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03)

각성

로젠바움사가 주최한 파티장에서 대놓고 회사 사장의 군생활을 꼬아놓겠다고 낄낄대는 이들.

옆에서 허드렛일하는 이들이 술잔을 나르고 음식을 깔고 접시를 정리하고 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이런 아랫것들의 눈과 귀를 의식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권력자는 그래도 되니까.

귀족이 평민을 갖고 노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이 나라는 우리의 나라인데 네가 어쩔 테냐.

‘사실 삥뜯는 거 맞음. 근데 어쩔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이 평민 새끼야.’

‘집구석에서 욕이나 하거나 투표장에서 야당 찍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냐고 이 하층민아.’

마치 어린애들이 잠자리 날개를 뜯으며 노는 것처럼, 어찌 보면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발상.

이 모든 것에 대한 보고를 접한 나는 한마디로 기분을 요약할 수 있었다.

“이러니까 나라가 점점 빨개지지, 시발.”

이딴 매콤한 신분제의 맛을 한번 보고 나니 단숨에 사회민주당이 너무 멋져 보이고 사회주의 혁명이야말로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수단으로 보인다. 역시 독일에서 마르크스가 튀어나온 덴 다 이유가 있지 않은가.

이들의 꼬장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

<체펠린 백작의 몰락··· 어디까지 추해지는가?>

체펠린 비행선 회사의 대주주이자 비행선 중독자로 유명한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이 자신의 옛 피후원자 아르민 로젠바움과의 혼사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하지만 그 영애가 약 4년째 혼인을 맺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알려져 있지 않다. 독일 귀족의 체면과 위신을 땅에 떨어트리는 백작의 이러한···.

===

또다시 잽 한 방.

이번 건 좀 많이 아팠다.

“좆같은 프로이센 놈들, 내 딸을 건드려?!”

“어르신, 진정하시고-”

“네놈이 빨리 우리 애 안 데려가니까 이딴 일이 벌어진 거 아니냐!!”

“황제가 기다리라는데 내가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어서 결혼을 합니까? 속도위반이라도 해야 했어요?!”

“차라리 하지 그랬어!”

때린 건 저 새끼들인데 이 영감은 왜 나한테 화내냐고.

지금 부랴부랴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도 기사 뜨니까 화들짝 놀라서 이러는 줄 알겠지. 남의 집 아녀자를 건드리는 시점에서 솔직히 수법이 꽤 많이 악질적이다.

도대체 왜 이 지랄을 하는가, 왜 나를 쿡쿡 찔러대는가 한참 고민했는데.

“사장아들님?”

“사장아들님은 또 뭡니까. 왜요, 아버지.”

“잠깐 서재로 오겠, 니?”

베를린의 집에서 눈을 좀 붙이려던 나는 아빠의 말에 서재로 향했고.

“높으신 분들이 뭐 좀 내놓으라더구나.”

“다 주기로 했잖아요. 선물이든 뭐든 돌리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제가 전에 아끼지 말라고-”

“그 수준이 아니야.”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예의 ‘요구 사항’들은 참으로 어메이징했다.

1. 지분 투자 요구.

2. 군의 요구 사항에 맞춘 항공기 우선 개발.

3. ‘공정한’ 입찰 경쟁이 될 수 있도록 타 업체에게 더 폭넓은 라이센스 허용.

“이거 사실상 칼만 안 들었지 강도 아닌가?”

“강도보다 더하지. 자기네들을 대주주로 삼아주고 자기네들 입맛에 맞춘 제품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경쟁자한테 그 기술을 공유해달란 소리니까.”

“황제 폐하께 가보겠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요.”

“···하지만, 폐하의 총애가 얼마나 가겠느냐? 여기선 저들에게 한 수 접어 주는 게 맞아. 이 독일 제국에서 융커들을 거스르고 어떻게 사업을 하겠니?”

