서입니까?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잖습니까.”

“바로 그래서요. 지금 행여나 실패했다간 우리, 나아가 독일은 전 세계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될 게요. 백작. 다음 실험에 걸린 게 너무 많소.”

“그렇다면 제가 회사를 나오겠습니다. 민폐 끼치지 않도록 야인으로 돌아가 비행선을 준비하겠습니다. 부디-”

“그것도··· 조금 어렵겠소.”

국왕은 본인도 민망함을 아는지 백작에게서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그 젊은이, 로젠바움은 베를린 태생의 프로이센인 아니오. 카이저가 대놓고 로젠바움을 한껏 띄워주고 있으니, 백작 그대가 남부인을 대표하는 항공 연구자가 되어줘야만 하오. 당장 비행 연구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곳은 우리 뷔르템베르크나 바이에른, 바덴 같은 곳 아니오? 입만 열면 비아냥대기나 하던 카이저에게 모든 영광이 쏠리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소.”

비행선은 당분간 접어야 한다.

물러나지도 못한다.

집으로 돌아온 백작은 울화가 치밀어 연신 술만 퍼마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병이 나 그대로 앓아눕고 말았다.

***

백작의 방에서 나온 나는 정신을 차릴 겸 세수를 했다. 머리에 찬물을 좀 끼얹으니 정신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역사가 바뀌었다.

미래 지식과 내 추측을 결합해서 생각해 보노라면, 아마 원 역사에서 체펠린은 일종의 ‘독일의 민족영웅’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가만 미래 지식을 따져보면 유달리 독일만 비행선에 매달리지 않았는가? 다른 나라들이 전부 항공기에 매달릴 때 힌덴부르크호다 뭐다 하면서 비행선을 굴린 건 독일뿐이다. 딱히 비교우위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비행선을 꾸역꾸역 수십 년 뒤까지 굴릴 이유는 단 하나, 국뽕이겠지. 당장 지금만 해도 사람들이 국뽕에 굶주려 있으니.

그런데 여기서 나, 아르민 로젠바움이 나타났다.

구태여 비행선을 아득바득 빨 필요가 없다. 독일인들은 이제 마음 편히 비행기라는 위대한 독일의 작품을 칭송하면 저절로 자긍심이 샘솟는다.

아마 백작은 여기까지 짐작하지 않았을까.

계속 비행선을 개발하겠다고 하다간, 독일의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저 굶주린 대중들이 그를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백작은 사실상······ 비행선 개발을 금지당한 셈.

나 때문일까?

나는 복잡한 상념을 최대한 꾹꾹 숨긴 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체펠린 비행선 회사>는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본래 이 회사는 비행선 LZ 1을 국가기관, 특히 독일 군부에 납품해 경영 위기를 타개하고, 그 자본으로 민간 여행용 비행선을 추가 제작해 ‘항공 여행’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겠다는 것이 캐치프레이즈.

하지만 문제의 비행선 LZ 1은 해체당해 재료로 팔려나갔고, 군부는 구매 가치가 없다고 도장 꽝 하고 찍어버렸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이제 비행기가 있으니까요!”

“하하하하! 투자는 대성공입니다그려!”

“백작은 대체 왜 몸져누웠답니까?”

“비행선보다는 비행기에 전념해 달라 했더니 드러누웠습니다. 그 양반 고집이 어디 보통 고집입니까?”

“절대 꺾여선 안 됩니다. 비행선은 돈 먹는 하마에요. 비행기도 아직 얼마나 돈이 더 들어갈지 미지숩니다.”

비록 비행선 관광 여행의 꿈은 뒤로 미뤄졌지만, 이들 핵심 주주들은 비행기라는 새로운 문물이 가져다줄 돈벼락을 기대하고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백작더러 멍청이라고 손가락질 할 때 꿋꿋하게 그 미미한 확률을 믿고 장투를 한 사람들.

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장투가 빛을 발했단 생각에 반쯤 광기에 차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오늘의 주인공이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체펠린 백작님을 대행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아르민 로젠바움입니다.”

“반갑소. 제국의 영웅을 이렇게 보게 되니 참으로 감격이오.”

“반갑소!!”

“어서 앉으시오! 여기, 이 자리가 따뜻하고 좋소!”

그들의 돈줄이자 미래가 다가오자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로젠바움(장미나무)이 아니라 골덴바움(황금나무)이라 해도 결코 틀리지 않으리.

