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03)

황금 아치

독일어로 Einjährig-Freiwilliger.

영어로는 One-year Volunteer.

한국어로 단순히 번역하자면 ‘1년 자원입대자’고, 의역하면 ‘학사 군복무’쯤 되는 병역 의무 이행 방안.

대학교 입학 또는 고졸, 혹은 국가가 인정하는 과학, 기술, 예술계통 종사자이며 전과가 없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군에 끌려가는 대신 저 특별한 테크트리를 탈 수 있다. 이 시대에 고등학교 졸업자라면 대단히 희소한 지식인 계층이니 그만한 대우를 해주는 셈.

혜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만 25세 전이라면 입대 일시 지정 가능.

입대할 부대도 지정 가능.

병영 생활관에서 사는 대신 영외 거주도 가능. 당연히 생활관에 거주하게 된다면 따라오는 각종 잡일 - 청소나 설거지 등도 자연히 패스.

그래서 이 형태의 군복무를 하려는 이들은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가 있는 곳 부대에서 군복무를 신청했고, 대학을 휴학하지도 않고 그냥 군복무와 학업을 병행하는 형태를 많이들 취했다.

물론 군대에 미친 나라, 군대가 나라를 만든 곳 프로이센답게 1년을 복무한댔지 절대 1년간 꿀을 빨게 냅두지는 않는다.

6개월 동안 병으로 복무하면 상~병장급 계급으로 진급.

거기서 3개월 더 복무하면 부사관.

전역 전 시험에 통과해야 비로소 소위. 

진급할 때마다 시험을 쳐야 하고, 훈련도 평균 두 번 정도 뛰어줘야 한다. 적어도 나이롱까지는 아니었다.

이렇게 좋은 제도라면 자격이 되는 모든 사람이 1년 군복무를 신청하겠지만, 현실은 약 30%만이 신청을 했다.

왜냐면, 1년 복무자들은 군복무 기간 동안 들어가는 일체의 비용을 자비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근본은 있는 집 자식을 위한 제도니까. 신분제 국가에 뭘 바래?

일체의 장구류, 장비, 군복, 헬멧, 숙박비, 식비, 총알값, 각종 수선 도구 등등등··· 모조리 자비 부담. 21세기식으로 치환해서 몇천만 원쯤 깨지는 건 순식간이다. 기병으로 복무하면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게다가 군국주의 국가답게 장교 전역자는 사회적으로 어깨 좀 으쓱하고 다닐 수 있었는데, 장교로 집에 가느냐 부사관으로 집에 가느냐가 달린 마지막 시험엔 ‘선임 장교들의 평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멋진 나라 프로이센의 장교들은 자신들이 봤을 때 ‘장교로 쳐주긴 좀 그런’ 이들을 사정없이 짤라냈다. 돈 없는 고학생이라거나, 집안 빽이 좀 약하다든가, 유대인이라든가 하면 대개 장교 계급장을 받지 못했다. 내 조국이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애국심이 깎여나간다.

사실, 해군과 손잡게 된 시점에서 해군으로 가 1년 복무하는 방안도 있긴 하다.

하지만 고작 1년을 편안하게 보내겠다고, 10년 뒤 1차 대전이 터졌을 때 해군에서 복무한다? 아무것도 못 하고 손가락만 빨다 종전된 그 해군?

- 그렇지. 무조건 육군이다. 나랏돈만 낭비하던 물개놈들이랑 어울리면 커리어 다 망가지지.

저리 가라, 이 땅개의 망령아.

-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독일 해군은 별반 가치가 없어. 만약 수병들을 이끌고 군사 반란을 일으키겠다면 또 모르겠는데, 아무리 제국이 망한다고 쳐도 그걸 진압 못 할 린 없겠지.

그래서 몰트케와 구구절절 기 싸움을 벌여 가면서까지 육군에 가는 것.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재미없다.

나는 원칙대로 내가 복무할 부대와 내가 자비로 쓸 장비를 지정했다.

“로젠바움 씨?”

“예.”

“제출하신 서류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다시 한번 확인차 여쭤보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정확합니다. 저는 제 소유 자가 비행기를 타면서 복무하고 싶습니다. 기부채납 형태로 처리해도 문제없습니다.”

