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03)

융커를 만나다

제국의 영광만이 가득하던 19세기가 끝나고, 무한한 인류 문명의 발전만이 기다릴 것 같은 20세기가 도래한 첫해.

아르민 로젠바움은 ‘모든 것을 끝낼 전쟁’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홀로 진저리를 쳤다.

베를린의 몇몇 시민들은 이 위대한 항공 개척자가 비 오는 날 웅덩이를 바라보며 화를 내거나 짜증을 토한다는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고, 역시 천재들은 하나같이 돌아버린 게 틀림없다는 귀납적 추론에 도달했다.

- 조직을 구성하는 방법은 간단해. 

첫째, 내가 모든 최종 결정권을 쥐도록 설계한다. 둘째, 내 아랫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두고 나는 심판이 된다. 셋째, 일이 잘못되면 나 대신 책임질 고기방패를 둔다. 쉽지?

“미쳤나 봐, 이 사람. 군생활 그딴 식으로 했어요?”

- 혹은 조직의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역동성을 포기하고 안정을 얻을 수도 있지. 정치장교라든가. 아니면 부사단장이라든가.

“근데 당신도 어차피 조직 경험이라곤 군대밖에 없지 않아? 나한테 훈수 둘 처지야?”

-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노무,,, 자슥이,,,!

“틀니 딱딱대는 것 좀 봐.”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 자신보다는 최소한 저 AI 망령은 밥이라도 더 많이 먹어보지 않았는가.

그의 조언에 따라 아르민은 가장 먼저 회사의 재무와 회계를 담당할 사람을 골랐다.

“아, 아들아.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거니?”

“헛소리 좀 그만하시고 빨리 우리 회사 재무 일이나 맡으세요.”

“아, 알았다.”

브루노 로젠바움은 모두의 무수한 환송을 받으며 정든 도이체방크를 떠났고, 그다음 날 곧바로 로젠바움 항공 제조 회사에 새 둥지를 틀었다.

야생의 정글 같은 초기 자본주의.

어린 애송이가 카이저의 후원을 받아 차린 회사라는 말에 쫄아버리면 사기꾼 자격이 없다.

(주)로젠바움을 길가에 굴러다니는 황금알쯤으로 생각하는 인간들이 전 세계에 드글거리고 있는 판국에, 아버지라는 인간에 대한 존경심과는 별개로 그는 회삿돈을 횡령하거나 삥땅칠 이유가 없는 유일한 인간 아닌가. 

돈 문제에서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도 이 인사의 이유 중 하나였지만, 사실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훨씬 더 컸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하지만.

“자기 애비를 직원으로 부린다고? 그거 패륜 아닌가?”

“패륜은 무슨, 효도지 효도. 내 아들이 사장이오, 내 아들이 비행기를 발명했소 하면 어깨 떡 벌어지지 않겠어?”

“그러니까 당신들은 자기 아들한테 굽신거리면서 사장님 사장님 할 거냐고.”

“보통 회사도 아니고 황제 폐하 후원으로 차린 회사인데 가는 게 영광이지!”

“아들이 나랏일을 하겠다는데 애비라는 사람이 쪽팔린다고 도와주지도 않는 게 더 쪽팔리는 일 아니겠어?”

아주 스리슬쩍, 어느새 아르민은 로젠바움가의 가장(家長)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여전히 가부장적 정서가 짙게 남은 독일에서 이는 아주 유용했다.

게다가 평생 은행에서 근속한 그가 또 알음알음 자신의 인맥들을 회사로 모아 왔으니, 여느 회사와 달리 돈은 썩어나지만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던 회사에 척추가 될 만한 중간관리자급이 대거 자리를 잡게 되었다.

기본 세팅이 마무리되자 남은 일은 이제 저 높은 하늘로 이륙하는 것뿐.

“더! 더더! 더 튼튼한 엔진! 더 체공 성능 좋은 설계!”

“다음 시험 비행 때 남부 돼지들에게 뒤지는 날엔 전부 슈프레강에 뛰어들어 죽는 거야!”

“비행기는 우리가 원조다! 졌다간 백작님께 얼굴 들 낯이 없어!”

거기에 더불어 베를린 공장과 뷔르템베르크 공장을 사실상 한 지붕 두 가족처럼 운영하기 시작하자, 독일 특유의 지역감정이 일종의 라이벌리를 형성하며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경쟁이 붙었다.

“이거 돈이 되겠는데.”

- 저러다 사고 날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놈의 돈이냐.

“타 개발사까지 끼워서 누가 누가 좋은 비행기를 만들었나 시연을 하는 겁니다.”

- 에어쇼 말이냐?

“아, 네, 그거.”

