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03)

독일의 외교는 세계제일

만약 지금 누군가 메스로 내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낸다면, 그 심장엔 아마 선명하게 <충신>이라고 써져 있으리라.

- 아범아, 지랄이 짜구나.

아니. 좀 들어 보세요.

다른 건 몰라도 해군에 관계된 일이다. 조금이라도 전투력이 향상될 일이라면 영국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입하겠지.

티르피츠 제독이 러일전쟁에서 항공기의 활약상을 듣고 ‘야 이거 해군에 도입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세계 최고의 해적들인 영국인들도 지금 런던 어딘가에서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내가 수상기를 개발하든 항공모함과 그 함재기를 개발하든 아무튼 해군에 비행기를 도입하려면 당연히 1차 대전이 터지기 이전이어야 한다. 대전쟁이 터진 이후라면 독일에 그런 실험적인 투자를 할 여력이 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나?

- 그건 맞는 말이지. 영국과 프랑스는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전차를 개발했지만, 독일은 그걸 보면서도 제대로 전차를 양산할 여력이 없었으니. 해군은 더하겠군.

그렇지.

그리고 1차 대전이 터지기 이전에 개발해서 납품한다면 당연히 영국인들이 긴빠이쳐서 베껴 간다. 그럴 바엔 그냥 내가 돈이나 벌고 세금 내서 애국하는 게 맞지. 내가 이토록 논리정연하다.

“제독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오늘 개안을 하는 듯합니다. 영국이 저토록 전 세계에 대고 패악을 떨치고 있는데,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선 반드시 해군이 강해져야만 하겠지요.”

“하하하! 이를 말인가?”

“저는 모든 힘을 다해 연구에 매진하겠습니다. 반드시 성과를 내 제 조국에 대한 충정을 입증하겠습니다!”

“고맙구만. 혹 짬이 난다면 해군연맹(Deutscher Flottenverein)에도 가입해보겠나? 이 나라의 미래가 해군에 달렸다고 믿는 우국지사들의 모임이라네.”

“물론입니다!”

내 깍듯한 반응에 제독도 흥이 붙었는지 열심히 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선 저 사악하고 음흉한 데다 신뢰할 수 없기까지 한 영국인들이 언제든 이 나라에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네. 대체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길래,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함대를 건설하겠다는데 저리 발광을 한단 말인가?”

“맞습니다. 우리가 배 좀 뽑겠다는 게 어째서 시비가 걸릴 일인지 참 이상하지요.”

“우리의 대해함대만으로 저 영국인들의 함대에 맞서기는 당연히 어렵지. 그러니 그대가 발명한 항공기가 큰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군.”

티르피츠는 이름에 ‘폰’ 자가 붙긴 하지만, 1890년에 카이저에게서 귀족 칭호를 수여받기 이전엔 평범한 의사 집 아들에 불과했다. 융커는 아닌 셈.

나는 최대한 이 국가적 영웅에게 잘보이기 위해 열심히 딸랑거린 후, 해군용 항공기 납품에 대한 구두 협상을 끝냈다.

공통의 적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친구를 사귀는 일은 참으로 쉬웠다.

***

일본에 출장 나갈 사람들을 선발하고 새로 채용하는 작업을 끝낸 뒤.

이젠 정말 사교라는 걸 해야 할 시간이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내 정치적 노선과 영향력을 확보해 놔야만, 훗날에 대비할 수 있을 테니.

인맥 관리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단순히 돈 크게 벌어서 잘 먹고 잘살자는 목표가 끝이라면 구태여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장차 이 나라를 거머쥘 역량을 가진 거물이 되려면 지금부터 미리미리 얼굴 좀 팔고 다녀야 한다. 

당장 주식만 봐도 장투 안 하고 단타만 치면 망하지 않나. 나는 수십 년 뒤를 내다보는 투자를 해야 하니, 당연히 아직 아무도 미래를 모르는 동전주에 엔젤 투자를 해야지.

그러니까 예를 들면.

“안녕하세요, 아저씨. 놀러 왔어요.”

“아저씨 아니라니까. 형이라고 해.”

“맨입으로요?”

“초콜릿 하나 줄게.”

“네, 형.”

저 입버릇 나쁜 꼬맹이가 바로 훗날 세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전범, 헤르만 괴링이다.

지금부터 미리미리 회사 브랜드라는 걸 관리해야 하니, 우리 회사는 어린이들에게 비행기라는 개쩔고 멋진 아이템을 과시하면서 국뽕까지 불어넣고 있었다. 시험 비행 한 번 나갈 때마다 무슨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온 동네 애들이 전부 다 뛰쳐나온다니까.

미래의 에이스 파일럿답게 괴링 역시 비행기에 굉장히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일단 결론만 먼저 요약해서 말하자면, 현재 괴링 어린이는 내가 독립한 뒤 둘만 남은 우리 부모님 집에서 하숙 비슷한 생활을 하며 혼자 베를린에서 김나지움에 다니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가 아기 괴링에서 진화한 어린이 괴링을 만났을 땐 무척 당혹스러웠다.