내 제안은 당연히 저 높이 상층부로 올라갔고, 이미 한번 내게 패배의 쓴맛을 본 적 있는 몰트케는 군말 없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에르나가 있는 집에서 군복 입고 출퇴근.

출근해서 하는 일은 비행기 연구.

육군이 로젠바움 항공 제작사에 발주 넣은 신형 항공기를 개발해야 하니, 한 달의 약 절반 이상은 부대 대신 우리 회사 연구소로 출근.

그래도 부대로 출근해야 할 때는?

“로젠바움 씨와 같이 복무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신문 보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자동차처럼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다닐 수 있을 거라던데 사실입니까?”

“혹시 저도 대학교 졸업하면 로젠바움사에 취업할 수 있을까요?”

20대에 화성으로 로켓을 쏘아 올린 청년 재벌이랑 같이 군복무하면 괴롭힐 것 같나, 못 친해져서 안달 날 것 같나?

부대에서는 그야말로 왕처럼 군림했다.

훈련 나가서는 당연히 내 비행기 타고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테스트했다.

“귀하는 우수한 작전 능력과 지휘관으로서의 인망 및 품행 모두를 증명하였으므로, 우리 프로이센 육군은 귀하를 예비역 소위로 임명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감히 나를 떨구자고 주장하는 간이 배 밖에 나온 이들은 없었다.

1년.

날로 먹었다.

- 젊은 놈이,,, 편한 길만 가려 하고,,, 군대를 가야,,, 남자가 되는데,,,!

요즘은 귀신도 미칠 수 있나 봐.

***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모스크바에선 ‘피의 일요일’로 역사에 남을 학살이 벌어졌고, 영원할 것만 같던 차르 전제 정권이 침몰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이후 스웨덴의 속국 신세였던 노르웨이는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언했다. 당연히 이 배후에는 세계 모든 일에 개입하는 귀염둥이 악당 로켓-잉글단이 있었다. 아, 두렵다! 혐성국!

독일은 아프리카 나미비아 식민지에서 대학살을 벌이며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러시아가 반병신이 된 틈을 타 프랑스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른바 <제1차 모로코 위기>였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거의 세계 모든 국가가 프랑스의 편을 지지했고, 독일의 외교가 파탄 났다는 사실만 입증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유명한 전함 <드레드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외교가 사실상 멸망했다는 사실, 그리고 영국이 언제 갑자기 선전포고해서 독일을 두들겨 팰지 모른다는 공포에 카이저와 독일 군부, 거기에 의회까지 저 드레드노트급 신형 전함을 대거 건조해 나라를 지키기로 일치단결했다. 나라 꼴 참 예술이지 않은가?

나는 애써서 예정된 종말에서 관심을 끄고, 태어난 우리 아기에게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아부를 떤다면 아이 이름을 ‘빌헬름 로젠바움’으로 짓겠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애 이름이지 않은가? 조만간 제위에서도 쫓겨날 팔병신 이름을 붙이는 건 너무 저주받을 것 같잖아.

그리하여 나는 요람에서 곤히 잠든 내 첫 아이, 페르디난트 로젠바움을 뒤로한 채 다시 기나긴 출장길에 올랐다.

첫 목적지는 당연히 소중한 고객, 프랑스.

“로젠바움 사장님! 프랑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프랑스 지사 여러분들. 그리고 반갑습니다, 파리지앵 여러분. 프랑스에 오는 건 처음이군요.”

누차 말하지만 나는 인기인이다.

처음 나를 알아보지 못하던 사람들도 비행기를 발명한 독일인이 파리에 도착했다고 하니 괜히 근처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럴 줄 알고 기자까지 불러다 놨다. 오늘 회사 홍보 한번 원 없이 해보자.

나는 수첩과 펜을 쥔 채 내 곁으로 다닥다닥 달라붙는 기자들을 상대로 곧장 즉석 인터뷰를 개시했다.

“하하하. 프랑스어가 무척 능숙하십니다. 이곳 프랑스에서도 사장님의 명성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합니다. 프랑스 국적만 갖고 계셨다면 더 완벽했을 텐데요.”

“대신 김나지움을 프랑스와 연관된 곳으로 다니지 않았습니까? 저의 지성을 일깨운 이는 괴테지만 제 감성에 불을 붙인 이는 쥘 베른이지요.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그분을 뵐 수 있었을 텐데.”