매일매일 천지가 개벽하는 혁신이 밥 먹듯 일어나는 항공업계에 미칠 듯이 기름까지 끼얹어줬다.

“에에잇, 로젠바움의 항공기는 괴물인가!”

“네 힘으로 이긴 게 아니다! 마이바흐제 엔진 성능 덕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졌으면서 뭐래, 병신들이.”

단 3년.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

1904년, 베를린.

나는 양복쟁이 군단을 거느린 채 그 이름도 찬란한 독일 제국 육군 수뇌부와의 협상을 재개했다.

“또 뵙게 되는구려. 지겹지도 않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중장님.”

육군 병참감, 폰 몰트케(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

일명 소(小) 몰트케로 역사에 남을 인물.

삼촌인 대 몰트케는 독일 통일의 영웅이지만, 조카 소 몰트케는 1차 대전 초기에 독일군의 전략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그대로 몰락해버렸다. 요컨대.

“육군의 병참을 통괄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내가 보았을 때, 항공기의 군사적 유용성과는 별개로 이를 군에 도입해야 할 충분한 당위성을 찾아볼 수 없었소.”

똥별.

지독한 똥별.

단언하겠다. 이놈은 무능하다.

황제의 밀명을 받은 나는 내 파트너가 될 예정인 몰트케를 신중히 탐색해 봤고, 놀랍게도 독일 군부 내에서조차 ‘쟤는 아무리 봐도 삼촌 빽 두른 병신 같은데?’라는 의구심 섞인 목소리가 나온단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대관절 왜 이런 몰트케가 병참감, 아니, 사실상 독일군 넘버 2로 군림하다가 나중에는 참모총장 자리에까지 오르느냐?

우리 팔병신 황제 폐하께서 이 몰트케를 총애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네. 당신이 총애하는 두 사람이 지금 대립하고 있잖아!

- 그걸 모른다고? 내가 누누이 강조했잖나. 카이저는 보나 마나 자네가 도와달라고 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걸세. 겸사겸사 혼담도 쪼개버리고.

그래서야 너무 악질 같잖아. 

나는 커피잔에서 빙글빙글 소용돌이치고 있는 허리케인 조를 낼름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이저와의 합의에 따라, 나와 에르나 폰 체펠린의 혼사는 ‘독일 육군이 항공기를 도입한 이후’로 잡혔다.

하지만 내가 충분한 기술력을 확보한 이후에도 독일 육군은, 특히 몰트케는 귀에 촛농이라도 부었는지 참으로 요지부동이었고, 결혼은 자꾸 딜레이되었다. 이제 백작은 몰트케가 황제의 밀명을 받아 이 결혼을 파토내기 위해 일부러 저런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건 몇 달 전, 육군이 제시한 항공기 요구 성능입니다. 우리는 이 조건을 초과 달성하였으며, 군부 여러분들께서 얼마 전 직접 시연에 참관하여 이를 직접 확인하셨습니다.”

내가 손을 휘젓자 부하 직원들이 얼른 두툼한 서류 다발을 내밀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무장한 항공기가 전쟁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지속적으로 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떠들어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전부 미래 지식으로 검증된 내용들이다.

독일 육군은 나름대로 내 제안을 검토했고, 내가 말한 것들이 실전에서 적용될 수도 있겠다는 데까지 의견이 일치했다. 이쯤 되면 이제 비행기 몇 대 사가야 정상이다. 비행기를 사고 싶지 않아도 최소한 샘플은 좀 가져가야 테스트를 해볼 것 아닌가!

“로젠바움 씨.”

“예, 장군.”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우리 독일 제국 육군은 그리 만만하지 않소.”

“절대 저는 만만하게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말이오. 세상에는 사회적 위신이라는 게 있소. 우리 육군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스무 살 애송이의 날틀을 구매하면 이 얼마나 위신에 크나큰 상처를 입겠소? 제국의 근간인 프로이센 육군의 명예는 결코 털끝만큼의 상처도 입어선 아니 되오.”

이 새끼, 왜 입으로 말을 하는 대신 똥을 싸고 있어?

‘어린놈이 만든 물건 사면 우리가 쪽팔린데’라니, 지금 장난하나?

보통 저따위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를 늘어놓는다는 건.

- 일반적으로 저런 꼬장질은 뇌물 달라는 신호야. 자기 사돈의 팔촌을 회사에 좀 꽂아달라거나, 아니면 공장을 자기 땅에 지어달라거나 뭐 그런 거. 내가 살아 있을 적엔 할배들이 부대에서 깽판을 치면 보통 대민지원 좀 먼저 보내달라고···.

근데 저 인간은 돈도 많다고.

이미 우리 회사 직원들이나 아빠 친구들이 몇 번씩 몰트케와 그 주변 인물을 쑤시며 ‘선물’을 제공하려 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몰트케는 진짜로 그냥 비행기를 사기 싫은 거다. 병신새끼.

