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03)

항공전의 서막

옛날 어떤 유명한 정치인이 ‘전쟁은 너무 막중한 일이어서 군인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라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독일 제국은 거꾸로 돌아갔다.

군바리 새끼들이 ‘정치는 너무 막중한 일이니 정치가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라면서 자기들이 자꾸 나랏일에 끼어들려는 게 바로 이 요절복통 독일 제국.

물론 그치들이 내 말을 들으면 어이없어하리라.

‘이 나라는 원래 우리 꺼였는데 너희 하층민들이 끼어든 거잖아’라며 윽박을 지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저 군바리들은 수십,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전해져 내려오는 중세 영주들의 후손이고,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서유럽의 못된 버릇을 이 나라에 받아들이려는 불순한 놈들이잖은가.

근데 어쩌라고.

내가 꼽다는데, 니들 따까리로 지내기엔 배알 꼴린다는데 어쩌라고.

내가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독일 제국을 지키기 위해 한목숨 바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미래를 봐버렸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놔야 했다.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 그 폐허 위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면.

그러니까.

“만주로 가겠다고요?”

“응.”

“전쟁터로 말이지?”

“그래.”

내가 인간쓰레기의 길을 걷는 것도··· 전부 이 나라를 위해서다. 진짜다. 믿어 달라.

결혼식을 올린 지 나흘 만에 나는 에르나 로젠바움 부인에게 장기 출장을 통보했다.

에르나는 내게 과분할 만큼 착하고 좋은 여자였다.

내가 아직 김나지움 다니고 있던 시절부터 백작의 저택을 드나들며 안면을 텄으니 거의 준-소꿉친구 아닌가. 가끔 왜 내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제 팔자를 스스로 꼬지?

나와 결혼하기 위해 몇 년 동안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딘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자니 참 가슴이 쿡쿡 찔렸지만, 나는 오히려 뻔뻔스럽게 팔짱을 끼고 얼굴을 더 높게 들었다.

“러시아 놈들이 우리 회사 비행기를 20대씩이나 구매했어. 전쟁 중에 그 비행기가 운용된다면, 우린 또다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지.”

“···다치면.”

“나는 그냥 기술지원과 판촉 때문에 가는 일개 영업사원이야. 전쟁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빨리 출장 짐이나 싸줘.”

- 와. 쓰레기 주제에 당당하기까지 하다니. 이쯤 되면 존경스럽다. 존경스러워. 우리 마누라한테 저렇게 싹퉁머리없이 말했으면 바로 후라이팬으로 뺨따구를 처맞았을 텐데.

에르나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가.

내 양 볼을 붙잡고 그대로 쫙 늘렸다. 아. 아아아.

“아, 아파. 아파파파.”

“이런 인간인 건 알고 결혼한 건데 어쩌겠어. 살짝 후회가 되긴 한데.”

“너무해.”

“너무한 건 너고!”

불꽃 싸다구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건만, 그녀는 화장대로 가선 십자가 목걸이 하나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우리 어머니가 쓰던 건데,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갔을 때도 이거 갖고 갔대요. 무사히 다녀와요.”

“나는 군인이 아니라 걱정 안 해도 된대도. 고마워. 잘 쓸게.”

그 순간, 내 주먹을 붙든 그녀의 양손에 무시무시한 악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프레셔는 뭐, 뭐냐.

“대신. 딴 여자랑 놀아나면··· 잘라버릴 거야.”

“다 끊었어. 일하러 가는 거라고. 자르긴 뭘 잘라. 워워. 워.”

“싹둑.”

우리는 그날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한참 뒤에야 잠들었다.

베를린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내가 의용병 신분으로 전쟁에 끼어들 생각이란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을 했다간 정말 그녀가 혼절하든가, 눈깔이 뒤집힌 체펠린 백작이 날 쏘러 오거나, 혹은 둘 다일 게 뻔했으니까.

물론.

그런다고 내가 망설이진 않았겠지만.

기어이 목숨까지 판돈으로 올리게 만든 이 나라 귀족들을 저주할 뿐이었다.

***

1904년 중순.

나는 배를 타고 독일령 교주만(키아우초우)을 거쳐 만주에 있는 러시아군에 무사히 합류해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오셨군요, 사장님.”

“사장님이라니. 그 말 들으니 어쩐지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데요. 그냥 편히 말씀하시죠. 제가 많이 도움받고 있으니까요.”

“그럴까? 고맙네.”

아우구스트 오일러 씨는 원래 본인만의 항공기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작별을 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회사가 너무 잘난 탓에 경쟁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나쁘지 않은 가격에 그의 회사를 날름 잡아먹었고, 오일러는 중역 타이틀을 달고 계속해서 개발 업무에 전념했다. 

