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기 전에 (2)
1914년.
한밤중의 베를린.
유모가 애들을 재우고 에르나 또한 잠든 뒤, 나는 내 업무용 공간으로 돌아갔다.
서재와는 별도로 만든 우리집의 내 작업실은 여러모로 독특했다.
일단 방 안에 언제든 커피를 끓일 수 있게 세팅이 되어 있고, 언제든 설계도면을 그리는 것은 물론 간단한 목공까지 뚝딱거릴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내 널찍한 의자에 턱 앉으면 옆면에 큼지막한 대형 거울이 바로 비친다.
- 후회하고 있나?
후회는 무슨.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시가를 커팅해 입에 물었다.
- 손이 떨리고 있는데.
좀 닥쳐주면 안 될까?
나는 커피 대신 술을 꺼내 쭈욱 한 잔 들이켰다. 알코올의 힘을 빌렸는데도 불구하고 떨리는 손은 가만히 있질 않았다.
내가 태어난 지 30년.
1884년생 아르민 로젠바움은 1893년에 귀신이 들렸고, 1900년에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개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4년.
그야말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세계 곳곳에 건설한 로젠바움 왕국.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어지간한 나라엔 다 하나씩은 있는 나의 지사들.
몇 년 전부터 지사 대부분의 수익금은 재투자라는 명목하에 현지에 묶어 두었고, 그게 아니라면 하다못해 스위스 은행이든 금괴든 어떤 식으로든 안전 처리를 거쳤다. 이 나라가 잿더미가 되더라도 나는 알거지꼴은 되지 않는다.
새로 지은 저택은 거대한 지하실을 구축했다. 지을 때부터 방공호 역할도 염두에 두었고, 일가족이 몇 년은 먹을 식량을 몇 달에 걸쳐 몰래몰래 반입하고 있었다.
준비는 거의 끝나가고 있다.
사라예보의 총성이 울려 퍼지기만 하면 된다.
-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여태까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거야. 맨손으로 이만큼 거대한 기업을 일구는 건 어디 보통 일인가?
대답하는 대신 다시 병나발을 불었다.
그래.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전쟁영웅만 되면 된다.
비행기 발명가로서의 그 어마어마한 뽕에서 제법 거품이 꺼진 지금, 전쟁영웅이 되어야만 이 나라를 거머쥘 가능성이 크게 올라간다.
내가 융커들의 반대편에 서기로 결심한 이상, 그들과 제대로 부딪치려면 ‘우리는 나라를 지키잖아’라는 그 가증스러운 말에 반박할 재료가 있어야만 한다.
- 원 역사에서 독일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는 융커들과 타협했지. 융커들은 처음엔 그를 꼭두각시로 삼을 속셈이었지만 히틀러는 이내 그들의 목줄을 붙들었어. 그들은 서로 싸우는 대신 공생하기로 했고··· 세계를 불태웠지.
싫다.
그래서야 그냥 모리배잖나.
나라를 파멸로 이끌 새끼들과 타협해 가면서 정권을 잡는다? 그럴 바엔 그냥 미국이나 스위스로 가지.
사리사욕으로 제 나라를 불태운 저 늙은 권귀 조범석이와 이 젊고 후레쉬한 아르민 로젠바움이 똑같은 궤적을 밟을 수가 있나.
내게 사심이란 없다.
오직 미래 지식을 얻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나긴 가시밭길을 자청한 것뿐.
- 누가 들으면 나는 뭐 아주 호로새끼지. 나는 뭐 처음부터 더럽고 추잡했는 줄 아나? 어디까지나 처음에는 대통령 지시로-
병나발을 좀 많이 불어서 그런가, 조스비의 컨트롤이 잘 되지 않았다.
사람이 술을 마시면 헛생각과 헛소리를 하게 되듯, 범석이 형 역시 내가 원하는 방향의 아이디어를 내놓기보단 특히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방향으로 주절대곤 했다.
- 그거 아나? 군인들이 헛생각을 하는 건 그냥 단순히 나라꼴이 병신 같아서가 아냐. 내 조국, 평생을 지키려 했던 조국 대한민국이 망하기 직전에 뭐라도 하겠다던 그런,
왜 똥폼 잡고 계세요. 당신이 그 조국에서 반란 일으키려다가 망했잖아요.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게 선거에 출마해도 될 자질이 충만하다.
망령의 신세 한탄 같은 골치 아픈 일에 할애할 시간은 없었으니, 나는 술을 깨기 위해 노력하며 정신을 집중해 그가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떠들도록 했다.