저 새끼가 앞으로 참호에서 몇 명의 독일 청년을 함박스테이크 재료로 만들어버릴지를 떠올리며, 나는 애써 파들파들 입에 힘을 주며 스마일을 사수했다.

“결코, 독일 육군의 위신은 훼손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당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니까. 이제 그만-”

“러시아 제국 육군이 저희의 항공기 20대를 발주했습니다. 일본과의 전쟁에 투입될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러시아군은 전쟁터에서의 기술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처음으로 저희 항공기가 실전에 배치될지도 모르겠군요.”

태연스레 제 콧수염을 쓰다듬던 몰트케가 멈칫했다.

“제국을 불편하게 여기던 러시아인들조차 우리 로젠바움사의 항공기야말로 최고의 성능, 최적의 가격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불가리아, 루마니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또한 적극적으로 자사의 비행기를 군용으로 구매하고자 의사를 타진하고 있습니다.”

“으음···.”

내가 열변을 토하는 사이 부하 직원 하나가 실무진 군바리 한 명에게 몰래 쪽지를 전달했다.

쪽지를 확인한 실무자는 제 상관에게 귓속말을 했고, 그 상관은 또 자신의 윗사람에게, 그 사람은 또 자신의 윗사람에게··· 아무튼 기나긴 가족오락관이 이어진 끝에 한 장성이 조용히 몰트케를 불러냈다.

“흠. 이만한 성능이라면 기술 실증용으로 소수를 구매하는 건 고려해봄직하겠소.”

그리고 돌아온 몰트케는 방금까지 자신이 무슨 망언을 떠들어댔는지 모조리 까먹은 듯, 뻔뻔스럽게 떠들어댔다.

“제국 육군은 그 어떤 국가보다 항공력의 증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우리의 최첨단 공중 교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국적의 어떤 회사 제품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구매할 의사가 있지.”

몰하다, 추트케야. 개소리하지 말고 닥치고 구매 계약서에 서명이나 해.

그도 그럴 것이, 그 ‘쪽지’엔 프랑스 수출 계약이 체결 직전이라는 정보가 적혀 있거든. 국산 항공기를 프랑스보다도 늦게 도입하게 된다면 몰트케의 평판에 먹구름이 뭉게뭉게 끼게 될 게 뻔하다.

나는 그런 속내를 싹 숨긴 채.

“앞으로도 제국 육군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항상 정진하겠습니다.”

“바람직한 태도요.”

그의 거드름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먹고살기 더럽게 힘드네.

***

그날 저녁.

계약 체결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로젠바움사는 회삿돈을 털어 제법 호화스러운 연회를 개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잘 봐달라는 일종의 로비였다.

“그 어린놈 눈깔 봤나? 딱 보니 싸가지가 없어 보이더만.”

“어린 나이에 허명만 들어찼으니 싸가지가 있을 턱이 있겠나?”

“황제 폐하께서 그놈을 너무 싸고돌아서 문제야.”

하지만 물 좀 쳐보려는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핵심인 융커들의 의견은 대체로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카이저 빌헬름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첨과 아부를 일삼는 놈팽이들을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아르민 로젠바움은 최소한의 줏대도 없는지 아주 그냥 혓바닥이 다 헐도록 아부를 해대는 간신 중의 간신.

아부보다는 항상 직언을 던지곤 했던 몰트케로서는 저 간사한 기생오래비를 붙잡아다 강바닥에 처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어쩌겠는가. 저런 놈이 제국의 영웅이라는데.

몰트케는 지병인 두통이 확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관절 앞길 창창한 젊은이가 속에 얼마나 욕심이 가득 차 있으면 그토록 간신배 노릇을 거리낌 없이 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비록 날틀 만드는 재주가 있다곤 하지만, 황제 폐하의 총기를 흐리는 건-”

“폐하께서 저놈에게 작위를 수여하실지도 모릅니다. 막아야만 합니다!”

“그만.”

그가 손을 휘젓자 앵무새처럼 꽥꽥대던 따까리들이 모두 침묵을 지켰다.

“로젠바움이 아첨을 일삼는 모리배라지만, 딱히 나랏일에 훼방을 놓거나 사사로이 이득을 탐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혹 그가 폐하의 총애를 바탕으로 추잡한 짓을 한 적이 있나?”

“······.”

“아직은 주제 파악은 하고 있나 보군.”

카이저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면서도.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 순간 몰트케의 머릿속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로젠바움, 아직 군대를 가지 않았다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됐군.”

그의 입에서 절로 썩어빠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군대에서 사람을 만들어줘야지. 암암.”

아르민의 군생활이 꼬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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