내가 융커다 결혼이다 하며 베를린에서 박 터지게 골머리 썩이는 동안 그는 러시아군에 인도할 비행기 20대와 함께 먼저 만주에 도착했고.

“전쟁은 러시아군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네. 우리나라 군인 몇 명이 관전무관으로 러시아군에 갔었는데, 전부 모조리 철수했다더군. 칭다오의 우리 직원들이 듣자 하니 러시아군은 군기부터 시작해서 전의까지 모조리 개판이라는데.”

“그래요?”

“지금이라도 일본군 쪽으로 편을 갈아타는 건 어떻겠나? 러시아군에 항공기 인도는 이미 끝났지만, 시연용 비행기가 두어 대 있긴 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쇼.”

카이저 빌헬름이 황화론, 그러니까 ‘동양인들이 언젠가 유럽을 불태울 것’이라는 기괴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

내가 왜 신혼인데 부인 품을 벗어나 세계 끝 극동까지 왔겠나. 오로지 카이저에게 딸랑거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일본 편을 들면 카이저가 참 좋아하겠어.

나는 러시아군 지휘관을 찾아가 인사를 했지만, 그들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쓸데없는 장난감 산다고 또 헛짓거리 했구만.’이라는 반응 외에 딱히 유의미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했다.

“저 비행기라는 게 뭘 할 수 있겠나?”

“탁 트인 만주 벌판에서 항공기를 통한 정찰은 장군님들께서 전쟁을 지휘할 때 크나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에겐 역사와 전통의 카자크 기병대가 있네. 기병들을 통한 정찰이라면 이미 익숙하네만.”

“하지만 저희에겐 훨씬 더 특별한 게 있지요.”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떨떠름해 하는 그들에게 온갖 알랑방귀를 뀐 끝에 우리의 비행기를 직접 두 눈으로 보여주었다.

“저희가 군용으로 개발한 이 기체는 그동안 민수용으로 판매되던 기체와는 질적으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두 명이 탑승할 수 있군그래.”

“그렇습니다. 앞좌석에 탑승한 사람이 기체의 조종을 맡습니다. 그리고 뒷좌석에는 바로 이 문명의 이기가 준비되어 있지요.”

나는 뒷좌석에 거치된 네모난 물건을 가리켰다.

“저희가 선보일, 세계 최초의 정찰기 ARZ(Aufklärungsflugzeuge Rosenbaum-Zeppelin)-1는 보시다시피 코닥(Kodak)과 제휴해 카메라 촬영에 최적화된 설계를 적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지휘관 여러분들께서는 ‘항공사진’이라는 20세기의 혁신을 맛보실 수 있습니다!”

“흐으음.”

“적의 참호, 진군로, 어디에 어느 숫자가 있는가, 야포는 몇 문이 움직이고 있는가. 모든 지휘관들은 항상 정찰병이 얼마나 정확하게 적의 숫자를 확인했는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턴! 사진이라는 물적 증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지휘관들은 조금 마음이 동하는 듯했다.

“그러면 한번 확인해 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러려고 제가 직접 왔습니다.”

나는 최대한 매력적인 스마일을 지으며 요청을 수락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일러가 조종간을, 나는 카메라를 잡은 뒤 우리는 유유히 만주의 높은 하늘을 향해 이륙했다.

세계 최초의 실전 투입이었다.

***

일본군은 발칵 뒤집혔다.

“으아! 으아아아!!”

“괴조(怪鳥)다! 괴조가 우릴 잡아먹으려 한다!!”

요란한 엔진음과 프로펠러 소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처음으로 접한 일본군은 한동안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저건 괴조가 아니라 비행기! 로스케 놈들이 쓰는 날틀이다!!”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단숨에 목을 베어주마! 정신들 차려!!”

일본이라고 해서 비행기를 모르진 않았다.

실물을 본 이들은 극히 드물었지만, 적어도 전신이나 우편을 통한 정보 전달이 되는 시대니 ‘사람이 하늘을 나는 기계’가 발명되었단 사실을 아는 이들은 제법 있었다.

하지만 병졸들은 아니었다.

농촌에서 농사짓다가 징병당해 끌려온 이들에게, 난생 처음 접하는 비행기가 머리 위를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고서도 무덤덤하길 바라는 건 너무 과도한 기대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가 점점 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이 예의 비행기를 이용해 아군의 이동 경로와 작전 태세를 손금 보듯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여순 요새를 관측하기 위해 띄웠던 열기구가 모조리 추락했습니다! 놈들이 권총으로 기구를 쏴대니 버티질 못합니다!”