“생각 좀 해볼게요.”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반항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갑자기 말문이 탁 막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이라도 하는데 어째서 사람이 꿈틀도 못하는가.

나는 집 대문을 박차고 나와 곧장 차에 올라탔다.

차라리 회사가 더 편했다.

***

사장실.

창문 너머로, 주말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직원들로 가득한 회사 전경이 보였다.

내가 미국으로 튀면 이 회사는 공중분해되겠지. 백작은 나와 엮여 안 그래도 꼬인 팔자가 더 꼬일 테고. 투자자들은 단체로 게거품을 물고.

미국까지 갈 필요도 없이,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이딴 굴욕을 겪으면서 살 일이 있었을까?

내 충성과 애국심의 대가는 고작 이건가?

-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이게 전제군주제야. 이게 신분제일세.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 일단 하나만 짚고 넘어가지.

창문 속 조범석이 어쩐지 더 다가오는 듯했다.

나는 시가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곤 창문 바로 앞까지 가까이 다가갔다.

- 이 나라 사람들의 상당수는 오늘 자네가 겪은 일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네. 네 아버지처럼.

“······.”

- 너만. 유달리 너만 화를 내고 있어. 아니, 화 그 이상이지. 네가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순전히.

“민주공화국을 알기 때문이다?”

- 그렇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기억이 뻔히 네 머릿속에 있으니, 저 개벼룩같은 양반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현실이 어디 받아들여지겠나?

그의 목소리에도 은연중에 서서히 분노가 깃들고 있었다.

- 그냥 미국으로 떠나면 돼. 떠나서, 다시 시작하면 돼. 카이저는 진노할 테고 자네가 독일에서 이루었던 거의 모든 것들은 깔끔하게 지워지겠지만, 미국엔 라이트 형제가 있지 않나? 그곳에서 새출발하고 항공 제작사를 크게 일구면 되겠지. 남들 따위 신경 쓸 필요 없어.

손을 뻗어 창문을 매만졌다.

2월의 차가운 냉기가 유리를 넘어 손끝으로 파고들었다.

- 왜 이민을 가지 않는 겐가?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니까.”

- 언제부터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나는 독일인이니까.”

꼬우면 이민 가라?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 이 나라인데 어째서?

포기할 수 없었다.

내 가족. 내 고향. 내 회사 모두.

털끝 하나도 내줄 수 없다. 내가 뭣 때문에.

사람이 이토록 간사했다.

카이저의 궁둥짝에 찰싹 붙어서 단꿀을 빨 땐 폐하의 은혜가 참으로 하늘과도 같았다.

하지만 저 더러운 융커 놈들에게 갑질 한번 당하고 나니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다 쳐죽여버리고 싶어진다.

- 아니지, 이 친구야. 자네의 분노는 지극히 정당해.

“또 무슨 개소리를 떠들려고.”

- 단순히 우리에게 피해를 끼쳐서 분노하는 게 아냐. 저들이 이 나라를 어떤 파국으로 인도하는지 우린 너무 잘 알고 있지 않나. 앞으로의 미래를 훤히 꿰뚫고 있잖나!

그렇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제서야 이 기묘한 기분의 정체를 깨닫고 잠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던 미래.

막연히 뭔가 바뀌겠지 하면서 도외시하고 있었던, 지옥이 울고 도망갈 끔찍한 시대.

전쟁.

패전.

잿더미.

황제는 폐위당해 쫓겨나는 것으로 제 죗값을 치른다. 평생 황제라는 자긍심만으로 살아온 이에겐 아마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형벌이겠지.

하지만 저 융커들은?

군사귀족이란 새끼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주제에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름자에 폰 돌림자 쓰는 놈들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정권이 집권해서도 그대로 장군 해먹고 잘살았다.

패배는 유대인 탓이라고, 빨갱이 탓이라고 선동하면서 제 기득권을 유지하다가··· 두 번째 전쟁을 향해 또다시 전 독일 국민들을 내몬다.