- 우리가 구축한 로젠바움사야말로 우리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되어줘야만 해. 그다음은 대중에 대한 폭넓은 소구력과 긍정적 이미지고. 예를 들자면 미래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기업이 책임을 진다니. 내가 개같이 일해서 세금을 얼마를 내는데 거기에 또 책임은 무슨 책임? 게다가 ‘사회적’이라고? 빨갱이들이 마침내 승리한 것인가? 그다음은 <기업의 공산적 책임>이고?
- 20세기 빡대가리 새끼들, 내가 어쩌다 이런 상병신 같은 놈들 틈에 꽂혀서는. 진짜 상대하기 싫어··· 대가리가 어떻게 군바리보다 딱딱할 수가 있지. 아니, 됐다. 프로이센 놈이면 그냥 다 군인이지. 대충 알았다. 너희들의 수준. 그냥 성불하고 싶어졌다···.
아니, 진짜로 내가 마신 알코올이 귀신에게도 흠향되는 건가.
나는 어이가 없어 대답 대신 혀만 찼다. 입만 열면 북괴가 어쩌고 적화가 어쩌고 하던 망령이 대뜸 저러니까 기가 막히고 코가 다 막히네.
- 아무튼, 본질은 대충 비슷해. 빨갱이들이 기어이 죽창을 들어 자본가 배때기를 쿡쿡 찌르고 그 내장으로 피의 카니발을 여는 꼴을 본 탓에, 다들 천한 놈들 손에 뒈지지 않을 만큼은 이미지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고.
어쨌거나 저놈의 가이드를 따라 우리는 다양한 공헌 활동을 펼쳐 왔다.
각종 복지 단체와 재단은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랑의 연탄 나누기’ 같은 행사를 하며 열심히 이 로젠바움의 이미지 재고를 위해 노력 중.
중요한 수금 수단이기도 한 곡예비행사들의 곡예비행. 아예 서커스단 몇 개를 돈으로 고용해 종합 엔터테인먼트 패키지 세트를 꾸려 전국을 순회시키고 있었다.
뉴스 영화를 제작, 판매, 상영하는 우리와 공생 관계가 된 언론사들은 이제 거리낌 없이 나를 위해 나발을 불어준다. 물론 나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절대 기득권님들에게 까불지 않았다. 어차피 나나 그놈들이나 결국 정권의 나팔수거든.
뉴스 영화를 통해 매출이 잘 나오는 알짜 극장들을 확보한 뒤엔 영화 국산화라는 아젠다를 들고나왔다.
‘독일 사람이 볼 영화 독일인이 맹글자’를 떠들어대며 국내 영화 산업을 밑바닥에서부터 다지고 있었는데, 잘생기고 예쁜 신인 배우들을 슬슬 발굴하는 단계였다. 이 시대 영화는 생각보다 제작비가 적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
물론 다른 이들도 영화 시장에 속속 뛰어들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처음 구상했던 대로 극장을 쥐고 있단 건 어마어마한 무기였다.
거기다, 우리가 독일에서의 독점권을 획득한 프랑스 파테사가 현재 유럽의 영화 촬영용 장비 시장을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다. 로젠바움 그룹이 영화 시장에서 패배할 경우의 수는 딱 하나, 경쟁자가 어마어마한 뒷배를 업고 날 정치적으로 찍어버렸을 때뿐이다.
근데 내 뒷배는 카이저잖아.
이것 참. 사업이 이렇게 쉬운 줄 몰랐네. 나중에 폐위당하면 명절에 집으로 선물 세트라도 좀 보내드려야겠어.
나는 문득 옆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에 혼자서 술과 담배를 정신없이 탐닉하는 남자.
거울엔 아르민 로젠바움도 조범석도 아니고, 브루노 로젠바움의 핏줄이 있었다.
그래도 난 에르나를 때리진 않는다는 사실이 눈물겨울 만큼 참 위안이 되었다.
최소한.
내 아이들은 전쟁터에 가지 않는다.
그 사실은 마음에 들었다.
***
나의 아이큐 150, 범석이의 아이큐 150. 합쳐서 300의 지능을 자랑하는 사상 최대의 천재인 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범석 씨는 제1차 세계대전이 언제 터졌는지 날짜까지 외우고 있진 않았다.
그러니 나는 대관절 전쟁이 언제 터질지만 초조하게 기다리며 태연스럽게 업무를 성실히 처리해야만 했다.
거대한 그룹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내 주말은 압수당했다.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가 어디 있나. 솔직히 말하면 교회 갈 시간도 아깝기 그지없지만 교회는 일종의 사교 활동이라서 말이지.
“사장님, 에베르트 의원이 방문했습니다.”
“제길. 나 없다고 할 순 없나?”
“죄송하지만 이미 계시다고 말씀을 드린 탓에, 아니, 출근한 걸 알고 계시던데요.”