“곳곳에서 카자크 기병대가 출몰하고 있는데, 이전과 달리 아군을 사냥하듯 치밀하게 움직입니다. 황군이 어디에 어떻게 포진해 있는지를 훤히 꿰고 있는 상태에서 기동하니 상대하기 훨씬 까다로워졌습니다.”

“으음···.”

항공사진의 맛을 본 러시아 군부는 언제 자신들이 뜨뜻미지근했냐는 듯 적극적으로 비행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오락과 레저용으로 사비로 비행기를 구매해 타고 다니던 이들이 ‘하늘의 기사’로 참전해 저 높은 창공으로 이륙했고, 주요 전장이란 전장엔 끊임없이 러시아의 비행기가 신의 눈처럼 만주 곳곳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일본군은 완전히 맛이 가버리기 전.

“우리도 비행기를 사들여야 합니다.”

“저 비행기는 독일제라고 들었소. 그리고 독일은 러시아를 편들고 있고! 저 비행기야말로 카이저의 복심을 보여주는 무기란 말이오!”

“프랑스에서도 비행기를 제작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구입하면 대관절 언제 수령할 수 있소?”

“수령한다 한들 저 날틀은 누가 조종합니까?”

제공권의 중요성, 그리고 하늘을 통한 관측을 직접 몸으로 당해본 일본군은 즉시 교훈을 깨달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대응하거나 카피가 불가능했기에 그 교훈은 더욱 쓰라렸다.

“로스케의 비행기가 상공 위를 지나가면 전 장병은 일제히 비행기를 향해 화망을 펼쳐 소총 사격을 개시한다.”

“소구경 야포 끌어와! 어떻게든 한 놈만! 한 놈만 격추시키면 장병들의 사기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들이 임기응변으로 짜낸 대응책은 훌륭했다.

1904년의 기술력으로 날아다니는 비행기는 느린 데다가 내구성은 엉망진창.

고작 소총수들이 뭉쳐 쏴대는 총알이라 하더라도, 맞으면 정말 격추당할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정화수 물 떠놓고 안 맞길 기도하는 수밖에.

“러시아군이 저 비행기를 알차게 운용하는 모양입니다.”

“성능이 궁금한데. 다시 러시아 측에도 관전무관단을 보내 볼까?”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대결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느긋하게 즐기던 세계 각국의 관전무관들은 저 신병기가 앞으로의 전쟁에 어떤 역할을 할지 상상하며 자신들의 문학성을 뽐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 비행기가 단순히 정찰을 하는 대신, 기관총을 장착하고 땅을 향해 긁으면?”

“폭탄을 들고 이륙한 뒤 던지면 적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을 테지.”

“지상에서 저 높은 하늘에 있는 비행기를 물리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은데··· 결국 비행기는 비행기로 물리쳐야 할 것 같군. 하늘을 장악해야만 한다.”

미국 관전무관 페이튼 마치(Peyton C. March)와 조지프 퍼싱(John J. Pershing).

독일 관전무관 막스 호프만(Carl Adolf Maximilian Hoffmann) 등.

그들은 이제 하늘을 새로운 전장으로 인식했다.

더 좋은 항공기.

더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항공기.

적의 항공기를 내쫓을 수 있는 항공기.

그리고 ‘공대지’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항공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들도 있었지만,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해냈다!! 격추했다!!”

“보아라! 대일본제국 황군이 괴조를 쓰러뜨렸다!! 아마테라스 여신께서 가호하시는 황군을 가로막는다면 괴물을 부리는 로스케도 결코 무사할 수 없다!!”

일본군이 마침내 처음으로 러시아 정찰기를 격추하는 데 성공한 후.

아르민 로젠바움은 카메라 대신 수류탄 한 뭉치를 들고 이륙해 한 무리의 일본군 머리 위에 떨어트렸다.

인류 최초의 파일럿이란 타이틀은 오일러에게 양보했지만.

인류 최초의 폭격수란 타이틀은 그의 것이었다.

다시 한번, 그는 자신이 만든 발명품이 여느 시시껄렁한 것들과 달리 세상을 영원히 바꾸었다고 만천하에 선언했다.

그리고 세상은 그의 외침에 호응해 쩌렁쩌렁 메아리를 토해냈다.

<로젠바움, 비열한 원숭이의 머리에 천벌을 떨구다!>

<“불벼락은 건방진 황인종에게 충분한 답장” 카이저의 말말말>

<‘로젠바움은 충신. 내 지시를 받고 만주로 향했다’ 빌헬름 황제 충격 발언의 연속>

<폰 티르피츠 제독, “조만간 제국의 군함들도 항공기를 이륙시킬 수 있을 것”>

<밸푸어 영국 총리, “황제의 망언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독일에 전쟁을 선언해야 한다.”>

조금 이상한 메아리도 섞여 있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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