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03)

시대의 눈물

강도귀족과 독점 자본가, 그리고 국가권력이 어우러져 지옥불도가니탕을 끓이는 분노의 20세기.

강대국이 약소국을 빨아먹고.

더 뒷배 튼튼한 기업이 중소기업을 등쳐먹고.

공장이 있는 기업가는 대기업이고 중소기업이고 노동자의 골수를 쥐어짜는 게 당연한 시대. 혹시 꼬우시다면 당신은 사회진화론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빨갱이가 틀림없습니다. 오늘부로 프로이센 비밀경찰의 감시 및 사찰 대상이다. 정말 미친 시대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20세기는 온갖 첨단 기술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가 라이트 형제의 업적을 긴빠이한 항공기. 하지만 너무 슬퍼할 것 없다. 나는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안정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니, 그만큼 추락사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우수한 도전자들의 목숨 또한 절약하고 있지 않은가.

프랑스에서 몇몇 거물들과 회담한 나는 <항공우편>이라는 새로운 떡밥을 던졌고, 만국우편연합에도 항공우편의 도입을 제안하자는 뉘앙스를 풍겼다.

아무리 내가 미친놈이라지만, 벌써부터 항공기를 통한 여객운송이라는 미치광이 같은 아이디어를 제시할 순 없었다. 오히려 나는 이 누구보다 정열적인 프랑스인들이 ‘왜 승객을 못 태우지? 사나이가 태어나서 하늘을 날다 죽으면 천국도 가까우니 오히려 이득 아닌가?’ 같은 광기의 대사를 내뱉는 걸 아연실색해서 뜯어말려야만 했다. 두렵다. 20세기.

각설하고.

어느 나라든 지배자들은 언론의 유용함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었다. 21세기 정치인들이나 시민들처럼 언론을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언론> 수준으로 간주하진 않았지만 절대 경시하지도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일찌감치 독일의 통신사를 때려잡아 친정부적인 보도만 공급하도록 채찍을 휘두르고 대신 독점 시장이라는 당근도 던져주었다. 진짜 억울한 게, 미래 지식을 끄집어내 뭔가 하려고 하면 하나같이 다 비스마르크가 선점했더라고.

그러니, 백일하에 언론을 차려서 어그로가 폭발하는 것보다 나는 우회 경로를 모색했다.

이 프랑스의 영화사, 파테를 통해서.

“저희는 이미 미국의 코닥과 제휴해 카메라에 대한 노하우를 습득하고 있습니다. 귀사의 활동사진 촬영 장비, 그리고 이를 상영할 수 있는 영사기 등 또한 저희는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로젠바움사는 연극이나, 저희가 시도하고 있는 ‘영화’라는 장르에 대해선 전혀 접점이 없지 않습니까?”

“로젠바움-체펠린사는 전 독일인,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전 세계인의 기대와 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신생 기업입니다. 따라서 우리 회사의 미래가치는 대중들이 얼마나 우리의 도전과 발자취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에둘러서 말했지만 그 실상은.

[우리 그냥 이미지랑 브랜드빨로 승부하는 거품 회사다. 아니 무슨 회사 크기는 코딱지만한데 시총 좀 봐봐. 이거 작전주 아냐?]

[그러니까 우리 주가 관리하려면 홍보 더 빡세게 해야 해.]

라는 뜻. 파테 임원들의 표정이 굳는 걸 보니 정확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비밀을 유지해주신다는 전제하에, 저희는 앞으로 파테와 제휴할 경우 보다 새롭고 다채로운 경영과 확장 전략을 펼치고자 합니다.”

“알려주신다면 반드시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물론이지요. 이미 카이저 폐하께서도 듣고 대단히 경탄한 계획이니 여러분들게 자신 있게 선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 카이저가 뒷배인 거 알지? 너희가 듣고 헛짓거리했다간 바로 외교 위기야. 모로코 위기 다음엔 파리 위기가 될 거라고.]

“하하하. 독일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으신다더니 정말이로군요. 아무쪼록 귀사의 사업이 순풍에 돛 단 듯 순항하길 기원합니다.”

[더러워서 안 건드린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말도 하기 전에 유세 떨고 있어?]

나는 이들의 참을성이 다 떨어지기 전에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이미 몇몇 업체가 귀사에서 제작한 새로운 시도, ‘영화’라 불리우는 활동사진을 수입해 독일 내에서 상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가 앞으로 연극이나 오페라를 밀어내고 극장을 책임지는 컨텐츠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후하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전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그 영화라는 게 많지가 않고, 대중이 재밌어 할지도 미지수라 다소 투자가 저어되긴 합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재미와 관계 없이 모두가 바라는 정보라면 어떨까요?”

“신문기사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뉴스를 영화로 촬영하는 겁니다.”