“우리 회사에 사민당 프락치가 있다니. 참을 수가 없구만. 내 단단히 한소리를 해야겠어.”
“로젠바움 씨. 죄송합니다만 우리는 프락치 같은 건 키우지 않습니다. 직원들이 하나같이 아편 피운 광신도처럼 날뛰는 로젠바움사라면 더더욱이요.”
내가 막 슈미트 비서에게 한마디 하려는 찰나, 멋대로 문을 열고 에베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작지만 체구는 굉장한 에베르트 씨는 얼마 전, 정확히는 1912년 선거에서 마침내 금뺏지를 달고 의원이 되었다.
아무리 독일 제국 의회가 권한이라곤 극히 미미한 장식품에 불과하다지만, 보수 우익 정당의 씨가 말라버리고 사민당이 원내 제1당이 된 건 확실히 민심이 어떤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증거.
전체 의석 397석 중 빨갱이인 사민당이 110석. 가톨릭중앙당이 90석. 자유주의 성향의 국민자유당 45석.
가톨릭도 거의 유대인급으로 사회적 멸시와 탄압을 받는 걸 고려한다면, 이 나라의 보수 우파 세력은 말 그대로 씨가 마른 셈이다.
물론 의회 구성이 어떻게 되든, 융커들이 여기에 관심을 줄 리는 만무하다. 그들은 여전히 외골수였다.
그나마 국민들에게 관심을 갖는 건 우리 카이저 빌헬름이었지만, 연이은 주둥아리 실수가 누적된 끝에 국민들의 지지도 뜨뜻미지근해졌다.
민심이 명확하게 드러났지만 권력층이 이를 반쯤 외면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그들이 대중과 의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들은 하나뿐.
국뽕 - 민족주의 - 팽창주의 정책이었다.
“다과 좀 내오게. 귀한 의원님께서 오셨으니 비싼 것으로.”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평범한 노동자도 즐길 수 있을 만큼 저렴한 다과가 좋겠군요.”
슈미트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라는 시그널.
나는 적당히 알아서 꺼내 오라고 눈짓하고 다시 에베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베르트 씨. 나날이 귀하의 명성이 올라가고 있는 걸 보니 제가 혜안이 있었나 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찾아왔소. 대체 왜 당신네 뉴스 영화에서 날 옹호하는 게요?”
“저는 나름대로 호의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딱히 호의로 느껴지진 않았소.”
“그냥 호의로 받아들여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만큼 노동 조건 향상에 매진하는 사업가도 드물잖습니까.”
나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가 저 피지컬을 살려 죽빵을 날리면 나는 단숨에 하히후헤호를 외치며 퇴치당할 게 틀림없었다.
으음. 물리공격은 무섭지. 실제로 그 누구도 감히 건들지 못하던 합스부르크의 대마법사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도 물리공격 한 방에 골로 가지 않는가.
에베르트가 막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다과가 나왔다. 그는 쿠키 하나를 입에 털어넣은 뒤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우리 당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으로 보인다면 어쩌시겠소.”
에베르트가 이렇게 성이 난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빨갱이들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노선 투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는 강경파.
그리고 혁명보단 점진적 개혁을 통해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온건파.
그리고 그사이에 속한 중도파.
그는 지금 내게 ‘당신들 온건파 등 떠미는 거 아냐? 서로 싸워 죽여라 하는 거 아니냐고’라고 말하는 셈이었다.
“그런 복잡한 고민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민당은 어차피 원내 제1당 아닙니까. 분열?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 뉴스 영화 몇 편 때문에 분열될 당이라면 진작 쪼개져야 정상 아닙니까.”
“······.”
“솔직해집시다, 우리. 뭘 원해서 오신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요구사항이나 뱉어라.
“좋습니다. 그럼 솔직하게 말하지요. 우리는 로젠바움사의 노동 환경에 대해-”
“사장님? 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슈미트 씨.”
또다시 말이 짤려버린 에베르트의 심기가 영 불편해 보였지만,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방 안으로 들어오는 비서에게 손짓했다.
“전보가 왔습니다.”
“내용은?”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했답니다. 사라예보에서요.”
“뭐라고요?!”
에베르트의 눈이 터질 듯 부릅떠졌다.
나는 최대한 무덤덤하게 내 몫의 커피를 음미한 후, 그를 노려보았다.
“의원님.”
“···예, 사장님.”
“저와 내기하시겠습니까?”
“이 와중에 무슨-”
“몇 달 내로 독일은 전시 태세에 돌입한다, 에 제 전 재산을 모두 걸겠습니다. 지금 노동 환경에 대해 저와 협상하실 때가 아닐 것 같군요.”
그는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계대전이 오고 있었다.