이 미묘한 불쾌함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주둥아리로는 영원한 충성을 떠들지만, 그 실상은 기득권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버러지 집단.

독일 민족의 골수를 짜먹는 종양 덩어리와 처음으로 제대로 조우했고, 그들의 끝없는 오만을 직접 맞닥뜨렸다.

- 예전에 한번 말한 적이 있지. 아르민 로젠바움 대신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이 조범석이의 기억을 가졌다면 미래를 바꿨을 거라고.

“그래.”

- 미래 지식을 과거로 보내려는 초월적인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설마 융커들이 전 세계인의 등골을 빨아먹는 미래를 원해서 나를 보냈겠나? 카이저의 제국이 승리한 세계. 케케묵은 귀족들이 영원토록 전 독일인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는 세계가 과연 올바른 세계겠나? 

그럴 리가 없다.

산신령인지 뭔지··· 대충 천사 비슷한 뭔가 아니겠나. 그런 게 실존한다면 당연히 신 또한 존재할 테고.

신이 존재한다면 저 버러지 같은 놈들을 어여삐 여길 리가 없다.

“역사를 바꿔야 한다는 게, 그래서 나온 말이었나.”

- 그거였나. 그래서 내가··· 백 년을···.

미친 콧수염이 한 인종을 말살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키는 미래도.

카이저와 융커들이 승리해 시대착오적 군주제를 이어나가는 미래도.

결국 비참한 실패로 끝날 공산주의 실험을 위해 무수한 사람들이 갈려나갈 미래도 아닌.

새로운 미래.

오직 나만 해낼 수 있는.

***

1904년 초.

에르나 폰 체펠린은 에르나 로젠바움이 되었다.

- 모름지기 큰일을 하려면 지금부터 이미지에 신경을 써야 하지. 기득권에 맞서려면 자넨 반드시 대중들, 저 구름 같은 민중들의 힘을 빌릴 수 있어야 해.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 그야 ‘바람둥이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교화되는 이야기’는 모두가 좋아하니까. 이제 유목민 짓은 그만하고 한 여자 옆에서 정착생활이란 걸 좀 하게.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헛짓하고 다녔다간 백작이 날 살려둘 것 같아요?”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자신의 졸개 중 한 명을 내 결혼식에 참석시켜 내가 여전히 그의 총애를 얻고 있음을, 그리고 이 결혼을 인정했음을 암시했다.

카이저의 태도가 명확해지자 기사는 순식간에 우리의 결혼을 신분의 벽을 넘어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치장해 주었고, 다시 한번 내 이름은 독일 전역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 새신랑이 된 나는 카이저의 은혜에 감읍하며 다시금 황궁으로 향했다.

“로젠바움. 마침내 육군이 항공기를 받아들였다지? 참으로 장하도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제국군의 반석이자 기둥과 같은 이들이 먼저 항공기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소인은 그저 한낱 날틀 만드는 기계공에 불과하였습니다.”

“짐은 이 나라의 근간인 저들 귀족들과 그대가 서로 화합하지 못할까 봐 참으로 아쉬웠도다. 그대가 이토록 공순하니 아무 문제도 없겠구나. 다행이로다.”

나는 입안의 살을 한번 꽉 깨물었다.

내가 먼저 숙여주니 다행이다? 역시 빌헬름 이 새끼도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나는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거무튀튀하게 들끓는 감정을 슬며시 다시 집어넣고, 가슴 절절한 충신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소인, 폐하께 청이 있사옵니다.”

“무엇인고?”

“러시아인들이 비열한 황인종, 일본인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마침 러시아가 소인의 비행기를 구매하였으니, 제가 직접 만주로 건너가 일본인들에게 백인의 힘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누구보다 일본을 싫어하는 레이시스트 카이저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활짝 웃었다.

그래. 지금 많이 웃어 둬라.

언젠가 내가 너를 그 옥좌에서 끌어내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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