“그거라면 이미 10년 전부터 나왔던 겁니다. 영화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뤼미에르 형제(The Lumieres)가 의회에서 선보였던 적 있지요.”

“주간 뉴스를 만들어야지요. 하루의 시작을 커피로 시작하듯, 일주일의 끝을 교회 예배와 극장에서의 뉴스 관람으로 마무리 짓게 하는 겁니다.”

“그게 돈이 되겠습니까?”

“왜 안 됩니까? 지금 여러분은 전 세계인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촬영할 계획이셨잖습니까?”

멍청한 놈들.

어차피 영화 극장은 대세가 된다. 당연히 미리미리 좋은 입지에다 극장 말뚝을 박아 놔야지.

비행기가 하늘을 향해 이륙하는 장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세계 만방에 깔리고 또 깔렸다. 

비행기의 이륙, 태풍 상륙, 대화재, 신형 전함의 관함식, 각국 국왕의 연설 같은 것만 촬영해서 상영하면 다들 못 봐서 안달이 날 게 뻔하잖은가.

- <대한늬우스>라고 있었지. 나 어렸을 땐 이미 동네마다 못 해도 한두 대씩은 라디오가 있어서 영화 상영 전에 억지로 틀어주는 물건이 됐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파괴력이 어마어마할 거야.

뉴스 영화(Newsreel)의 수명 자체는 아마 오래가지 못할 게 뻔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존의 통신사나 신문사들이 자기네들도 뜯어먹으려고 달라붙어서 순식간에 피범벅의 레드 오션으로 변모하겠지.

그러니까 우린 뉴스 영화 그 자체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일단 고객들을 길들여 놓는 용도로 뉴스라는 떡밥을 던진 뒤 서서히 본격적인 상업 영화를 깔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동안엔 제법 지출이 클 텐데요. 기자들과 카메라맨을 모집하는 것부터 일일 건데.”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죠. 아마 무수한 부자들이 돈을 싸들고 올 겁니다.”

내가 카이저에게 말했다는 걸 이 사람들은 농담처럼 들은 모양인데, 난 진지했다.

‘폐하를 따르는 충직한 신하들의 정견을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서 보여줄 수 있다면 신민들도 분명 폐하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선거철에 더더욱 그들에게 크고 분명하게 말해준다면 무척이나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로젠바움. 인제 그만 짐이 하사하는 작위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대 같은 충신의 이름에 폰Von 자가 붙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건만!’

선거철에 신명나게 특정 정당 홍보만 틀어줄 거라고 이 멍청한 놈들아.

극장에 와서 무료로 뉴스도 보고, 빵이랑 맥주도 좀 서비스로 받아가고, 선거날 깔끔하게 특정 정당 찍어주고. 사민당 빼고 모두가 행복한 일 아니냐고.

파테 친구들은 아직 영상 미디어가 선거와 같은 특정 이슈에서 편파적으로 굴 경우 어떤 파괴력이 나올지에 대해 감이 잘 오지 않은 것 같았지만, 적어도 도장을 찍는 덴 동의했다.

내 장담하는데 우린 돈벼락 확정이라니까.

- 내 돈맛에 타락한 언론은 많이 봤어도, 시작부터 싹수가 노란 언론은 또 로동신문 이후로 처음 보는구만.

무슨 소리야. 당신이 말한 <대한늬우스>에서 배운 건데.

***

파리까지 왔으니 그래도 관광은 해야 한다.

“파리에 오셨으면 당연히 에펠탑은 보셔야죠.”

“그렇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예술을 잘 나타내주는 루브르 박물관도 당연히 보러 가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 코쟁이 도적놈들끼리 아주 죽이 척척 맞군그래. 너는 커서 식민지 같은 거 만들지 마라···.

“그리고 저 성미 더러운 영국인들마저 파리행 배편을 끊게 되는 끝내주는 곳이 있죠.”

“오, 거기가 어딥니까?”

“영안실입니다. 파리 영안실을 보면 예술적 영감이 샘솟는데-”

“아니다, 이 악마들아!”

- 아니다, 이 사악한 종자들아!

역시 프랑스 놈들의 뒤틀린 발상은 이해할 수 없다. 시체 구경을 한다고? 제정신인가? 차라리 독일 제국이 선언된 뜻깊은 장소인 베르사유를 구경하고 말지.

이 당시 파리는 단순한 빛의 도시, 역사와 예술의 집결지일 뿐만 아니라 런던과 함께 금융의 중심지기도 했다. 

게다가 런던과 달리 파리의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금융 투자를 일종의 애국, 국위선양으로 보고 굉장히 공격적이고 호쾌한 투자를 선보이곤 했다.

그 말인즉슨.