“잘 지내고 있니?”

“뭐, 그저 그래요. 학교는 더럽게 재미없고 집은 개판이거든요. 빨리 군에 입대하고 싶어요.”

“집은 왜? 아빠가 때리니?”

“아빠요? 아빠가 어떻게 때려요, 집에도 못 들어오는데.”

“아빠가 집엘 못 들어온다고?”

“제 대부인 에펜슈타인 아저씨가 성에서 살고 있는데요, 거기서 같이 살아도 된대서 우리 가족들 전부 거기서 살고 있는데요, 아빠는 출입금지라서 성 밑 마을에서 따로 살아요.”

내가 지금 뭘 들었지?

“아빠가 왜 출입금지야?”

“왜긴요. 에펜슈타인 아저씨랑 우리 엄마랑-”

“오케이. 거기까지.”

“우리 엄마 침실이 의사양반 바로 옆방인데 매일 밤마다.”

“그만그만. 그만! 더 묻지 않을게!”

나는 손가락으로 외설스러운 동작을 하는 괴링 어린이를 보며 절로 탄식하게 됐다. 이게 아노미 현상인가? 윤리의식의 파괴 뭐 그런 건가?

21살 연하의 여자를 후처로 들일 만큼 잘나가던 변호사, 거기에 식민지 총독까지 지낼 정도로 승천하던 아빠 괴링, 하인리히 괴링 씨는 아이티 영사직을 마지막으로 비참하게 몰락했다.

그가 초대 총독을 맡았던 식민지 나미비아는 아무것도 없는 똥땅에다가 심심하면 반란이 일어나는 동네였고, 비스마르크 코인을 탔었는데 그 비스마르크도 짤려서 집에 돌아갔다. 

전 재산을 다 까먹고 나라에서 내주는 국민연금만이 수입의 전부가 된 괴링네 가족은 사실상 끝장났고, 우리 엄마랑도 여러모로 개같은 인연이 있는 유대인 의사 에펜슈타인은 집 한 채 없어서 거리로 내앉을 판이었던 괴링 일가를 통째로 거둬준 대신 현실에서 기획작 야동을 찍고 계셨다.

- 19세기 좀 세네. 아니, 이제 20세기인가···.

범석이조차 혼이 쏙 빠져나갔으니 더 말해 무엇 하리오.

대충 알았다. 너희들의 도덕.

이런 파탄 가정에서 자라난 어린이들이 드글드글했으니 독일이 미쳐버린 나라가 된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짓을 하다간 다들 미쳐버리게 된다고.

우리 로젠바움가도 충분히 개판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마가 옆집 아저씨 애인이 돼서 생활하는 개막장 집안 괴링네나 엄마한테 전기충격받고 학대당하던 팔병신 카이저 같은 걸 비교해 보니 음··· 우리 집은 선녀다. 어쩌면 우리 집안은 그래도 1등급까진 아니어도 대충 3등급쯤은 되는 거 아니었을까.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이 황폐한 정신세계에서 자라나는 괴링 어린이를 최소한 저 개막장 삼류 포르노 집안에서는 떼어놓기로 결심했고, 다짜고짜 우리 엄마아빠한테 애를 맡겼다.

“빨리 전쟁 이야기 해주세요. 빨리요. 그거 들으러 왔단 말이에요.”

“전쟁이 뭐가 좋다고 그걸 듣고 싶니.”

“멋있잖아요! 정말 저 군대 갈 때쯤엔 군대에서 비행기 몰고 싸울 수 있는 거예요?”

“그래. 지금 열심히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 언젠가는 하늘의 주인이 된 나라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거란다.”

내가 한창 잼민이 괴링에게 꿈과 희망, 용기를 가득 불어넣어 주고 있을 때, 에르나가 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누나.”

“왜 나는 아저씨고 에르나는 누난데?”

“액면가가 달라서요. 아야!”

나는 봐주지 않고 딱밤을 때렸다. 망할 꼬맹이 같으니. 그런 나쁜 주둥이를 교정하지 못하고 자라났으니까 커서 가스실 같은 걸 짓게 됐지.

나는 한 손으로 살짝 부푼 에르나의 배 쪽을 가리키며 다른 손으로 잼민이의 머리를 더 꾹꾹 눌렀다.

“이상한 소리 하면 진짜 쫓아낸다. 태교에 방해돼.”

“태교는 또 뭐에요. 아무튼 암 말도 안 할게요.”

“그래. 얌전히 주는 거나 얻어먹고 가.”

“왜 애를 구박하고 그래.”

“얘 입버릇을 안 겪어봐서 그래.”

“저는 숙녀분껜 깍듯한데- 아, 아야야야.”

그래. 많이 먹고 많이 커라.

인간말종으로 암흑진화하지만 말고.

***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독일 외교는 멸망했다.

카이저와 그 신하란 놈들은 <러시아와 일본이 양패구상해 일본이 개박살나고 러시아는 피투성이가 되어 승리>라는 참으로 야무진 꿈을 꿨었다.