“쥘 베른을 존경하셨습니까?”

“물론이지요. 하늘을 날고 싶다는 영감을 그분의 작품이 아니면 어디서 받았겠습니까?”

당연히 구라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처럼 화도 많고 갬성도 많고 자존심도 센 족속들에게 이 정도의 립 서비스를 해준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잖은가?

예상대로 이들은 내 후한 서비스에 대단히 만족해하는 기색이었다.

“프랑스 육군에 비행기를 납품하셨지요. 독일인으로서 프랑스군의 전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거침없이 하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원합니다.”

“그래도 독일 내에서 압력을 받진 않으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기자님께선 제가 무기를 팔았다고 생각하고 계실지 몰라도, 저는 독일인이 프랑스에 필요한 제품을 팔았다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우리는 다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사이입니다. 전쟁이 나는 순간 우리의 교역망과 금융 시스템은 모조리 무너지고 끔찍한 가난과 혼란이 그 자릴 메꿀 겁니다.”

“지금 우리의 정당한 땅이던 알자스-로렌을 빼앗아 간 독일인이 그런 말을 하십니까?”

- 얼굴 찌푸리지 마. 표정 관리해.

기자의 안경알 속에서 떠들어대는 조스비의 조언에 따라, 막 찌푸려지려던 얼굴에 최대한 바짝 힘을 빼고 온화한 미소를 유지했다.

이 병신 개구리들아. 똑똑히 외워라. 알자스-로트링겐은 독일의 정당한 영토다. 밑줄 쫙.

- 그 나물에 그 밥이었군. 하아.

물론 저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대신 슬쩍 우리 직원에게 눈치를 줘 저 머저리 같은 기자 놈을 치우라고 손짓했다.

“제가 프랑스에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면 항공기와 관련된 라이센스를 허가하지 않았거나 더 비싼 가격을 책정했을 겁니다. 제가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을 우려했다면 군용 항공기를 판매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프랑스 항공 산업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 우리의 협력이 만들어낼 멋진 미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대충 떡밥은 줬으니 실컷 놀라고.

실제로 프랑스의 항공 사업은 매우 빠르게 날아오르고 있어서 내가 다 쫄릴 지경. 1차 대전에서 각종 항공기를 찍어내는 저력은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 지식으로 무장한 내가 충분한 성능의 항공기를 공급한다면, 아무리 개구리 놈들이 날뛰어도 항공 우위를 잡기는 크게 어렵지 않으리라.

사실 이번에 프랑스를 방문한 목적은 프랑스 지사를 확인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는 신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생각해보자.

항공기는 결국 군납이 핵심. 민간용 비행기도 만들긴 하겠지만, 앞으로 전쟁이 예고된 상황을 고려한다면 군납이야말로 단연 최고의 캐시카우다.

그런데 그놈의 베르사유 조약.

조약에 의해 독일의 항공기 생산과 보유가 금지당하는 미래를 피하기 위해 지금부터 프랑스 정계에 끝없이 맛 좋은 사과상자와 굴비상자를 두루두루 나눠 주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항공기 사업이 날아갔을 때를 대비한 신사업을 나도 펼쳐놔야 하지 않겠나.

때마침 프랑스는 지금 새로운 사업에 대한 에너지가 왕성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노리는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로젠바움 사장님.”

“협상에 도장 찍으러 이곳까지 왔습니다. 부디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지요! 저희 임직원 일동 모두 로젠바움사와의 협업이 얼마나 끝내주는 결과가 나올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파테(Pathé).

축음기 사업으로 크나큰 명성을 떨친 프랑스 기업.

축음기 시장을 거머쥔 이 회사는 이제 비슷한 다른 노선으로 뻗어나가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미 각본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인류, 하늘을 정복하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비행기는 물론 저나 오일러 씨, 체펠린 백작 모두 등장할 수 있습니다. 괜찮다면 독일로 오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물론입니다! 돈을 내도 좋으니 꼭 가겠습니다!”

“대신 독일에서의 사업권과 노하우에 관해서 약간만 양해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화.

내가 원하는 대로 대중을 거머쥐려면.

당연히 미디어를 장악해야 한다.

나는 융커들의 눈을 피해 나만의 스피커를 손에 넣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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