“항공기의 발전은 전혀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겁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엔진이 개발되면 캔버스천 대신 금속으로 만든 항공기를 제작할 수도 있겠지요. 금속제 항공기는 인류의 비행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마침내 항공운송의 꿈을 실현시켜줄 겁니다.”

“로젠바움!! 로젠바움!!”

“빨리 파리에 지사를 내시오!”

“돈 줄 테니까 빨리 합자회사 세우자고!!”

음. 이 광기의 맛.

세계 경제가 불황이고 공황이고, 이 미칠 듯한 갈망 앞에선 모든 게 무력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신기술이야말로 경제 침체를 타파할 수단이라고 믿는 만큼, 일종의 맹목적인 투자 현상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튼 나야 투자 끌어모으기 좋으니 좋지 뭐. 괜히 독일 전국 각지에 극장을 짓겠다는 미친 발상을 실현에 옮기는 게 아니다.

그렇게 프랑스에서는 뜨거운 반응을 얻었지만.

영국에서는 생각보다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았다.

<카이저의 장식품 아르민 로젠바움 런던에 오다>

<‘뱀 혓바닥’, 프랑스인들에게 망상을 팔아 한몫 채우다>

아프다, 아파. 망할 놈들.

영국 언론에 대한 증오는 독일인들이라면 필수적으로 갖고 있는 것.

프랑스 언론도 사실 비슷하긴 했지만, 영국 언론은 독일을 욕할 때마다 나무에서 돈이라도 열리는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쿨타임만 돌면 독일을 비방하고 있었다. 

아무리 카이저 빌헬름이 저주받은 아가리의 소유자라지만, 매번 그걸 침소봉대하고 과장하고 아예 날조까지 서슴지 않는 건 영국 언론이었다.

나는 영국에서도 최대한 비행기를 시연하고 투자 유치를 시도해보려 했지만, 그다지 반응은 좋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이라 해서 독일을 싫어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당장 전쟁까지 했던 사이인데.

하지만 적어도 아르민 로젠바움은 독일과는 별개로 봐주던 게 프랑스지만, 이 템스강 장어젤리나 뜯어먹고 사는 혐성국민들은 전혀 그런 객관화의 미덕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 반드시 런던 불바다를 실현하고 만다.

- 미친 놈 아냐?

왜 또 시비지.

- 네 전적을 생각해봐라, 이 멍청아.

내 전적이라니. 인류 최초의 비행기 개발. 인류 최초의 폭격수··· 아.

- 영국의 동맹군 머리 위에 폭탄 던져서 명성 얻어놓고 영국에서 재미 보길 원하네, 이 뻔뻔한 놈. 얼굴가죽 두껍고 자기가 했던 일 까먹는 솜씨를 보니 역시 정치를 해야 해.

날이 갈수록 조스비의 사람 갈구는 솜씨가 늘어난다. 역시 저거 외국산 망령 맞다니까. 내가 그렇게 자학을 좋아하는 성격일 리가 없잖은가.

영국 해군에 항공기를 납품해보려는 일련의 협상 시도가 모두 불발로 끝나고, 이 새끼들이 내 특허를 긴빠이치고 자국산 항공기를 자체 개발하려 한다는 결론을 내 머리에 잔뜩 스팀이 올라버린 찰나.

[LZ 2 비행선 시범비행 성공. 귀국 바람.]

마침내 체펠린 비행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이보게, 사위! 마침내 해냈내! 해냈다고!! 내가! 마침내! 해냈다고!!”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드디어 꿈을 이룩하셨군요.”

비행기로 여객수송은 머나먼 이야기지만.

체펠린 비행선은 얼마든지 많은 화물, 그리고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태울 수 있었다.

이제 항공 여행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렸으니 국내 곳곳에 비행선 공항을 짓고, 본격적인 항공 교통로 개설을 도모해야 할 시간.

“그런 의미에서 여객용 비행선을 개발해야-”

“무슨 소리 하나, 여객용이라니.”

“그야 비행기에 비해 수송능력이 월등하니, 수송용으로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보단 역시 런던을 불바다로 만들 폭탄을 가득 채우는 게 우선 아니겠나.”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비행선의 발명가.

이전 직업··· 군인.

“얄팍한 도버 해협만 믿고 그토록 독일을 멸시하고 음해하기 일쑤였던 섬나라 해적놈들에게 드디어 공포라는 걸 보여줄 시간일세! 알겠나? 당장 프로이센 돼지 새끼들이 이 나의 역작을 2백 대만 발주해서 런던으로 날려보내면 그 더러운 빅토리아의 무덤에 폭탄을 그냥-”

“진정하세요, 장인어른.”

피와 폭발을 원하는 광기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기나긴 심리 상담이 필요했다.

그리고 매번 입만 삐죽대던 몰트케는 이번엔 일절 군말 없이 바로 칼같이 발주를 넣었다. 아, 진짜 내 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