이를 위해 아낌없이 퍼주는 나무가 되어 러시아에게 지원을 퍼부었지만, 받아먹는 러시아의 상태는 참으로 불량한 데다가 그 꼴을 본 영국의 눈깔이 휙 뒤집히고 말았다.

“이 비열한 독일 놈들! 그래, 차라리 지금 한판 붙자!”

“아니, 우린 중립이라니깐···.”

“대놓고 러시아 편들고 있으면서 무슨!”

여기에 카이저 특유의 뻘짓이 겹치며 독일은 곳곳에서 쓸데없는 원한 스택을 쌓아나갔다.

예를 들면, 프랑스 대통령이 이탈리아를 공식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프랑스 대통령이 이탈리아에 머무르고 있을 때, 갑자기 카이저 빌헬름은 황실 전용 요트 <호엔촐레른>호를 타고 지중해 투어를 즐기다가 이탈리아 영해에 진입했다.

그리고 그 뒤 코미디 같은 일이 터졌다.

‘쟤들은 임기제 대통령이고 우리는 황제 폐하신데, 프랑스 대통령보다 독일 황제가 의전을 못 받으면 말이 안 되잖느냐. 의전 좀 때깔나게 해달라.’

‘프랑스 대통령은 우리가 초빙했고 너희 황제는 갑자기 멋대로 왔잖아.’

‘아니, 그래도 우리 가오가 있지···.’

‘당신들이 지금 우리 체면을 짓밟고 있잖아!’

독일 - 이탈리아 관계는 순식간에 개판이 되었다.

덤으로 영국과 프랑스 언론은 이 카이저의 유람을 가리켜 <카이저가 이탈리아에게 누구 줄을 탈 것인지 공갈협박을 치고 있다>라고 보도했고, 모두가 그 말을 믿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열강 대다수의 여론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지만, 정작 독일 국내는 물론 독일의 수뇌부들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 건설할 독일의 함대. 그리고 러시아의 발트 함대. 이 두 함대가 힘을 합쳤을 때 영국 함대를 상대할 만한 견적이 나와야 하네.”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무너뜨리고 독일-러시아 동맹을 만들 수 있어. 이러면 대륙의 패권이 사실상 우리 독일의 손에 떨어지는 셈이지.”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영국인들은 셈이 빠르지. 독러 동맹이 눈앞까지 다가온다면 영국인들은 독러 동맹을 상대하느니 그냥 독일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낫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우린 그때 느긋하게 누구를 간택할지 고르면 되네.”

“예···?”

<강력한 함대를 가지면 러시아도 영국도 우주최강 독일과 손잡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라는 카이저의 야무진 꿈은.

“황국의 흥망이 이 전투에 달려 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 노력하라!”

“전 함선, 포격 개시!”

그토록 러시아가 자랑하던 발트 함대가 모조리 용궁으로 떠나는 순간 끝장났다.

“러시아가··· 졌다고? 어째서?”

“폐하.”

“그 섬나라 원숭이들이 대체 어떻게 러시아를 이겼단 말이냐! 영국이야! 또 영국이 수를 쓴 게야!”

러시아의 패전은 <그레이트 게임>의 종료를 뜻했다.

더 이상 러시아는 아시아로 진출할 수 없다.

더 이상 러시아는 영국의 경쟁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독일은?

프랑스와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원수 관계.

영국과의 관계도 끝없이 악화되어 ‘독일은 신뢰 불가능한 나라’로 도장 꽝.

이탈리아는 그나마 친하다 할 수 있지만, 그 대신 독일의 떼놓을 수 없는 친구인 오스트리아와 원수 관계.

러시아는 이제 이빨이 다 뽑힌 관계로 더 이상 영국의 경계를 못 사는 처지로 전락.

독일인들 자신은 쉽게 깨닫지 못했지만.

이미 독일의 파멸은 이 시점에서 사실상 확정되었다.

예정된 파멸을 피하기 위해서는 매우 강력한 외교적 조치가 필요했지만.

“슐리펜 참모총장. 짐에게 할 말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폐하. 지금 당장 프랑스를 침공해야 합니다.”

“총장. 혹시 낮술하셨소?”

“러시아가 나라 꼴을 가다듬기 전에 지금 당장 프랑스를 향해 예방전쟁을 개시해야 합니다. 손 놓고 있다간 10년 내로 러시아-프랑스 연합군의 손에 이 나라가 망합니다!”

융커들은 카이저보다도 더욱 비범했다.

그동안 대체 나는 뭘 하고 있었냐면.

“로젠바움 씨는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저를 만나도 괜찮습니까?”

“뭐 어떻습니까. 에베르트(Friedrich Ebert) 씨도 폐하의 신민 아닙니까.”

“보내주신 후원금은 대단히 감사하지만 솔직히 당황스럽군요. 혹시 폐하께서 익명으로 우리를 매수할 작정이시라면-”

“저희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환경을 개선하고 싶은데, 사회민주당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들 빨갱이들의 시선을 모른 척 흘려넘겼다.

왜들 이래요. 직원 복지에 신경 쓰는 사장 처음 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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