젊은이는 여유롭게 자리에 착석하고는, 가볍게 서두를 뗐다.

“먼저, 체펠린 백작님께서 건강이 생각보다 많이 좋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런··· 나이도 많으신데 어쩐다.”

“금방 털고 일어나셨으면 좋겠군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백작님을 낫게 하는 덴 비행선만 한 게 또 없겠지요. 체펠린 비행선 회사는 그 이름부터 비행선 개발을 위해 설립된 회사라는 점이 명백하니, 새롭게 조직을 가다듬고 실용성 있는 비행선 개발에 매진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짜고짜 핵심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한 방. 하지만 아프다기보단 의아함이 먼저였다.

“이보게, 로젠바움 군.”

“예에.”

“이런 말 하긴 그렇네만···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다들 귀하가 만든 비행기에 미래를 건 사람들이오. 가망이 보이지 않는 비행선 대신 비행기를 먼저 개발하기로 하면 당연히 귀하께서 가장 큰 이익을 보지 않겠소?”

근데 왜 갑자기 비행선 타령이냐.

이것조차 이해 못 할 머저리는 아무도 없었고, 아르민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옆에 놓여 있던 커피를 가볍게 음미했다.

“먼저, 여러분들께서 오해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입을 떼기 시작했다.

“저는 체펠린 백작의 후원을 받았지만, <체펠린 비행선 회사>의 후원은 전혀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 회사는 저 아르민 로젠바움과 그 어떠한 관계도 없습니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 비행기 제작과 관련된 일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 이 회사란 사실은 바뀌지 않소!”

아수라장.

한두 사람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벌떡벌떡 일어나 자신들의 주장을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평화와 황금만이 가득해 보이던 이곳이 도떼기시장으로 전락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르민의 눈은 점점 날카로워져만 갔다.

그는 로동당 당원증을 꺼내 올리는 북쪽 돼지와 같은 자세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몇 가지 오해를 정정해야 할 것만 같군요.”

“뭔가?”

“우선, 이미 저와 백작님을 제외하고서도 전 세계 곳곳에서 비행기를 제작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당장 이번 공개 비행의 조종사였던 오일러 씨부터가 독자적인 항공기 제작 회사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사람들의 얼굴이 괴기하게 일그러졌다.

“저는 특허를 무기로 삼지 않을 겁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라이센스를 내줄 것이고, 각국의 재기 넘치는 이들은 얼마든지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비행의 꿈을 펼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그야, 하늘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르민은 반론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또한 <체펠린 비행선 회사>는 생각보다 그렇게 크나큰 메리트가 있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이 회사가 만든 LZ 1도 엔진은 마이바흐 씨에게 발주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비행선과 비행기의 제작엔 다루는 재료부터 해서 제법 차이가 크고.”

“잠깐! 잠깐잠깐!”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자네는!”

“뭐. 돈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황공하옵게도 신민들을 보살펴주시는 황제 폐하께서 얼마든지 은사(恩賜)를 베풀어 주기로 하셨습니다.”

‘카이저의 후원’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방금까지 뭐라 떠들던 사람들은 죄 합죽이가 되어 의자에 털썩털썩 앉았다.

이 독일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뒷배를 챙긴 놈에게 무슨 말을 한들 들리기나 할까?

그렇게 허탈감이 장내를 가득 메우고 더 이상 누군가의 숨소리마저 대포 소리처럼 들릴 만큼 지독한 침묵이 자욱하니 깔렸을 때.

“하지만 말입니다.”

청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체펠린 백작님께서 독일의 무수한 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선도적인 항공 개발자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백작님께서 비행기 개발에 착수하신다면, 뭐, 금방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비행선만을 고집하시는지라-”

“그야 뭐. 주주 여러분들께서 잘 타협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뒤 별 알맹이 없는 이야기가 몇 차례 오가고, 주주들은 기쁜 마음으로 ‘비행선과 비행기의 병행 개발’을 추진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추가로 자본을 조달하기로 하였으며, 연신 박수를 치던 아르민 로젠바움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뒤 일이 급하다며 퇴장했다.

“저게··· 스물도 안 된 애라고?”

한바탕 공연이 끝난 후, 누군가의 한탄 섞인 중얼거림만이 주주들의 귓전을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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